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4-01-05 15:44
신자는 성령을 언제 받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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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7,572  

        *신자는 성령을 언제 받는가* 

 

- 예수 믿는 것과 성령 받는 것은 구분된다 - 
 

 

Ⅰ.문제제기 

1. 오늘날 성령에 대한 논의의 내용은, 성령을 받아야 하는가, 성령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성령을 받으면 어떤 일이 생기는가, 성령 받는 것과 방언은 무슨 관계인가 등등 모든 신자들의 구체적인 신앙생활에 직접 연결된 중요한 주제들이다. 이것은 신학자들만의 독점적인 연구영역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체험이 앞선, 신자들 사이에서 더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느낌이다.

 

 


2. 복음적인 신학자라면, 우선 성령을 받아야한다는 당위론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성령을 부인하거나 제한하는 견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대부분이다. 즉, 논리전개상으로는 성령을 받는 자격과 받는 시기와 받은 결과에 대해 나름대로 견해를 펴 나가지만, 실제로는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이나 성령의 체험이 없는 사람의 모습이라고 밖에는 달리 생각하기 어려운 논리와 행태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그 문제가 방언과 연관되는 경우에는, 학문적인 치밀함과 논리성보다는, 비약적인 단정과 감정적인 비난 그리고 체험에 대한 비하까지 서슴지 않음으로 해서 그러한 의구심을 더하게 만드는 경우가 적지 않다.

 


3. 구체적으로, 성령을 받는 시기에 대해서는, 예수 믿는 것과 성령 받는 것의 관계를 논점으로 하여 세 가지 견해가 대립한다.

 

첫째는, 예수 믿을 때에 동시에 성령도 받은 것이라는 견해로, 여기서는 편의상 동시설(同時說)이라 부르고자 한다.

 

둘째는, 성령의 내주(內住)와 성령침례를 구분하여, 믿을 때에 동시에 성령이 내주하나 성령침례라는 별도의 과정이 있어야 성령의 사역이 나타난다는 견해로,

 

           여기서는 절충설(折衷說)이라 부르고자 한다.

 

셋째는, 예수 믿는 것과 성령 받는 것을 구분하고, 성령을 받음으로써 표적과 은사가 따르는 권능 있는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견해로, 여기서는 구분설(區分說)이라 부르고자 한다.

 


그런데 이 세 가지 견해는, 단순히 이론을 어떻게 구성하는가의 차이를 넘어선, 실체적이고 치명적인 차이를 드러냄으로써, 신앙생활의 수준을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지경까지 이른다.

 


4. 동시설은 예수 믿을 때에 이미 성령을 받은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성령을 받기 위한 별도의 과정(예를 들면, 행8:14-17의 성령 받기 위한 기도와 안수)을 부정한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방언을 비롯한 성령의 은사와 표적을 무시 내지는 부정하기까지 한다. 즉 구원의 믿음을 갖게 하는 데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 외에는, 성령의 사역에 대하여 부정론을 펴는 견해와 실질적인 차이가 없게 된다.

 


절충설의 경우에는 부분적으로 타당한 면도 없지 않으나, 성령내주와 성령침례의 구분이 결과적으로는 성령의 역사를 극히 제한적으로 인정하게 되는 잘못을 피하기가 어렵다. 즉 성령은 믿는 자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임할 뿐 아니라 그들 모두에게서 보편적으로 그 사역을 드러내시는데(행2:17-18), 절충설을 취할 경우 성령이 내주만 할 뿐 사역을 나타내지 않는 경우가 다수를 차지하게 된다. 결국 성령의 사역이 성령침례를 받은 특별한 자들의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나타난다는 면을 볼 때, 동시설과 핵심면에서는 일치하고 약간의 양적인 차이만 보일 뿐이다. 또한 이 견해의 보다 근본적인 결함은 성령과 그분의 능력을 혼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관해서는 뒤에 보충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5. 본 논문에서는 바로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동시설과 절충설의 근거들을 검토·비판하고자 한다.

