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4-03-27 11:18
[2]성서에 나오는 아홉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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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7,881  

3. 신 바빌로니아 왕국

 

1) 기원전 620년 경, 갈대아인들은 기원전 721년에 앗수르인들이 초토화시켰던 바벨론을 재건했다. 앗수르 치하의 고 바빌로니아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갈대아인들이 메소보다미아 남단에서 건너왔다. 이들은 나보폴라살이라 하는 인물의 인도를 받고 있었다. 나중에 그는 바벨론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 직후 그는 메소보다미아 북부의 전역을 장악하고 있던 메데 왕의 딸에게 그의 아들을 장가들도록 주선하였다. 기원전 612년 나보폴라살의 유명한 아들 느부갓네살은 바벨론인과 메데인의 연합군을 결성하여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공략했다.

 

2) 반란은 성공하였으며, 이 결과 신 바빌로니아 왕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3) 기원전 606년 느부갓네살은 저 유명한 갈그미스 전투에서 눈의 가시로 남아 있던 애굽을 격파했다. 느부갓네살은 도망하는 애굽인들을 쫓아 서쪽으로 예루살렘까지 추격했다. 그의 첫번째 예루살렘 방문은 그가 부친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인하여 되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짧은 순간에 그친 것이었다. 그는 기원전 605년 8월 15일에 서둘러 고국으로 돌아갔다. 비록 그는 자신의 뜻대로 할 수는 없었지만 성도 예루살렘을 최소한 세 번에 걸쳐서 포위하여 전소시킬 계획이었다.

세 가지 경우란 다음과 같다.

 

(1) 기원전 605년, 그는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꼭둑각시 여호야김(요시야의 아들)을 세웠으며, 성전 보물 일부를 약탈하고 바벨론으로 왕족을 잡아 갔다. 이들 중에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있었다(대하 36:6,7;단 1:1-3).

 

(2) 기원전 579년. 그는 다시 예루살렘에 와서 나머지 보물을 가져가고, 이와 더불어 선지자 에스겔, 왕 여호야긴(여호와김의 아들), 10만 명에 달하는 왕족, 관리 및 주요 인물들을 포로로 끌고 갔다(왕하 24:14-16). 이 일은 기원전 597년 3월 16일에 일어났다.

 

(3) 기원전 586년. 그는 또 다시 와서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가 주도한 반란을 응징했다. 이때 예루살렘 방벽은 무너지고, 성전은 파괴되었으며, 예루살렘은 전소되었다. 시드기야의 아들들은 살해되고, 시드기야 자신은 눈알이 뽑혀 바벨론으로 끌려갔으며, 거기서 그는 여생을 마쳤다. 그리고 나서 느부갓네살은 바벨론 시를 개수하는 광범위한 계획에 착수했다(단4장). 이리하여 바벨론이 그의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도시를 빙 두른 방벽의 높이는 300피트였고, 두께는 85피트였다. 이 벽은 정방형으로 도시를 둘러샀으며, 한 면의 길이는 9마일에 달했다. 내부 면적은 200평방킬로, 다시 말하자면 오늘날의 뉴욕시의 크기와 맞먹었다.

 

