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4-03-27 11:04
[2]인물 중심의 종교개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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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8,081  

2. 스위스에서의 개혁의 확산과 중단

 

  츄리히가 종교개혁에  가담한 사실은 스위스 연방에  깊은 동요를 일으키게 했다. 어떤 주들에서는 강력한 반발에 부딪히기도 하였고 혹은 진압되기도 하였다. 반대로 바젤에서는  1529년에, 베른에서는 1528년에  공식적으로 도입이 되었다. 그리고 잔크트 갈렌에서는 1528년에 승인되었다. 


  이런 "이단"의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가톨릭 주들은 1524년에 베켄리이드 동맹을 결성하였다. 이에 위험을 느낀 츠빙글리는 [경건한 연방주들에게 보내는 신실하고 진지한 권면]을 통하여 스위스 사람들이 서로 싸우지 말것을 권면했다. 그러나  그의 호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공동관할 구역들에서는양 신앙고백의 참여자들 사이에 긴장이 커져갔다. 가톨릭 주들은 종교개혁을 "뿌리채 뽑고, 금지하고 처벌하고 제거하기로" 결심하고는, 1526년 종교문제를 끝내도록 결정했던 국회를 대비하여 바덴에서의 회담을 소집하였다.


  1526년 5월 21일에 열린 이  회담에 로마 교회는 상황이 자기에게 유리했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대표단을 파송했다.  이에 종교개혁 측에서는 변호를 위해 바젤의 외콜람파디우스와  베른의 할러를 보냈다. 엑크는  루터와 츠빙글리의 성찬론견해를 대립시키는 능숙함을 보였고, 결국 개신교 진영에 불화의 씨를 심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예상했던 대로, 바덴 논쟁은 가톨릭의 승리로 끝났다. 츠빙글리는 파문되었고, 국회는 츄리히로 하여금 츠빙글리를 포기하되 그렇지 않으면 연방에서 제외시키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츄리히는 츠빙글리 편에 있었고, 또한 베른과 바젤, 및 샤프하우젠 등이 반대했다.


  바덴 논쟁이 있은 다음, 츄리히만이 복음적 교리에 전적으로 가담했다. 바젤과 베른에서는 "새"신앙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한 정치적 사건이 상황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 1527년 한 해 동안에 여러번의 선거에서 종교개혁의 가담자들이 베른  시 대의회의 다수를 점령한  것이다. 시의 대의회는 종교문제에 대한 광범위한 토론회를 개최하도록 결의했다.


  이렇게 해서 1528년 1월 베른  논쟁이 열렸고, 로마 교회는 2류급 인사들을 파견했다. 반대로 종교개혁측은  일단의 탁워란 신학자들이 대변했다. 토론은 복음주의 교리의  옹호자들이 승리함으로서 끝났고, 그  결과 베른에서는 종교개혁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것은 중요한 사건이었는데, 이로인해 종교개혁이 쥬네브에 발을 붙일 수 있었고 프랑스 개신교의 운명에 큰 영향을 끼쳤다.


  베른 논쟁 이후, 1524년 베켄리이드  동맹을 체결한 바 있는 가톨릭 주들에 응전하기 위해  조직을 강화했다. 그러자 가톨릭  주들은 국가적으로 스위스인들의 원수인 오스트리아와  결탁하면서까지 반발하였다.  전쟁의 선전포고까지 다다른때에, 글라루스의 책임자가 화해를  성공시킴으로 인해 양측은 화해를 하게 되었다.

  이러한 카펠  평화 조약에 뒤따르는 몇달을  이용하여 츠빙글리는 1529년 10월 마르부르크에 가서 성찬문제로 루터와  토론했고, 1530년 부쳐의 주도하에 막 [4도시 신앙고백]문서를  작성한 독일 고지대 도시들의  신학자들과 대화를 개시했다. 1531년에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인 [간단하면서도 분명한 요점]을 프랑소아 1세에게 헌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츠빙글리의 노력은 기대했던 결과를 얻지 못했다. 츄리히에서 그는 "교회적 구속력" 문제로 시의회에 사임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시의회는 사임을 거부하였다. 1531년 10월, 가톨릭 주들은 츄리히를 공격하여 카펠에 모인 츄리히  군대를 패주시켰다. 츄리히의 원정군에 속했던 츠빙글리는 전투 도중 살해되고 말았다.


  이 참패 이후, 개신교 주들은 패배를 만회할 방법을 도모하지 않고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로인해 비록 츄리히에서는  새 신앙의 독립과 그 예배를 보장해주었으나, 그 조약은 종교개혁의 확장을 분명 중지시키고 말았다.


