작성일 : 18-03-03 12:28
예수님은 지옥까지 가셔서 복음을 전하셨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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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3,198  

예수님은 지옥까지 가셔서 복음을 전하셨는가?

                 (베드로전서 3장 19절 해석에 대해)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전파=개역한글판)하시니라”(개역개정판)(벧전 3:19) 



A. 긍금증들 

본문 구절은 성경 전체의 난해 구절 가운데서도 가장 난해한 구절로 알려진 구절이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도 이 구절이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다. 이렇게 본문 해석이 어려운 것은 다음의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옥에 있는 영은 누구인가의 문제이다.

(1) 죽은 불신자인가?

(2) 구약 시대 죽은 신자들을 말하는가?

(3) 타락한 천사들을 말하는가?(타락한 천사 구원 문제를 언급한 내용인가?)

그렇다면 베드로후서 2장 4-5에 언급된 옥에 갇힌 타락한 천사들과 연관되어 모세가 말한 "하나님의 아들들"(창 6:1-2)에게 전파하러 가셨단 말인가?  (4) 노아 홍수 때 죽은 자들을 말하는가? 등에 대한 견해가 다양하다. 

둘째 옥에 있는 영들에게 무엇을 선포(전파)하신 것일까의 문제이다.

예수께서 복음을 전하신 것인가?

그러면 패자부활의 구원을 위한 2차 기회가 있단 말인가?

아니면 다른 무엇을 전하신 것인가? 학자들 간에 이 문제에 대한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셋째 옥에 전파하신 시기는 언제를 말하는 것인가의 문제이다.

노아 시대 때인가?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이의 기간을 말하는가?

예수 부활 이후를 말하는가에 대해 성경이 명확한 해석을 주지 않고 있다. 


B. 다양한 해석들 
  
로마 카톨릭은 이 구절에 대해 전통적으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 3일 동안 지옥(하데스)에 가셨다고 본다(물론 일부 소수 반대 견해도 있음). 외경들과 더불어 이것이 사후 구원에 대한 카톨릭 특유의 교리인 연옥(燃獄, purgatorium)설의 방편이 되고 있다.

 

루터파 교회는 이 구절에 대해 예수님 지옥 전도 구절로 본다.

 

칼빈도 이 구절의 난해함을 인정한다. 그래서 그런지 여러 해석에 대해 소개한 다음 적절한 의미를 찾으려고 단지 한 구절에 불과한 이 구절에 대해 아주 길게 해석하고 있다. 영으로 가셨다고 하였으니 예수께서 성령으로 옥에 가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카톨릭과는 해석을 달리한다. 여기서 옥은 구약 성도들이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의 완성을 기다리는 곳으로 본다(예수님의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서 보면 택함 받은 자와 불신자 사이에 오고 가지는 못하나 분명 소통 가능 영역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고 생각할 것). 

칼빈은 오직 그리스도가 생명의 주요, 심판의 주요, 구원의 주이심을 이 구절을 주석함에 있어서도 분명히 하고 있다. 죽은 경건한 자들은 약속된 구원을 바라보며 그리스도를 소망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그들을 찾아갔다.    


C. 성경적 견해는? 

"영들"(프뉴마신)은 보통 초자연적 존재들에 적용되나 인간의 영들에게도 적용되었다(히 12:23). 베드로전서 3장 20절을 참조할 때 천사들보다는 인간들에 대한 언급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헤르만 바빙크는 본문이 근본적으로 예수님께서 옥 중 영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러 가신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요함과 능력과 승리를 선포하러 가셨다고 본다. 여기서 ‘전파’는 복음을 전했다(유앙겔리조)는 의미가 아니라 선포했다는 단어(케루소)로 본다. 즉 전파는 복음전도(벧전 1: 12, 25; 4:6)가 아니라 부활 승천의 능력 선포이다. 우리 성경도 과거에는 ‘전파’(개역한글판, 현대인의 성경)로 번역하다가 근래 번역에서는 ‘선포’(공동번역, 개역개정판, 표준새번역)로 바뀌어 이 구절 해석에 있어 괜한 오해의 여지를 줄였다. 

그런데 왜 하필 노아 시대 죽은 자들의 영에게 가셨는가(벧전 3:20) 하는 난제가 남는다. 노아 홍수는 온 세계가 멸망 받은 아주 심각한 상징성을 가지는 실제 역사(벧전 3:7)였다. 따라서 예수님의 구원 역사도 온 세계에 미칠 실제적이면서도 상징적 사건으로 나타나야 했다. 즉 노아 홍수 사건은 예수 십자가 구원 사건의 모형이었다(눅 17장 참조). 

어거스틴과 전통적 해석은 이 구절에 대해 옛날 노아 시대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노아를 통해 사람들에게 전파하신 것으로 보았다. 어거스틴이 볼 때 노아 당시 그리스도는 노아가 선포할 때 노아 안에 계셨다. 그런데 그때 사람들은 순종치 않다가 멸망을 당하였다. 이제 베드로는 이들을 옥에 있는 영들로 보고 이렇게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런 견해에도 난점이 남는다. 18절의 문맥상 그가 가서 선포한 것은 부활 이후 된 일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구절에서 베드로가 강조하려는 것은 옥에 있는 영들에게 무엇을 선포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임을 강조하는 데 있었다. 심판 받는 사람은 많고 구원 받는 사람은 결코 많지 않을 것이다(20절). 노아와 그 가족들은 불신자들로 가득찬 세상에서 외로운 신앙적 여정을 계속하고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악인이 더 형통하는 듯하고 세상은 온통 하나님보다 세속적, 물질적 풍요를 더 즐기게 되었다.

오늘날 신자들도 물질과 세상 복은 크게 여기고 구원은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닌가 심히 우려가 된다. 노아 시대처럼 좁은 길을 따르는 자들은 결코 많지 않다. 오늘을 사는 이 땅 우리들은 이 구절을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D. 나가면서 

결론적으로 베드로 전서 3장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명확한 사실은 인간의 시간으로 언제인지(노아 때인지, 십자가와 부활 사이인지, 예수 부활 이후인지)는 자세히 모르나 그리스도는 분명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사람의 영들이나 타락한 천사들)에게 가셔서 자신의 승리를 엄숙하게 경고하며 선포하셨다’고 볼 수 있다.

즉 노아 시대이든 베드로 시대이든 오늘날 우리들이든 ‘세상적 선한 양심’이나 '세상적 풍요'나 '세상적 명성'이 우리를 구원하는 게 아니라 오직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대속과 부활의 도를 믿고 그리스도께서 전하신 '좁고 협착하여 따르는 자들이 적은 좁은 길'로 들어서야 ‘참된 선한 양심’이 가능해 진다. 마치 상식의 세속적 세상에 맞선 마이너리티로 "오직 의를 전파"(벧후 2:5)하던 의인 노아와 그 가족처럼. 

따라서 본문을 그리스도께서 죽음 이후 두 번째 기회를 주시기 위해 옥에 복음을 전하러 가셨다고 보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는 해석으로 보인다. 


 

조덕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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