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2-01-11 16:40
이슬람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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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6,676  
I. 이슬람 문화 

   세계여행을 하다보면 기독교나 불교, 힌두 문화권에서 이슬람 문화권으로 들어갈 때 눈에 띄게 현저한 몇가지 사실이 나타나게 된다. 그 첫째가 이슬람문화권에는 개짖는 소리나 개의그림자조차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동상이나 조각등을 찾아 볼 수가없다. 대신 마을마다 높이 솟은 돔과 첨탑위에 초생달 마크가 있고 새벽마다 확성기를 통해서 무슬림의 기도소리가 들린다.
   이슬람의 문화 이해의 대전제가 되어야 할 것은 모든 이슬람 국가가 신국(神國) 즉 신정국가(神政國家)라는 것이다. 국가와 국민과 종교가 떨어질 수 없는 관계 속에 있는 문화라는 점이다. 이슬람사회는 정치와 종교가 명확히 구분되지 아니한다. 중요한 정치적 결정은 호메이니옹과 같은 종교지도자가 결정한다. 이슬람의 신앙은 모든 분야의 사회조직과 이리저리 얽혀있다. 이슬람은 하나의 종교 공동체요 문명과 문화의 통합된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언어, 풍습, 역사 인종적 차이를 초월하는 다르-알-이슬람(dar – al – Islam)이라는 합성된 통일체, 즉 이슬람 세계를 다른 이교도 사회와는 확실히 구별이 되도록 구축하려고 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슬람문화의 특징은 영적이고 현실적이면서 강력한 종교적 특징으로 결합된 문화라는 점이다. 그들의 종교법을 “샤리하(Shariά)”라고 하는데, 이것은 단순히 종교에 국한된 교리나 법이 아니라 개인의 사생활은 물론 공적인 생활,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분야를 총망라하고 있다.

