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03-22 10:52
[1]신약신학의 기원과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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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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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신학의 기원과 발전  

이 장에서는 성서 신학의 주류를 19세기 초엽부터 20세기의 첫 세대에 이르는 신약신학의 전개 과정에 강조점을 두어 개관한다. 신약신학은 성서신학에서 파생된 것이므로 이 둘을 함께 연구해야 한다. 

1. 종교 개혁으로부터 계몽주의에 이르기까지

신약 이후의 초기 기독교 교회는 성서신학이나 신약신학을 발전시키지 못했는데 이유는 경전 문서의 내용이 보편적인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었던 교회의 교리에 일치한다는 주장때문이었다. 종교개혁은 성서를 교회의 전승과 스콜라주의 신학에서 벗어나게 했으며, "오직 성서로"라는 원칙으로 성서는 더이상 전승에 의해 해석되지 않았다. 전승보다 뛰어난 권위가 성서에 있음이 인정되었고 그것은 성서의 자기해석의 결과를 가져왔다.

마틴 루터는 1516년에서 1519년 사이에 새로운 해석학을 전개시켰다. "문자와 영" 사이의 대조를 강조하는 것,"율법과 복음"을 결정적으로 구별하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라는 기독론적인 원칙이 '오직 성서로'라는 루터의 새로운 해석학의 본질을 이룬다. "오직 성서로"라는 원칙은 루터에게 1)그리스도와 성서의 구별, 2)그에 따른 율법과 복음의 구별이라는 의미로 작용한다. 그러나 루터를 비롯한 다른 개혁자들은 "오직 성서로만"이라는 원칙의 해석학적인 결과들을 신학의 모든 영역에 적용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성서신학의 연구라고 알려진 것을 발전시키지도 않았다.

"성서신학"이란 용어를 발전시킨 선구자들은 1530년대 초의 글레이트( O. Glait)와 피셔(A.Fischer)를 중심으로 한 재세례파운동에 속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처음으로 성서신학이란 표현은 크리스트만의 {독일 성서신학}이라는 책에서 1629년에 나타났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성서신학 서적은 디스트의 {성서신학}(1643)으로 새로 대두되는 연구의 성격에 대한 최초의 통찰을 보여준다. "성서신학"의 부수적인 기능은 칼로비우스에 의해서 견고히 수립되었는데 그는 이전에 신학적 주석이라고 불렀던 것에다 "성서신학"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성서로 돌아가자는 독일 경건주의의 강조는 성서신학의 방향을 바꾸어 경건주의에서는 성서신학이 빈약한 개신교 정통주의에 반대하는 도구가 되었다. 경건주의의 영향이 성서신학을 가지고 정통주의 교리체계를 반대하는 하이만(1708), 도이취만(1710), 바이드너(1722)등의 저서에 나타나 있다.

1745년에 "성서신학"은 분명히 교리(조직)신학과 분리되었고 성서신학은 교의학의 기초로 생각되었다. 이것은 성서신학이 교의학에 대한 단순히 이차적인 역할에서부터 해방되었음을 뜻하며 이러한 분리연구가 가능했던 것은 계몽주의 시대의 합리주의의 영향이라 할만하다.

2. 계몽주의시대

계몽주의 시대에서는 여러가지 영향아래서 성서연구를 위한 전적으로 새로운 방법이 발전되었다. 그것은 첫째, 합리주의의 반응이었고 둘째는 새롭게 역사적 - 비평방법이 해석학으로 등장한 것이다. 세째는 성서에 대한 철저한 문서비평을 적용하는 것이다. 결국 합리주의는 성서의 영감에 대한 정통주의의 관점을 포기하게 했고 궁극적으로는 성서가 고대 문헌의 하나가 되어 버렸다.

