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06-21 10:52
[1]기독교는 어떻게 유대교로부터 분리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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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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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어떻게 유대교로부터 분리 되었나

                             유대교 종파들 - 신학적 배경 

 


신구약 중간기에 유대교는 종교적 민주화를 이룩했다. 포로기 이전 하나님의 말씀은 예언자들을 통해 해석되거나 선포되었고, 토라 연구와 정결한 생활방식 또한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나 포로기 이후 더 이상 예언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수 없게 되면서 유대인들은 기록된 말씀-토라에 집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곳곳에 세워진 회당을 통해 토라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면서 일반인들도 성서 연구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성전 영역과 성직자들에게 제한되던 정결 규례가 유대 땅과 유대 사회 전체로 확대 적용되었다. 이 시기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예전처럼 수동적인 위치에 머물렀지만 토라의 실천을 통해 유대인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자발적 노력들은 종파 운동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종파들이 표준적이고 단일한 형태의 유대교를 지향하며 각축전을 벌였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종파들은 각자 자신들의 믿는 바를 실천에 옮기는데 힘썼으며, 주후 70년 성전 파괴이후 바리새파 유대교가 대중 속에서 일반화되기까지 공존했다. 주후 1세기유대 사회에서 기독교 또한 나사렛파로 불러지는 하나의 종파였다. 따라서 유대교 종파에 대한 연구는 초기 기독교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결정적 시각을 제공해준다. 물론 종파들은 본토 유대 사회에서 시작되어 꽃을 피웠고 해외에서는 활발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어차피 해외에서는 성전 제도 뿐 아니라 정결 규정조차 본토에서처럼 제대로 지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종파운동의 배경


1. 종파의 정의

유대교 역사 연구가 샤이 코헨의 정의에 의하면 종파란 ‘좀 더 큰 집단으로부터 이탈하고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때문에 좀 더 큰 집단의 이상을 자신들만이 구현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소규모의 조직된 집단’이다. 다시 말해서 종파(sect)는 아직 대규모 교단(denomination)이 되지 못한 채 조직화 되어 있는 배타적 종교 집단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특징은 조직으로 들어온 구성원들과 일반인들 사이의 경계를 긋고 교류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종파에 속하지 않은 사람과 분리되기 위해 사막이나 외딴 지역에 집단 거주하는 방식을 취할 수도 있고, 도시나 마을에 그냥 살면서 비종파인들과 교제만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들은 종파에 속한 구성원들에게 의로운 자, 선택된 자, 순수한 자 등의 용어를 적용하여 우월감을 갖게 한다. 반대로 일반인들을 사악한 자, 저주받은 자(요 7:47-49), 어둠의 아들들, 박해하는 자 등의 용어로 지칭한다. 이런 용어의 사용은 일반 종교인들로부터의 분리와 구성원만의 배타적 교제를 영구적인 것이 되게 한다. 한마디로 종파주의자들은 분리주의자들이다.

그런데 종파(sect)라는 말과 함께 생각해야 할 단어는 이단(heresy)이다. 이단으로 번역된 헬라어 하이레시스(ai`re,sij)는 신약 성경에서 네 번 나온다(행 24:5,14, 갈 5:20, 벧후 2:1). 그런데 교부들에 의해 이 단어가 이단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 전에는 단순히 분파 혹은 사상적 학파를 가리켰던 것으로 보인다. 사도행전 26:5에서 바리새파가 “엄한 파(하이레시스)”로 번역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주후 90년대에 완성된 글에서 요세푸스가 유대교 종파들을 소개하면서 ‘사상적 학파(하이레시스)’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세푸스가 종파들을 가리키는 단어로 하이레시스를 사용한 이유가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 하더라도 정죄의 의미로 사용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신구약 중간기 유대교는 정통(옳은 것) 혹은 표준(보편적인 것)의 개념이 없는 채 다양한 모습을 모두 포용했기 때문이다. 또 그런 토양 속에서 기독교가 탄생하고 자라게 되었던 것이다.