1. 정치

   이슬람 문화 내에서 정치적 특성을 든다면, 그것은 한마디로 이슬람교도들의 상징인 오른손에는 칼, 왼손에는 꾸란으로 상징되는 바와 같이 폭력적인 힘의 지배가 특징이다. 이슬람세계에서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암살과 테러를 자행하여 왔다.
   11세기 경에 하산에샤바흐는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암살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테러수법으로 아랍세계에서 큰 영향력을 주었다. 이슬람교의 정치 분파중의 하나인 이스마일리아파 소속인 그는 이란 북서부 지역인 알라무트 지역에서 밖이 보이지 아니하는 성과 같은 높은 집을 짓고 향락시설을 만들어 놓고 젊은 여자들에게 수면제를 먹인 후 이곳에 데려다가 한동안 쾌락을 즐긴 후 잠든 상태에서 다시 밖으로 내보냈다고 한다. 그는 이들에게 “그곳이야 말로 알라가 약속한 유일무이한 천국”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명령을 따르다 죽으면 그때는 영원히 그곳에 가서 머물게 된다고 했다.
   암살단은 샤바흐의 정치적 적들을 암살 시키는 것이야말로 알라의 뜻을 실행하는 그들의 신성한 종교적 의무로 여겼으며, 영원한 시간동안 항상 황홀감을 느낄 수 있는 천국에 가서 살기위해서는 기꺼이 자살공격을 자행할 수 있는 것이다. 중근동의 골칫거리였던 샤바흐 추종자들이 조직한 하사신조직은 1256년 징기스칸의 손자 훌라구가 이끈 몽골군에게 전멸당했다. 이 조직에 속한 암살 단원들은 작전 개시전에 대마초를 피웠기 때문에 중세 아랍어로 “대마초 흡연자를 하사신 또는 하시시인”이라고 하였다.
   이 “하사신”이란 말이 유럽에 건너가서 영어의 “암살”을 뜻하는 아사신네이션(assassination)이 되었다고 한다. 
   중세 사라센제국이 폭력과 포교를 동시에 진행했다는 뜻으로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꾸란”을 들고 어느 쪽을 받겠느냐고 하면서 이슬람교로 개종을 강요했다고 하나 그것은 지나친 왜곡이고 일부의 경향을 전체에 적용시킨 과장이라는 것이다. 하와리즈파의 한 지파인 아자리카파는 이교도는 물론 무슬림이라도 자기들의 교리대로 따르지 아니하면 죄인으로 간주해서 그 가족까지 죽였다고 하나 그들은 이슬람의 현재의 공동체와는 무관한 것이 오래전에 사라진 것이다. 오래전에 사라진 이들의 망령이 21세기로 오늘날 미국에서 대량 학살 테러로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슬람 세계의 주류 공동체와는 직접적 관련성은 없다. 아랍인들 대부분이 이런 테러행위를 지지하지 아니한다. 사라진 극단파의 교리가 되살아나고 있을 뿐이다.
   이슬람의 정치적 분파에는 오마야드 칼리프(Omayyad Caliph)파, 압바사이드 칼리프(Abbaside Caliph)파,  이스파니아 칼리프파, 파티마 칼리프파, 오트만 터어키 칼리프파등이 있다.
   오마야드 칼리프(Omyyad Caliph, 660-750 A.D.)파는 권력세습의 방법을 시작하고 무력에 의해서 북아프리카와 이스파니아 반도 전역을 장악하였다. 이들은 계속 북상하다가 프랑스의 뚜르(Tours) 혹은 포이띠얼스(Poitiers) 전투에서 챨스마르텔(Charles Martel)에게 732년에 패배하였다. 
   압바사이드 칼리프(Abbaside Caliph, 750-1258 A.D)파는 무하마드의 숙부 아불 압바스(Abul Abbas)가 시작하였다. 이들은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하였으며 하룬알라스치드(Harun-al-Raschid)를 포함하고 있다. 
   코르도바 칼리파(Cordova Caliph, 755-1236 A.D.)는 이스파니아에서 무르칼리프 (Moorish Caliph, 1238-1492 A.D.)파는 그라나다(Granada)에서, 파티마 칼리프 (Fatimite Caliph, 910-1171 A.D.)파는 애굽과 북아프리카에서 권세를 잡았다. 
   오트만 터키 칼리프(Ottoman Turks Caliph)파는 1299년에 일어나서 1453년에는 콘스탄티노플, 1517에는 애굽을 정복하였다. 이것이 600년간 이슬람세계의 주도적 역할을 감당해왔다. 1922년에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술탄(Sultan)이 앙골라(Angora)에서 터키 국민회의(National Assembly)에 의해서 폐위당했다. 

2. 언어, 과학, 예술, 건축, 문학

   이슬람은 독자적인 사막문화를 건설하면서 이를 세계화 시키며 보급하는데 성공하였다. 무엇보다도 이들이 사용하던 숫자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쓰이지 않는 곳이 없다. 우리는 이를 통상 아라비아 숫자라고 한다. (1, 2, 3, 4, 5, 6, 7, 8, 9, 10) 또 이 아라비아 숫자에 의한 10진법은 수학의 세계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체계의 기초가 되었다. 그들은 또한 사막에서 밤을 보내면서 밤하늘의 신비와 별들을 관찰하다 보니 천문학이 발달하였으며, 별을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펴나가다 보니 운문과 산문이 발달하였다. 낙타를 몰고 먼곳까지 다니며 장사를 하다 보니 무역학이 발달하였다. 먼 길을 다니다 보니 보고 듣고 느끼고 한 것을 이야기 형식으로 표현한 것이 산문이며, 운과 율에 맞춰서 압축한 것이 운문이다. 먼나라에 장사 나간 가족을 그리워하면서 기나긴 밤을 눈물과 한숨으로 지새우는 가운데 그리움과 상상력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문학으로 승화한 것이 아라비아의 문학이다.
   아라비아 사막의 뜨거운 기후에서 생성된 그들의 예술 또한 뜨겁다. 신비스럽고 현실의 세계를 초월한 내용이 많다. 왜냐하면 현실의 세계는 사막이며 잠시 머물기에도 부적합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라비아의 예술은 이 세상(this world)보다는 저세상(other world) 지향적이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성이 있는 말이 될 것이다.
   이슬람의 건축 양식 또한 매우 독특하다. 돔형식의 성전과 뾰족탑은 이슬람의 독특한 건축양식이다.
   그리고 아라비아의 연금술은 근대 화학의 시조다. 화약의 발명이라든가 약품의 제조에 있어서 아라비아는 선구적인 위치에 있었다.