경건주의의 부분적인 영향 아래서 합리주의의 강력한 영향을 받은 뷔슁의 저서들(1756 - 58)은 "성서신학"이 교의학의 경쟁상대가 되었음을 처음으로 나타내고 있다. "해석학의 혁명"에 있어서 주요한 촉매적 역할을 한 사람은 합리주의자 제믈러(1725 - 1791)였는데 그의 저서 Treatise on the Free Investigation of the Canon(1771 - 75)에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서는 전혀 일치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결과적으로 성서신학은 전통적인 교의학에 대립하는 역사적인 연구일 수밖에 없다. 짜카리애(1729 - 1777)가 쓴 성서신학에 관한 네 권의 저서(1771 - 75)에서 짜카리애는 교의학과 해석학에 새로운 방향을 지시하는 영향 아래서,짜카리애는 신학적 체계를 조심스러운 주석적 작업을 기반으로 수립하려고 했다. 물론 짜카리애도 성서의 영감설을 고수했으며 에르네스티의 성서주석방법을 따랐다. 후프나겔(1785 - 89)의 성서신학은 "교의학을 지지하는 성서의 증거 - 본문을 역사적으로 수집한 것이다.그의 연구는 신약성서를 구약성서보다 높게 평가한 것이며 그것은 4냔 후에 바우어에 의해서 구약성서를 독립적으로 연구하는 첫 걸음이다. 가블러(1787 - 1836)의 유명한 정의에 의하면 "성서신학은 성서 저자들이 신의 문제에 관하여 무엇을 생각했는지를 전해주는 역사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그 반대로 교리신학은 한 특별한 신학자가 그의 능력과 시간, 세대, 장소, 종파 또는 학파, 그리고 비슷한 다른 어떤 것들에 의해서 신의 문제를 철학화한 가르침으로써 교훈적인 특징을 가진다. 성서신학에 대한 가블러의 귀납적, 역사적, 기술적 접근방법은 본질적으로 세 가지 방법론적 고려에 근거하고 있다. 1. 영감은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생각해야 할 것은 "신적인 권위"가 아니라 "성서저자가 무엇을 생각하였는가"하는 점이다. 2. 성서신학의 과제는 개별적인 성서저자들의 개념과 생각을 주의깊게 수집하는 것이다. 이 과제는 문서비평. 역사적 비평, 그리고 철학적 비평의 도움을 받아서 역사적 비평방법을 일관성있게 적용함으로서 수행될 수 있다. 3. 역사연구로서의 성서신학은 그 정의상 "옛 종교와 새 종교의 여러 기간들 사이를 구분"해야 한다. 그 중요한 과제는 어느 사상을 "오늘날 적용하여" 어느 사상이 "우리 시대에 타당"하지 않은가 하는 것을 연구하는 것이다. 순수한 역사적인 성서신학의 목적은 바우어에 의해 최초로 구체화 되었다. 바우어에게 있어서 "성서신학이란 그리스도 이전의 유대인들과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종교적 이론의 발전, 즉 성서저자의 문서로부터 나온 것으로 그 저자들이 반영하는 다양한 시대와 견해와 이해의 측면에서 제시된 발전이다. 바우어는 합리주의의 도움을 받아 역사비평 방법을 일관성있게 적용했다. 그의 기여는 성서증언의 중첩성에 관한 역사 - 비평적 재구성의 문제, 순수한 역사적인 연구로서의 성서신학의 성격에 관한 모든 주제의 논쟁을 제공한데 있다 하겠다. 어쨋든 가블러와 바우어는 성서신학과 신약신학을 독립적인 연구로 만든 창시자이다.

코페르니쿠스와 케플러, 갈릴레이에 의해 증진된 과학 혁명의 영향은 성서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초래하였다. 이제 성서가 과학의 결론들에 의해서 해석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성서의 권위는 감소되었고 믿음과 도덕의 문제에 관련되게 되었다. 합리적 정통주의의 제네바 신학자 투레티니는 "거룩한 성서는 다른 책과 다른 방법으로 설명될 수 없다"고 1728년에 주장했다고 전해지고 있다.또한 게믈러는 성서와 하나님의 말씀을 분리하며 성서의 신적인 내용과 인간적인 형식을 엄격하게 구별함과 동시에 성서에다 결정적인 신성모독의 기본적인 규칙을 일관성 있게 적용한 것은 성서의 본문을 의도적으로 고대 상황에 놓고 현대독자들에게 말하려는 의도없이 고대 시대에 대한 증인으로서 성서 본문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역사 비평주의를 위하여 근본적인 것으로 제믈러는 역사 비평신학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었다.

3. 계몽주의로부터 변증법적 신학에 이르기까지

계몽주의 시대는 신학에 있어서 지속적인 영향의 변화를 초래했다. 성서신학은 기술적인 연구로 변하여 "성서가 의미하는 것"을 기술하는 역사과학이 되었다. 해석은 당시의 유행하는 철학에 의존하여 순수한 역사적인 연구방법을 떠나 적극적인 역사적 연구방법, 종교사적 연구방법, 구속사적 연구방법등이 발전하였다. 가이저의 성서신학(1813 - 1821)에서 그는 "종교사적" 연구 방법을 적용하고 모든 성서적 측면들과 비성서적 측면들을 보편적인 종교의 원칙에다 종속시킨 최초의 사람이다. 드 베테는 1813넌에 {구약과 신약의 성서적인 교의학}에서 칸트철학을 채택하여 성서신학을 철학의 체계와 결합시켰다. 그는 구약과 신약의 실질적인 통일성이 붕괴되었음을 의미하고 신약성서신학은 종교사의 한 현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드 베테의 시도는 그가 성서신학을 교의적인 관심과 결합시키려고 하였기 때문에 미해결의 방법론적인 문제가 존재함을 지시한다. 그러나 그의 연구는 많은 학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으며 그의 연구의 의의는 신약성서의 중심과 통일성의 전 문제성이 표면화되었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쾰른의 {신약성서의 성서신학}(1836)은 성서신학의 "순수한 역사적인"성격이란 점에서 가블러와 바우어의 전통에 속한다. 쾰른은 해석의 과제로부터 역사 비평적인 성서신학의 과제를 엄격하게 분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최종 결과는 교의신학을 수정하는 것이라는 메르크의 지적을 받았다. "순수한 역사적인" 신약성서신학에 대한 가블러와 바우어의 연구방법의 결정은 바우르(1792 - 1860)의 저서에 의해 성취되었다.1835년 그의 제자 슈트라우스(1808 - 1874)는 {예수의 생애}라는 저서에서 예수에 관한 신약성서의 기사를 철저히 재해석하였다. 슈트라우스는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에 의해서 변형되고 확대된 역사적 사실의 기초를 제공하는 복음서기록들을 헤겔적인 변증법을 적용하여 신화적으로 해석하였다. 바우르의 {신약성서신학에 대한 강의}(1864)는 바우르의 사후에 출판되었다. 바우르의 헤겔적인 변증법은 그로 하여금 기독교의 역사를 2세기의 초기 카톨릭주의라는 종합으로 이끄는 유대적 기독교라는 명제와 이방 기독교라는 명제 사이의 투쟁으로 보게 하였다. 이에 따라 세개의 기간을 구분하였는데 첫째는 바울 자신의 서신 4개(갈라디아서, 고린도전후서, 로마서), 둘째는 히브리서, 바울서신들, 베드로전후서, 야고보서, 공관복음서, 사도행전을 포함하며 세째는 목회서신과 요한서신들을 포함한다. 그리고 예수의 가르침은 세 기간 앞에 놓고 "순수한 도덕적인 요소"로 전락시켰다. 즉 예수의 가르침을 신약성서 자체의 신학에 있어서 전역사로 생각하였다. 이 문제는 오늘날까지 긴급한 논제로 남아있다.

