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열 장로의 해방 후 한국 교회사 네 번째 강의는 두 권의 책 소개로 시작했다. 이 장로가 쓴 <역사의 중심은 나다>(현암사, 2007)와 류대영 교수가 쓴 <한국 근현대사와 기독교>(푸른역사, 2009). 어느 단체에서 교회사에 관한 필독서를 추천해 달라고 하면 "이 두 권을 추천해 준다"고 소개했다.

 

<역사의 중심은 나다>는 근대 한국사를 관통하고 있는 민족주의 문제를 기반으로 3·1운동 전후의 민족 운동, 임시 정부, 민주주의의 발전 과정, 식민주의 사관 청산, 한민족의 세계화에 대한 문제 등을 다루면서, 역사의 중심은 특정 사건의 중심에 있는 정치가나 예술가가 아닌 바로 오늘을 사는 '나'임을 주장한다. 단순히 영리를 추구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더 주체적으로 삶을 이끌고 사회를 이해하며, 사회는 평등하게 되어야 역사의 중심으로 살 수 있다고 역설하는 책이다.

류 교수에 대해서는 "학부 시절에 연구실에서 같이 공부했다"며 개인적 인연을 소개했고, "생각이 좋을 뿐만 아니라 문장력과 영어 실력도 기가 찰 정도로 뛰어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편, 수강생들은 이 책을 강의실 공간을 제공하는 푸른역사에서 30% 할인된 가격으로 살 수 있었다.

교단 분열의 악영향

강의안으로 돌아와서 "한국교회 분열과 관련된 역사는 1950년대에 시작해서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에 대한 양면적인 성격이 있다. 분열을 통해 여러 교회와 교파가 생겨서 양적 성장에 도움이 되었다는 측면이 있고, 교회의 무질서와 생존경쟁이 치열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는 측면도 있다. (교회 분열은) 지도자들의 타락과 교회 전체의 질적 성숙에 전혀 도움되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교단에서 제한 두면서 엄격하게 목회자 관리를 한다면, 함부로 떠벌리지 않는다. 교단이 워낙 많다 보니까 통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는 것은 교단 분열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며 긴 서언으로 강의를 열었다.

과연 그러한 교단 분열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50~60년대 교회들의 정황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해방 직후 교파별로 전개된 각 교단의 재건 운동은 1950년대로 접어들면서 교단의 분열로 귀결되었다. 한국교회의 최대 교파로 자리 잡아 온 장로교는 1950년대에만 세 차례에 걸친 대분열을 경험했고, 감리교 역시 세 차례의 분열과 통합의 과정을 겪었다. 침례교나 성결교 같은 교파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시기 교회 분열 요인들은 해방 후 신사참배 회개 문제를 포함한 교회 안의 일제 잔재 청산 문제, 지역적 배경과 인맥, 신학 노선의 차이, 국외 교회 및 선교부와의 관계, 교권 다툼 등으로 다양했다. 장로교와 감리교의 분포 지역을 알게 되면 분열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외국에서 들어오기 훨씬 전에 지역과 교단에 의해서 분열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한국 기독교가 사랑의 메시지가 아닌 분열의 메시지를 먼저 준 것이 아니냐는 반성을 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교단 분열의 역사 제대로 알아야

'기독'교 장로회, '예수'교 장로회로 분열되는 것을 보고 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서는 예수와 그리스도가 싸우고 있다"며 비아냥거릴 정도로, 한국교회의 분열사에 대한 다툼은 떳떳하지 못하다. 요즘에도 끊임없이 이권 다툼으로 싸우고 있는 현실 때문인지 강의실 분위기는 침울했다. 신학적인 견해 차이도 아닌 자리 욕심과 명예욕으로 똘똘 뭉친 지도자들이 대의명분을 핑계 삼아 지금도 분열을 꾀하고 있을 것 같은 현실에 가슴이 아팠다. 아프려면 강하게 아파야 한다. 그래야 치유하려는 힘과 의지에 탄력이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분열에 대한 역사를 더 깊숙이 들여다보았다.

