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4-04-27 14:16
[2]조나단 에드워드의 종말론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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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7,933  
마지막으로, 에드워즈가 전개하는 새 하늘과 새 땅 이해의 역동적인 측면에 대해서 고찰해 보자. 에드워즈는 천국의 행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천국의 행복은 점진적(PROGRESSIVE)이며, 여러 시기가 있어서 그 속에서 새롭게 영광스러운 진전이 있다. 그리고 그 행복은 구속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께서 마련하시는 자신의 현현(顯現)을 보는(BEHOLDING) 것 가운데 있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천국의 행복은 이 역사 속에서 전개되는 구속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그런데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 가운데 특기할 만한 점은 이러한 천국 행복의 점진적 성격은 단지 역사적 과정의 영역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의 영역에도 적용되는 데에 있다. 즉, 에드워즈는 영생의 삶 가운데서도 시간적인 요소가 있음을 지적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에드워즈가 말하는 구속의 역사는 천국에서 그 완성에 다다르는가? 우리는 하나님과 피조물의 영화가 이 세계와 역사 속에서 점진적으로 진행되어 왔음을 살펴보았다. 이 세계와 역사 속에서 계속 진행된 그 영화의 과정은 천국에서 그 완성에 이르는가? 에드워즈는 이 문제를 구속 역사의 완성과 그 열매라는 시각에서 답하고 있다. 일단 구속의 역사는 천국에서 그 종말에 이른다. 구속의 역사는 무작정 진행만 되고 그 결말이 없는 역사는 아니다. 에드워즈는 말한다: "구원의 사역은 영원한 사역이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사역은 언제고 계속되기만 하면서 결코 완성되지 않는 사역은 아니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곧 바로 덧붙인다: "하지만 이 사역의 열매는 영원한 열매이다." 즉 마지막 시대는 "만물의 궁극적이며 가장 완전한 상태의 시작"이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더욱 풍성하게 드러낼 것이며, 성자의 영광이 더 풍성히 드러날 것이며, 따라서 성도들의 영광도 더욱 증가할 것이다. 물론 이것은 구속의 사역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구속(救贖)의 현실태의 영속적인 증대는 계속될 것이다. 

에드워즈는 하나님과 피조물의 영화의 시작을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비유하는데, 이 혼인은 영원한 영광의 오직 시작일 뿐이다.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러한 혼인날은 결코 그치지 않을 것이다. ... 혼인의 기쁨은 영원토록 지속될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의 행복은 점진적(progressive)이기에 "하늘나라의 행복이 변화가 없는 것이며, 새로운 경우에 새로운 기쁨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는 견해는 하늘나라의 행복에 대한 잘못된 견해이다." 물론, 하늘나라 그 자체는 어떤 사악한 변화에도 영향을 받지 않으며, "그것을 파괴하거나 방해하는 모든 변화들"을 넘어서서 존재한다. 성도의 영화는 변화 없는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무한한 정도의" 변화를 수용할 수 있다. 변화와 진보의 종말이 쉽게 오는 지상의 행복과 천국의 행복을 대비하면서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지상의 연인들은 서로의 아름다움을 발견함에 있어서 어찌나 빨리 그 마지막에 다다르고 마는가! 그들은 너무도 빨리 서로의 모든 것을 보며, 너무도 빨리 하나되어 결국에는 서로가 누릴 수 있는 교제의 마지막에 다다르고 만다! ... 그런데 이 모든 것에서 영원한 진보가 있는 그 사랑은 얼마나 행복한가! 그 속에서는 새로운 아름다움이 계속적으로 발견되며, 더욱 더 큰 사랑스러움이 또한 발견된다. 그 가운데 우리 자신은 아름다움 가운데 영원토록 자라갈 것이다. 우리가 영원토록 점점 더 사랑스러운 표현을 발견하고 또 주고받을 수 있게 될 때, 우리의 하나됨은 더욱 가까워질 것이며, 우리의 교제는 더욱 친밀해질 것이다. 

