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4-06-04 18:04
종교 다원주의 시대를 사는 크리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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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7,755  

종교 다원주의 시대를 사는 크리스천 

크리스천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우리는 대립과 반목보다 화해와 이해의 시대에 살고 있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서구의 정치 이데올로기에 지배받아 반세기 동안 동족끼리 불신하고 미워했던 과거에서 벗어나 점차 호의적으로 대화와 협조로 전환하고 있다.

 


한국 교회도 교파와 교단이라는 외국 신학 이데올로기에 무참하게 휘둘린 채 형제 자매들끼리 서로 정죄하고 대립했던 과거로부터 벗어나 복음을 믿는 모든 교파를 수용하고 대화하며 일치를 추구하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과거의 이성주의적 독선에 회의를 느끼고 각종 이데올로기의 종속에서 벗어나 좀더 인간적이고 자유로우며 진실한 인간 사회를 추구하는 현대인의 갈망이다.

 


이와 같은 시대적 변화는 종교계에서도 일고 있다. 과거에 반목하던 종교들이 서로 대화와 화해의 제스처를 보이고 있다. 심지어 불교가 성탄절을 축하하고, 기독교가 석탄일을 축하하는 현수막을 내걸고 서로 방문하기도 한다. 여러 종교 지도자들이 어울려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매스컴은 이런 광경을 빠짐없이 보도하고 사회도 열린 종교인들이라며 환영 일색이고 정부도 종교간의 대화를 후원한다. 그것은 시대의 흐름에 맞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종교인 특히 기독교인들은 이런 현상에 대해 당황하고 거부감을 느낀다. 기독교인만이 빛의 자녀들이며 타종교인들은 흑암의 권세 아래 있고 악령의 도구라는 생각으로는 이런 변화에 도저히 적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절대성 상실이 낳은 결과

 


그러면 어디에서부터 그리고 왜 이런 풍조가 발생하였는가? ‘종교 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란 다원주의(多元主義) 사상의 종교적 적용이다. 다원주의란 ‘원’(元), 즉 근원적 진리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라는 사상으로 영어의 pluralism도 복수성을 강조한다. 이성이 진리 판단의 유일한 기준이라고 믿는 이성주의 체계에서는 진리가 하나밖에 없다. 따라서 이성주의 지배에 반대해 일어난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 사상과 상통하고 서로 지원한다. 더욱이 기독교는 하나님이 유일한 진리의 원천이라고 믿기 때문에 다수의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다원주의는 이성주의나 기독교에서 유래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에 대한 반동으로 인해 발생했다.

 


종교 다원주의는 유럽에서 시작됐다. 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이라는 반기독교 운동이 일어나면서 지성인들 사이에 대안 종교로 동양 종교에 대한 낭만적 동경이 확산되었다. 종교들에 대한 연구는 자연히 비교 종교학을 발달시켰고, 이성에 기초한 종교학은 여러 종교들을 모두 상대화하고 일반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물론 기독교도 많은 종교들의 하나로 전락했다. 하나님과 기독교의 절대성에 대한 신앙의 상실이 가져온 결과가 기독교의 상대화였다.

 


그러나 이런 경향은 오로지 소수의 지성인들에게 일어난 현상이었고, 이것이 대중화되고 세계화되는 데는 정치적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 유럽이 전세계를 침략해 지배한 식민주의 시대가 종식되자, 모든 나라들이 독립해 전통 종교로 복귀하면서 기독교의 우위성이나 절대성이 집중적인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20세기에 들어 2차에 걸친 세계 대전과 한국전, 베트남전, 보스니아전, 중동전 등이 끊임없이 발생해 수많은 인류가 희생되었다.

 


미국과 소련이 대립하던 냉전 시대에는 전 세계가 공포와 긴장 속에서 살았다. 전쟁에 대한 혐오와 평화에 대한 소망이 모든 인류의 마음을 사로잡아 반전적 평화주의(pacifism)가 오늘날 지배적 풍조가 되었다. 그런데 전쟁의 원인은 대부분 이데올로기와 종교의 분쟁이었다. 이에 따라 냉전 종식과 함께 이데올로기의 종언과 종교적 대립 해소를 요구하게 되었다. 특히 유일신 사상에 근거해 절대성을 주장하며 타종교들에게 배타성을 보여 왔던 기독교에 내외적으로 자성의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 결과 종교 다원주의 사상이 대두되었다.