바우르의 연구 방법 가운에 가장 큰 결점은 헤겔의 변증법을 적용한 것과 초기 기독교에 있어서의 유대교의 영향을 지나치게 강조한 점이다. 19세기 초기의 몇 십년 동안에는 신약성서 학문에 대하여 실정적인 역사적 방향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될 수 있는 학자들이 있었다.로시우스는 "교리들의 - 개념"에 대한 교의학적인 연구방법을 역사적인 연구 방법과 결부시켰다. 그는 신약성서신학의 기술 가능성을 각 신약성서기자를 분리해서 취급하거나, "교리의 개념들"에 대한 조직적인 연구 방법을 사용하거나 아니면 이 두가지를 결합시키는 것 세가지를 제시하였다. 이 방법은 "실증적인"연구방법에 대한 방법론적인 역전으로 생각될 수 있으며 신약성서 전승에 대한 철저한 비평에 대한 필수적인 반정립으로 볼 수 있다. 바움가르텐 - 크루시우스는 "교리를 위한 기반과 규범으로 사용되고 교리사를 위한 출발점으로 사용될 순수한 성서적인 개념들의 체계를 위해 노력하였다.그는 성서신학에 대한 이질적인 영향을 막기 위해서 종교에 관한 이신론의 과도한 비판을 진지하게 반대하였다. 구약과 신약을 통일시키는 하나님 왕국에 대한 공통된 주제를 근거로 성서의 통일성이 인정된다고 시사하였다.

신약성서에서의 통일성과 다양성에 관한 질문은 1832 - 33년에 방대한 두 권의 책을 펴낸 네안더의 연구 방법에서 중요한 문제성을 갖는다. 그는 사도들의 다양한 메시지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생생한 통일성"을 강조하였다. 슈미트는 신약성서에 깔려있는 본질적인 통일성이 신약성서 기자들의 상이한 교리들 안에서 반영된다고 생각하였다. 한(1854), 메스너(1856)등은 다양성 안에 통일성이 존재한다는 것과 신약성서신학은 경전적인 문서들을 문제삼는다는 점에 동의를 하며 적절한 방법은 "역사 비판적인"것이고 교의학으로부터 나온 전통적인 주제 아래서 신약성서의 교훈을 제시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것에 동의를 한다. 신약성서신학에 대한 "현대적인 실증적"방향은 튀빙겐 학파의 반대자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바우르에 비해 보수적이며 네안더, 슈미트, 한, 메스너보다는 덜보수적인 바이스는 "신약성서의 성서신학은 서로 다른 신약성서 저자들의 가르침이 다양한 헹태임을 묘사해야 한다"고 말한다. 바이스의 표제적인 선언은 전형적으로 "현대적인 실증적"방향이다. 성서신학은 신약 성서 문서들의 기원에 대한 비판적이고 큭수화된 연구에 관심을 둘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역사적 - 기술적인 과학일 뿐, 역사적 - 비판적인 과학은 아니기 때문이다.