 

그 다음에 구분설의 근거를 제시하고, 그 시각에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다섯 장(章)의 성령강림(성령내주) 사건들을 해명하고자 한다. 또한 앞의 두 견해가 공통적으로 오해하고 있는 성령의 사역에 관한 성경구절들을 추가로 설명함으로써, 신자가 성령 받는 일반적인 과정을 정리하고자 한다. 그것을 통하여, 성령충만한 신앙생활을 고무하고 유도하기 위한 신학적 토대를 제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 논문의 근본의도는 공격적이거나 비판적이거나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권면적이고 제보적(提報的)이고 실천적인 것임을 밝혀 둔다. 즉 성령충만하고 능력 있는 신앙생활에 함께할 것을 권유하는 의도에서 씌여진 것이다. 


Ⅱ. 세 견해의 개관 

1. 예수믿을 때에 성령받는다는 견해 (동시설) 

1) 근 거 
첫째,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말씀하신 대로, 예수를 믿는 순간에 이미 성령을 받은 것이다. 
둘째,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말씀하신 대로, 그리스도인은 이미 믿을 때부터 그 속에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이 내주하고

 

        계신다. 
셋째, 사도행전 10장의 사건(10:44-48)에 나타난 것처럼, 말씀을 듣고 믿을 때에 성령이 이미 내주하신다. 
넷째,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강림사건(2:1-4)은 일회적으로 완전히 성취된 사건으로서, 오늘날은 성령이 또다시 새롭게 임하시는 것이 아니다.

 

 

 

성령은 이미 단번에 다 부은 바 되었고 이미 오셔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에, 오순절 때와 같이 성령을 주십사고 기도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믿을 때에 당연히 우리 속에 들어와 계시기 때문이다. 

2) 비 판 
첫째, 성령은 거룩한 영이시라 거룩한 곳 즉 죄가 없는 곳에만 거하신다. 그런데 인간은 예수를 구세주라 시인할 때 비로소 죄사함을 받고 거룩해진다(롬10:10). 따라서 예수를 주라 시인하는 것은 거룩해지기 전이며, 이것은 바로 성령이 내주하시기 전에도 성령에 의해 믿음을 고백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때의 성령의 사역은 분명히 내주가 아닌 형태, 즉 구약 때부터 존재해 온 성령의 감화감동인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뒤에 별도로 자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둘째, 로마서 8장 9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영은 성령이 아니라 양자의 영 곧 복음을 의미한다. 이에 관해서도 뒤에 별도로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셋째, 성령은 영혼의 죄가 용서받은 다음에 임하시는 분이므로, 사도행전 10장의 사건은 예수를 믿고(말씀을 듣고) 동시에 성령을 받은 예가 된다. 그러나 이것이 곧 바로 동시설을 지지하는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시점’과 ‘사건’은 구별해야 할 별개의 개념이라는 사실이다. 믿음(회개, 영접, 구원)이라는 것과 성령받음(내주)이라는 것은 각각 별개의 사건이다. 이 두 별개의 사건이 시간의 차이를 두고 진행된다면, 그 두 사건은 또한 두 개의 시점으로도 구분된다. 그러나 만약 두 사건의 시차가 미미하거나 아니면 실제로 동시에 두 사건이 일어난다면, 그 두 사건은 시점상으로는 구분이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두 개의 사건이 한 시점에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곧 바로 두 개의 사건을 한 개의 사건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즉 동시에 일어났다고 해서 그 일이 한 사건이라는 것은 논리적인 비약이라는 것이다.

 


사도행전 10장의 사건(예)은 바로 이와 같은 경우이다. 다른 장의 사건(예)들과 비교해 볼 때 10장의 사건(예)은,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갖게 된 시점과 성령이 내주하여 방언을 말하게 된 시점이 거의 동시에 일어난 예일 뿐이다. 즉 믿음과 성령받음 사이의 시차가 작다는 점에서 다른 장의 사건(예)들과 양적인 차이만 있을 뿐인 것이다. 오히려 내면적인 믿음이 별도의 외면적인 현상(성령내주에 의한 방언)으로 확증된다는 것을 통하여 두 개의 사건(믿음과 성령받음)이 발생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10장의 내용은 특히 2장의 성령강림장면(2:37-41)과 비교할 때, 회개(구원)와 침례와 성령내주가 부분적으로 순서는 바뀔 수 있어도, 그 각각은 엄연히 구분되는 별개의 사건들이요, 반드시 거쳐야 되는 사건들임을 나타내는 증거로서 의미를 갖는다.