한국의 종교 다원주의

 


우리나라 종교 다원주의는 자생적인 것이 아니라, 서구에서 들어왔다. 스위스에 유학해 야스퍼스에게 종교 철학을 배우고 돌아와 한국종교학회를 창설하고 초대회장이 된 윤성범 교수가 한국 종교와 기독교의 연결을 추구하며 토착화 운동을 전개했다. 단군신화와 삼위일체, 퇴계의 성사상과 성육신을 연결시키려는 1960년대 시도가 그 효시라 할 수 있다.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하며 주체 사상을 근거로 반서구 운동을 전개하면서 우리의 전통 종교를 내세우는 민중 신학도 1980년대부터 하나의 조성 환경이 되었다.

 


본격적으로 존 힉이나 존 캅스 같은 종교 다원주의자들에게 배워 영향을 받은 변선환, 김경재 교수 등에 의해 1980년대에 종교 다원주의가 도입돼 1990년대에 정착했다. 이는 소수였지만 한국의 민주화와 운동권의 득세로 사회적 흐름을 주도하는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어떻게 기독교 신학자가 타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기독교에서 그리스도와 구원은 불가분리하기 때문에, 그들은 타종교에도 그리스도가 있다고 주장한다. 익명의 그리스도라는 개념을 사용하며, 유대인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보내졌듯이 타민족과 타종교에는 다른 이름의 그리스도가 주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허무맹랑한 것이며 전혀 성경의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성경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 종교 다원주의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점은 기독교 신앙의 인격성을 부정하고 논리적으로 자기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종교 다원주의는 기독교를 비인격화하려고 노력한다. 기독교를 기독론 중심에서 신론 중심으로 전환하며, 신론에서도 여호와와 같은 고유 명사 대신 신이나 절대자와 같은 추상 명사를 사용한다. 그러지 않으면 타종교를 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익명화는 비인격화이며, 그리스도의 우주화는 추상화다. 불교나 유교는 해탈이나 군자와 같은 이념 성취에 목적이 있으며, 공자나 석가의 인격적 관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격적 화해의 복음을 가르친다. 사랑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하나님과 이웃과의 화해와 평화를 의미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 즉 삼위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성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섬기며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게 된다. 따라서 기독교는 삼위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회복하며 이웃들과 인격적 관계를 수립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익명의 그리스도와 같이 인격적 실체가 없는 구원자는 인정될 수 없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또 다른 하나님의 아들이 있을 수 없다.

다원주의 시대, 또 다른 발판으로 삼을 때


종교 다원주의가 안고 있는 또 하나의 근본 문제는 상대주의적 사고의 허구성이다. 그들은 기독교가 독선적이며 타종교를 관용하지 못한다고 포용 정신의 결여를 비난한다. 모든 종교가 독특한 가치와 구원을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은 모두 포용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갖고 있는 것처럼 자만한다.

 


그러나 넓게 보면, 종교 다원주의는 다원주의라는 이름의 일원론이며 상대주의라는 이름의 절대론이다. 종교 다원주의자는 다른 모든 생각을 정죄하고 오로지 자기의 생각만이 옳다는 절대론을 고수한다. 엄격히 말하면, 다원주의나 상대주의는 옳고 그름을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주의(ism)란 모두 절대적 가치를 주장하는 절대적 사고방식이다.

 


신을 포함한 모든 것이 변하는 과정에 있다고 주장하는 과정 신학도 ‘과정이라는 불변하는 원리’를 인정하듯, 절대 원리가 없는 완전한 상대주의나 다원론은 불가능하다. 때문에 종교 다원주의는 자기 종교를 중심으로 형식적 포용주의이거나 종교적 진화 이념을 추종해 미래의 통합 종교를 추구하는 새로운 종교 운동일 뿐이다. 여러 종교를 포용한다는 말은 그것들을 통합하는 상위의 원리를 추종한다는 전제가 있을 때만 가능하며, 상위의 종교 원리는 또 하나의 새로운 종교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종교는 신앙보다 이성에 근거하고 있는 자연 종교 또는 종교라는 이름의 이성주의에 불과하다. 