에드워즈는 영생을 일종의 새로운 역사로서 보는 견해를 전개한다. 즉, 에드워즈의 영생 이해의 이면에는 시간과 영원에 대한 그의 견해가 자리잡고 있다. 기독교 종말론의 영역에서 중요한 쟁점 가운데 하나는 시간과 영원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다. 여기서 에드워즈는 영원을 단순히 시간과 상반되는 것으로 보는 견해를 거부한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시간적 차원의 중요성은 심지어 영원한 삶 속에서도 상실되지 않는데, 이는 천국의 행복이 가장 역동적인 하나님의 내적인 삶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 가운데 피조물의 존재가 영화롭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화롭게 된 성도의 삶은 시간성을 포함한다. 

에드워즈는 영생을 새로운 역사로 이해함으로써 자신의 영원 이해를 보다 풍성하게 만든다. 이 지상에의 과거의 삶의 기억과 하나님을 향한 지식과 사랑의 지속적인 성장에 대한 미래의 희망은 모두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영원한 삶의 본질적 특성에 속하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서는 인간의 현재의 역사 가운데 발견되는 것과 같은 과거, 현재, 미래 사이의 분리나 모순은 없을 것이다.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에 따르면, 상호 조화를 이루는 시간적 차원은 영원한 삶 속에서는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영화롭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에드워즈의 영생 이해는 천국 행복의 미래적 차원을 포함한다. "그들(성도들)이 완전한 행복을 누린다는 사실은 모든 증가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모든 희망을 배제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램지(P. Ramsey)가 지적한 바와 같이, 에드워즈의 천국 행복 이해는 "더 행복한 '완전함'으로부터 훨씬 더 행복한 '완전함'으로의 운동"으로 기술될 수 있다. 

영원한 삶의 시간성에 대한 강조는 에드워즈로 하여금 또한 새 하늘과 새 땅의 행복이 무한히 진보할 것임을 강조하게 한다. 전통적인 천국 이해는 영원한 삶을 다분히 정적으로 파악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으나, 에드워즈는 영생을 매우 역동적으로 이해한다. 에드워즈의 영생 이해는 창조에서의 타락 이전의 상태의 단순한 회복 이상을 지향하고 있음이 강조되어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섬김 가운데, 하나님의 삶이 끝없이 펼쳐질 것이며, 이에 따라서 성도의 행복도 무한히 진보할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새로운 역사로서 이해함으로써,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은 영생에 관한 잘못된 견해 가운데 한 가지를 수정한다. 영생을 묘사하기 위하여 전통적으로 사용된 표상 가운데 하나는 영원한 휴식의 표상이다. 인간 삶의 완성의 이러한 측면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유명한 구절에도 나타난다: "당신께서는 우리를 당신을 위한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이오며, 그리하여 당신 안에서 안식을 발견하기까지 우리의 마음은 평화를 누릴 수 없읍니다." 히브리서 4:9에 따르면, 하나님의 백성의 최종적 목표는 "안식할 때"이다. 

영생의 이러한 측면은 때로 인간 삶의 일종의 은퇴로 잘못 이해되기도 하였으며, 따라서 권태라는 감정을 유발하기도 하였다. 특히 현대인들은 영원한 휴식의 개념을 지루함이라는 개념으로 냉소적으로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에드워즈에 따르면, 권태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삶의 모습을 기술하는 데에 전혀 관계가 없는 단어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에드워즈의 역동적인 비전에 따르면, 하늘나라에서의 삶이 지루하다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견해이다. 

물론 에드워즈 자신도 영원한 생명을 기술함에 있어서 휴식의 표상을 사용한다. "하나님께서는 안식할 것이며, 새롭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 모든 사람들은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인데, 이 안식에 비하면 이전까지의 모든 안식은 그 그림자에 불과할 것이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천국은 분명히 휴식의 장소이다. 그러나 천국에서의 영원한 휴식은 천국의 일에의 능동적인 참여와 결코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의 휴식은 무위(無爲)와 모든 행동의 중단에 있는 것이 아니며, 오직 모든 괴로움, 모든 수고, 모든 지겨운 일의 중단만을 의미한다. 가장 완벽한 휴식은 계속적으로 일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하늘나라에 이르면, 실업자(失業者)가 되어서 아무 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영광 가운데 있는 성도는 지상의 성도보다 훨씬 더 능동적이며 활동적인데,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되 모든 무익한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케 된 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하기 때문이다. 영광 가운데 있는 성도들은 특히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인 삶 가운데 참여하기에, 성도의 삶은 정적이거나 지루한 삶일 수는 없다. 에드워즈가 말하듯이, "하나님 자신도 무한한 행복을 즐기고 있다. ... 하지만 하나님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 자신의 본성 가운데 하나님은 완전한 행위이며, 또한 계속적으로 일하고 계신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하늘나라에서 성도가 누릴 "거룩함의 원리"는 "가장 활동적인 원리"이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에서의 성도의 삶에 비교해 보면, 지상에서의 성도의 삶은 "매우 단조롭고 지루한 것이며, 따분하며 활발치 못한" 삶이다. 