3. 가족제도와 여성의 지위
   이슬람교에서 결혼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의무이다. 남자는 네사람 이상의 아내를 취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들이 선택하고 싶은 만큼의 많은 여인을 동거자로 소유할 수는 있다. 
   꾸란 제4장에서는 “남자가 여자보다 위에 있다”라고 했고, 꾸란 4:3에 근거하여 일부다처제가 합법화되고 있다. 또한 “여자는 남자의 경작지”라고 꾸란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경작 능력이 있는 만큼 얼마든지 경작하도록 되어있다. 이것은 아마도 이슬람의 초기 무하마드가 이슬람세력의 확장을 위한 인구 팽창 정책을 위해서 종족을 마음껏 번성시킬 것을 명령했기 때문이다.
   이슬람에서 결혼은 신성한 의무를 가지지 아니한다. 그들은 언제든지 또 어떠한 이유로든지 이혼할 수 있다. 그러나 여자는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이혼을 제기할 수 없다. 여인이 외출을 할 때는 반드시 얼굴 가리개를 해야 한다. 만일 가리개를 하지 아니한 상태에 있는 여인의 얼굴을 낯선 남자가 보았을 때 그 남자는 이 여인을 책임져야만 하는 것이다. 조혼과 다산의 고통 때문에 여성 자살율이 높다. 꾸란에 이혼에 관한 장이 있는데 남자쪽에서 “나는 너와 이혼한다”고 세번 외치면 여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이혼이 성립된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러한 여성의 지위가 매우 낮은 이슬람 문화권임에도 불구하고 파키스탄에서는 여성 수상이 나온다든지 소수의 특권층 여성들에 의한 여성 지위 향상을 위한 개혁이 시도되고 있다.


II. 이슬람 세계를 향한 기독교 선교


    이슬람인들은 자기들을 아브라함의 자손중 이스마엘 계열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유일 최고 절대. 창조의 신 하나님의 선민중 장자계열로서, 이삭 – 야곱계열인 이스라엘 사람들과는 신관에 있어서 하나님의 성품, 육체의 부활, 사후의 세계인 지옥과 천국등의일부교리에 있어서는 동일하거나 유사점이 많이 있다. 그것은 그들의 경전인 꾸란경을 편집 제작할 때 구약 성경에 있는 많은 내용들을 차용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무하마드가 대상들과 함께 팔레스타인 지역을 다닐 때 보고 듣고 또한 예배에도 참여한 경험과 소아시아지역을 다닐 때 기독교도들로부터 들은 이야기, 함께 예배드렸을 때의 종교적 체험들이 이슬람의 교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교와 기독교는 신앙과 신학에 매우 큰 차이점이 존재하고 있다.