신약신학에 대한 "순수한 역사적인" 연구방법에 대한 또 다른 보수적인 반응은 멘켄, 베크,호프만과 관련되는 "구속사 학파"에서 표현된다.구속사 학파는 1. 말씀으로 표현된대로의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 2. 성서의 영감에 대한 사상, 3.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역사에 관한 결과에 근거하고 있다.호프만은 신약성서를 일반 사상에서 통합시키지 않고 구약성서와의 역사적인 관계, 즉 구원사에 통합시켰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성서를 성서로 해석하게 하라는 종교개혁의 원칙을 역사에 대한 현대적인 이해에 결합시켰다고 지적되고 있다. 호프만의 영향을 받은 찬은 신약성서신학을 종교에 관한 과학적인 체게로 보지 않고 성서에 내포되어 있는 신학의 제시로 보았으며 신약성서신학은 성서의 역사적인 발전에서 파악되어야 하며 "구속사의 단계에 따라 배열되어야 하는 것이다." 쉴라터역시 구속사파에 속하는 학자로 1905년, {신학에서의 무신론적인 방법들}이라는 그의 글에서 현대의 역사적 - 비평 방법에 내재되어 있는 무신론을 거부하였다. 이것은 역사적인 연구방법의 목표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쉴라터는 신약성서의 역사와 그것에 대해서 증언하는 말씀이 기독교 존재의 토대가 된다는 사실은 신약성서가 기독교의 경전이라는 사실에 의해 표현된다고 말한다. 신약성서에 대한 "순수한 역사적인" 연구 방법에 반대하는 쉴라터의 비난은 그가 역사적인 탐구에 둔감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쉴라터가 초월성의 여지를 두지않는 원인과 결과의 폐쇄된 연속체로 역사를 이해하는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한편 하나님은 역사 안에서와 역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역사를 넘어서서 행위한다는 편협한 정통주의를 비판하는 것임을 의미할 뿐이다. 그의 신약신학 연구는 신약의 증언이 모든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통일되어 있으며, 신앙은 신약 문서의 적절한 이해를 위한 전제라는 확신에서 출발한다.

신약성서의 증언의 통일성은 "팔레스틴의 유대인인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의 환경"에 역사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다.고펠트와 크라우스가 쉴라터의 연구 방법에서 구석사적인 개념을 발견한 것은 상당히 정확한 일이며, 쉴라터는 신약신학의 모든 기획의 성격을 주의깊게 사고한 거장으로서 우리 앞에 존재한다.

{신약신학의 과제와 방법에 관하여}(1897년)에서 윌리엄 브레데는 "종교사" 연구방법을 제시 이 방면의 개척자가 되었다. 그의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홀츠만의 책 {신약신학의 교과서}에서 홀츠만은 신약을 문화적 환경으로부터 고립시키지 않았다. 신약성서의 전통적인 이름을 보유하였으며 연구의 범위를 신약의 경전적인 문서에 국한했다. 결국 홀츠만은 성서신학의 분야에서의 역사적인 연구는 신학적인 과업이라는 개념을 고수하였던 것이다.이러한 홀츠만의 입장은 19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신약신학이 가블러와 바우어의 기초로부터 이탈되었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이와 관련하여 다이스만은 신약신학의 역사적인 성격이 경전적인 문서를 넘어서는 것이므로 "미리 결정된 노선의 현상을 제거하는 것임"을 원칙적으로 요구한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신약신학의 과제는 세가지이다. 첫째는 기독교 세계가 발생한 시대와 기독교의 복음이 지향하는 시대의 종교 - 윤리적 사상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 둘째는 초기 기독교적인 의식의 독특한 형성을 결정하는 것, 세째는 초기 기독교의 전체 의식에 관한 진술을 제공하는 것이다. 브레데는 1897년에 쓴 위의 책에서 "교리의 개념"적인 연구 방법을 공박하였다. 그는 다이스만의 세번째 과제를 부인한다.또한 그는 19세기의 역사적인 신학 연구, 특히 바우르의 튀빙겐 학파와 리츨의 신학을 공격한다. 브레데는 역사적 - 비평방법에 대한 일관성있는 적용을 주장한다. 즉 신약문서들은 그 시대의 문화를 기초로 해서만 이해되고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이것은 초기 기독교의 역사적인 모습은 역사비평주의, 유비, 그리고 역사적인 과정들의 상관관계로브터 유래될 수 있다는 것도 의미한다. 아뭏든 브레데는 역사적 - 비평 방법으로 일관성있게 연구하는 학자는 초기 기독교 운동의 교리나 신학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며 초기 기독교의 "종교"를 연구하고 제시한다고 주장한, 브레데의 "종교사"적인 방법은 신약신학의 연구라는 명칭에 대하여 새로운 평가를 초래한다. 즉 그는 신약성서에 있어서 교리의 개념 대신에 역사를 주인으로 교체한 것이다. 그러므로 브레데의 프로그램은 1)교의학이 제기한 질문과 교회의 관심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하게 되는 것, 2)그러한 신학에 무관심하게 되는 것, 3)역사적인 방법론에 일관성있게 전적으로 헌신하게 되는 것, 4)최초의 기독교 종교를 제시하려고 추구하는 것, 5)경전과 무관하게 자료를 연구하는 것, 6)초기 기독교 사상과 인식의 특징을 보여주려고 시도한 것, 7)발전을 지시하는 관점에서 초기 기독교 종교의 "개념들"을 묘사하는 것, 8)종교사적인 연구 방법을 세우는 것이다. 이러한 브레데의 영향은 하인리히 바이넬의 {신약성서신학}(1911년)에서 최초로 나타난다. 그는 "최초의 기독교 종교사가 신약의 성서신학을 대신해야만 한다"고 선언하였다. 기술(재구성)에서 해석(신학)으로 종교사학파에서 옮겨가는 이 운동은 "신앙과 종교에 대한 분명한 개념이 상실되고 있다"는 사실에 궁극적으로 기인된 것이다. 이를 이어 부세트는 {주 그리스도}라는 그의 책에서 바우르가 기독교 종교의 기원과 발전에 관한 정교한 역사를 통해서 명백하게 묘사한 것을 극복한다. 철저한 전승 비평의 적용은 예수의 모습을 최소로 감소시킨다. 이에 대해서는 칼 홀과 고펠트가 질문을 제기한다. "순수한 역사적인"연구방법이 "순수한 객관성" 또는 객관적인 과학과 정확하게 일치되지 않느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은 역사적 탐구는 항상 그 시대의 유행하는 철학에 의해서 한정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요약한다면 20세기의 전환기에서 개신교 신학은 풍성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1)오버베크는 순수한 역사적인 방법론이 그를 "근본적인 불신앙"으로 이끌었기 때문에 그는 순수한 역사적인 연구 안에서의 신학적 과제를 부인한다.