이 세계 속에서 성도들은 매우 지루한 가운데 있어서, 따분하며 활발치 못하였으나, 이제 그들의 타오르는 불과 같다. 그들은 단지 수동적이 아니라, 활동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에 의하여 작용을 받는 대상일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행동하며, 이러한 행동과 재-행동(re-action)에 하늘나라의 행복이 있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영생을 하나님의 지식과 사랑 가운데 영원토록 역동적으로 자라 가는 것으로 간주한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교제 가운데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인 삶 가운데 끌려 들어가기에, 영생은 결코 정적이며 변화 없는 상태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찬양 가운데 하나님의 삶이 끝없이 피조물을 향해 펼쳐질 것이며, 피조물은 또한 하나님 지식과 사랑 속에서 무한한 진보를 경험할 것이다. 


5. 결론 

우리는 지금까지 종말에 대한 에드워즈의 비전을 살펴보았다. 우리의 분석 가운데서 우리는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이 그의 삼위일체론적 하나님의 영화의 틀 위에 토대를 두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은 근본적으로 삼위일체론적인데, 그것은 그가 영원한 생명의 본질을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삶 가운데의 참여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성도의 최종적 운명은 이 세계적인 현실로부터의 도피로 여겨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체와 역사 안에 더욱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 피조물의 삶과 역사의 영화는 오직 그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삶과 역사 가운데 포함될 때, 이루어진다. 이러한 삼위일체론적 틀에서 살펴볼 때, 우리는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의 몇 가지 특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은 무엇보다도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공동체적인 차원을 가진다. 우리는 이미 에드워즈의 개인적 종말 이해가 역사적 차원의 종말 이해의 틀 속에서 전개됨을 지적하였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영생이란 고독한 개인적 실존이 끝없이 확장되고 연장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영생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공동체 가운데 성도가 참여하는 것이기에 근본적으로 공동체적인 특성을 지닌다. 

맥대널(C. McDannell)과 랭(B. Lang)은 개혁자들의 영생 이해와 하늘나라 이해가 다분히 개인적인 용어로 전개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들의 하나님 중심의 전망에 보조를 맞추는 가운데, 개혁자들은 영생을 일차적으로 성도 개인이 하나님과 최고의 교제를 가지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에드워즈의 새 하늘과 새 땅 이해는 이러한 유혹에 빠지지 않는데, 이는 그가 성도의 행복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체적 삶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성도들은 "삼위일체의 사회 속에 들어가도록 허락된다." 이러한 점에서 개인주의적 종말 이해는 그 시작에 있어서 배제된다. 에드워즈는 고독한 자아의 끝없는 연장 속에서 영생의 삶을 찾지 않는다. 오히려 영생의 본질은 하나님과 피조물의 보편적 공동체 속에 능동적으로 참여함 가운데 발견되고 획득되는데, 이러한 공동체는 곧 하나님의 나라이다. 

영생에 대한 에드워즈의 공동체적 이해는 개인의 종말에 대한 이해 가운데서도 발견된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죽음 이후의 성도의 운명은 보다 확장된 성도들의 공동체 속에 더욱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계기가 된다. 죽음의 이후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긴밀한 교제 가운데 있음으로 인하여 성도들의 보편적 공동체 속에 참여한다. 