  츠빙글리의 죽음 이후, 알자스 사람 레오 쥬드와 브렘가르텐 출신의 젊은 성직자 하인리히  불링거가 츠빙글리를 승계하였다. 특히  불링거는 카펠에서 패배한뒤 츄리히에 나타난 가톨릭의 반동을 제지할 줄 알았다. 그는 세례파의 재출몰이종교개혁에 다시 퍼지게  될 위험을 미리 예방했다.  그리고 복음 사역의 권리를옹호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그의 공로는 성찬 문제로 나뉘어진 개혁파를 하나로 묶는 작업을 한데 있다. 사실 그는 1536년 스위스 제1신앙고백서에 츄리히 등의 도시들이 서명케 했다.  1540년 부터 성찬 문제에 해결책을 찾을 목적으로 칼벴과  담판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그는  쥬네브 개혁자와 더불어 "츄리히협정"을 체결하였다(1549). 이렇게 그는 개신교사에 상당한 영향을 행사했다. 왜냐하면 이것은  츄리히와 쥬네브를 연합시킴으로  츠빙글리의 조교개혁과 칼벴의종교개혁을 지속적으로 접근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영국 성공회에 대해 조언자의 역할을 해주었다. 나아가 종교 개혁의 교회들에게 그들의 가장 훌륭한 신앙고백서들 가운데 하나인 제2스위스 신앙고백을 작성하였는데, 이  문서는 1566년 팔츠 선거  후에 의회 신앙고백으로 채택된뒤, 같은 해 쥬네브 교회와 대부분 스위스 개혁파 교회들에 의해 인정되었다. 또한 프랑스에서도 수용되었고, 스코틀랜드, 헝가리, 폴란드, 오스트리아에서도 채택되었다.

 

 

  3. 부쳐와 스트라스부스 종교개혁

 

  비텐베르크의 수도사 루터가 보름스 국회에 출두했을 무렵(1521년), 루터의 작품을 읽고 그 영향을 받은 스트라스부르 성당 신부인 마태우스 젤은 통속적인 어조와 복음적 영감으로  로마서를 강해했다. 그는 주교에게 이단으로 고소되었고,1523년 스트라스부르 종교개혁의 첫 성명서로 여겨질 수 있는 "기독교인의 책임"이란 글을 간행했다.


  이렇게 투쟁에  뛰어들면서 젤은 카피토와 특히  마틴 부쳐라는 동역자를 얻게된다. 카피토와 반대로 1523년  당시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부쳐는 하이델베르크논쟁 당시(1518년), 루터에게 사로잡혀 수도원 서약을 스스로 풀어 버렸다. 그리고 결혼하여 슈파이어  주교가 자신을 쫓아냈던 비셈부르크에서 종교개혁을 설교했다.


  젤의 제안으로 부쳐는  스트라스부르에서 성직자와 평신도를 위해 성경을 강의했다. 그리고는  1523년 [누구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 살아야 할것]과 [비셈부르크에서의 설교 요약]을  펴냈다. 이 두 작품의 영향을 커서 대성당의 참사회가  개혁 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부른 명성있는  설교가 헤디오 역시"새" 신앙에 가담하게 된다.


  당국은 부쳐와 카피토를 청빙하여 성경의 여러 곳들을 공적으로 강해하게 하였다. 이 말씀의 사역자들이  이곳에서 자리를 잡자 예배의 개혁이 뒤따랐다. 1524년 초 니그리가 "독일어  미사"를 시작했고, 동년 말, 부쳐는 츠빙글리의 관점을가지고 스트라스부르  예배의식에 도입된 변화들을 옹호하는  [쇄신의 기초와 명분]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이처럼 종교개혁의 일원들이 기획한 교회의 재조직은 대성당과 교회 참사회 회원들을 불안케 했다. 그러나 당국의  능숙한 타협 끝에 그들은 중립을 지키자 쇄신운동은 승리의 발걸음을 계속했다. 교구개혁과 병행하여 수도원과 학교 개혁도수행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스트라스부르는 황제와 불편한 관계에 놓이게 된다. 스트라스부르는 제2차 슈파이어 국회 때(1529년), 보름스 칙령을 적용해서 종교개혁의 확장을 금한다는 황제의 결정에 "항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스트라스부르 시는신학적 방어를 준비해야 했다. 

 

이때 부쳐와 카피토가 콘스탄츠, 린다우, 메밍겐등의 동의를 얻어 [4도시 신앙고백서]라는 이름의 문서를 작성했다. 이럼으로 인해 스트라스부르는 제국에 그대로 머무를 수 있었다. 더우기 종교적 영역에서 독일 여러 지방 국가들과 스위스 사람들 사이에서 중개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개신교 세력들 가운데 탁월한 위치를 확보했다. 그러나 카펠의 참사이후, 스트라스부르는 비텐베르크와 그 위성 지역 쪽으로 가까이 하게 되었다.


  스트라스부르의 종교개혁은 도시 내부에서도 난관이 있었다. 비록 가톨릭은 이곳에서 신속히 사라졌지만, "열광파들"은 심각한 위협적 존재가 되었다. 칼 슈타트가 이곳에 정착하러 찾아왔지만 그는 이내 그의 분리적 행동 때문에 당국에 의해 쫓겨났다. 더 위험했던 것은 재세례파와 온갖 종류의 영성주의자들로서, 이들은 자유스런  분위기를 틈타 도시에 만연했고  심지어 카피토의 동정을 얻기까지했다.

  조명주의가 종교개혁에  퍼뜨린 위험을 막을 목적에서,  부쳐는 시 책임자에게"열광파들"을 추방하라고 부추겼다. 그는  교회에 치리를 보다 강화하는 일에 전념했다. 1531년 각 목사에게 "감독회"를 딸려 붙여주었으며, 교회에 법적 기능을부여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조처들은 분파적 운동들을 약화시키고 총회의 주래를 맡은 부쳐의 권위를 강화시키는데 상당히 공헌했다.  그리고 그는 목사들과 필요한 인물들을 키울수 있는 기관을 1538년  고등교육학교를 창설함으로 해결하였다. 이 학교의 총장은 요한 슈트름이었으며, 부쳐,  카피토, 헤디오, 베르미글리, 그리고 칼벴도 한때 가르쳤다.