2. 역사적 배경

종파 운동은 에스라 느헤미야의 개혁운동으로부터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전 537년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브네이 하골라)들은 그 땅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암 하아레츠)의 성전건축 참여제의를 일축했다. 그것은 혼혈이든 아니든 그 땅 백성들(암 하아레츠)들이 유대 사회에 들어올 수 없게 된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성전 재건을 독려했던 학개는 하나님의 언약에 순종하는 모두를 남은 백성(쉐에리트 하암)으로 취급하고 있다(2:2). 다시 말해서 성전을 재건하지 않는 자들은 경멸조로 ‘이 백성’으로 치부하며(1:2), 성전 재건에 순종하는 자들은 남은 모든 백성(1:14)으로 간주한다. 마침내 학개는 성전 재건에 참여하는 유대인 모두를 ‘이 땅의 모든 백성(콜 암 하아레츠)’으로 부르며(2:4) 사로 잡혔던 자의 자손들(브네이 하골라)과 땅의 백성들(암 하아레츠)을 하나로 간주한다. 그들은 함께 성전을 재건하고 유월절도 지켰다(에 6:21). 그러나 주전 458년 포로에서 돌아온 에스라는 사로 잡혔던 자의 후손들이 국제결혼을 통해 혈통의 순수성을 잃어버린 것을 보고 개혁을 단행했다. 이미 유대사회의 국제결혼 역사가 80년이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사장과 레위인일지라도 유대사회로부터 추방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그는 유대사회를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들(브네이 하골라)’로 불렀다(에 10:7,16). 에스라는 일반 유대인의 결혼 기준을 제사장들에게 요구하는 수준 이상으로 높였다. 그리고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전유물이었던 토라를 백성들이 직접 이해할 수 있도록 힘썼다. 그가 토라를 읽고 해석해주었던 장소도 성전 마당이 아닌 수문 앞 광장이었다. 주전 444년에 돌아온 느헤미야는 에스라의 결혼 정책에 토라에서 요구한 십일조와 제물에 관한 규정을 보강했다. 그는 토라에 재 헌신한 사람들을 이스라엘로 부르고 있다(느 9:1, 10:1-39). 중요한 것은 에스라 느헤미야가 혈통적인 유대인들일지라도 토라를 지키지 않을 경우 이방인과 같이 취급하기로 한 것이다(에 6:21, 느 10:28). 이것은 앞으로 진정한 유대인이 되기 위해 토라를 지켜야 하며, 자신을 오염된 사회로부터 분리시켜야 하는 분파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진정한 유대인-하나님의 백성 논쟁은 마카비 항쟁으로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소위 하시딤(경건한 자들)으로 불러지는 유대인들은 성전을 제우스신전으로 대체하고, 토라를 불태우며, 할례와 안식일과 정결음식을 금지시키는 안티오쿠스 IV및 그를 추종하는 유대인들에 대항하여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러나 안식일에도 전투를 고집하는 마카비 형제들의 주장 때문에 일부 하시딤들은 군사적 행동을 중지하고 은둔하기 시작했다. 그들 중 일부는 요단 강 동편 베레아 지역으로 물러나 에세네 혹은 세례 공동체를 형성했고, 멀리 다메섹으로까지 가서 경건주의 유대인 공동체를 형성했다. 하시딤 가운데 마카비의 군사 조직에서 탈퇴한 일부는 바리새파라는 이름으로 불러지며 토라의 해석과 실천에 몰두했다. 하시딤이 아닌 유대인들 가운데는 사두개파와 셀롯파(열심당)이 있었다. 사두개파는 마카비 가문에서 대제사장직을 탈취하므로 밀려난 사독 계열 제사장 가운데 헬라파 유대인들이다. 그들은 마카비 가문에 맞서 싸우는 대신 마카비 가문의 정치적 헬라화에 동반자가 되기를 원했다. 귀족 계층을 형성했던 그들은 서민 계층 위주의 바리새파를 견제하므로 반사이익을 누렸다. 사두개파와 정반대의 길을 걸었던 셀롯파는 외세와 외세 협력자들에 맞서 무력 항쟁을 시도하며 정치적 불안정기에 주로 활약했다. 요세푸스는 네 개의 이들 종파 가운데 바리새, 사두개, 에세네가 이미 주전 요나단의 통치시기에 있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실제로 종파운동은 훨씬 전에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3. 신학적 배경과 핵심 쟁점