2)일관성있는 역사적 - 비평 방법에 근거한 종교사적 신학의 프로그램을 가진 종교사학파가 있었다.

3)쉴라터는 순수한 역사적인 방법에 대해서 예리한 신학적 비판을 가하고 구속사의 연구 방법에 확고한 관심을 두었다. 이 모든 것이 변증적인 신학이 발생하는 요람의 역할을 하였다.

4. 변증법적 신학으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진화론적인 자연주의에 대한 신앙이 일반적으로 상실되었고, 역사적인 진리가 순수한 과학적인 "객관성"에 의해 획득될 수 있다는 확신에 대한 반동,또는 이러한 객관성이 정말 획득될 수 있다는 확신에 대한 반동, 계시의 개념으로 복귀하는 변증법적 신학(신정통주의)의 경향, 그리고 이러한 신학에 대한 갱신된 관심등이 나타나게 되었다고 덴탈은 지적하고 있다. 칼 바르트는 해석학과 모든 신학에 있어서 과격한 변화가 있을 것을 암시하였다. 세계 대전을 통하여 자유주의 신학의 부당성을 배우게 된 바르트는 하나님 - 인간의 관계에서 신적인 측면, 즉 계시의 근원으로서의 하나님을 강조하였고 "성서에 대한 비평 이후의 해석"을 요구하며 실천한다. 이것은 성서에 포함된 계시에 관한 증언을 통찰하는 성서의 해석을 의미한다.

불트만은 양식 비판과 비신화화 게획을 시작하였고 다른 많은 것들 중에서 역사적 예수에 관한 새로운 질문에 대한 논의에 공헌하였다. 불트만은 "순수한 역사적인" 연구 방향, 즉 종교사학파에 속한다. 또한 그는 당대의 유행한 철학, 즉 하이데거의 실존주의를 그의 정신적인 전제로 채택하였는데 신약의 메시지를 현대인의 사상 세계에로 재해석하는 것이 불트만의 시도였다. 이것은 '삶의 행위'와 관련지어서 신약의 신학적인 사상을 해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불트만은 역사적인 질문을 신학적 질문과 결합시키려고 하였다. 즉 삶의 행위로부터 사고의 행위를 분리함으로써 신학적인 언급의 의도를 인식하는데 실패하는 실수를 피하려고 시도한다.

불트만에 반대하는 가장 의의깊은 반발은 관례적으로 후기 - 불트만 학자라고 불리는 그의 제자들에 의해 1950년대에 나타났다(케제만, 훅스, 로빈슨, 보른캄 등). 후기 불트만 학자들은 역사상의 예수가 신앙을 위하여서는 타당성이 없다는 불트만의 주장을 반대하였다. 1960년대 초에 몇몇 후기 불트만 학파들, 특히 훅스, 에벨링, 로빈슨, 풍크는 불트만의 해석학과 특히 불트만이 초기 하이데거의 실존주의를 채택한 것을 넘어섰으며 그들은 언어의 기능 방법에 대한 불트만의 이해를 비판한다. 특히 1976년 로빈슨은 {신약신학의 미래}라는 논문에서 브레데와 함께 신약신학은 종말을 맞이하였다고 말했다. 로빈슨은 "신약신학의 교리적인 구조를 넘어서서, 그것을 신학적으로, 존재론적으로, 우주론적으로,정치적으로 확대하여 현대사회에 있는 다른 방도를 통해서 해석될 수 있는 언어의 운동으로 나아갈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후기 불트만 학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스툴마허는 동의의 해석학에 관하여 말한다. 그것은 "성서의 말의 내재적 능력", "신앙의 지평과 교회의 경험", "초월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진리와의 만남을 위한 개방성", "신앙의 가능성을 위한 개방성"을 위한 충분한 여지를 포함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 "케리그마적 신학, 경건주의와 성서적으로 지향하는 루터파 사이의 경계에 있는 자"로서 중간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는 구약학자 폰 라드, 침머리 그리고 특히 게제의 노산을 따른다. 신약성서신학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에 뿌리 박고 있는 화해의 선포이다. 왜냐하면 "화해의 메시지는 성서 전체의 결정적인 중심이기 때문이다"라고 스툴마허는 말하고 있다.