  스트라스부르가 속해있던 슈말칼덴  동맹이 패배는 이곳의 종교개혁의 "황금시대"라고 부를 수 있었던 것에 종지부를 찍었다. 1547년 "최고 책임자" 야곱 슈트름은 황제에게 도시를 대표하여 공개적인 사죄를 해야 했다. 그리고 부쳐는 황제와 주교의 연합 압력에 항거한 시당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549년 4월 스트라스부르를 떠나야 했다.  그는 영국에 가서 매우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도착한 지채 2년이 못된 1551년  사망했는데, "기도서" 개작에 수고하였고 [그리스도의 통치론]을 에드워드 6세에게 헌정함으로 영국교회의 개혁에 적지 않은 공헌을 하였다.


  스트라스부르 종교개혁은 슈말팔덴 전쟁으로 매우 축소되었다. 부쳐 대신 교회총회를 주재했던 헤디오는 상황을  바로 잡을 시간이 없이 1522년 페스트로 사망했다. 그후  스트라스부르의 개신교의 입장을 재확립시킨  이는 헤디오의 후계자요한 마르바흐였다. 그가 가져온 이 공로는 부쳐의 종교개혁의 목숨을 잃게 하는값 비싼 지불이었다.


  마르바흐는 루터주의에 양보하여 교회에 권위 체계를 강요했다. 나아가 1555년부터 4도시 신앙고백에 모든 규범적 가치를 부인하기를 모색했고 결국 1563년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과 비텐베르크  협정을 신앙 규칙으로 인정케 함으로서 그목적을 달성했다. 그는 1560년이 지나면서, 개신교 예배를 추방한 대성당과 여러교회들에 그 예배를  회복시켜 놓게 하였다. 가톨릭에  대한 이런 승리는 우리가볼 때 성공이라고 여길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개신교 역사에 있어서 새로운 시대를 잘 드러내는데 곧  교리적으로 뻣뻣해지는 시대요, 고백적 정통들의 시대이다.


 

제 4 장 칼벴의 종교개혁 

 

  1. 종교개혁에 가담한 인문주의자

 

  1509년 피카르디 지방 노아용 시에서 태어난 쟝 칼벴은 지방 성직자를 위해 일하는 사업가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는  14살 때 교회 성직록의 혜택을 받게 되자파리로 가서 부친의 계획에 따라 사제직을 가는데 필요한 공부를 계속했다. 몽테커 학교에 들어가서 1528년 초에 문학석사를 받았다.


  철학 수업이 끝나자, 칼벴은  파리를 떠나 당시 법과대학으로 유명했던 오를레앙에 갔다. 왜냐하면 노아용 참사회와 사이가 틀어진 그의 부친이 생각을 바꾸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부친이  죽자, 자기가 가장 원하던 기호에 부응하는 생애를 자유롭게 택할 수 있게 된 그는 문학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1533년에 오를레앙 대학에서 법학사를 받은  것으로 보아 법학을 완전히 내버리지 않은채 파리에 세운  왕실학교에 다녔다.  그곳에서 그는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을 준비해 1532년에 출판함으로 일약 인문주의자들 가운데서 유명해지게 되었다.


  법학공부를 끝내러 오를레앙으로  갔다가 1533년에 돌아온 칼벴은 파리에서 상황이 성경파들에게 호의롭게 된 것을 보았다. 칼벴의 친구로서 대학의 새 총장이된 인문주의자 니콜라콥은 1533년  만성절, 개학식에 총장 훈시 시간에 8복 설교를 했는데 이 설교에서  그는 에라스부스와 루터에게서 열감을 받아, 종교개혁의귀중한 테마들 특히  믿음으로 얻는 칭의 테마에  접근했다. 의회는 대학 총장을기소하자 콥은 외국으로 도망했고,  칼벴도 위협을 느끼고 친구이며 신부인 루이뒤 티에가 사는 앙굴렘으로 피신했다.


  1533년 적어도 에라스무스적 쇄신주의의 일원이었던 그가 종교개혁에 가담하게된 시기를 그가 성직록을 포기하기 위해 1534년 봄에 노아용을 방문하기 전 몇달기간으로 위치한다고 본다.


  노아용에서 돌아와, 이미 복음주의사상에 사로잡힌 칼벴은 여러 곳에서 머물렀는데 특히 오를레앙에서 자신의  최초의 신학 작품인 [영혼의 수면]을 써서 재세례파들에 대항하였다. 그러다 1534년 가을 사건 하나가 그로 하여금 프랑스를 떠나게 했다. 이 위험을 피하여  칼벴은 바젤로 도망했다. 그곳에서 그는 1년도 채안돼서 [기독교 강요]를 썼고, 1536년 앞에 프랑스 왕에게 드리는 변증적 서간문을 달아 출판했다.


  [강요]의 인쇄 교정을 끝낸 칼벴은 이탈리아로 갔다가 잠시 머문뒤, 바젤로 돌아와서 이내 프랑스로 출발하여  재산을 다 정리하고 결정적으로 망명의 길을 떠나게 된다. 그의  계획은 스트라스부르에 자리잡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쟁때문에파리를 떠나 쥬네브를 거쳐  우회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하여 1536년 7월 쥬네브에 도착했고 그러기가 무섭게  기옴 파렐은 이곳에 남아 자기를 도와 종교개혁을 공고히 하자고 그를 독촉했던 것이다.