 


넷째,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요15:26)은 원어상 3인칭 단수 현재형(εχπορευομαι)으로서 ‘계속 나오신다’는 뜻이므로 성령은 현재도 계속해서 새롭게 임하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또 사도행전 2장 사건(2:37-41)에서 보는 대로 회개와 침례와 성령내주는 ‘각각’ 실제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2. 예수 믿을 때 성령이 내주하나 성령침례를 받아야 성령의 사역이 나타난다는 견해(절충설) 

1) 근 거 
첫째, 동시설의 근거를 인용하는 것 외에도,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말씀하신 대로, 거듭남은 성령의 사역이요

 

        거듭난 자는 성령이 내주하시는 자이다. 
둘째, 사도 바울의 회심을 기록하고 있는 사도행전 9장의 사건에서, 성령을 받은 때는 다메섹 도상에서 빛을 보았을 때요, 성령침례를 받은 때는 다메섹에서 아나니아가

 

        안수하여 다시 보게 된 때이므로, 두 가지는 구분된다. 
셋째, 삼손이나 다윗과 같은 구약 신자들의 예가 말해 주듯 성령의 사역은 내주와는 달리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2) 비 판 
첫째,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과 성령의 내주는 구별되는 사건이다. 예수께서 죽으신 날부터 오순절 성령강림 때까지의 50여일 간에는 비록 성령의 내주는 없었을지라도 구원과 중생(거듭남)은 완전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십자가상의 강도는 그 대표적인 예로, 주님은 그가 구원받고 거듭났음을 아셨기에 하늘나라(낙원)에 갈 수 있음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거듭남은 성령의 감화감동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서는 뒤에 별도로 보충설명을 하고자 한다.

 


둘째, 바울이 본 빛은 성령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며(요1:9), 바울이 실제로 성령을 받은 것은 아나니아가 안수할 때였다. 아나니아는 바울이 길에서 본 빛이 예수임을 분명히 밝히며 안수하였고(행9:17), 그때서야 바울은 성령을 받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셋째, 구약의 신자들은 아직 죄를 용서받지 못한 상태이므로 성령이 그 속에 들어가실 수 없었고 단지 몸 밖에서 감화감동하심으로 능력을 나타냈다. 그러나 신약의 신자들이 나타내는 능력은 이것과 원리가 다르다. 성령이 내주하시고 그에 따라 외부적으로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 견해는 근본적으로 성령의 내주와 감화감동, 성령과 성령의 능력을 구분하지 못함으로써 혼동을 빚고 있다. 그 결과 사도행전의 사건들을 “성령받는다”는 성경상의 표현대신 성령침례 혹은 성령충만이라는 표현으로 대치함으로써 오해와 부작용을 일으킬 소지를 심각하게 내포하고 있다. 즉 왕권을 가지고 능력과 함께 우렁차게 임하시는 성령의 임재를 제한적·축소적으로 인정하도록 유도하고, 오히려 따르는 능력이 성령 자신보다도 더 부각되기에 이른 것이다.

 


사도행전 1장 4절에서 8절과 2장 1절에서 4절에 의하면, ‘성령침례 =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 성령의 임하심 = 성령의 내주’라는 등식이 성립함을 쉽게 알 수 있다. 다른 한편, 절충설이 언급하고 있는 ‘성령침례’라는 내용은 실제로는 오히려 성령이 아니라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행1:8)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성령 자신과 그분의 능력(권능)은 실체가 다른 별개의 것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성령은 능력이 아니라 능력을 주시는 분이시요, 능력은 성령이 임한 결과 나타나는 현상(표적과 은사)이다. 그래서 성경은 ‘능력을 받으라’하지 않고 ‘성령을 받으라’ 하심으로써 두 가지를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3. 예수 믿는 것과 성령 받는 것을 구분하는 견해(구분설) 

1) 근 거 
첫째, 사도들은 오순절 성령강림 이전에 이미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있었다(요15:13, 17:16-19).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은 그 이전과는 달리 사람의 속에 내주 하러 오신 것이요, 그 표적으로서 방언을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둘째,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요20:22)고 별도로 명하셨으며, 승천하시기 직전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행1:4)고 명하셨다.