로빈슨과 스툴마허의 프로그램은 구속사에 보다 가깝다. 신약신학에 대한 구속사적인 접근으로 되돌아 가기 전에 로마 카톨릭 학자들에서의 발전과 신약학에서의 현대 실증적인 경향을 대표하는 것으로 분류되는 연구 방법을 주목해야 한다. 프랑스 학자 르모니예의 {신약신학}(1928)은 주제적 연구 방법을 제시하고 있으며 마이네르츠의 두권의 {신약신학}(1950)은 신약신학과 교의학의 관계를 논하였지만 신약신학 연구의 기원과 발전을 논하지는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각각의 신약 저자들이 지닌 다양한 신학들을 통일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봉시르방의 {신약신학}(1951)은 신약신학을 통일성있게 제시하는데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신약신학의 과제를 "신약성서안에 게시된 진리를 함께 모으는 것이며 신약저자들이 이해한대로 그 진리의 의미를 정의하는 것이고 중요성에 따라서 이런 진리들을 분류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기독교교리를 위한 기초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현대의 카톨릭의 성서운동은 피우스 12세의 회칙 Divinio Afflante Spiritu(1943)으로부터 시작된다. 1970년대 중반에는 성서 비평 방법을 적용하는데 있어서 로마 카톨릭 학자들과 비로마 카톨릭 학자들 사이에 차이가 없어졌다. 바이스의 연구 이후 신약신학의 "현대실증적"방향에 속하는 것 중에 대표적인 것으로는 스타우퍼의 {신약신학}(1941)을 들 수 있다. 스타우퍼는 그의 책을 신학적인 주제를 따라서 체계화하는 조직적인 연구 방법을 택하였다.이 연구 방법은 기본적으로 "구속사적"전망을 가지며 그 방법은 엄격히 기술적이다. 스타우퍼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역사신학"은 옛 성서적 전승위에 세워지며 신약 - 후기 기독교의 신학으로 곧바로 옮겨가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 미국인 학자 그랜트는 {신학사상입문}(1950)에서 "신약신학은 신약에 반영된 것처럼 상징하는 기독교 교회의 신학이 없으며 완성된 하나의 산물이 아니라 진행하는 가운데 있는 신학이었다. 따라서 과제는 기록의 과제라기보다는 해석의 과제이다"라고 말한다.또한 신약성서의 다양성은 기본적인 신약신학의 몇몇 사상들을 포함한다는 것은 분명히 인정하고 있다. 헌터의 {신약신학입문}은 그리스도의 사실에 기초한 신약성서신학에 대한 역사적 연구 방법을 드러낸다. 이 책은 신약신학자들의 다양성을 간과하지 않으면서 그들이 통일성에 관심을 둔다. 대륙에서는 큄멜, 예레미아스, 로제가 그들의 성서신학에서 "현대 역사적인" 연구 방법을 보다 철저히 사용하였다. 알버츠는 그의 {신약의 메시지}에서 신약에 대한 전통적인 비판적 서론과 전통적인 역사 - 비판적인 신약신학이 철저히 새로운 방법으로 재정립될 필요가 있다고 시사한다. 그는 바우르의 철학적인 연구 방법, 바이스가 사용한 "교리의 개념"의 방법, 하르낙과 다이스만의 종교심리학적 연구 방법, 부세크와 다른 이들의 종교사적 방법, 그리고 스타우퍼와 불트만과 같이 현대의 세계관을 기초로 신약을 해석하려는 시도를 비판한다. 따라서 신약신학의 위치는 "신약성서의 메시지의 전개"에 있다고 본다. 알버츠는 고도로 개인주의적 연구 방법을 사용한 것이 분명하지만 이런 모든 것이 알버츠의 연구가 미래의 연구 방법을 위한 시사로 가득차 있으며, 젊은 세대에게 그것을 파악하도록 요청할 수 있다는 것을 수긍하는데 방해가 되어서는 안된다는데 동의하고 있다.다시 구속사로 돌아가서 구속사 연구 노선은 쿨만의 두 개의 중요한 연구에서 힘있게 연구되었음을 볼 수 있다. 미국의 라드, 또는 레만등을 이와 같은 노선에서 볼 수 있다. 1940년대 이후의 미국에서 일어난 "성서신학운동"에 대해서 차일드는 전진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성서신학운동은 1.철학적인 체계에 대한 반대, 2.히브리 사상과 그리스 사상의 대조, 3. 신구약의 통일성에 대한 강조, 4. 주변환경을 배경으로 본 성서의 독특성, 5. 낡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동, 6. 역사 안에서의 하나님의 계시와 같은 특징을 지닌다. 차일드의 사고에서 "성서신학의 과제란 구약신학과 신약신학과는 다른 연구"라는 것이 확실히 인식되어야 한다. 이것은 구약신학과 신약신학에 각기 타당한 영역이 있다고 이해함을 의미한다. 신약신학은 성서신학과 다른 "주로 기술하는 과제"라고 그는 말한다.