 

 

  2. 칼벴과 쥬네브 종교 개혁

 

  제네바인들이 그들의 독립을 보존하고  확립하기 위해 싸우고 있을 무렵, 복음주의 사상은 그들 가운데 점차 퍼져 나갔다.


  칼벴은 파렐에 의해 쥬네브에  붙들려 그로부터 "성경 강사"의 직무를 맡았다.칼벴은 대성당에서 바울  서신들을 강해하였고 종교개혁에 가담한 쥬네브 교회를서둘러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는  파렐과 협력하여 4개 [조항]을 작성한 뒤 시의회에 맡겼다.  그리고 [쥬네브 교회에서 사용하는  교육서와 신앙고백]을 작성했고, 파렐과 함께 21개 조항으로 된 신앙고백서를 작성하여 모든 쥬네브 시민들로하여금 각자 서명하게 하려 했다.


  이러한 노력은 강한 저항을 야기시켰다. 1538년 시 당국과 개혁자들 사이에 잠재해 있던 갈등은 첨예한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칼벴과 그의 동료들이 신앙고백에 반대하는 자들을 성찬에서  제외시켜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시의회는 성찬이 누구에게도 거절되어서는 안된다고 결정했다. 이 결정은 세속권으로 교회의주인이 되게 했다.

 

또한 시의회가 그 권한을 넘어서서 베른의 의식을 채택하기로결정했을 때, 개혁자들은 맹렬히  반대하면서 1538년 부활절에 강단에 올라 설교는 하되, 성찬 거행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당국은 칼벴과 파렐과 코로를 면직시키고, 3일 안으로 쥬네브를 떠나라고 처분을 내렸다.


  칼벴은 바젤에 정착할 생각을  했지만 부쳐의 절박한 부름에 계획을 바꾸었다.1538년 9월, 그는 종교의 이유로 스트라스부르에 피난해 온 프랑스인들의 공동체를 책임졌다. 이곳에서 그는  스트라스부르의 개혁자들과 접촉을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으며, 프랑스 교회 목사의 직책외에도, 교수로서 그리고 문학방면 등에서도 자신의 역량을 보여줬다.  그는 [로마서 주석]을 내놓았고, [사돌레에게 주는편지]를 작성했고 [성만찬 소고]를 썼다.


  칼벴이 스트라스부르에 체류하는 동안, 쥬네브 교회는 심각한 분쟁으로 시련을당했다. 추방된 개혁자들의  지지세력인 기에르멩들에게 호의적인 선거가 치뤄지고, 그에따라 쥬네브 당국은 칼벴을 다시 부르기로 결정했다. 칼벴은 쥬네브인들의 간청이 점점 더 절박해지자,  그는 결국 1541년 9월 교회의 다소간 질서를 회복하기에 필요한 시간만 머물  의도로 쥬네브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23년의 사역을 마치고 생애를 끝내야 했다.


  쥬네브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칼벴은 교회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는 1541년11월에 [교회법]이란  이름으로 시당국이 채택한  치리서를 만들었는데 여기에서교회 안에 44가지 직분을 구분했다. 1542년에는 문답형식으로 된 [신앙교육서]를작성하였고, 많은 요소를  스트라스부르에서 빌어온 예배 모범서인 [교회의 기도와 찬송의 형식]을 만들었다.


  이렇게 종교개혁의 기초가  놓여지자, 칼벴은 "도시-교회"로 만들기 위해 험난한 전투에  들어갔다. 이러한  그의 의지는 수많은  반동을 야기시켰고 더나아가1546년부터 기에르멩파의  우두머리인 페랭과 등을 지게  되었다. 급기야 1548년선거에서 페래의 지지자들이 승리하여  7년 동안 이들은 시의회 의석의 대다수를점유하여 교회와 국가간의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칼벴이 교회 치리에  대해 가졌던 매우 엄격한  개념이 많은 원한을 사게 했다면, 복음  진리를 옹호하려는  그의 의지 역시  적지 않은  수의 적을 만들었다.1543년 애가서의 정경성을  부인함으로써 성경의 권위를 문제시한 세바스티앙 카스텔리용을 나무랐다. 8년 뒤, 예정론 교리를 부인하고 자기를 향해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라고 비난한 제롬 볼섹의 공격과 맞서야 했다. 1533년에는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한 세르베투스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이처럼 그는 "잘못된" 교리들을 쥬네브에서 제거한 뒤, 외부의 적과도 논쟁을 하였다.


  쥬네브는 개혁파의 피난처였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유럽에 광채를 던지는 영적인 모국이었다. 칼벴은 종교개혁에서  나온 교회들을 모으기 위해 츠빙글리의 제자들과 더불어 1549년  [츄리히] 협정]을 체결하는데 성공했다. 루터의 후계자들과도 마찬가지로 담판을 시작했으나  성찬문제에서 합의를 보지 못했다. 또한 그는 영국  국교도들과도 서신 연락을 취했으며,  에드워드 6세와 서머세트 공작인에드워드 세이무어경에게 영국교회의 감독제를 존중하는 개혁안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칼벴은 "연합적" 노력들 이상으로, 아카데미 창설에도 힘을 썼다. 1559년 아카데미를 창설하였고  바로 이곳에서 필립 마르닉스와 가스파르 올레비아누스 등과 같은 학생들도 있었다.