바벨론은 노아의 4대손 니므롯에 의해 창건되었다(창 10:8-10). 수차례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이 도시는 세상에 알려진 가장 호화스롭고 웅장한 도시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믿어지지 않을만큼 잘 세워진 그 도시는 15평방마일에 뻗여 있었으며, 유브라데 강이 그 도시를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흐르고 있었다. 유명한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이 도시가 높이 350피트, 두께 87피트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전한다. 더구나 방벽의 및부분은 굴착을 저지하기 위해 지면으로부터 아래로 35피트를 연장했으며, 여섯 대의 전차가 나란히 달릴 수 있을 정도의 폭이였다고 한다. 성벽 위에는 전략적인 위치마다 하나씩 모두 250개의 망대가 있었다. 이 거대한 성벽 바깥에는 커다란 외호, 즉 성 주위를 둘러싼 수로가 있었는데, 그 수로에는 유브라데강의 물이 채워졌다. 이 거대한 외호는 쳐들어 오는 적을 막아내려는 목적으로 세워진 것이었다. 무릇 바벨론 성을 바벨론 성을 고약하자면 성벽으로 다가서기 전에 이 물웅덩이를 건너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바벨론은 안전한 요새일 뿐 아니라 아름다운 곳이기도 했다. 저 유명한 바벨론의 가공원은 오늘날까지도 세계 7대 불가사이 중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이 정원은 넓이가 400평방피트로 한 대지 위에 여러 제단을 차곡차곡 포개놓은 형태였으며 하늘로 높이 350피트 가량 치솟아 있었다. 관람객들은 폭 10피트의 계단을 통해 꼭대기로 올라갈 수 있었다. 멀리서 볼 때 이 가 공원은 사람을 짓누르듯 했다. 탑 자체의 밑바닥은 한 면의 폭이 300피트였다. 바벨탑에 가까운 거대한 마르둑 신전은 유브라데 계곡에서 가장 유명한 성소였다. 거기에는 적어도 5만파운드 이상 나가는 벨(Bel)의 금상과 금 탁자가 있었다. 그리고 꼭대기에 벨과 이스다롯의 황금 신상, 두 금사자, 길이 40피트 폭 15피트의 금탁자, 높이 18피트의 정금으로 된 사람의 상이있었다. 바벨론은 문자 그대로 금의 도시였다(참조, 사 14:4). 바벨론에는 이스다롯 신전이 53개이고 제단이 180개 있었다.

 

4) 느부갓네살은 기원전 562년에 죽었다.

 

5) 허약한 사람들에 의한 몇 개의 짤막한 치세기를 거친 후에 나보니두스가 느부갓네살의 뒤를 이었다. 나보니두스는 느부갓네살의 딸과 결혼했으며 기원전 556년부터 539년까지 권좌에 있었다. 그는 왕위가 싫어지자 왕권을 아들 벨사살에게 맡기고 바벨론 시를 떠나 동쪽으로 물러갔다. 그리고나서 그는 역사상 최초의 고고학자가 되었다.

 

6) 기원전 539년 10월 13일, 바벨론 시는 메데와 바사 동맹군의 손에 들어갔다. 벨사살은 살해되고, 신 바빌로니아 왕국도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참조, 단5장).

 

7) 바빌로니아에는 천문학(에 관한 과학적 연구)과 점성술(위와 같은 연구의 종교적 해석)이 훌륭했다. 바빌로니아인들은 훌륭한 건축자들이었다. 저 유명한 가공원도 느부갓네살이 자기의 고향 메데의 산을 그리워 한 처 아메티스의 향수를 달래기 위해 건축한 것이다. 또한 그의 왕궁은 넓이가 7에이커였으며, 항연장은 폭이 65피트, 길아가 172피트로 면적은 11,000평방 피트였다.

 

 

앗수르인

 

1. 소개

 

1) 의심할 바 없이 고대 역사 중에서 가장 잔인무도한 족속은 앗수르인들이었다. 그들은 야수와 같은 격렬한 테러행위를 통해 정복하고 지배했다. 그들은 기원전 1200년경에 메소보다미아를 지배했다.

 

2) 그들은 그들이 점령한 적국의 사람들을 분산시키는 방법을 사용했다. 싸움에 진 나라 백성들은 고국을 떠나 노예로서 앗수르에 끌려갔다. 그리하여 그들의 고국은 그곳에 살기를 희망하는 이방인들의 소유가 되기 마련이었다.

 

3) 앗수르인들은 성벽파괴용 무기를 개발했는데 그것이 바로 공성퇴 및 다른 장비들이다.

 

4) 그들은 또한 "파발"제도의 창시자들이다. 왕은 이와 같은 "통신체계"를 통해서 각지의 방백들과 긴밀한 연락망을 유지했다.

 

5) 그들은 수로, 계단, 탑 및 아아치가 있는 신전과 왕궁을 건설했다. 거대한 왕궁이 왕을 위해서 건축되었다. 코르사밧에 있는 사르곤 2세의 저택은 대지 면적이 25에이커로, 200여개의 커다란 방이 들어서 있었고, 한꺼번에 8,000명의 손님을 유숙시킬 수 있었다.