마카비 항쟁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시작된 종파운동은 이 시기에 기록된 묵시문학과 종파들의 문헌에서 그 신학적 배경과 핵심 쟁점들을 찾을 수 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신구약 중간기의 사회 분위기는 포로기 이전의 것과 사뭇 달랐다. 예언자를 통해서 알 수 있었던 야훼의 명령은 토라 읽기를 통해 이해되었고, 성직자의 전유물이던 토라는 회당을 통해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확산되었다. 따라서 누구나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실천할 수 있게 되었고, 개인의 책임 또한 강조되었다. 일찍이 에스겔은 혈통을 통한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의 시대가 끝나고 선악 간 개인의 행위에 따라 상벌이 시행될 것으로 예언했었다(겔 18:19-35, 출 20:5중-6하). 여기에 이방인들의 개종과 혼혈족들의 유대 사회 진입도 개인의 책임이 강조되는 것에 일조를 했다. 유대 사회의 진정한 일원이 되기 위해서 아브라함의 혈통은 더 이상 필요충분조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따라서 토라의 실천 여부가 핵심 쟁점 가운데 하나가되었다. 그와 함께 어떤 토라가 진정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계명이냐 하는 것이 논쟁의 대상이었다. 사두개파는 성문 율법(토라 베크타브)만을 토라로 본 반면, 바리새파는 구전 율법(토라 베알페)까지 토라에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바리새파는 자신들만이 진정한 계명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비의 전승 방식으로 성문 토라의 해석을 강화시켰다. 


유대교 종파 운동의 신학적 배경 두 번째는 제 2 성전에 관한 것이다. 소위 스룹바벨의 성전은 이방 왕의 명령으로 지어졌으며, 낙성식 때 하나님의 임재를 확인할 만큼 세키나의 구름도 나타나지 않았다. 또한 그 성전은 안티오쿠스 IV와 폼페이우스가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므로 심각하게 권위가 손상되었다. 그리고 사독 계열만이 맡을 수 있는 대제사장 제도는 마카비 가문에 의해 탈취되었으며, 셀류오쿠스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발라스 왕에 의해 임명되었다가 이두메 출신 헤롯 왕과 로마 정부에 의해 임명되는 등의 제도로 고착되어 정통성을 의심받았다. 따라서 제사장 공동체를 형성했던 쿰란 에세네파는 사악한 제사장들이 드리는 제사가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을 만큼 오염된 것으로 보았다. 더구나 성전 제도를 장악한 사두개파가 최초에 사용했던 태음력은 일 년이 355, 354, 353일이 될 수도 있고, 19년에 일곱 번 들어가는 윤달 계산에 착오가 발생하기도 했다. 따라서 언제나 고정된 날짜에 절기를 지킬 수 있도록 일 년 364일의 태양력 사용을 주장했던 바리새파가 볼 때 문제가 많았다. 비록 바리새파가 성전 제도를 전면 부정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포함한 모든 유대인들이 제사장에게 요구되는 수준의 정결을 유지하도록 주장한 것은 성전 제도에 대한 불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갈 때 요구되었던 정결 목욕을 일상에서 요구한 것도 유대 땅 전역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성전과 같은 곳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리새인과 같은 정결을 유지하지 않는 자들과 악수하거나 함께 식사하는 것도 불결에 오염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들만의 식사공동체를 형성했던 것이다. 


신학적 배경 세 번째는 부활과 내세에 관한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선악에 대한 상벌이 현세에 시행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집트가 주전 1,000년경에 벌써 내세에 관한 가르침을 발전시킨 것과 대조적이다. 그런데 포로기와 헬레니즘 시대를 거치면서 현세적 보응에 대한 가르침은 회의적이 되었다. 예를 들어 마카비 항쟁에 참여했던 수많은 유대인들이 무참하게 살육 당했음에도 현실적인 보상은 없었다.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 사두개파와 에세네파 사이에 있던 바리새파는 부활과 내세 보상에 관한 가르침을 이 시기에 발전시켰다. 그리고 일부 묵시 문학도 이와 같은 관점에서 기록되었다. 그러나 에세네파는 하나님의 현세적 보응이 예정대로 시행될 것으로 믿었고, 사두개파는 현실은 인간의 의지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며, 내세도 부활도 예정도 운명도 없는 것으로 보았다. 