1. 신관

   첫째로 이슬람교에서는 기독교에서 믿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관이 없다. 이슬람교에서의 신의 본질은 단일성이다. 기독교에서는 성부하나님, 성자하나님, 성령하나님 삼위가 계시지만 이슬람교에서는 오직 유일신 알라 한 분밖에는 없다. 알라는 기독교에서의 성부에 해당하는 신이다. 기독교에서는 성령의 교통하심이 있음으로서 성부와 성자와 피조물 신자들 상호간에 인격적 교제와 신비적 연합(mystical union)관계가 있으나 이슬람교에서는 알라와 피조물 신자들과의 교통하는 것이 없이 단절되어 있고 알라가 피조물과의 관련성을 직접 가지지 아니하는 것이다. 알라는 너무 위대하여 인간을 초월해 있으므로 비인격적으로 존재하고 또한 작용하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로서 여호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여호와의 종 모세”, “여호와의 종 다윗”과 같이 유대인들의 구약적 하나님에 대한 신관은 유일, 절대, 초월, 창조주요 그 앞에서 유대인들은 피조물 중에서 일개 선민에 불과하고 종에 불과한 것으로만 생각해 왔으나,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神子, Son of God)로서 인간들 사이에 (세상)오셔서 인간들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주심으로 인하여 인간들을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신 사건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이요, 감격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이것이 매우 거리끼는 것이 되는 것이다. 헬라인들에게는 눈에 보이지도 아니하는 대상을 향해서 아버지라고 하니 이는 심히도 미련한 것이 되는 것이다. (고전1:23) 예수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이 참람죄라 하여 그것이 그의 사형의 직접적 죄목이 된 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보통의 일이 아닌 것은 사실이다.
    이 문제는 이슬람 교도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알라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매우 큰 불경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아버지라는 개념은 육체적 성관계를 통해서 자기를 낳아주신 분으로만 생각할 따름이다. 이슬람교의 하나님인 알라에게는 사랑, 거룩함, 은총과 같은 인격적 속성이 매우 희박하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사랑이 많으시며, 의로우시고 선하시며, 긍휼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이다.

2. 경전

   둘째로 이슬람교와 기독교는 경전에 있어서 차이점이 현저하다. 이슬람교의 경전에는 모세오경, 선지서, 다윗의 시편, 예수의 복음서 그리고 무하마드의 생애와 교훈으로 구성되어져 있다. 그런데 앞의 교훈들은 상실되고 손상이 되었으며 오직 무하마드의 교훈과 생애가 기록된 꾸란만이 보존되어 오고 있다고 무슬림들은 철저히 믿고 있다.
   그들은 또한 이전의 모든 것은 다 불완전한 것이지만 꾸란만은 위의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 완전한 것이므로 꾸란만이 알라의 절대적 계시를 담고 있는 경전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그 꾸란은 성경의 내용 일부를 변조 인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3. 그리스도