 

장로교 최초의 교회 분열이 시작된 곳은 경남노회였다. 이에 이 장로는 "맨 늦게까지 불교적, 유교적 잔재가 있는 곳이 경상도였다.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도 가장 보수적 성격을 띤 지역이다. 신사참배 투쟁과 같은 일은 보수적이 아니면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재건될 당시 노회 안에는 세 부류가 있었다. 소수의 출옥 성도들, 적극 친일 활동을 했던 일부 목사들, 일제 강요로 소극적으로 신사참배를 했던 대다수 사람들. 두 번째 부류에 속한 목사 중 대표적 인물은 김길창 목사다. 그가 세운 대학교도 있는데, 무슨 대학인지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 '명예훼손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을 뿐. 또한 "수완 좋은 사람들이 있다. 여기 붙고 저기 붙고 하는…"이라며 권력에 빌붙어 이권을 챙기는 이들에 대해 쏘아붙였고, 나아가 "대통령의 무릎까지 꿇게 하는 목사들도 있다"며 최근까지도 유능한(?) 활동을 하는 목사들에게 일침을 가했다.

한편 신사참배를 적극 반대했던 주남선 목사의 사례도 들려주었다. 주 목사는 신학이 옳아야 교회의 순결성도 지킬 수 있다고 하여 출옥 후에 신학교를 새로 설립했다. 또한, 박윤선 목사는 "교회사적으로 한국인으로서 신구약 66권 주석을 최초로 낸 인물이다. 성경 관련한 다국어에 능통했고, 풍부한 신학계 정보를 풀어냈다"고 극찬했다.

이후 신학교 문제를 두고 싸움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1948년 12월 마산 문창교회에서 개최된 경남노회 제50회 정기노회에서 노회 도중 한 사람이 갑자기 일어나 일제 말 신도 의례를 했다고 고백하여 노회장이 혼란에 휩싸이자, 한상동이 그 의례의 동원 책임자였던 김길창의 목사직 제명을 제안했다. 이는 노회 분열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목사의 제명 건의한 사건에 대해서 이 장로는 "이렇게 해서는 안 되는데, 너무 극단적으로 나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 대목에서 이 장로는 잠시 강의안 슬라이드를 넘기는 리모컨을 내려놓고 성토하듯 말했다. "내가 고신파 사람으로서 미움을 많이 받고 있다. 이유 가운데 하나가, 분열 문제(에 대한 내 입장) 때문이다. 신사참배 반대를 총회가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를 지켰다는 말에는 반대한다. 죽었어야 했다.

 

그렇게 해야 부활 같은 새로운 생명이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고신파는 그렇게 안 했다. 한국교회 백 수십 개 교단의 첫 분열이 고신이다. 명분은 좋았지만, 그 명분으로 이후에 분열이 계속되었다. 그 이후에 다른 교단들도 명분만 있다면 분열했다. 한국교회 타락이 분열과 관련 있다면 고신파에 책임이 있다. 나는 아직도 고신파 교회에 나가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생각한다"고 심정을 쏟아냈다.

다양한 경험과 역사의 소소한 뒷이야기 들려줘

다시 강의로 돌아와 '조선신학교 학생들의 진정 사건과 김재준 교수의 진정서 제출' 대목에서 김재준 교수의 사진이 나오자 그의 학력을 술술 읊었다. 언젠가 한 번 만나서 이야기 나누었다고 하면서. 이 장로의 회고를 따르면 김재준은 "프린스턴 (다닐 때)까지는 근대적 신학(고등비평 포함한 신학 사조)이 아니었다. 그때까지 주로 매이첸 강의를 들었던 것으로 알 수 있다.

 

이후 피츠버그로 가서 근대적 신학을 공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면 박형룡 교수는 김재준과 같은 프린스턴신학교를 나온 후에 서든 뱁티스트대학교로 가서 보수적 신학을 하게 된 것이었다. 박 교수의 <변증학>이라는 책은 "(읽어 봤더니,) 20~30년대 보수주의 신학 입장에서 근대주의 신학을 비판적으로 잘 평가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이처럼 이 장로의 넓은 경륜과 다양한 인맥에 대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어서 강의의 정점에서 한국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분열로 통합과 합동의 분열을 다루었다. 고신파와 기독교장로회가 분립하였지만, 소수에 불과했고, 대부분 장로교회는 여전히 기존의 교단에 남아 있었다. 이들은 고신이나 기장과의 대결 과정에서는 입장을 같이했지만, 두 집단이 떨어져 나간 이후에는 분열의 조짐을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한국 기독교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대분열을 초래했다.

이 분열 과정에는 세계교회협의회 가입 문제가 근원이었다. 교회 연합과 깊은 교제의 목적으로 가입하려고 했지만, WCC에 공산주의 국가의 교회들도 참여했던 것이 문제였다. 전쟁을 경험했던 이들은 WCC에 가입하면 용공(공산주의를 용납)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국회의원들도 120여 명이나 WCC에 굉장히 비판적이었다. 결국, 협력하되 (단일 교회를 목표로 하는) 연합은 안 되고, 성도의 교제 측면에서만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에큐메니컬 운동 지지자와 반대자의 입장을 절충한 것이었다.