둘째, 우리는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이 가지는 역동적인 차원을 간과할 수 없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영원한 삶이란 무시간적이며 정태적인 삶이 아니라, 역동적인 삶이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영생은 역동적일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영화라는 시간적인 운동에의 참여이기 때문이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성도의 운명은 근본적으로 역사적인 성격을 지니는데, 그것은 성도가 하나님 자신의 영화의 운동 가운데 참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삶은 시간과 역사 안에서 반복되고 있으며, 성도는 바로 이러한 반복 가운데 참여하기에, 영생은 시간적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이러한 영생의 시간적인 성격에 근거하여, 에드워즈는 천국의 행복이 무한히 진보할 것임을 주장한다. 천국에서의 삶이 지루하고 반복적인 삶일 것이라는 우리의 기우(杞憂)는 영생에 대한 참된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기보다는, 노동과 삶에 대한 우리의 왜곡된 이해를 반영하는 것일 뿐이다. 다음과 같은 베르코프의 견해는 에드워즈의 역동적 종말 이해의 특성을 잘 설명해준다. 

완성(Consummation)이란 과거와 미래의 연속을 다시 한 번 사는 것을 의미하는데, 곧 과거가 우리에게 있어서 축복으로 움직이며, 또 미래가 현재를 통하여 그 빛을 발하는 방식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은 피조물, 특히 인간의 참여의 차원을 강조한다. 에드워즈는 자신의 종말론적 비전을 삼위일체론적 하나님 영화의 틀에 위치지음으로써, 인간의 참여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인간이 창조된 것은 하나님이 이루어 가는 영화의 운동(the divine movement of glorification)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결과들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지각 능력이 있는 존재를 창조하였고 그들은 의지력이 있고 능동적인 주체들 또는 매개체들로서 창조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능동적으로 촉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영생이란 이 세계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며,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삶에의 능동적 참여, 곧 이 역사 가운데 진행되고 있는 구원의 사역에의 심층적인 참여를 뜻한다. 자신의 종말론 이해에서의 성도의 운동에 대한 에드워즈의 견해는 성도의 운명에 관한 그의 이해 속에서 드러난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성도의 죽음은 이 세계로부터 저 세계를 향한 후퇴가 아니다. 오히려, 성도의 죽음은 성도로 하여금 희미했던 구원의 역사를 보다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도우며, 또한 새로운 방식으로 이러한 영화의 사역 가운데 참여하도록 만든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긴밀한 연합 가운데, 죽음 이후의 성도들은 구원의 역사에 대해 보다 강한 관심을 가지고, 또 참여하게 된다. 

성도의 능동적 참여에 대한 에드워즈의 견해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의 후천년설적인 역사 이해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우리는 에드워즈의 후천년설을 고찰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함에 있어서 성도의 참여가 대단히 중요함을 살펴보았다. 먼저, 에드워즈의 신학적 비전은 철두철미하게 하나님 중심적임이 지적되어야 한다. 

하지만 에드워즈 신학의 하나님 중심성은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있어서 그가 강조하는 인간의 책임과 양립하는 것이다. 에드워즈의 종말론에 있어서의 지속적인 주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화에 있어서 차지하는 성도의 역할에 대한 강조이다. 성도들은 끊임없이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 완성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요청 받고 초대받으며, 이것은 개인적 차원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차원에서도 사실이다.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표가 하나님 자신의 궁극적 영화이므로,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인간의 목표와 과제는 이러한 삼위일체적 영화의 과정 속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그의 확고한 신념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러한 확고한 신념으로 인하여, 에드워즈는 인간의 참여에 강한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갱신의 사역과 천년왕국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고찰하는 가운데, 에드워즈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독교적 희망과 이 세계에 대한 기독교적 책임이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바르트가 말한 바 "위대한 의"에 대한 시각을 놓치지 않으면서, 성도들은 인간 역사의 변혁 가운데 참여하는 것이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성도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는 것은 바로 그 나라가 이 역사 속에서 반복되는 것 가운데 참여하는 것을 통하여 성취된다. 