 

따라서 종교 다원주의는 신앙을 상실한 종교학자들의 이성적 유희로서, 신에 대한 헌신이나 신앙 생활이 결여된 언어 게임일 뿐이다. 원불교학자 김성곤 교수는 종교 다원주의가 시대에 적절한 현대인의 종교적 태도이며 배울 것도 많지만, 종교의 본질은 유일하고 절대 진리를 추구하며 절대자에게 헌신하는 것이므로 이와 모순되는 종교 다원주의는 허구적이고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교 다원주의를 무조건 부정적으로 거부만 할 일도 아니다. 우리가 깊이 생각할 점은 왜 소수의 주장이 사회 전반에 수용되었는가, 종교 다원주의에 우리가 수용할 수 있는 긍정적 측면이 전혀 없는가 하는 점이다. 시대마다 지배적인 사상이 있는데, 이는 과거의 사상이 한쪽으로 치달았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보완 장치로 발생한 것이다.

 


신을 저버린 서구 사회가 근대에 들어 이성과 과학으로 지배당해 결국 풍요한 인간성을 상실하고 초월적 세계를 부정하며 인류의 삶을 메마르게 만들었기 때문에 반대 급부로 다원주의라는 사상이 부상하게 된 것이다. 인류는 안정되지 못하고 균형적 사고에 이르지 못해 시계추와 같이 극에서 극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세계를 주관하는 하나님의 섭리로 인해 하나의 극단으로 몰락하지 않는 은총을 받게 된다.

 


종교 다원주의 자체는 잘못된 것이지만, 과거의 획일적인 일원적 사고를 교정하는 데 이용한다면 유익한 면도 있다. 더욱이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다원적 사고가 지배적 시대 정신인 때를 지금 통과하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는 지혜롭게 어려운 시기를 잘 대처해 나가야 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뱀 같은 지혜가 필요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종교 다원주의가 극단적인 소수에겐 기독교를 상대화하고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는 이데올로기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긴 하다. 하지만 대다수에겐 타종교에 대한 배타적 자세를 버리고 관용하는 자세로 이해되고 있다. 

타종교에 배타적 자세 자제해야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종교 다원 시대에 대처할 것인가? 첫째, 타종교에 배타적인 자세를 자제해야 한다. 우리 주변은 과연 누가 평화를 위협하는지에 대해 예리한 눈으로 관찰하고 강력한 비판을 가한다. 그러므로 타종교에 대해 공격적이나 전투적인 자세로 대립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전략적으로 중대한 손실을 초래한다.

 


단군상이나 불상을 훼손함으로써 기독교는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많다. 종교의 중립성을 지켜야 할 공립 학교에 단군상을 설치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으로 시정돼야 한다. 하지만 전투적인 자세를 취함으로써 거국적 반감을 야기한 것은 지혜롭지 못한 처사이다. 보다 합리적으로 처리해 기독교가 호전적이지 않고 합법적이며 평화적임을 보여줘야 했다. 현대는 문화 시대로서 이미지가 중요하다.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임을 천명하면서 서로 싸우고 타종교인에게 적대적 자세로 임한다면, 기독교의 진실성에 강한 의심이 제기되고 불신의 근거가 된다.

 


예수님은 자신을 정죄한 후 십자가형에 처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미움이 아니라 사랑의 기도를 드렸다. 그들이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으며 ‘알지 못하던 시대’에 사는 사람들을 하나님도 허물치 아니하신다(행 17:30). 오히려 우리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도 행치 않을 때는 책망을 받지만, 타종교인들은 아직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보다 더 관용적일 수 있다. 그런데 우리에게 대해서 관용적이고 타종교에 대해서 극도로 비판적이라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더욱이 진리와 윤리의 존재를 부정하고 상대주의와 다원주의가 범람하는 오늘날, 기독교는 타종교와 협력할 일이 많다. 현대의 다종교 사회에서 사회적 타락을 방지하고 보다 건강한 사회를 만들려는 데 있어서 동일한 의견과 목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단순히 타종교인이기 때문에 협력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무신론이나 불가지론도 종교적 전제를 가지고 있다면, 왜 타종교인에게는 거부감을 가지면서 무신론자에게는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가? 그것은 사실상 논리나 신학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문제이다. 그러나 타종교인을 사랑하고 동정하기보다 미움의 감정이 앞선다면, 그것은 모두를 사랑하고 복음을 전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본분에도 위배된다. 실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에 타종교인이었고, 현재의 타종교인 중에도 미래의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타종교를 연구하고 이해하라

 


둘째, 타종교의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 기독교 신앙은 타종교인을 포함해 모든 인류가 죄인이며 구원의 대상이며, 그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전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의 종교를 연구하고 이해하는 일이 필요하다. 더욱이 일반 은총과 일반 계시의 교리는 타종교에 대한 이해에서 반드시 고려돼야 한다.