유대교의 종파들


제 2 성전 시대 유대교 종파들에 대해 요세푸스는 <유대고대사>에서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와 같은 사상적 학파가 있으며, 제 4의 철학파로서 열심당(셀롯인)이 있다고 소개했다. 물론 요세푸스는 헬라주의적인 로마 제국에 이 종파들을 철학적 관점에서 소개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가 바리새파를 스토아학파에 비교하고, 에세네파를 피타고라스학파에 비교한 것이 그 예가 된다. 이외에도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 필로가 쓴 <유대인을 위한 변증서>에 에세네파에 대한 기록이 있다. 물론 주후 2세기 이후 수집되기 시작한 랍비 문헌에는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온다. 쿰란에서 발굴된 문헌에는 에세네파의 사상과 삶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들어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신약 성서에는 에세네파에 대한 직접적 언급은 전혀 없고, 열심당에 대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중 한 사람 시몬이 그쪽 출신이었다고 말할 뿐이다(눅 6:15). 그러나 랍비 문헌보다 먼저 기록된 신약성서는 제 2 성전 시대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에 대해 풍부한 자료를 담고 있을 뿐 아니라 초기 기독교와 에세네파와의 신학적 공통점에 대해서도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요세푸스가 언급한 4대 종파 외에 다른 종파도 있었으며, 조직적 종파로 발전하지 않은 운동들도 있었다. 종파가 되기 위해서는 조직과 위계질서, 규칙, 입회절차, 신학적 입장 등이 분명해야 한다.


1. 바리새파


1)기원과 구성원 

바리새(פרושים)라는 이름은 “분리하다” 혹은 “떨어져 서다”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파라쉬(פרש)에서 파생되었다. 그들이 어디로부터 왜 떨어져 나왔는지 기원은 확실하지 않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마카비 항쟁 때 안식일 전투 문제로 등을 돌린 하시딤이었을 것으로 본다. 랍비 문헌에 의하면 대제사장 사독의 혈통으로서 마카비 가문이 아닌 의인 시몬이 바리새파의 시조이다. 이들을 최초로 언급하고 있는 마카비 상 7:13과 마카비 하 14:6에는 ‘경건한 유대인들의 단체’ ‘용감하고 율법에 온전히 헌신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단체’로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바리새파의 출현에는 에세네파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에세네파의 엄격한 정결 규정들과 성별을 위한 노력은 바리새파에서도 발견되며, 다메섹의 하시딤 공동체에 보내진 쿰란 공동체의 편지에서 에세네파의 조직이 바리새파의 조직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이 이를 말해준다. 또한 바리새파의 공동체였던 “하베로트”와 에세네파의 공동체였던 “야하드”가 비슷한 이름을 사용한다는 점도 그런 결론에 이르게 한다. 그런데 바리새파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시험 기간을 통과해야 했다. 요세푸스가 에세네파와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의 규정을 모두 살펴본 다음 19세 때 바리새파에 입단했다고 하는 표현이 이를 말해준다. 입단 자원자는 시험 기간을 거쳐야 했으며, 공동체의 규칙을 모두 지키겠다는 맹세를 율법학자 앞에서 한 다음 입단했다. 바리새파 회원들이 지켜야 하는 규칙들은 주로 정결 규례, 십일조, 금요일 저녁 공동식사와 금식에 관한 것들이었다. 대부분 소도시 상공인들로 구성되었던 바리새파는 반드시 시골 사람이나 평민들만 입단하지 않았다. 예루살렘에도 “거룩한 공동체(하베로트)”라는 이름의 바리새 공동체가 있었고, 성전 제사장들 중 상당수가 바리새파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리고 많은 수의 율법학자들이 바리새파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모든 바리새인이 다 율법학자가 아니며, 모든 율법학자가 다 바리새인도 아니었다. 율법학자들 중에는 사두개파도 많았으며, 바리새인 중에는 율법학자가 아닌 사람들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바리새파 사람들이 율법 연구에 열심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헤롯 대왕 시절 바리새파의 숫자는 약 6,000 명이었다고 한다.