 


셋째, 예수의 죽음 이후 및 부활과 성령강림 사이의 50여 일간은 믿음은 있었으나 성령은 받지 않은 상태였다. 십자가상의 강도의 예(눅23:43)는, 성령강림 없이도 보혈공로를 믿음으로써 완전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과,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거듭남은 성령의 강림(내주)이 아닌 감화감동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동시에 가르쳐 준다.

 


만일 믿을 때 성령받는다고 한다면 이 50여 일간의 믿음은 성령받지 못한 상태의 불완전한 믿음이라는 설명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예수의 보혈공로가 그 기간 동안은 불완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설명이 불가피한 것이다. 

 

넷째, 구약의 성령론도 이 구분을 지지하고 있다. 이것은 죄인의 상징인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는 것에서 매우 은혜스럽게 묘사되어 있다(레14:15-20). 즉 귓부리에 피(구속)를 먼저 바르고 나서 그 위에 다시 기름(성령)을 바르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절기에도 같은 이유로 유월절과 오순절이 구분되어 있다.

 


다섯째, 앞의 두 견해가 사도행전의 다섯 장에 나오는 성령강림사건 중에 하나씩만을, 자기 논리대로 불완전하게나마 설명할 수 있는 반면, 이 구분설은 그 모두를 충돌 없이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다. 

2) 비 판 
첫째, 2장의 마가다락방 사건(2:1-4)은 이미 구원받고 거듭난 자들에게 성령이 최초로 내주하셔서 비로소 방언을 말하게 되었다. 뒷부분의 베드로의 설교(2:37-41)에서도 회개(구원)와 침례와 성령강림을 구분하고 있다. 9장의 바울의 회심사건(9:1-19)과 10장의 고넬료일가사건(10:44-48)은 앞에 설명한 것으로 대신한다. 

 

둘째, 8장의 사마리아사건(8:14-17)은 말씀을 받고 침례까지는 받았으나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는” 사마리아에, 사도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고 “안수”함으로써 성령을 받게 되는 과정을 시간의 경과에 따라 상세히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구원의 믿음과는 별도로 성령 받기를 사모해야 한다는 것과, 성령을 받기 위해서 기도와 안수라는 행위도 필요할 때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셋째, 19장에 나오는 에베소에서의 성령강림사건(19:1-7)은, 믿음과 침례와 성령받음과 그 표적(방언과 예언)을 명문(明文)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들은 믿을 때에 성령을 안 받았다고 직접적으로 대답하고 있으며, 바울을 통해서 성령이 있음과 예수의 침례가 있음을 비로소 듣고는, 그대로 순종하여 침례 받고 성령을 받으며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게 되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어떤 자들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는 구절을 “믿을 때에 성령 받는 것이다”또는 “믿을 때에 이미 성령 받은 것이다”라는 의미로 착각하여 이것을 동시설의 근거로 삼기도 한다. 그러나 이 질문은 성령 받는 것이 믿는 것과 구별되는 것임을 전제로 해서만 가능한 질문이다. 만일 믿을 때에 자동적으로 성령이 임한다면 굳이 이와 같이 질문하지 않았을 것이며, 오히려 “믿느냐” 하는 한가지 사항에 대한 질문으로 충분할 것이다. 가장 영감있고 권위있는 것으로 공인받는 킹 제임스판 영어성경은 이 구절을 “믿은 이후에(since ye believed)”라고 번역하고 있음도 주목할 만하다. 


