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05-30 11:57
기독교 타락 부추기는 저급한 구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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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2,517  

기독교 타락 부추기는 저급한 구원론 

 

'구원론'은 메가처치 신학 중 반드시 짚어야 할 부분이다. 사실 구원론은 가장 강력한 추진력을 갖는 신학이다. 신앙생활이든 종교 생활이든,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추진력은 바로 ‘구원에 대한 관심’일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구원론을 다룰 때는 대단히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른 신학과는 다르게 대단히 민감한 반응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 개혁이 그토록 폭발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개혁가들이 구원의 문제를 정면으로 건드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구원에 대한 가르침이 문제가 있을 경우 기독교의 계시와 예수를 따르는 삶은 심각하게 왜곡될 수 있으므로 부득이 구원에 관한 교리를 점검하지 않을 수 없다.
 

출애굽기에 나타난 구원의 삼중적 의미

성서는 하나님을 크게 두 가지 이유로 칭송하고 있다. 하나는 창조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구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창조의 하나님은 창세기에 나오고, 구원의 하나님은 출애굽기에 잘 나온다. 출애굽기의 구원 이야기는 구약과 신약을 망라하는 전체 구원 이야기의 원형(archetype)이다. 때문에 출애굽기의 구원 이야기는 신약의 구원론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를 제공한다. 따라서 구원론을 논할 때 출애굽기의 구원 이야기를 먼저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출애굽기는 애굽에서 노예로 고생하던 히브리 민족을 야훼께서 당신의 종, 모세를 보내시어 구원하시는 구원의 드라마를 수록하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출애굽기의 이 구원 이야기 속에 세 가지 차원의 구원이 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첫째는 애굽을 탈출하는 구원이요, 둘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계약을 맺는 구원이요, 셋째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가는 구원이다. 첫째 구원을 '곤경으로부터의 구원'이라고 한다면, 둘째 구원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발탁되는 구원'이라고 할 것이고, 셋째 구원은 '안식에 들어가는 구원'이라고 할 것이다.

 

출애굽기에서, 좀 더 넓게 말하면 모세오경 전체에서 이 세 가지 차원의 구원은 서로 맞물려 돌아가며 하나로 얽혀 웅장한 구원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구원의 각각의 차원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 차원은 구분된다. 구분될 뿐만 아니라 서로 비교되기도 하다. 서로 비교된다면 이런 질문이 가능할 것이다. 구원의 삼중적 차원 중에서 가장 중요한 차원은 무엇일까?


노예 생활로부터의 구원…하나님의 백성으로 발탁되는 구원

먼저 첫 번째와 두 번째 차원을 비교해보자. 첫 번째 차원은 애굽의 노예 생활로부터의 구원이고, 두 번째 차원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발탁되는 구원이다. 이 둘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

 

모세가 바로를 맨 처음 찾아가 히브리 민족을 내놓으라고 할 때 그가 한 말을 들어보자.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나의 절기를 지켜야 한다’ 하셨습니다”(출 5:1). 다시 모세는 바로에게 이렇게 청원한다. “우리가 광야로 사흘 길을 가서 우리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십시오”(출 5:3).

 

모세에 따르면 히브리 민족이 애굽을 나가야 하는 이유는 광야에서 야훼의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다. 후자가 전자의 목적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야훼께서는 히브리 민족을 단지 곤경으로부터 건져 주실 목적으로 출애굽시키신 것이 아니라 야훼의 신민(臣民)을 세우실 목적으로, 그러니까 구원의 두 번째 차원을 위해서 출애굽 사건을 일으키신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을 ‘고생 끝, 행복 시작’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러니 광야의 고난이 이해될 리 만무하다. 출(出)애굽은 입(入)광야다. 애굽의 곤경으로부터의 구원임과 동시에 광야의 곤경으로의 진입이다. 그러니까 ‘고생 끝, 행복 시작’이 아니라 ‘고생 끝, 새로운 고생 시작!’인 셈이다.