이런 대강의 역사적 개관으로 우리는 신약신학의 성격, 기능, 목적 그리고 제한성에 관한 현재의 논의에서 중요한 뿌리를 부상시키고자 하였다. 근본적인 문제들은 아직 미해결로 남아있고 다양한 배경과 학파에 속하는 학자들 가운데서 계속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II. 신약신학의 방법론 

1787년 가블러에 의해 제기된 신약신학의 방법론은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실 방법론의 문제는 복잡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어느 특정한 학자를 어떤 기존의 방법에다 할당하는 것은 어렵고 조심스러운 일이다.여기서는 4개의 주된 연구 방법을 개관함으로서 방법론의 문제성을 제기할 것이며 각 연구 방법은 한 사람 이상의 연구에 의해 대표될 것이다.

1. 주제적 연구 방법

1) 앨런 리처드슨

앨런 리처드슨은 {신약신학 입문}(1958)의 서문에서 "사도 교회가 공통된 신학을 가졌고 그 신학이 신약문서로부터 재구성될 수 있는지"를 아는 단 하나의 방법은 "신약의 기록에 깔려 있는 신학에 대한 가설을 세우고 그 다음에는 모든 유용한 비판적이고 역사적인 지식에 비추어 본문의 기록에 의하여 그가설을 검증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이것은 "역사적, 비판적, 문학적, 언어학적, 고고학적"등의 방법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는 신약신학을 쓰기 위해서는 신앙의 전제가 필요하다고 본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어떤 변명도 순수하게 기술적인 학문의 제한성 안에 머무르는 것이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그러나 신약신학이 고백적이거나 또는 신조적인 영역에 반하여 그 독자성을 유지할 필요가 있음을 나타낸다. 리차드슨이 옹호하는 가설은 '예수 자신이, 신약에서 발견되는 구원에 관한 구약의 틀에 대한 뛰어난 재해석자'라는 것이다. 이 가설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신약성서의 신앙 전체에 대한 신약의 자료를 역사적으로 철저히 연구하는 것을 기대하지만 리차드슨은 이것도 실시하지 않는다. 그의 신약신학 구조는 의아스러울 정도로 엉성하여 각 장들의 연결성의 결여, 창조, 인간, 율법, 윤리와 같이 중요한 신약의 주요 주제들의 생략, 특히 주제적 연구 방법을 위한 방법론적인 정당화가 문제된다. 주제적 구조를 가지고 쓰여진 신약신학은 신약성서 자체에서 그 주제들 및 소재 그리고 그들의 상호 연관성을 발견해야 한다. 리차드슨은 이 점에서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2)칼 쉘클레

칼 쉘클레는 1968년에 {신약신학}이라는 4권의 책을 출판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제는 "통일된 신약신학"을 제시하려는 것이었다. 쉘클레의 방법론은 "신약을 구성하는 각각의 문서들과 문서들의 실제적인 형성과 의미에 관하여 생각될 수 있은 것을 체계적으로 요약하여 서술하려고 신약에서 좀더 비중이 있는 큰 용어들, 개념들, 그리고 주제들을 추구한다. 그는 그의 신약신학의 방법론, 특징, 그리고 목적에 대한 그의 이해를 제 3권에 와서야 논하며 그는 신약신학의 자료를 경전으로 국한하였다. 쉘클레는 신약신학을 이중적인 기술적 연구 방법, 즉 해석과 기술을 사용하여 기술한다. 쉘클레는 그 형태가 우리와 별로 친숙하지 않은 선포의 형태의 목적과 내용을 추구하는 시도를 통해서 기술적인 측면에 관해 말한다. 해석의 측면은 "신약의 선포들은 우리의 현재적 질문과 시대에 연결"시키려 추구한다. 쉘클레에게 해석은 "신약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명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또 그안에서 시작된 것을 지속시키고 상관시키는" 신약신학의 측면이다. 그래서 해석은 현대의 질문들과 현대에 관련될 필요가 있는 신약 사상들의 상관성을 포함한다.그는 신약의 통일성과 성서의 통일성 문제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그리스도가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는 신약신학의 부분만이 아니라 바로 중심"임을 주장하고 있다. 그는 주제적인 연구 방법으로 4개의 주요 주제를 따라 신약신학을 체계화하였다:창조(세계,시간, 인간),역사와 구속사 안에서의 계시(예수 그리스도와 구속; 하나님, 성령, 삼위일체), 기독교인의 생활(신약의 도덕성), 하나님의 지배.교회.완성. 이러한 조직화는 "전통적인 교리적 위치"를 따른 것으로 관찰이 되어왔다. 주제적 연구 방법은 신약의 통일성을 나타나게 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 방법의 가장 가치있는 측면은 신약의 증언에 있어서 연대기적인 발전 안의 신약의 사상과 주제들에 대한 종적인 탐구이다. 그는 또한 이 사상과 주제들을 구약에까지 소급한 것에 대하여, 즉 신약과 구약의 연관성을 부상시켰다는 의미에서 분리된 성서신학에 대하여 공헌하는 것이다.