Ⅲ. 성령의 역사와 관계된 개념들의 올바른 이해 

1. 구원·중생과 성령의 역사 

신약성경의 일관된 주장은, 구원은 오직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만 받는 것이라는 진리이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 말씀하신 대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되는 것이다(롬10:10).

 


또 이것을 다른 말로 설명하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그가 곧 구원받은 자이다. 즉 구원은 예수 이름을 단지 환영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며, 성령을 받는 것과는 구별되는 사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상의 강도와 같이 오순절 성령강림 이전에 믿은 사람들도 흠없이 완전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간혹 성령을 받거나 은사를 받을 때에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그때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단지 확신을 갖게 되었을 뿐인 것이다. 구원은 이미 받았으나 실감하지 못했던 것을 후일에 확실히 깨닫게 된 것이다.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것은 성령이 내주하시기 전에도 가능하며, 우리는 다윗의 경우나(마22:43-45) 베드로의 경우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마16:13-17).

 


만일 예수를 시인할 단계에 이미 성령께서 몸 속에 들어와 계시는 것이라 주장한다면, 그것은 예수를 시인할 단계에 또는 그 이전에 이미 죄사함 받고 거룩해져 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예수를 시인하는 것은 형식적인 과정에 불과하며, 그 외에 다른 어떤 과정에 의해 구원이 제공된다는 의미가 된다. 이것은 결국 예수의 구원자 되심을 부인하거나 그의 공로가 불완전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비난을 모면하기 어렵다.

 


그것은 중생(거듭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십자가상의 강도나 제자들도 앞에 설명한 것처럼 오순절 성령강림 전에 이미 구원받고 거듭난 상태였다. 그렇다면,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난다(요3:5)는 것은 성령의 내주와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 해답은, ‘그리스도의 영’과 ‘성령의 감화감동’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선행되어야만 대답이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일단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은 구원과 중생은 적어도 성령의 내주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이 이루어지는 사건이며 실제로 오순절 성령강림 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2. 성령의 내주와 성령의 감화감동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셔서 내주하시기 전에도, 구약시대부터 성령의 역사는 계속 존재해 왔다. 그러나 죄사함받지 않은 상태에서는 성령이 내주하시지 않으므로, 그때의 성령의 역사는 내주와는 구별되는 감화감동의 역사이다. 이것은 성령께서 사람의 몸 바깥에서 옷을 입히듯, 필요에 따라 능력을 입혀 주시는 형태의 역사였다. 그래서 그 필요가 없어진다거나 그 사람이 경건에서 타락하면 성령의 역사는 소멸되고 만다(삼상16:13-14). 다윗이 범죄한 후 성령을 거두지 말 것을 그토록 간절히 기원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시51:11).

 


그러나 예수의 공로로 죄사함을 입은 사람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영원히 함께 하신다(요14:16). 
그런데 여기서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구약시대에는 성령의 감화감동만 있고 신약시대에는 성령의 내주만 있다고 단순하게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구약시대에는 성령의 감화감동만 존재했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성령의 내주와 성령의 감화감동이 공존하는 것이다. 이미 앞에서 논증한 바와 같이 성령이 내주하시기 시작한 오순절 이전에도 성령의 감화감동의 역사는 있었고, 무엇보다도 구원과 중생은 내주와는 별도로 완전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동시설이나 절충설이 갖는 오류들은 바로 이와 같은 내주와 감화감동의 혼동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신약시대에는 감화감동이 없이 내주만 있으리라는 단순한 선입견에서, 모든 성령의 사역을 성령의 내주에 의한 사역으로 가볍게 판단한 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여진다. 

3. 성령과 그리스도의 영 

주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6:63)고 말씀하심으로써 주님의 말씀은 ‘살리는 영’임을 가르쳐 주셨다. 사도행전 8장 14절에서는 예수 믿는 것을 “말씀을 받았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자들은 ‘살리는 영인 말씀’을 받은 자들인 것이다.