 

새로운 고생은 이전 고생보다 결코 못하지 않다. 어쩌면 훨씬 더 가혹하다. “차라리, 우리가 이집트 땅, 거기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배불리 음식을 먹던 그 때에, 누가 우리를 주의 손에 넘겨주어서 죽게 했더라면, 더 좋을 뻔하였다. 그런데 너희들은 지금,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나와서, 이 모든 회중을 다 굶어 죽게 하고 있다”(출 16:3)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불평은 절대로 과장이 아니다. 출애굽의 구원 사건은 단순히 곤경으로부터의 구원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출애굽의 목적은 시내산 계약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으로 발탁되는 구원을 목적으로 한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발탁되는 구원…안식으로 들어가는 구원

그렇다면 구원의 두 번째 차원과 세 번째 차원을 비교해보자. 하나님의 백성으로 발탁되는 구원과 안식으로 들어가는 구원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 혹시 안식으로 들어가는 구원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발탁되는 구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안식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시내산 계약을 맺으신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전자가 후자의 목적은 아닐까? 아니다! 안식으로 들어가는 구원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발탁된 구원의 목적이 아니라 부산물(by-product)일 따름이다.

 

출애굽기 32-33장을 보면 이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의 세 번째 차원이 두 번째 차원의 목적인 줄 알았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복락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자신들을 택하신 줄로 안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안식을 얻는 구원을 출애굽 사건의 주목적으로 여겼다는 말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완전히 오해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복락의 땅으로 인도해주실 것을 기대했기 때문에 하나님과 시내산 계약을 체결했다. 수단과 목적이 뒤바뀐 셈이다. 하나님의 본 의도는 시내산 계약을 맺고 언약에 충실하면 안식을 허락해주신다는 것이었는데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본심이 드러난 것은 모세의 실종 때였다. 시내산 계약을 중개한 뒤 모세는 시내산으로 올라간 뒤 도무지 함흥차사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에게 이렇게 요구한다.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 주십시오”(출 32:1). 이들의 말 속에서 하나님은 '인도할 신'으로 전락한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있어서 주목적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 목적을 이루는 수단에 불과했다. 지금 그들이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가이드였다. 아론은 그들의 요구대로 이스라엘의 가이드(guide)를 금송아지 형상으로 근사하게 만들어낸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 금송아지의 이름이 ‘야훼’였다는 사실이다(출 32:4-5).

 

'가이드를 원한다면 가이드를 보내주마'

이것은 하나님의 자존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낸다. 야훼가 순식간에 송아지의 탈을 쓴 웨이터, 벨보이, 혹은 여행 가이드로 전락한 셈이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당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모조리 쓸어버리고자 한다. 불같은 진노에 휩싸인 하나님을 진정시킨 이는 다름 아닌 모세였다. 모세 덕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멸을 겨우 면했다.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분은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제안하신다. “내가 한 천사를 보낼 터이니, 그가 너를 인도할 것이다.…너희는 이제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않겠다”(출 33:2-3). "가이드를 원한다면 가이드를 보내주마" 하는 말씀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구원의 두 차원이 날카롭게 비교되고 있다. 복락의 땅에 들어가는 구원의 세 번째 차원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시는 구원의 두 번째 차원 말이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구원의 두 번째 차원이 없다면 유토피아는 무의미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로소 이 사실을 깨닫는다. “백성은 이렇듯 참담한 말씀을 듣고 통곡하였다”(출 33:4). 옳다. 통곡할 일이다.

 

신약을 살아가는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천국이라는 유토피아에 들어가는 것이 우리 신앙의 주목적이 아니라는 말이다. 만일 천국 가는 것이 신앙의 주목적이 되는 순간 예수는 천국행 가이드로 전락하고 만다. 황금 길이 깔리고 수정 같은 맑은 물이 흐르는 새 예루살렘성이라 하더라도 그곳에 예수가 안 계시고, 하나님이 함께 가시지 않는다면 어찌 그곳이 천국일 수 있으랴.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을 선물 받다

구원의 중심 차원이 두 번째 차원이라고 한다면, 이 구원의 두 번째 차원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앞서 말한 대로 두 번째 구원의 차원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발탁되는 구원'이다. 이것은 출애굽기 19장부터 나오는 시내산 계약 체결 사건에 잘 나타나 있다.

 

시내산에서 야훼와 이스라엘은 계약을 통해 특별한 관계로 묶이게 된다. 이스라엘은 세상의 허다한 민족 중에서 유일하게 야훼의 백성으로 선발된다. 그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무관한 자들이었다. 최소한 집단적으로 말이다. 그러나 계약 체결 이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보물’이 되며,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이 되고,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었다(출 19:5-6). 그리고 야훼는 이제부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셨다.


야훼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셨기 때문에 이제 야훼는 더 이상 하늘에 계시거나 흑암 중에 계시거나 저 멀리 산 위에 계시는 분이 아니다. 야훼는 이스라엘 백성 ‘한복판’에 계신다. 들락날락거리시지도 않는다. 야훼는 이스라엘 백성 한가운데로 이사 들어오신다. 손님으로 잠깐 방문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예 들어와 사신다.