2. 실존주의적 연구 방법

1)루돌르 불트만

불트만은 종교사학파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이는 그의 역사적인 뿌리가 역사 - 비판적 연구 방법에 깊이 근거하고 있음을 의미하며 또한 1920년대의 변증신학, 특히 바르트와 고가르텐에 관련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역사와 인간 실존에 대한 이해로 인해서 불트만은 그의 체계 안에서 하이데거의 실존주의를 통합시켰으며 그것을 근거로 그는 "역사적 재구성"을 "실존주의적 해석"과 결합시켰다. 이는 그의 비신화화 프로그램과 밀착되었는데 신약을 비신화화하는 불트만의 계획의 범위와 문헌는 매우 방대하고 복합적이다. 불트만은 "비신화화하는 것은 해석학적 방법, 즉 주석 방법이다. 해석의 방법으로서의 비신화화는 신약의 우주론이 본질적으로 신화적이기 때문"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의 과제는 케리그마를 해석하기 위해, 실존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비평주의를 사용하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불트만의 "재구성","해석"의 개념은 그의 {신약신학}을 이해하기 위한 기초이다.신약 문서들을 재구성하는 것은 역사 - 비판 방법과 종교사학파의 규범을 따르나 재구성은 신약의 문서들이 우리에게 말해줄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 아래서 그것들을 해석하는데 봉사한다. 해석은 신약의 신학적 사상들을 "삶의 행위"와의 관계에서, 즉 신앙적인 자기 이해에 대한 설명으로 해설함을 의미한다. 불트만의 {신약신학}은 1부;신약신학의 전제들과 주제들로서 예수의 메시지와 최초의 교회의 케리그마 그리고 바울을 제외한 헬라적 교회의 케리그마에 관한 장들을 포함하고 있다. 2;바울의 신학을 취급한다. 그 안에는 신앙의 계시 이전의 인간이라는 장과 신앙 아래서의 인간이라는 장이 들어 있다. 3부;요한복음과 요한 서신들의 신학이며 방향설정, 요한의 이원론, 세상의 심판, 신앙이란 장들을 포함한다. 4;고대 교회를 향한 발전이란 주제로서 교회 질서, 교리, 발전, 그리고 기독교인의 삶으로 나누어진다. 그의 이러한 방법론적 절차는 그가 브레데의 계획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불트만은 그의 신약신학을 "예수의 메시지는 신약신학을 위한 전제이다"라는 선언과 함께 시작한다.불트만의 양식비판 연구와 1926년에 나온 {예수}라는 책에서 예수의 메시지는 비판적 방법론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 즉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한 자에 관한 케리그마로부터 재구성된다.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적 그리스도에 관한 불트만의 견해는 신약신학의 이 분야에서 오늘날 제기되는 논쟁의 기초가 된다. 이러한 불트만의 주장에 대해 후기 불트만 학자들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새로운 탐구에 관여하게 되었다.불트만의 좌파 비평가들은 우리가 비록 하나님이나 초월자를 의미있는 방식으로 말할 수 있다 할지라도, 모든 역사적 사건들의 본질적인 상대성은 우리가 다른 역사적인 인물에 관하여 가질 수 있는 지식과는 종류가 다른 예수에 대한 지식의 관점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확신을 가지고 논쟁에 임한다. 이것은 예수는 모방될 수 있는 오직 최상의 모형이거나 또는 기타 다른데서 알려진 것의 "결정적인 현현"일 뿐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불트만은 바울신학을 그의 신약신학의 중심으로 삼았다.그는 바울을 "기독교 신학의 창시자"로 간주하며 그의 신학은 동시에 인간학이라 말하고 있다. 이런 불트만의 바울이해에 대한 반응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바르트는 불트만의 체계에서 인간학이 차지했던 중심에 기독론적인 관점을 놓기를 원한다. 쉴리어는 바울과 요한의 신학과 병행하여 공관복음서의 신학을 제시하는 것을, 또한 초기 기독교의 신앙 고백문을 신약신학의 기초로 하는 것을 제안한다.불트만의 제자 브라운은 신약신학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였다:신약저자들은 인간의 구원과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다루는 진술을 하고 있으며, 이 둘은 서로 조화될 수 없으나 그 내용은 상호 모순된 것을 진술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그 이질성이 증명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은 하나님을 좀더 철저하게 인간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순수한 후기 불트만의 신약신학은 페린의 견해에 따르면 표식과 상징의 성격과 기능에 관한 철학적인 연구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 안에서 나타나는 다양성을 통합할 요소는 신약의 불변의 요소인 예수라는 상징적인 인물이다라고 페린은 말한다. 불트만이 신화를 비신화화하는 해석학을 수립하였다면, 페린은 상징을 이해하는 해석학을 수립하였다.

불트만의 신약신학의 특징이 신화를 비신화화하는 것이라면, 페린이 제안한 후기 불트만파의 신약신학은 상징을 이해하는 것으로 기대될 수 있다. 신약신학에서 언어철학을 사용하는 것이 실존주의 철학만큼이나 쟁점이 될 것인지의 여부는 두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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