  아카데미의 창설이  끝나자, 그는  1561년 [교회법]  개정에 전념하였다. 그는"교회에 모든 신자들을  복종케 하고 하나님을 참되게  섬기도록 할 뿐만 아니라물의를 일으킨 자들을 못하게 하고 교정시키기 위해 존재해야 할 최고 감독직"을강조하는데 성공했다.

 

 

  3. 칼벴과 프랑스 종교 개혁

 

  프랑스의 개신교는 에라스무스적  개신교였다. 이들은 기존 교회의 예배의식에참여하고 평신도들은  자기 자녀들의 세례를 기존  교회에 요구했고 많은 경우에있어서 그들은 미사에 참석했다. 사제들은 자신의 직무 수행을 거절하지 않았다.이러한 태도는 칼벴에 의해 1544년 부터 "니고데모파"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니고데모파들이 종교개혁을 위태롭게  하고 있음을 의식한 칼벴은, 1537년부터두편의 중요한 서신 속에서 복음주의 신앙과 기존 예배에 참여하는 것 사이에 온갖 타협이 있음을 고발했다.  그러나 이 편지들은 내적으로는 가담하지 않으면서그 의식 자체는  큰 문제로 여기지 않는  자들의 신학적 입장이 야기하는 위험을쫓아내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는 1543년에 이 문제를 [교황주의자들 가운데 있을때 복음의 진리를 아는 신자가 행해야 할 것을 보이는 소논문]을 작성했다. 이러한 권면은 프랑스에서 복음에 가담한 수많은 사람들을 동요케하였는데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오히려 칼벴을 비인간적이라고 비난했다. 칼벴은 다시 [니고데모파에게 주는 글](1544년)에서 응답했다.


  니고데모파가 정죄되자, 이번엔 다른 위험이 프랑스 복음주의 회중들을 위협하였는데 그들은 곧 조명주의의 위험이었다. 이에 대하여 칼벴은 [영성파로 불리우는 자유파란 환상적이고  광란적인 분파를 논박함](1545년)과 [자유파의앞잡이인어떤 프란치스코 수도사를 논박함](1547년)이라는 두 팜플렛에서 말하였다.

  쥬네브 개혁자  칼벴은 프랑스  동료들을 조직하는 또  다른 일에도 봉사했다. 1555년부터 기도와  교화로 모인 작은 그룹들이  감독회가 고무적인 활동을 하고 또 성례 거행 능력이 있는 말씀의 사역자를 갖춘 회중들로 변형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조직된 교회를 지도하기 위해서 칼벴은 편지를 통해서 복음을 표방하는 이들에게 용기를 북돋우고 방향을 제시해주었다. 하지만 칼벴이 프랑스 종교개혁의 조직을  이루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쥬네브에서 파송된 설교자들을 통해서였다. 이들은  프랑스로부터 이주해 온 사람들로서  개혁교회들의 설립에 결정적인영향을 끼쳤다.
  칼벴의 권면에 따라 "세워진" 최초의 교회는 파리 교회였다. 뒤이어 동년, 모,앙제르, 포아티에, 루뒹 교회들이  설립되었다. 1561년 말, 670개의 개혁파 교회들이 당시 프랑스  영토에 조직되었다. 이 교회  안에는 평민뿐만 아니라 수많은중산층, 사업가, 지식인, 수도사, 사제, 귀족들이 있었고, 이들이 개신교당의 뼈대를 이루었다.


  "세워진" 교회들 사이의 확실한 결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연결기관이 필요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대회체제에서 발견했다. 1557년 또는 1558년 목사회는 어떤문제이든지 전 교회의 대표들이  모인 자리에서 소송 절차에 따라 토의되어야 할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이 원칙에  따라 1559년 5월 프랑소아 드 모렐 목사의 주재 하에 프랑스 개혁 교회의 첫 총회가 파리에서 열렸다.


  칼벴은 근심어린 눈으로  바라보다 그들에게 신앙고백서 초안을 작성하여 보냈다. 총회 마지막 날 도착한 이 문서는 프랑스 개혁 교회 대표자들에 의해 다소간수정을 거친 후 신앙고백서로 채택되었다. 이 문서는 제7차 총회(1571년)에서 결정적으로 인정된 후, 라 로셸 신앙고백이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다.

  파리 총회가 끝난 며칠 뒤,  앙리 2세는 에쿠앙 칙령에 서명을 하고 냉혹한 박해를 시작하였다. 개신교자들 중에  1560년 3월 앙보아즈 성에 대한 점령 계획을하였지만 이 음모는 모든 개신교 음모자들이 대량학살 당하고 끔찍하게 진압됨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런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개혁  교회들은 새로운 조직 설립을 그치지 않았다. 종교개혁당을 완전히 멸할 수  없음을 안 카트린느 드 메디치는 가톨릭과 복음주의자들을 화해시킬  목적으로 포아시 회담(1561년)을 소집했다.  칼벴의 또 다른자아였던 테오도르 드 베즈는 개혁 교리의 주요 사항들을 훌륭하게 진술했다. 그러나 회담은 왕이 바랐던 화해로 이끌어가지 못했다. 그러나 섭정 카트린느는 필립 2세가 후원했던 삼두체제에  대항하기 위해 개혁파의 도움을 확보하려는 열망에서 그들에게 1562년 1월  칙령의 특혜를 주었다. 그들에게 대회로 모일 권리와 도시 밖에서 예배드릴 권리를 부여하면서, 그녀는 "새 종교"를 인정했다. 하지만승리의 기간은 짧았다. 1562년 3월 1일 바시의 대학살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도시 안에서 예배를 드리던  70명 이상의 개신교도들을 부하를 시켜 죽이게 함으로서, 프랑소아드 기즈는 제1차 종교전쟁을 터뜨리고 말았다.