 

6) 앗수르의 수도이자 가장 중요한 도시는 니느웨였다. 니느웨는 티그리스 강 동쪽에 있는 도시로 고대의 도시들 중 가장 큰 도시 중의 하나였다(아마도 가장 큰 도시가 아닐까 생각된다). 성벽에는 높이 200피트의 탑이 1,200개 있었고 성벽의 높이는 100피트였다. 또한 그 폭은 세 대의 전차가 나란히 달릴 수 있을 만큼 넓었다. 또 둘레의 길이는 60마일로, 그 성의 면적은 60만명의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곡물이 자라기에 충분했다. 크세노폰의 말을 빌리자면, 그 성벽의 기초는 마광석으로 되어 있었고, 그 폭은 15피트였다 한다. 그 성안에는 100에이커 이상의 정원을 갖춘 궁전이 있었다. 궁전의 지붕을 떠받치는 들보는 백향목이었으며, 이 들보를 지탱하는 것은 삼나무 기둥이었다. 백향목 기둥은 아름다운 무늬가 아로 새겨져 있었고, 갖가지 형상을 조각한 은제 혹은 철제 머리싸개가 보강되어 있었다. 궁전의 입구 곁에는 돌로 된 거대한 사자와 숫소가 버티고 있었다. 문은 상아, 은 또는 철로 입힌 삼 나무와 흑단으로 되어 있었고, 방 안의 부벽은 석고를 바른 후에 조각을 아로새긴 것이었다. 그 벽돌에는 설형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가공원은 값비싼 식물과 희귀한 동물로 가득 채워져 있었으며, 신전과 궁전, 도서관 및 병기창과 더불어 이 도시의 부를 자랑했다. 이 모든 것들은 이방 노예들의 강제노동으로 이루어졌다.

 

2. 앗수르의 중요한 왕들

 

1) 디글랏빌레셀 1세(기원전 1114-1076년) 초기의 가장 강력한 왕들 중의 한 사람. 그는 자신을 세상의 지배자라고 자칭했으며, 몸소 거대한 물소 네 마리, 코끼리 열 마리 그리고 사자 120마리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2) 앗수르나시팔(기원전 883-859). 이 왕으로 더불어 거대한 대외 침략 정책이 추진되었다.

 

3) 살만에셀 3세(기원전 858-824). 이 왕은 성서에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기록에 따르자면, 아합 왕이 그와 전쟁을 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는 앗수르나시팔의 아들이었다.

 

4) 디글랏빌레셀 3세(기원전 746-728). 이 앗수르 장군은 왕위를 찬탈하고, 살만에셀 3세가 죽은 뒤로 8년 동안에 걸쳐 줄곧 퇴보한 제국을 부흥시켰다. 그는 곧장 성서에 등장한다(왕하 15:29;왕하16:7,10). 이스라엘과 유다가 분쟁할 당시에, 유다 왕은 어리석게도 외국의 디글랏빌레셀 3세에게 구원을 청했다. 그러자 곧 디글랏빌레셀이 이스라엘로 침입하여, 요단 동편에 살고 있던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과 므낫세 반지파 중에서 많은 사람들을 잡아갔다(왕하 15:29-30). 실제로 이 왕은 앗수르의 군대를 세계적으로 유명한 전투부대로 만들었다.

 

5) 살만에셀 5세(기원전 727-722). 그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아를 포로로 잡아 감금하고(왕하 17:1-6), 사마리아를 포위 공략하던 중에 사망했다.

 

6) 사르곤 2세(기원전 721-705). 사마리아에 대한 포위 공략을 매집지은 살만에셀의 장군. 그는 이사야 20:1에 나온다. 사르곤은 나중에 암살당했다.

 

7) 산헤립(기원전 705-681). 사르곤 2세의 유능한 아들. 아버지가 죽었을 당시에 산헤립은 바벨론의 방백이었다. 그는 후에 바벨론이 반란을 시도하였다는 이유로 그 성을 파괴했다. 사르곤 2세는 기원전 701년에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히스기야에게 항복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사자를 보내사 예루살렘을 건지셨다.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천사는 18만 5천 명의 앗수르 군대를 살해하였다(왕하 18-19장 ;대하32:장;사 36-37장).산헤립은후에 자기의 아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8) 에 살하돈(기원전 681-669). 그는 잡다한 외국인들이 왕국령 북부의 인구가 한산한 지역으로 이주하도록 허용하였으며, 그들이 그곳을 차지하도록 방관했다. 이곳이 바로 사마리아 족속의 발상지이다(왕하 17:24). 그는 앗수르의 마지막 막강한 왕이었다. 그의 왕국은 그가 죽은 이후 15년간 존속했을 따름이다. 수도 니느웨는 기원전 612년에 멸망했다.