그러나 세계교회협의회에 대한 양측의 견해 차이는 시간이 갈수록 점차 벌어졌다. 이에 대해 이 장로는 "이 문제만 따로 있었다면 교회 분열의 원인이 되지 않는다. 이 문제가 교회 내의 다른 문제와 맞물려서 하나의 요인이 되어 폭발하게 된 것이 통합과 합동의 분열이다"며 긴 분열의 내막을 요약했다.

교단 분열사와 삼박자 구원에 대한 일갈

나아가 "합동과 통합이 뭐가 다릅니까?"라며 우스개 질문을 던졌다. 이름도 비슷하고 내용도 비슷한데, 굳이 분열해야 했는지에 대한 반문이었다. 덧붙여 "통합 측이 학교나 기관을 더 많이 갖고 있다. 미션 스쿨이 다 통합 측으로 귀속되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문서, 인감도장, 서류들을 전부 통합 측이 가져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보충했다. 이런 야사(野史)는 "책에는 잘 안 나오는데, 그런 게 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며 덧붙였다. 한편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의 분열사는 시간 관계상 건너뛰었다. 강의안에 실린 도표로 짧게 정리하며 넘어갔다.

해방 이전 한국 기독교의 지형은 장로교와 감리교가 중심을 차지하고 그 주위에 성결교, 침례교, 구세군, 성공회, 복음교회 등 군소 교파, 그리고 안식교와 여호와의 증인 등 신흥 종파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방과 더불어 국외에서 들어온 새로운 교단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면서 기독교의 지형은 더욱 역동적인 모습을 취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교단으로는 오순절교회, 루터교, 나사렛교회, 퀘이커, 그리고 한국 주류 교회로부터 이단시 된 모르몬교 등이 있었다. 강의안에는 자세히 서술되어 있었지만, 이러한 내용에 대해서 이 장로는 "명칭이라도 알아두는 게 좋을 것 같다"며 간략하게 언급만 하고 넘어갔다.

덧붙여 순복음의 삼박자 구원에 대한 날카로운 평가를 아끼지 않았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복을 강조한다. 요한삼서 2절에 예수 잘 믿으면 돈 벌고, 건강하게 된다고 이야기하면 예수가 이야기한 복은 들어갈 자리가 없다. 팔복과 함께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되다(행 20:4)'는 말씀을 왜곡시키고 축소시킨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또한, "예수를 믿는 미끼로 삼는 것은 좋은데, 거기에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나올 수가 없다. (따라서 삼박자 복음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며 격양된 목소리로 일갈했다.

이 장로의 주장과 상이한 반론 질문 쏟아져

 

시간이 다 되어 강의는 끝났고, 여느 때와는 달리 수강생들의 열띤 질문이 쇄도했다. 내용도 이 장로의 역사적 해석과 입장과는 상이한 접근에 의한 질문이었다.

 

먼저 "장로님은 고신파의 분열을 비판했는데, 분열 자체는 어떻게 평가하나? 오히려 고신파가 보수적 교단의 주춧돌이 되기도 한 것인데, 긍정적으로 볼 수는 없나?"는 대학 신입생의 질문이었다.

이에 이 장로는 "그때는 (고신파를) 보수적이라 할 수 없었다. 한국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보수적 성향이 강하다. 다른 분들도 반대하는 사람 있었는데, 그들과 연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고 다 죽어 버렸다. 고신파 내에서의 명분으로만 존재했지, 한국교회에 확산시키려는 운동이 중단되었다. 이건 좋지 않다. 차라리 그때 죽었어야 했다. 그래야만 부활이 있다. 그때 신사참배 반대 투쟁을 확산시키기 위해 노력했는데, 고신이 분열되고 난 뒤에 신사참배 반대와 교회의 정화를 위한 운동이 결국 그 안에서 멈췄다"고 답했다.

또한 "한국교회 분열의 맨 꼭대기에 고신이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분열할 적에 명분은 좋았지만, 그 뒤의 사람들에게 명분만 있으면 분열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다는 분석이다. "죽은 사람이 부활하면서 한국교회 전체를 움직일 수 있는 운동이 일어났을 것"이라는 생각에 비판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 시점에서는 그렇게 볼 수 없었지만, 분열이 일어난 지 60년이 지난 시점에서 역사적으로 평가하니까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고 긴 안목으로 평가했고, "고신파 아닌 사람이 하면 욕으로 들리고, 고신파 내에서 하니까 욕이 아니고 비판이 될 수 있다. (나처럼) 고신 측에 속해 있으면서 비판하는 게 오히려 더 큰소리가 될 수 있다"며 마치 미리 준비라도 한 듯이 거침없이 풀어냈다.