 


칼 바르트는 모든 타종교와 종교 일반의 가치를 철저히 부정했다. 모든 종교는 자신을 위한 신앙과 공로적 구원을 추구하는 불신 행위로 정죄했다. 그러면 타종교에는 아무 가치도 없는가? 불교나 유교를 신봉하며 자신의 욕심을 극복하고 선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과 신도 진리도 부정하며 불법 무도하게 사는 사람을 동일시할 것인가?

 


칼빈은 타종교의 가치를 인정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의 마음속에 종교의 씨앗을 심어 놓았으며, 그 결과 참된 종교에 이르지 못한다 할지라도 다양한 종교적 형태를 통해 종교성을 부분적으로나마 실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개혁파 신학에서는 종교를 이방인들에게도 주시는 햇빛이나 우로와 같은 일반 은총의 하나로 간주했다.
헤르만 바빙크는 타종교에서도 성령의 역사와 일반 은총이 관찰되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타종교의 창시자들은 기만자나 사탄의 도구가 아니라 자기 시대와 민족을 위해서 종교적 소명을 성취하고 백성들의 생활에 적지 않게 좋은 영향을 행사한 사람들이라고 평가했다.

 


많은 오류가 혼합되었을지라도 종교적 요구들을 상당히 만족시키고 생의 아픔에 위로를 제공했다. 비록 부패하였지만 종교에 근본적인 신개념, 죄의식, 구원의 약속, 희생, 제사, 성전, 의식, 기도 등이 이방 종교 안에서 발견된다고 했다. 

인격적 모범으로 전도하라

 


모든 종교는 인간의 제한성을 인정하고 신적 존재의 도움을 요청하며, 올바른 삶을 가르치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한다. 심지어 자기를 부인하려는 처절한 몸부림도 있고, 하늘의 뜻을 추구하며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려는 끈질긴 노력도 있다.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율법적 구원을 추구하는 유대교나 유교 그리고 이슬람교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가?

 


우리는 종교를 사용해 인류의 부패를 방지하는 하나님의 섭리와 일반 은총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오기 이전의 오랜 세월 동안 아무 종교도 없었던 것과 종교들이 있었던 것 중에서 어떤 것이 전반적으로 한국인의 인간성을 보존하는 데 도움이 되었는가? 이런 면에서 타종교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인정한다면, 모든 종교는 기독교의 준비이며 기독교는 종교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타종교와 신사적으로 경쟁해야 한다. 인류 사회에서 선의의 경쟁은 불가피하며 결과적으로 사회에 도움이 된다. 여러 종교가 공존하면서 평화롭게 경쟁하는 것은 다원적 혹은 포스트 모던적 사고에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종교적 다원주의란 단지 배타적 종교에 부정적일 뿐 여러 종교를 인정한다는 전제에 근거하고 있다.
종교란 정치나 군사와 달라서 강제력이나 무력으로 목적을 달성하지도 않으며 경제나 상업과 달라서 돈이나 마케팅 기술에 의존하지도 않는다. 종교는 영적 감화와 설득이라는 독특한 방법을 사용하며 평화롭고 온유한 방식으로 초청한다. 

다원적 사회에서 여러 종교에 대한 설명을 듣고 선택하거나 심지어 교체하는 것은 공정하고 민주적이다. 물론 이미 타종교를 선택하고 더욱이 성직자나 독실한 신자인 경우, 무례하게 그 종교를 매도하거나 무시하지 말고 단지 자신의 종교를 성실하게 전하면 된다. 본인이 듣기를 원하지 않으면 강요할 수 없다.

 


종교간에는 상호 적용되는 호혜적 불문율이 있어서 상식과 예의를 거스르면 안 된다. 강요와 억지가 현대인의 전도에 효과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겸손과 사랑 그리고 인격적 매력과 모범이 전도를 성공하게 만든다. 효과적인 전도는 대상을 잘 이해하고 그가 수용할 수 있는 방법과 자세로 접근한다. 모두에게 성령의 시간이 있다. 전도는 우리의 의무이지만, 회심은 성령의 역사가 있을 때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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