   꾸란의 내용 가운데서도 예수그리스도의 처녀 탄생 비슷한 기사(Surah 3:45-47)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가복음 1:26-38)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임을 부인하고 있다. 꾸란에서는 예수를 아브라함, 요나 그리고 다른 선지자들과 동일한 한 사람의 선지자로 인정하고 있다. 무하마드는 예수보다도 한 단계 높은 최고의 선지자라고 슈라서(Surah)4:171에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 요10:30, 14:9, 8:58, 마17:5, 마8:29, 요20:28, 요1:1-5, 골 1:15-17, 골 2:9등의 내용에 배치되며 진실이 아니다.
   꾸란에서는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은 사실이 전혀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람들이 예수를 죽이지도 십자가에 못박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에게 그처럼 보였을 뿐이다” (surah 4:157). 그들은 예수가 십자가 매달리기 직전에 알라가 그들 천국으로 데리고 갔다고 한다. 예수 대신에 제자인 유다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십자가에 매달린 유다를 마리아와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몰랐단 말이 되는데 이것은 논리에 전혀 맞지 아니한다.(막14:10,11,43-45, 마27:5)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것임에 대해서 구약에서 예언되어 있고, 신약4 복음서에도 정확히 기록이 되어있다. 그리스도게서 십자가에서 이룬 대속적인 죽음 그 자체야말로 신약 성경 전체의 핵심적 진리이다. (고전1:23, 2:2, 15:3-4, 갈2:20, 6:12-14, 엡2:16)
   예수님 자신도 그의 죽음에 대해서 여러 번 예언한 바 있다. (마16:21, 막10:45, 마26:28) 
   바울은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이 히브리서 9:28에 쓰인 내용처럼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제물로) 드리신 바 되셨고 …..” “세상 죄를 지고 (제물이 되어)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요1:29)이었다.
   그들은 예수가 무하마드보다는 못한 선지자이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라고 했다. 예수는 하나님의 독생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대신한 하나의 천사였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고 했고 죄없는 삶을 살았다고 했다. 그는 죽은 자를 살리시고 문둥병자를 치료하셔서 깨끗하게 하였다. 예수는 “신의 말씀”이라고도 하고 “신으로부터 온 영”으로 존숭을 받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이슬람교는 예수에 관해서 상당히 높이 대우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는 아니라고 했다. (요19:17-19, 3:14-18, 고전1:18-25, 마28:1-10, 고전15:3-6,17)
   그리스도교에서는 인간이 죄 때문에 멸망받게 되어 있었지만 인간 스스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셔서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죽게 하심으로써 인류의 구원을 다 이루셨다. 누구든지 이를 믿는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다. (요3:16)
   그러나 이슬람교에서는 사람마다 각기 자기가 지은죄는 자기가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교리화하고 있다. (Surah 4:11) 그들의 신앙의 다섯기둥(믿음의 5大표주)인 신앙고백, 기도, 구제, 금식, 순례를 지킴으로서 죄에서 구원을 얻게된다고 말하고 있다. 위의 표주들을 온전히 지키지 못할 경우에는 그 개인의 과실이며 책임이라고 보는 것이다. 수라(Surah) 10:109에서는 “죄를 짓는 사람은 누구나 그 죄에 대한 책임을 진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죄를 범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사야 53:6) 그리고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했다. (롬 6:23) 그리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죄인이 된 것이 아니고 인간은 근본적으로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이 죄에서 용서받고 해방되고 구원받는 길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길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행 4:12)
   이슬람교에서의 죄 개념은 알라에 대한 복종의 결핍과 불충분성을 죄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슬람교에서는 인간의 본성에는 죄가 있다고 믿지 아니하고있다. 다만 인간이 죄가 되는 행위를 하기 때문에 죄인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아니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죄 아래서 태어나고 그러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멸망상태에 처하였다고 한다. (롬3:23)
   이슬람교는 철저한 율법종교요 행위에 의해서 구원 받는다고 믿는 자력의지 종교이기 때문에 규범과 규칙이 엄하다. 이점에서는 유대교와 유사점도 많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무거운 종교의 짐을 지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의 예수그리스도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 내 멍에는 쉽고 내짐은 가벼우니라” (마11:28-30)고 하셨다. 