2) 신학 사상과 생활 방식 

요세푸스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은 영혼의 불멸과 부활을 믿으며, 예정과 자유의지 모두를 인정했다. 신약 성서도 바리새인들의 부활과 영생의 신학에 대해 같은 증언을 한다(행 23:6-9). 바리새파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구전 율법 즉, 조상들의 유전을 성문 율법과 같은 권위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요세푸스는 유대 고대사 13권 10:6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리새인들은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았으나 모세의 율법에 기록되지 않은, 이로 인해 사두개인들이 배척한 어떤 규정들을 백성들에게 전해주었다. 사두개인들은 단지 기록된 규정들만 타당한 것으로 간주해야 하고, 조상들이 전해준 것은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두 집단이 서로 논쟁을 하고 심각한 견해 차이를 보이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장로들의 유전을 성문 율법처럼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도다”(마 15:1-3, 6하)

복음서의 곳곳에는 바리새인들이 조상의 유전-안식일 규정, 정결 규정을 지키지 않은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을 비난하는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그것은 바리새인들이 정결 규정과 안식일 규정을 엄격히 지켰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도 바울은 과거에 바리새인으로 살았을 때 조상의 유전에 나오는 엄격한 규정대로 살았음을 자주 고백하고 있다(행 5:34, 빌 3:5-6). 바리새인들의 강조점을 요약하면 십일조, 안식일, 정결 규례 준수가 된다. 마 23에 나오는 설교에서 그리스도는 바리새인들의 이방인 개종이 오히려 위선자를 양산하며(13-15), 각종 맹세 규정의 경중이 뒤바뀌어 있고(16-22), 십일조 규정을 철저히 지키는 것만큼 율법의 근본정신에 충실하지 않으며(23), 정결 규정을 겉으로만 지켜 자기 위안을 삼는데 그친다고 비난했다(24-28). 그리고 결혼 제도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바리새인들과 관점을 달리한다. 바리새인들은 여자가 음식을 잘 못하거나, 심지어 남편이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선언하기만 해도 이혼이 성립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배우자의 부정이 아닌 어떤 문제도 이혼을 성립시킬 수 없다고 선언했다(마 5:31-32). 쿰란 공동체가 만든 나훔 주석에는 바리새인들을 가리키는 듯 ‘부드러운 것들을 찾는 사람들’이라는 묘사가 있다. 아마도 그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예정에 대해, 로마의 지배에 대해 그들이 중간적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붙여졌거나, 명예와 부와 종교적 권력을 함께 추구하는 그들의 엘리트주의 때문에 붙여졌을 것이다. 


3) 사회적 지위 

바리새파는 헤롯의 통치 이후 사회적 지위가 높아졌다. 헤롯이 하스몬 왕가 시절 수혜집단이었던 사두개파를 견제하기 위해 바리새파의 위상을 높여준 탓이다. 산헤드린 공회의 절반은 바리새파가 차지했으며, 성전 제도를 장악했던 사두개파였음에도 바리새파가 만든 규정대로 의식을 집행해야 했다. 예를 들면 성문 율법에 없는 초막절에 제단위에 물 붓는 의식은 바리새파의 규정을 따른 것이다. 그리고 요하난 벤 자카이는 성적 부정을 의심받는 여인에 관한 법(민수기 5장)과 암송아지의 목을 꺾는 법(신명기 21장)을 중지시켰다. 바리새파는 저명한 율법학자들 덕분에 토라에 정통한자들로 대중의 존경을 받았으며, 까다로운 규정 준수 때문에 경건한 자들로 인정받았다. 그리스도가 그들을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하는 자들로 비난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다(마 23:6-7). 그러나 그들은 하스몬 왕가의 얀네우스 통치 시절 800명이 십자가에 처형되었을 정도로 한 때 정치적 박해를 받기도 했다. 바리새파가 가지고 있던 이중성은 서민들로 구성된 종파이면서도 서민들에 대해 엄격주의 혹은 엘리트주의를 고수한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조상의 유전을 지키지 않는 암하아레츠와 자신들을 엄격히 구분하여 율법을 모르는 자들의 지도자로 행세했다. 그들은 서민 대중들이 율법을 모른다는 이유로 저주받은 백성이라고 여겼다(요 7:49). 바리새인들은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 4대 종파 중 유일하게 생존한 이들은 바리새파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은 채 명맥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갈릴리 티베리아로 진출하여 교세를 확장했기 때문에 갈릴리에 뿌리를 두고 있는 나사렛파와 경쟁관계가 되었다. 오늘날의 랍비 유대교는 바리새파 유대교의 후신이다. 신구약 중간기의 종파 가운데 바리새파가 대중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는 단적인 예로 농촌 지역을 포함 전국에서 정결 예식용 욕조가 300 여개나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정결 규례를 강조하던 바리새파의 영향으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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