 


제 5 장 영국의 종교개혁 

 

  대륙과 스크틀랜드에서의 종교개혁이  교회의 인물들에 의해 기도되었다면, 영국 종교개혁은  국가의 보호하에 보다 정확히  말하면 군주제의 보호하에 준비되고, 세워지고, 재건되었다.  헨리 8세는 로마와 결별하면서 종교개혁을 준비하였고, 서머세트공과 노덤버랜드 공이 에드워드 6세 치하에서 종교개혁을 세웠으며,엘리자베드가 "옛 종교"로 자기  백성을 끌고간 메리 튜더의 죽음이후, 종교개혁을 회복시킨 것이다. 영국에서도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수많은 써클들을 통해 교회 갱신을 갈망했다.

 

 

  1. 헨리 8세의 분열

 

  16세기 초, 영국의 종교적 상황은 이중의 양상을 띄었다. 한편에서는 경건운동이 꽃을 피워 전통신앙에  매달려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수많은 사회계층에서교회 세금과 교황 지상권에 대한 모종의 적개심이 표출되었다.


  헨리 8세는 통치 초기에  토마스 월세이 추기경을 이용하여 수도원을 개혁하고성직자 양성을 줄이는 시도를 했다.  이 일을 하면서도 그는 전통 신앙에 충실히남아 있었다.

  이처럼 헨리 8세가 "신앙의 수호자"로 자처하던 무렵, 루터주의는 영국 대학들에서 최초의 지지자들을 맞이했다. 특히 캠브리지에서는 서클 하나가 "백마"라는여관에 모여 비텐베르크 사상을  논했다. 대부분이 성직자들로 구성된 이들은 토마스 크랜머, 존 프릿, 윌리암 틴데일 등이 끼어 있었다.


  헨리 8세는 1509년 자기 형의  과부인 캐터린과 결혼을 하였다. 이 결합으로 6명의 자녀가 태어났는데 오직  메리라는 딸하나만이 살아남았다. 그러나 남자 상속인을 갈망하는 헨리 8세는 궁정의 젊은 여인 앤 볼린과 사랑을 느낀다. 그리하여 그는 1527년, 캐터린과의  결혼을 교황청이 무효화 해주기를 바랬다. 교황 클레멘트 7세는 영국 왕의 간청과 분리하겠다는 위협에 양보할 마음이 있었으나 캐터린이 칼 5세의 숙모였고, 당시  교황을 마음대로 하였던 칼 5세가 캐터린이 버림받는 것을 반대하였기 때문에 거절하였다.


  그러자 헨리 8세는  토마스 크랜머를 시켜 큰  대학에 자문을 구하여 호의스런대답을 받고는  1531년 자신을  영국 교회의 "최고  우두머리"로 인정케 하였다. 1532년에 그는 성직자가 교황에게 소득세를 바치지 못하게 하였고, 성직자로부터 교회법의 전면 수정에 대한 의사 표시권을 얻어냈다. 나아가 1533년에 은밀히 앤볼린과 결혼을 하였다.


  이에 클레멘트 7세는 반발하였고, 헨리 8세도 영국 교회에 대한 재판권을 박탈하는 법률을 의회로 하여금 채택케하여 응수했다. 이 법률로 국왕이 성직자의 소득세를 받았고, 수장령(1534)에 이르러서는 헨리 8세와 그 후계자들에게 "지상에서 영국교회의 최고 우두머리"라는  칭호를 주었다. 헨리 8세는 토마스 크롬웰에게 이 법률을  적용할 임무를 맡겼다. 물론  저항이 일어났지만 착실히 진행되었다.


  이렇게 흐르는 동안 헨리 8세는  앤 볼린을 간통죄로 꾸며 참수시키고 제인 세이무어와 결혼하였다. 제인은  결혼 생활 17개월 뒤  아들을 하나 낳고 죽었는데미래의 에드워드 6세였다.  이렇게 사랑에 있어서 변덕스러웠던 왕은 종교문제에있어선 훨씬 일관된 정신을 보여줬다. 그는 교황과는 거리를 두었으나 정치적 이유로 정통에 머무르려 했다. 칼 5세와 프랑소아 1세 사이에 있을 수 있었던 동맹을 저지하기  위해서 1535년과 1536년에 독일  개신교 군주들의 지지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타협의 결론은  그다지 보잘것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헨리 8세는1536년 "소집"된  성직자 회에서 채택된 [10개  조항]을 통해 루터파와 가까와졌다.


  비록 [10조항]이 루터주의에 최소한의 양보밖엔 하지 않았지만 이 조항의 의미를 설명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1536년과 1538년의 [왕의 지령]은 보다 분명한 개신교적 어조를 간직했다. 이 [지령]은 성상, 성유골, 순례행각 등을 비난하였고,특히 신부들에게 신자들  각자가 성경을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도록 권면하라고 당부했다. 이로인해 번역성경들이 나타났다.