 

역사를 보건대 바벨론 침략군의 왕 나보폴라살은 3년 동안 앗수르의 니느웨를 포위했으며, 그에 대해 세 차례에 걸쳐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으나 번번히 실패했다. 이 때문에 니느웨 성 안의 앗수르인들은 기뻐 날뛰었으며 주연을 열기 시작했다. 그런데 돌연히 디그리스의 강물이 둑을 넘에 거칠게 니느웨 성벽을 두들겨댔다. 곧 성벽이 구멍이 뚫리고 그 구멍으로 바벨론인들이 밀려들어 갔으며, 그 오만한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니느웨의 파괴는 너무 처절해서 후에 알렉산더 대왕이 군대를 이끌고 진군해 들어갔을 때 옛날에 그 웅장한 도시가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이 도시는 기원후 1845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발굴되었다.

 

 

바사(페르시아) 인들

 

1. 소개

 

1) 대략 220년 동안(기원전550-330) 페르시아인들은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지닌 제국을 유지했다.

 

2) 그들은 가장 훌륭한 통치 체제를 수립했으며, 로마제국 전의 가장 막강하다고 일컬어지는 정치체제를 발전시켰다. 그들의 왕국은 총독 관구로 불리는 21개의 도로 나뉘어 있었다. 그들은 법률의 최고 권위를 인정하였으며, 심지어 왕까지도 그것에 복종했다.

 

3) 그들의 두 주요 도시는 수사와 페르세폴리스이다.

 

4) 그들은 과거 앗수르인들과 마찬가지로 훌륭한 "파발" 체제를 이용하였으며, 14일마다 역점을 두었다. 이와 같은 제도 덕분에 변경 지방의 소식이라 할지라도 10일이 못되어 왕의 귀에 들어갈 수 있었다.

 

5) 많은 사람들은 페르시아의 왕궁이야말로 이때까지 세상에서 지어진 건물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6) 바사의 중요한 교사는 기원전 600년경에 태어난 조로아스터이다. 그는 선(빛으로 나타남)과 악(어둠으로 나타남)으로 이루어진 이원론을 발전시켰다. 조잡한 형태로나마 조로아스터는 의로운 자들에게는 하늘의 축복이, 악한 자들에게는 지옥의 고통이 있을 것이라고 가르쳤다. 또한 그는 장차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도 가르쳤다. 조로아스터는 비록 이교도이며 많은 과오를 저지르고 있지만, 그는 분명히 노아의 홍수 이후에 위와 같은 성서적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세계 종교를 창시한 이교도 중 최초의 사람이다. 바사인들은 자기네들이 정복한 민족에게 각자 고유한 종교 제도를 지키도록 허용하리만치 아주 관용적이었다.

 

7) 바사인들은 개를 매우 좋아했다. 고대의 다른 어떤 문명권에서도 바사에서 만큼 개가 좋은 대우를 받은 적이 없었다. 그들은 개의 부릅뜬 눈이 악마도 쫓아낼 수 있다고 믿었다. 개를 때리는 것은 일종의 죄였으며, 강아지를 소홀히 다루는 것은 마치 어린아이를 소홀히 다루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생각한 일이었다.

 

2. 연대별로 살펴본 바사의 역사

 

1) 기원전 550년에 페르시아의 한 장군이 메데를 정복하고 이들을 페르시아인들과 연합하여 최강의 전투부대로 만들었다. 이전에 그들은 메데의 지배를 받아왔었다.

 

2) 이 페르시아인의 이름은 고레스 대제로역사상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기원전 547년, 그는 엄청난 부자로 소문난 루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를 정복했다(루디아는 지중해와 흑해 사이에 있는 나라였다). 고레스는 낙타 부대를 이용해서 이 전쟁에 승리했다.

 

3) 이 후에 그는 동쪽으로 인도 국경에 이르기까지 주변의 모든 영토를 정복하였다. 그리고 나서 바벨론으로 향했다. 기원전 539년, 그는 바벨론을 점령하고 느부갓네살을 처형하였다(참조, 단5장).