이슬람교는 그리스도교의 핵심적 교리들을 부정한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한 본질 안에 영원히 동일하신 세 인격이 동시 편재의 신비적 존재이심을 그리스도민들은 체험적으로 인식하고 또 믿는다. (마3:13-17, 28:19, 고전13:14)  
그러나 이슬람교에서는 최고신이라고 하나 비인격적인 알라 외에 여호와 하나님은 부정하고 있다.
   그들은 또한 예수그리스도의 신성(하나님의 아들되심)과 십자가의 죽음, 부활, 인간의 원죄,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은혜의 교리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사이에는 얼른 보기에는 유일 최고의 신을 섬기는 것이나 우상숭배를 배격하는 것이나 신앙고백, 금식, 구제등의 신앙행위에 있어서 유사점이 있는 것 같으나 근본적으로 차이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그리스도교 진영에서 이슬람권 선교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논의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이다.
   기독교선교역사의 저자인 스테펀 니일(Stephen Neill)은 “이슬람권 선교는 험한 장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지만 절망해서는 안되며, 교회가 만일 우호적이고 적절한 접근을 사용한다면 무슬림들의 적극적인 반응을 기대할 수가 있다”고 하였다. 
   무하마드가 그리스도교를 싫어하는 이유중의 하나가 그들의 교리 논쟁이다. 그러므로 핸드릭 크래머는 이슬람교세계를 향한 그리스도교의 선교 전략은 교리적인 측면은 피하고 성경적 실재론(Biblical realism)으로 삶의 현장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즉 그리스도교선교사들은 서로 협력하면서 무슬림들과의 인간적인 관계를 좋게 유지하면서 그들에게 필요한 봉사를 통해서 접근하면 선교의 가능성이 열릴 것”이라고 하였다. 
   첫째로, 이슬람교에서는 자비와 사랑을 교리적으로 강조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에서는 이것을 접촉점으로 사용할 수가 있다. 지금 중동의 곳곳에 그리고 중앙아시아지역과 중국의 신장 위구르지역 그리고 필리핀의 만다나오,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난민으로 혹은 사회적 낙오로 고통에 처해있는 수많은 무슬림들이 있다. 그리스도교 진영에서는 이슬람권을 향한 선교적 차원에서 연합해서 이들에게 의료, 식량, 구제, 생필품지원, 개발, 교육등을 통해서 이들에게 사랑을 보여주어야 한다. 인도네시아는 의료 교육활동을 통한 선교의 접촉점이 가능하며 방글라데쉬는 기술협력 개발을 통한 기회가 열려있다.
   둘째로, 이슬람권내에도 호메이니 혁명이후 쉬아파(Shi΄ites)라는 극성파가 세력을 펼쳐 나가고 있는데 이들의 투쟁 대상은 이스라엘에서 이슬람권 내부의 온건다수파인 수니파(Sunnites)와 이들을 지지하고 있는 미국에 대해서 테러 납치, 폭발등을 일삼고 있으며, 1975년 “아말” (희망)이라는 민병대를 조직하여 수니파를 지원하는 PLO도 공격하고 있다. 
   이슬람의 소수파 중에는 쉬아파와 수피파(Sufis)가 있다는 것은 이미 언급한 바가 있는데 소수파에는 이외에도 바하이(Bahai)파가 있다. 19세기 중엽 페르시아에 바흐(Bah)라는 자칭 선지자가 재림주가 되어 등장했으나 페르시아 정부에 의해 처형되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 바하울라(Baha Ulah)에 의해서 계승되고 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예수는 그 시대의 예언자이고 무하마드도 7세기의 예언자로 보며 바하울라는 오늘날의 예언자라고 하였다. 
   아마디야(Ahmadiyya)파는 인도를 중심으로 하여 일어나서 힌두교, 유대교 그리스도교 및 이슬람교의 쉬아파 교리를 섞어 혼합종교(Syncretism)를 만들어서 세계를 향한 선교에 전념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진영에서는 이들 이슬람 권내에서의 분열과 갈등 투쟁에서 희생되어 상처받고 고통 당하는 무슬림들에게 접근해서 세상으로는 위로 받을 길이 없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도움을 제공해 줌으로써 그리스도교 선교의 접촉점을 열어가는 것이다.
   셋째로, 이슬람권내에서 유학생을 선발하든지 아니면 기술자를 선발해서 한국이나 미국에 데려와서 장학금을 제공해주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전도해서 개종시킨 후 자기동족에 대한 선교사로 재파송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교전략을 위해서는 많은 물질과 장기적인 전략과 인내가 필요하다. 한세대 이상을 기다리면서 혹은 다음 세대에 가서 거둘 수확을 바라보면서 씨를 뿌리는 것이 필요하다.
   넷째로, 해외에 근로자로와서 사는 무슬림들을 따뜻한 사랑으로 도우면서 그리스도인들과 결혼을 시켜서 가정을 이루게 하고 이들의 숫자가 늘어감에 따라서 무슬림내에서의 그리스도인 숫자가 늘어가게 되고 이들 중에서 무슬림 선교사가 나오게 돕는 일이다. 현재 한국내에서 외국인 근로자 사회에 파고 들어서 이들에게 그리스도교 복음을 전하는 일이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다섯째로, 이슬람 선교를 위한 지원 시설에 투자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슬람 문화 연구소와 이슬람언어와 문화에 능한 사람들이 많이 나오고 이슬람언어로 성경이 번역되는 일이 급선무이다.
   여섯째, 아시아 지역에서의 구체적 선교 전략이다. 이것은 터키를 중심으로한 소아시아, 중앙아시아등의 이슬람국가들의 문을 열기위한 전략이다.
   지금 말하고자 하는 국가들은 대부분 비자 받기가 힘든 지역이다. 또한 비자를 어떻게 받느냐에 따라 사역의 형태나 선교전략의 방향성을 결정하는데 크게 영향을 미친다.
   특히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법령이 아직 잘 정비되어 있지 않는 상태에서 여러 가지 많은 부분에서 제약되어 있기에 우리가 일하기 편한데로 이들을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법 한계에서 충분히 활동할 수 있는 것을 찾고 개발해야 한다. 그렇다 이들을 이해 하는 것이 선교전략을 세우는 기본적인 마음인 것이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품고 기도하는 것이 좋은 전략인 것이다. 
   그러면 이제 몇 나라들을 선정하여 구체적 전략을 말해보고자 한다.