 

그러자니 하나님의 집이 필요하다. 그래서 시내산 계약 체결 직후 성막을 만들라는 주문이 모세에게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성막·성전은 이스라엘 백성 안에 지어진 야훼의 아파트로서, 야훼께서 이스라엘 백성 한가운데 거주하신다는 극적인 표지다. 바로 이것이 구원이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 이것이 구원의 진수다! 다른 말로 구원의 핵심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얻었다는 것에 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선물로 받았다. 두 번째 구원의 차원에서 구원의 중심 내용은 결국 '하나님 자신'이다.


노비 출신의 여인, 이스라엘이 야훼의 신부가 되다.

이 사건 이후로 야훼는 이스라엘을 자신의 ‘마누라’로 여기신다. 그러니까 시내산 언약은 실상 혼인 언약이었던 셈이다. 신부는 얼마 전까지 강대국 애굽에 짓눌려 종살이하는 비천한 민족, 히브리인들이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막일을 전전하던 불학무식하고, 비열하고, 배신을 밥 먹듯이 하던 발톱에 낀 때만도 못한 존재, 하비루! 그런 그녀가 시집을 갔는데, 그녀의 신랑은 누군가? 만군의 야훼 하나님이시다! 신데렐라 이야기나 영화 <프리티 우먼>, 드라마 <파리의 연인>, 그 어느 것도 이것만큼 극적이지 못하다.

 

창녀 출신 테오도라가 순식간에 비잔틴 제국의 황후가 된 것처럼, 길거리 여인 에바 페론이 아르헨티나의 국모이자 성녀가 된 것처럼, 노비 출신의 여인, 이스라엘이 야훼의 신부가 된다. 이 극적인 드라마가 바로 토라의 구원 이야기의 핵심이다. 그러니까 두 번째 구원의 차원에서 볼 때 구원이란 '극적인 신분 상승'을 의미한다.

 

추악한 옛 생활로부터의 구원

한 가지 더 있다. 창녀가 황후가 된 것만으로 온전하지 않다. 창녀는 이제 진짜 황후가 되어야 한다. 출신이 창녀였을지라도 황후가 된 뒤에도 밤마다 궁을 빠져 나가 윤락가를 전전하며 쾌락을 즐길 수는 없는 노릇. 이제 그녀는 옛 창녀 생활은 버리고, 황후로서의 생활에 익숙해져야 한다. 시내산 계약에 이 ‘새로운 삶’을 요구하는 율법, 곧 십계명과 토라가 함께 주어진 이유는 이 때문이다.

 

“이제 너희가 정말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출 19:5). 이것은 다른 말로, “짐의 황후다운 품위를 지키시오”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두 번째 구원의 차원에서 볼 때 결국 구원이란 추악한 '옛 생활로부터의 구원'인 셈이다. 

 

테오도라가 위대한 황후로 기억되는 이유는 그녀가 단순히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결혼을 했기 때문이 아니다. 놀라울 정도의 지혜와 용기로써 남편을 보좌하여 비잔틴 제국 1000년의 역사 중 최고 전성기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바로 이것이었다. 최하층 출신의 히브리 민족을 온전한 왕의 신민(臣民)으로, 하나님의 신민(神民)이자 성민(聖民)으로, 그리고 야훼의 황후(皇后)로 삼아 그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이로써 야훼의 구원은 완성된다. 따라서 본래 율법, 곧 토라는 이스라엘을 억압하는 족쇄가 아니라 그들을 구원하는 방편이었던 것이다. 이상이 구원의 두 번째 차원의 대략이다. 이러한 구원의 삼중적 차원은 구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다. 결국 구원 사건은 하나다.

 

구원 이야기는 곤경으로부터의 구원에서 시작하여, 야훼의 신민으로의 발탁을 거쳐, 약속의 땅의 진입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하나의 이야기(one narrative)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 이야기의 절정은 야훼의 신민으로 발탁되는 것이다. 구원의 두 번째 차원, 곧 야훼의 신민으로의 발탁은 첫 번째 차원, 곧 곤경으로부터의 구원의 목적이다.

 

그리고 구원의 세 번째 차원, 곧 약속의 땅에 진입하는 것은 두 번째 차원, 곧 야훼의 신민으로의 삶에 대한 자연스러운 부산물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야훼의 신민으로의 발탁과 신민으로서의 새로운 삶'이 결국 구약의 구원 이야기의 중심이다.

 허호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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