 

4) 이어 고레스는 수년 후에 유대의 남은 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도록 허용하였다(참조, 스1장) 그는 기원전 529년에 전장에서 죽었다. 고레스라는 이름은 성경에도 나온다(참조, 스1-5장;사44:28;사45:1;단 1:21;단6:28;단10:1).

 

5) 그의 뒤를 이어 아들 캄비세스 2세가 즉위하여 애굽을 정복한다. 예루살렘 성전 재건도 그의 통치 중에 칙령에 따라 잠시동안 중단되었다(참조, 스 4:7-11). 캄비세스는 자기에 대한 반역 음모를 알고 자결했다.

 

6) 다리오 대제(기원전 522-486)가 무너져가는 제국을 떠맡아 법과 질서를 회복함으로 구해냈다. 다리오는 아주 잔인했다. 바벨론 성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 그는 성의 지도자급 주민 3,000명을 처형했다. 그렇지만 캄비세스가 중단시켰던 성전재건은 계속하도록 허락했다(참조, 스 6:1-12).

 

기원전 490년에 다리오 대제는 기병과 보병 6,000명을 태운 600척의 거대한 함대를 이끌고 아테네로 쳐들어가 헬라 문명을 정복하려 하였다. 그러나 헬라 장군 밀티아데스에게 마라톤이라는 조그만 평야에서 참패를 당했다. 숫자상으로는 페르시아가 엄청나게 우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헬라인들은 그들의 적을 에워싸고, 마치 무르익은 곡식을 베는 것처럼 그들을 쓰러뜨렸다. 마라톤 전투는「역사상 가장 큰 100개의 사건」 이라는 윌리암 데윗(William A. DeWitt)의 책에 6번째로 수록되어 있다.

 

7) 다리오의 아들 크세르크세스(기원전 486-465)가 이어 즉위했다. 그는 에스더서에 나오는 왕 아하수에로이다. 기원전 480년 봄, 크세르크세스는 군대 10만명과 수백 척의 배를 거느리고 다다넬즈(the Dardanelles) 해협을 건넜다. 역사를 보면 크세르크세스는 화려한 색깔의 깃발을 들고 늠름하게 행진하는 그의 군대를 보고 울었다고 한다. 부하들이 왜 우느냐고 묻자 왕은 이렇게 대답했다. "짐은 이 모든 군사적 영광이 순간에 불과할 따름이며 곧 덧없이 사라져버릴 것임을 알기 때문이니라. 기껏해야 백년이 못가서 오늘 이 자리에 참석했던 모든 사람들이 죽고 말겠지, 짐도 물론 그렇고 말이야." 곧 이어 재난이 엄습해 와서 크세르크세스는 바다의 격렬한 태풍에 휘말려 400척의 배를 잃었다. 실의와 분노로 눈이 뒤집혀 그는 허리띠를 풀어 성난 파도를 쳤다.

 

헬라에 도착한 그의 오만한 페르시아 군대는 테르모필레라고 불리는 험준한 산길에서 하루 종일 진군을 저지 당했다. 여기서 레오니다스라는 헬라의 대장과 그의 용감한 스파르타 군대 300명이 24시간 동안 침략군 전체의 진군을 막고 엄청난 손실을 입혔기 때문에, 훨씬 전력이 약했던 헬라군은 질서정연하게 안전한 곳으로 퇴각할 수 있었다. 크세르크세스는 결국 포위망을 돌파하여 아테네를 모두 태워버렸다. 그러나 아테네 시민 대다수는 살라미스 섬으로 피난한 이후였다. 그리하여 페르시아 왕은 살라므시를 향해 돛을 올렸다. 그의 군대가 도망한 아테네 시민의 숫자보다 최소한 3배 이상 많았기 때문에 그는 승리를 확신했다. 그러나 그의 군대보다 숫자는 작았지만 더욱 민첩한 헬라의 전함들은 자유자제로 공격했다. 얼마 후 그는 당황한 눈으로 오만한 그의 해군이 참패당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일개 패잔병이 되어 페르시아로 되돌아갔다. 그의 남은 부대는 나르도니오 장군이 통솔했다. 그로부터 일년 후인 기원전 479년 나르도니오는 플라티어 결전에서 패배했고, 그 자신도 전사했다. 이리하여 페르시아 제국은 일대 치명적 타격을 입게 되었다. 풀러(J.F.C.Fuller)는 「서양의 주요 전쟁들」 에서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쟁들 가운데 살라미스 해전과 플라티아 전투를 끼워 놓고 있다.