  1538년 6월, 발로아 가문과  합스브르크 가문 사이에 체결된 니스 휴전 조약은헨리 8세를 불안하게 하였다. 교황은 프랑스와 스페인이 영국을 토벌하기를 원했다. 영국 왕은 크롬웰의 조언에 따라 작센 선거후의 처제인 안나 폰 콜레베와 결혼하였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정통  신앙의 증거를 가톨릭에게 보이기 위하여 [6개 조항] 법률을 가결시켰다(1539년).


  [6개 조항]이 보여준  신학적 경직현상은 1540년부터 두드러졌다. 전쟁은 발로아 가문과 합스부르크 가문  사이에서 재발되기 직전에 있었고, 칼 5세는 영국의도움이 필요했다. 따라서 헨리  8세는 독일 개신교 군주의 지원이 없어도 되었으므로 그는 안나 폰 클레베와 이혼하였다. 그리고 루터파와의 연합 정치로 부추켜왔던 크롬웰을 참수 시켰다. 1543년에 반 개신교적이인 [필요한 교리]란 책을 출판하였다. 헨리 8세는 1547년에 죽었다.

 

 

  2. 에드워드 6세 통치하의 종교개혁

 

  헨리 8세를  계승한 에드워드 6세는 제인  세이무어의 아들이었다. 겨우 9살에왕위에 오른 그는 종교개혁의 확고한 지지자였다. 그러나 혼자 통치할 능력이 없는 그대신 삼촌 에드워드 세이무어가 사실상 권력을 장악했다.


  세이무어는 선한 의지의  인물로서 확신있는 개신교도였다. 보호통치 초기부터영국교회를 종교개혁으로 차차 이끌어 가는데 진력했다. 그는 협력자로 캔터베리대주교인 토마스 크랜머를 삼았다.


  "개신교의 공세"는 1547년 7월의 [왕의 지령]이 발간되면서 시작되었다. [왕의지령]이 나온 지 몇달 뒤, 국회는 데 헤레티코 콤부렌도 법과 [6개 조항]을 폐지했다. 1548년에 더 나아가 성상들의 철거를 명했고, 사제들의 결혼을 인정했다.


  크랜머가 주재한  12명의 신학자 위원회는 새  예배모범의 초안을 작성하여 이초안을 통일령(1549년)으로 채택되었고 [공동 기도서]라는 이름으로 시행되었다. 이것은 교황주의와 비.국교주의 사이의 "중용의 길"에 성공적으로 들어선 형태였다.


  당국이 개혁을 신중하게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1549년 7월 여러 곳에서 폭동들이 일어났다. 폭도들은 "옛  종교"로 돌아올 것을 요구했으나 훨씬 정치적이요사회적이었다. 그러나 에드워드 세이무어는 농민들의 편에 서서 대지주들의 욕망에 제동을 가하려 했기  때문에 대지주들은 그를 비난하였다. "보호자"의 직분에서 면직된 그는 1549년 10월,  런던 탑에 수감되었고 반란자들을 진압했던 존 다들리로 대체했다. 다들리는 노덤버랜드  공작의 칭호를 획득한 뒤 세이무어를 참수시켰다. 그는 종교개혁 쪽을 택했다.


  노덤버랜드 세력이 도래한  몇달 뒤, 새로운 "성직  수임식 순서"가 만들어 졌다. 이후 종교개혁 지지파는  그동안 수많은 비판을 받아온 [기도서]를 개조하여크랜머는 1522년 두번째 [공동  기도서]를 출간하였다. 같은 해 이것은 제2의 통일령의 힘으로 강제성을 띠었고,  이것은 1549년의 것보다 훨씬 대륙적 개신교의특징을 지녔다.
  영국 교회에 복음으로 영감된  예배모범을 제공한 크랜머는 이제 그 교회에 신앙고백을 갖도록 하였다. 1538년  그는 루터파와 협상하여 [13개 조항]에 착상을얻어, 최종적으로 1553년  왕이 인정하여 노력 끝에  만든 [42개 조항]으로 간행허락을 받았다. 이 [조항]은 1522년의 [기도서]보다도 더 개신교적이었다.


  [42개 조항]을  승인한 지 한달  만에, 에드워드 6세는  16세의 나이로 죽었다(1533년). 노덤버랜드 공은 메리  튜더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권세를 유지하기 위해서 헨리 8세의 종손녀인 제인 그레이를 후계자로 지명하도록 부추겼다. 그리고 이  목표가 달성되자 그는 자기 아들들 중 하나와 제인을 결혼시켰다. 그러나  노덤버랜드 공의 평판이 크게 나빴고, 메리 튜더의 합법성이 논란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캐터린의 딸을 여왕으로 인정하고 만다.

 

 

  3. 메리와 엘리자베드 통치하의 가톨릭 복귀와 영국교회의 확립

 

  메리 튜더는  열렬한 가톨릭이었다. 그녀는 헨리  8세와 캐터린의 결혼 유효를인정하는 길은 영국에서의  교황 재판권 회복에 달려  있으며, 따라서 새 여왕의합법성에 대한 비준도 그것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자기 사촌인 칼 5세의 조언에 따라 메리는 먼저  에드워드 6세 통치 하에서 포고된 교회법들을 폐지하였다. 예배 의식들도  헨리 8세가 죽기 얼마  전에 만들었던 형태로 되돌아 갔다. 복음 사상에 가담한 주교들은 면직되었고 대신 헨리파 성직자들로 대체 되었다. 크랜머는 감옥에 들어갔고  대륙의 개신교 신학자들은 그들의 신앙을 따랐던수많은 영국인들을 데리고 영국을 떠나야 했다.