인간의 참여에 대한 에드워즈의 강조점은 영생 이해에서도 약화되지 않는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죽음 이후에 맞이하는 영생이란 인간 삶의 은퇴가 아니라 새로운 삶, 진정한 삶의 시작을 의미한다. 영화롭게 된 성도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삶 가운데 참여하기에, 그들의 삶은 이곳 성도들의 삶보다 훨씬 더 활동적이 된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서론에서 우리가 지적하였던 에드워즈 해석에 관한 쟁점을 올바로 평가할 수 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종말론적 비전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참으로 초월적인 실재인데, 브라이언트는 이점을 올바로 지적하고 있다. 초월적인 실재로서,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성취를 넘어서서 있으며, 일차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신적인 선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하이머트가 주장하는 바와는 달리,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의 목표는 "최고도로 뛰어난 기독교 국가"의 실현에 있지 않았으며, 오직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확립에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영광의 신학자였으며, "경건한 옷을 입은 이념주의자"가 아니었다고 주장한 브라이언트의 논지는 옳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초월적 실재는 그저 공허한 선물(Gabe)로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또한 과제(Aufgabe)로서 주어지는 것임을 우리는 또한 지적해야 한다.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은 현실로부터의 도피로 이해되어서는 안되는데, 그것은 에드워즈가 초월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역동적인 영화라는 틀에서 이해하고 있고, 이것은 브라이언트가 말하는 바와 같은 이 세계적인 책임성으로부터의 후퇴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에드워즈가 이해하는 바 하나님 나라의 타자성(otherness)은 하나님 나라의 타세계성(otherworldliness)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해야만 한다. 여기서 에드워즈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이 세계의 역사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는데, 바로 이 점에서 하이머트는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이 가지는 이 세계적인 성격을 올바로 지적하고 있다. 

역사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러한 논의는 우리로 하여금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에 관한 마지막 요점에 대해서 주목하도록 만든다. 우리는 에드워즈의 영생 이해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윤리적인 함축성을 지니고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다시 말하자면,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종말론)과 이 세계에 대한 책임성(윤리) 사이에 내재적인 관련성이 있다는 것이다. 

에드워즈가 하나님의 영광을 역사의 최종적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을 이 세계에 대하여 무책임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성도의 궁극적인 희망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언제나 향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성도가 그저 하나님의 나라의 궁극적 실현을 기대하는 가운데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은 그러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역사 내적인 실현에 대한 기대와, 그것에의 능동적 참여를 더욱 고양시키는 것이다. 

지나친 도피주의는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에 있어서 그 자리를 발견할 수 없다. 성도들은 역사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도록 부름 받고 있는데, 그것은 영원한 삶이란 세계의 마지막까지 그저 숨겨져 있는 미래의 실재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예기적인 실현은 이미 지금, 여기에서 주어져 있는데,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화라는 이러한 시간적인 운동 가운데 참여하고, 또 그러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도록 이미 초대받고 있다. 

우리는 성도의 참여가 신앙인들 자신에게만 의미 있는 주관적인 체험이 아님을 아울러 지적한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의 운동의 참여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성도들의 행복이 증가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된다. 사실상 이 땅에서의 성도들의 참여에 의하여 더 영화롭게 되는 것은 단지 피조물만의 운명이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운명이기도 한데,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도 인간의 참여로 인하여 더욱 그 영광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성도의 참여는 갱신의 사역과 천년왕국 이해에도 나타나고 있는 바와 같이 구원의 전 역사에 있어서 계속되는 중요성을 가진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인간의 참여는 성도 개인의 삶과 인간의 역사를 넘어서는 보다 심층적인 중요성을 가지는데, 그것은 자신을 확대하고자 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운동이 바로 인간의 참여를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구원의 사역 가운데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완성시키는 것으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존재를 보다 영광스럽게 만드는 데에 공헌하는 것이다. 여기서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인들의 윤리적 삶이 그저 피조물에게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삶의 반복과 확대에도 의미가 있는 것임을 주장한다. 

성도의 활동이 하나님과 피조물의 궁극적인 영화의 맥락에서 이해되고 있기에, 에드워즈의 윤리에는 강한 종말론적인 논조가 들어 있는 것이다.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역사 내적인 점진적 실현과 드러남에 참여함으로써, "하늘나라의 즐거움과 기쁨의 전조"를 경험하게 되며, 그 가운데 그들은 이미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한 자신들의 여정 가운데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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