l 타직키스탄
- 국가의 어려운 형편 때문에 구호사업을 통한 입국이 매우 효과적이다.
- 국가 기간산업 예를들면 농업 또는 지역개발사업에 참여함으로서 선교의 기회를 찾을 수 있다.
- 내전 이후에 약품의 품절과 의료시설의 낙후로 인해서 의료사업은 대단한 환영을 받는다.
- 현지어의 능숙함으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소그룹 제자양육을 한다.

l 투르크메니스탄: 일반 비영리단체 혹은 교육사업, 순수한 학생비자로 입국하려고 했던 과거의 모든 시도는 실패했다. 그러나 터키나 이란에서 들어온 사업가들은 이 국가의 상권을 거의 점령했다.
- 한국의 모기업의 현지지부를 설립하는 것
- 모기업과 자매회사를 만드는 것: 자매회사는 모기업의 상품뿐 아니라 다른 상품 판매 가능
- 무역 대표부 설립: 무역대표부는 세금 압력도 없고 실질적인 이익을 남겨야 하는 압박도 없어서 사역자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방법이다.

l 우즈벡키스탄: 비영리 단체의 활동이 두드려져 대부분의 사역자들은 비영리단체를 통해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그 길이 거의 막히고 있다. 학교를 통하는 방법이 열려 학생이나 교수, 연구원등 자격으로 입국이 가능하다. 
우즈벡의 사업환경은 은행시스템의 약점과 부패관료, 외환송금의 어려움으로 인해 선교적 상황에 지극히 나쁘다.

   공통적으로 필요한 전략은 제자양육이다. 사회, 문화환경이 이슬람 교도들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에 체계적인 제자양육이 아니면 또다시 이슬람에 넘어갈 수 있기 때문에 친밀한 관계 유지를 통한 제자양육이 절실히 필요하다.
   이러한 대부분의 나라들은 전쟁과 내전등의 나라와 경제, 사회의 전반적인 어려움에 있다. 먼저는 이들을 이해하고 이들의 상황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고 이들이 지금 무엇을 필요로 하는 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성급한 판단이나 행동으로의 전략은 미래 선교전략의 큰 손실을 줄 수 있기 때문이고 현재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들에게 큰 피해가 된다.
   일곱째, 유럽 여러나라에 퍼져있는 무슬림 선교전략
   유럽 여러나라들에서 종족전쟁이 있는 것을 우리는 매스컴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러한 전쟁은 종족전쟁이라고 말하기 보다 종교전쟁인 것이다. 무슬림(회교도)들과 비이슬람종교를 가진 사람들 특히 천주교나 기독교를 가진 사람들간의 전쟁인것이다.