 

8) 아닥사스다(기원전 465-423). 크세르크세스 1세이 아들로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의 통치자(참조 스 7:1;느 2:1).

 

9) 다리오 3세(기원전 335-331). 페르시아 제국은 다리오 3세의 짧은 통치기간 중에 알렉산더 대제에 의해 멸망당했다.

 

 

헬라

 

1. 배경

 

1) 기원전 546년부터 479년까지 헬라의 도시국가 들은 끊임없이 페르시아의 침입을 받았다. 그러나 이 모든 침략은 살라미스와 플라티아에서 승전이후 잠잠해졌다.

 

2) 이 두 전투 직후 헬라는 페리클레스(기원전 461-429)라는 아테네의 민주적 지도자가 주도하는 황금기를 맞는다. 이 시기에 일찌기 볼 수 없었던 다수의 유명한 사람들이 배출된다.

(1) 헤로도투스(기원전 485-425). 역사의 아버지.

(2) 히포크라테스(기원전 460-370). 근대 의학의 아버지.

(3) 소크라테스(기원전 469-399). 철학자.

(4) 플라톤(기원전 427-347). 철학자.

(5)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 철학자.

(6) 데모스테네스(기원전 385-322). 역사상 가장 위대한 웅변가들 중의 한 사람.

 

3) 그렇지만 황금기도 짧은 기간에 그쳤다. 헬라의 두 대표적 도시국가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서로 대립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들 도시 상호간의 무력 대립은 세 차례에 걸쳐 일어났는데, 이것이 이른바 펠로포네소스 전쟁이다(기원전 459-404). 이 전쟁 후에 스파르타가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2. 알렉산더 대제의 등장

 

1) 기원전 338년. 마게도냐 출신의 한 사람이 헬라를 정복했다. 그는 2년 후인 기원전 336년에 암살당했다. 그의 이름은 마게도냐의 필립이었다(기원전 380-336).

 

2) 필립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알렉산더 대제가 즉위했다. 이가 곧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정복자들 중의 한 사람이 된다. 그는 당시 20세였다. 그는 즉시 페르시아를 정복하라는 아버지의 명령을 실행에 옮길 준비를 했다.

 

3) 기원전 334년에 그는 소아시아와 중동 사이에 있는 헬레스폰트해(다다넬즈 해협의 옛 이름)를 건넜다.

(1) 그는 기원전 334년에 그라니쿠스에서 페르시아군을 무찔렀다.

(2) 그는 다신 기원전 333년에 그들을 대패시켰다.

(3) 그는 예루살렘을 제외한 두로 지방을 항복시켰으며, 애굽을 정복했다. 거기서 그는 알렉 산드리아 시를 건설했다.

(4) 그는 기원전 331년에 아르벨라에서 페르시아를 영원히 멸망시켰다.

 

4) 기원전 327년에 그는 인도로 쳐들어갔다. 또한 그는 이 때 바벨론 성읍을 복구시켜 예전의 영화를 되살렸다. 그러나 그는 인도에서 서른 두 살의 나이로 죽었다.

 

5) 그의 강대한 제국은 네 명의 부하 장군들에 의해서 곧 분할되었다.

(1) 프톨레미-애굽을 지배함. 클레오파트라는 이 혈통 출신이다.

(2) 셀류코스-수리아를 지배함. 이 수리아에서 악명높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가 나왔다(기원전 176-163).

(3) 카산더-헬라와 마게도냐를 지배함.

(4) 리시마쿠스-소아시아를 지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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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9 [3]성서에 나오는 아홉 민족 웹섬김이 03-27 6337
2338 코란과 이슬람의 경전들 웹섬김이 03-27 9753
2337 성경에 나타난 지혜서에 대해서 웹섬김이 03-27 8407
2336 고난주간에 관하여 웹섬김이 04-12 14035
2335 종려주간 웹섬김이 04-12 18755
2334 부활절 웹섬김이 04-12 8377
2333 바울 신학으로 본 부활 웹섬김이 04-12 7468
2332 세대주의의 기본 원칙 웹섬김이 04-17 6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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