두 번째는 신사참배에 대한 다른 평가의 가능성을 묻는 말이었다. 교회사를 전공하고 있는 대학원생은 "고등학교 시절 신사참배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영웅시하기도 했는데, 강의를 들어 보니 그분들이 분열의 원인이 된 것 같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신사참배를 끝까지 반대했던 사람들의 정신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나? 또한, 나름대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신사참배를 안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비겁하다고 여기는 것은 획일적인 시선인 것 같다"며 관련된 다양한 평가가 가능한지를 물었다.

이에 이 장로는 '신사참배 반대 투쟁을 순수하게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우상숭배 반대의 관점에서 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일제하라는 상황과 신사의 상징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해 보면 민족주의적 원인도 많다고 생각한다. 신사참배 강요한 것이 1930년대 황국 신민화 운동의 하나로 강조한 것이다. 더 나아가서 민족 말살 정책이었다. 신사참배 반대는 민족 말살 정책에 반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고 답했다.

 

역사를 공부하는 처지에서 신앙인으로서는 그분들이 신사참배를 우상숭배 관점에서 했지만,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민족 말살 정책에 반대한 행동이었을 수도 있다는 해석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민족주의적 경험 가진 사람들이 주로 신사참배 반대했다"고 덧붙였다. 삼일운동에 앞장섰던 주남선 목사와 민족 운동을 하기 위해 예수를 믿었다고 말했던 한남동 목사를 예로 들었다. 김구 선생도 1903년에 기독교로 들어왔는데, 독립운동하기 위함이었다고 설명했다.

마지막 질문은 교회사의 숨은 주역들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직장인이라고 밝힌 한 수강생은 "신사참배 결정 이후 소극적 반대파 중에 제도권 교회에서 이탈해서 교회사에서 잊힌 사람들도 많은데, 그분들에 대해 접근할 수 있는 자료나 추천할 수 있는 문건 있나?"고 요구했다.

이에 이 장로는 "그런 자료를 찾기 위해 노력 많이 한다. 반대한 사람 중에 적극적으로 못 하니까 아예 숨어 버린 사람도 많다. 하지만 (대외적으로) 투쟁을 안 했기 때문에 기록을 남긴 게 별로 없다. 또한, 해방 직후 신사참배 반대하다가 순교한 분이 50명이 된다는 말이 구전되고 있는데, 그분들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25명도 못 찾았다. 50명 순교설이 과장되었거나 기록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신사참배 문제로 전공하는 학자도 있다. 더는 문헌을 가지고 찾을 수가 없는 실정이다. 자료 있으면 제공해 달라"고 답했고, "역사를 공부하는데 자료를 보관하지 않고, 전쟁 거치면서 자료를 불태우고, 근대화 바람이 불면서 소중한 자료들이 너무 많이 망실되어 버렸다"며 사료의 부족함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역사의 중심은 나다 = 교회사의 중심은 우리다

 

기독청년아카데미 사무국 정인곤 간사는 오늘 강의를 마무리하면서 "신앙의 선배 중에 뜻이 있는 분들이 없지 않았는데, 총회 같은 집단적 단위에서는 뜻을 세우기보다 변절의 역사가 훨씬 많았다. 교단 분열을 공부하면서는 부끄럽다"며 강의 소감을 밝혔고, "20년 후에는 우리가 장로님께 공부했다는 이 시간이 중요한 기억으로 남고, 증언해야 할 때가 오지 않을까. 오늘날의 교회 상황은 우리가 증언해야 할 현실이다. 연구자들은 자료를 찾아가며 연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을 잘 증언해야겠다"며 역사 증언의 책임을 독려했다.

이 장로도 강의 서두에 '역사의 중심은 나'라는 화두를 던진 것처럼 기독 청년들 자신이 교회사의 중심이라 여기며, 주체적이고 책임감 있는 신앙생활에 대한 도전을 던졌다. <역사의 중심은 나다>는 책과 이 장로의 강의에서 공히 "공동체의 변화와 발전을 이해하고 더욱 나은 나의 삶을 위한 힘은 오직 역사관에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바른 역사관을 세우기 위해서, 나아가 하나님나라의 역사 진보를 추구하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곰곰이 생각할 수 있었던 강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