   유럽은 아주 오래전부터 항상 무슬림들에게 무력의 힘을 보여왔다. 그 대표적인 것이 십자군전쟁이다. 무슬림들은 서양인들을 생각할 때 십자군을 생각하며 경계하고 죽일려고 한다. 이제는 기독교 신앙의 모습으로써 이러한 사랑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나는 당신을 위해 죽을 각오가 디어있습니다.” 라는 말이 필요하다.
   독일은 8500만며의 인구중에 3%정도가 이슬람인구이다. 그들 대부분은 터키 사람들이다.   
   영국은 어림잡아 200만명의 무슬림이 있고 대부분 도시에 살고 있다. 그리고 유럽의 무슬림들의 팜플렛을 읽을 수 있다.
   또한 허술한 이민법을 통해 스페인을 통해 프랑스로 들어오기도 한다. 프랑스 또한 10% (500만명)정도의 무슬림이 살고있다.
   유럽에서는 무슬림에게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다. 
   이렇게 많은 무슬림들이 유럽나라 각곳에 이민와서 살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상황가운데 있는 선교상황에서 몇가지 전략을 세워보고자 한다. 

l 무슬림들이 많이 모여사는 지역에 커피숍을 운영하면서 그들과의 자연스러운 접촉을 통한 선교활동이 효과적이다. 현재 이렇게 하고 있는 선교단체와 선교사들이 있다. 

l 유럽에 살고 있는 무슬림 2세에게 전도하는 전략: 많은 젊은이와 무슬림 청년들은 지금 정체성의위기에 처해있다. 심지어 자기의 고국에서까지 국민으로써 받아즐여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과격한 무슬림도 아니다. 도시 청소년들을 위해서 함께 아파하고 슬퍼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필요하다. (학생들을 사역하는 것과 도시선교)

l 문화적 사업으로 사회복지 센터를 통한 선교
l 정체성을 잃어 마약을 남용하고 절도를 저지르는 청소년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베풀고 이들을 위한 청소년 사역으로 태권도 도장을 세울수도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인 것이다. 특히 한국 사람들에게는 많은 장점이 있다. 그중의 가장 큰 것은 역사적으로 무슬림과 전쟁한 사실이 없다는 것이다. 둘째서두에 말한 것같이 서양인들하면 이들은 “너는 서양인이며 십자군이야”라는 반감을 가지고 있으나 한국인에게는 이러한 감정이 없다.
   이슬람세계를 향한 복음선교는 그리스도교인들이 반드시 지불해야만 할 부채이다. 사도바울이 “나는 복음에 빚진 자”라고 했고 바울 당시에는 헬라인과 로마인과 야만인(게르만인)이었지만 이들에게 대한 빚을 그리스도교는 역사적으로 모두 청산했으나 이제는 이슬람세계에 대한 매우 무거운 빚이 남아있다.
   이들에 대한 복음의 빚을 갚기 위해서는 먼저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서 시작해야 한다. 인구로 말하면 전세계 인구의 1/4이 무슬림이다. 이들은 자존심과 자부심이 매우 강하다. 그리고 이들이 세계경제와 문화에 어떠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지에 대한 현재의 상황 이해가 선교에 선행되어야 한다. 이들에 대한 접촉점이 될만한 상황을 선교의 기회로 포착해야한다. 결혼, 장례, 축제, 교육, 예술등 일상생활의 사소한 이벤트도 모두 선교를 위한 접촉점이 될 가능성이 있는 상황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과 워싱턴에서 일어난 동시다발의 대량 살상 테러의 참상으로 인하여 이슬람교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전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데 이를 그리스도교 선교의 호기로 삼고 과거 이들에 대한 무관심에서 따뜻한 관심으로, 오해의 요소를 이해의 요소로 바꿔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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