  메리는 의회와 백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왕위에 오르게 될 칼 5세의아들과 1554년 7월 결혼했다.  그녀는 부군의 지원을 받아 영국의 분리를 해소하기 위해 협상을 하여 영국의 동포들에게 교황의 사면을 전하였다.


  로마의 권위가 인정되자,  희회는 1529년 이래 선포된  모든 반 교황적 법들을폐지했고, 재산은 되돌려주지  않은 채, 헨리 8세  통치 초기의 상황으로 교회를재건시켰다. 1554년 말, 의회는 옛날 이단자들을 사형으로 처벌했던 법들의 효력을 다시 인정하였다. 이런  법률을 이용하여, 무자비한 박해가 터져 성경을 편찬한 존  로저스와 복음주의적 4명의 주교들이  화형대에 올랐다. 대주교 크랜머는개신교를 버림으로 자기 생명을 구하려 했으나 메리의 형벌을 피할 수 없게 되자용감히 자기 신앙을 고백했다.
  이 박해는 민중 계층에도  전개되어 불과 4년도 안되는 동안 약280명의 목숨을잃게 되었다. 이 박해는 결국 그녀가 1558년 11월에 죽고나서야 끝났다.


  메리의 이복 동생인  엘리자벱 튜더는 앤 볼린의  딸로서 영국 왕위에 오를 때나이 25세였다. 자기 어머니의 결혼  유효성을 놓고 로마 교회가 한 비판 때문에자연히 개신교가 되었다. 그러나 참된 종교적 확신으로 이끌림 받았다.


  국가의 대신 윌리암 세실의 조언을 받아가며 엘리자벱은 용의주도하게 일을 처리했다. 의회는 [수장령]의 효력의  재인정을 가결했다. 그녀는 "영국 교회의 최고의 우두머리"라는 칭호 대신에 "영국교회의 최고 통치자"라 하였다.


  새 [수장령]의 포고와 동시에, 새[통일령]이 선포되었고, 이것은 1522년의 [공동 기도서]의  사용을 강요했다. 이처럼 가톨릭  측의 마음을 가라앉힐 목적에서1559년의 [기도서]는 수정되거나 삭제되었다.


  대부분의 하급 성직자들은 1559년의 [수장령]을 받아들였으나, 메리 통치때 자리잡은 대다수의 주교들은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므로 계급제도를 다시 만들어야했다. 매튜  파커가 캔터베리 대주교의 보좌에  올랐다. 주교단은 [42개 조항]의개정에 착수하여 성직자 회를 통해서 [39개 조항]을 승인케 했는데, 바로 이것은오늘날도 여전히 "영국 교회의  교리적 정책강령"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 [39개 조항]은 애매한  데도 있지만 대륙의 종교개혁,  보다 정확히 말해서, 칼벴의종교개혁에 소중한 개념들을 제시했다.  이렇게 [39개 조항]은 영국 교회에 매우다양한 신학적 경향을 공존케 하였다. 또한 동시에 [조항]은 이중의 반발을 야기시켜야 했다. 자기들의 신앙이  정죄되어 있음을 본 가톨릭의 반발과, 온전한 개혁 촉진을 염려하여 개혁의 개신교적 알맹이를 평가절하한 퓨리탄의 반발이 그것이다.

 

 

결 론

  

  루터의 종교개혁은 거의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지방으로 유독 퍼져서, 주위 상황으로 인해 강력한 국가교회의 형태로 확립되었다. 부쳐의 종교개혁은 아우그스부르크 임시안이 선포된 직후,  요한 마르바흐의 완고한 루터주의 때문에 스트라스부르에서 질식하고 말았다.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은 점차적으로 그 특징있는 모습들을 상실하고, [츄리히 협약]  이후 칼벴의 종교개혁의 공동의 지류를 형성하였다. 루터파 형태나 영국  국교 형태와 대조적으로 개혁파란 칭호를 일반적으로 갖게 된 이  지류는 장소에 따라 공권력의 보호아에  그 뿌리를 내렸는 바, 쥬네브, 스위스 도시들, 프랑스뿐만  아니라, 독일 일부 지방, 화란, 스코틀란드, 항가리, 그리고  폴란드 등에서 그리했다. 영국  종교개혁은 왕실과 밀접하게 연합된, 그러면서도 가톨릭에 대한  향수와 대륙의 개혁자들의 복음적 급진주의로 이루어진 국가 교회 조직에 도달했다.


  이처럼 16세기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개신교의 품에는 루터파, 개혁파, 영국국교의 세 가족이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루터의 파문(1521년)이래 서구 기독교권  내부에서 반세기 동안 일어난  엄청난 변화를 측정해 볼 수있는 것이다. 모든 개혁의  선구자들이 가장 열렬히 소원했던 대로, 교회 안에서일어났어야 했던 종교개혁은 결국  교회 밖으로 쫓겨났다. 교회의 통일성이 깨어진 것이다. 16게기는 기독교 역사의 가장 후회스런 비극들 가운데 하나로 여겨질수 있다. 왜냐하면 형제를 살해하는  싸움을 400년 이상이나 치루고 난 뒤,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연합운동의 품 안에서 이 갈라진 틈새를 때우려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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