 


한편 로마서 8장 15절-16절은 ‘종의 영’과 ‘양자의 영’과 ‘성령’을 각각 구분하여 별개임을 설명하고 있다. 갈라디아서 4장 6절에서도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 그 후반부에서는 하갈과 사라, 이스마엘과 이삭의 비유를 풀어 율법과 복음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즉 율법도 하나님의 말씀이고 복음도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율법을 받은 자는 종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종이요, 복음을 받은 자는 아들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아들임을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내용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말씀은 종의 영이 아니라 아들의 영(양자의 영)이기 때문에 그 말씀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구원받고 거듭난 상태이다.

 


이렇게 복음 곧 아들의 영을 받은 우리를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셔서 인치시고 보증하심으로, 우리가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고(롬8:16) 또한 땅끝까지 예수를 증거하는 삶을 살도록 인도하시는 것이다(행1:8). 그러므로 로마서 8장 9절의 ‘그리스도의 영’은 ‘아들의 영’ 곧 복음을 말한다. 실제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요건은 성령을 받았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복음 곧 말씀 곧 아들의 영을 받았는가의 여부라는 사실은 신앙의 상식에 속한다. 


Ⅳ. 결 론 

1. 성령내주의 보편성 

구약시대에는 사사들이나 선지자들과 같이 제한된 사람들에게만 성령이 임하신 점(민11:16-17; 29), 특정한 목적을 위한 감화감동이었던 점, 경우에 따라 떠나기도 하였던 점(삼상16:13-14) 등등을 볼 때 대상의 제한성, 조건의 제한성, 관계의 제한성 등으로 말미암은 성령역사의 ‘특수성’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은 이 모든 면에 있어서 구약의 특수성에 대비된 ‘보편성’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누구나 죄사함만 받으면 성령의 거룩한 처소가 될 수 있으며, 우리 속에 완전히 내주하셔서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행2:17; 38-39). 구원의 보편성을 믿는 자는 똑같이 성령내주의 보편성을 믿어야 할 것이다. 구원의 현재성을 믿는 자는 똑같이 성령내주의 현재성을 믿어야 할 것이다. 이는 신학적인 이론이 어떻게 엮어져 있는가와는 무관한 진리이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살아 계신 약속이기 때문이다. 

2. 성령내주의 과정 

성령의 무궁무진하고 다양한 역사, 아니 그보다도 근본적인 절대주권자로서의 역사를 생각한다면, 인간이 그것을 법칙화해서 이해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제한적이요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도행전을 통하여 알게 해 주신 성령강림사건들은, 약간의 사소한 차이들을 제외하면, 성령이 내주하시는 일반적인 과정들을 보여주고 있다.

 


성령은 말씀을 듣는 자들을 외부에서 감화감동시키심으로 그 말씀을 받아 구원에 이르게 하고, 또 거듭나게 도우신다. 그리고 구원을 받아 거룩하게 된 사람 속에 내주하시게 된다. 이때는 다른 사람의 매개 없이 직접 임하시기도 하고, 사도들의 안수와 같이 다른 사람을 동원하시기도 한다. 이때 보이지 아니하시는 성령이 임하셨다는 표시로 방언을 말하게 하신다. 성령이 내주하시면 영원히 떠나지 아니하시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고 보증하시며, 또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도록 그 사람을 인도하신다. 

3. 우리가 어찌할꼬 

서론에서 언급한 것처럼, 성령이 내주하시는 시기에 관한 논쟁은 이론구성의 논리성 여부를 떠난 실제적인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즉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약속된 성령의 내주 및 그에 따르는 표적과 은사를 사모하고 환영하느냐 않느냐라는, 신앙생활에의 결정적인 차이를 가져오게 된다. 더 적나라하게 이야기한다면, 이러한 체험이 없는 사람이 그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동시설이나 절충설과 같은, 부정론에 근접한 견해 속에 안주하고 있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의 체험을 구체적으로 가진 사람들은 하나같이 구분설을 부담없이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믿음은 듣고 깨닫는 데 그치는 지식이 아니라, 듣고 깨달은 대로 행하는 삶이라는 근본원리를 돌아보고자 한다(행2:37). 
믿을 때에 이미 성령 받은 것이라고 굳이 우기는 것 자체가 큰 잘못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님이 약속하신 성령의 체험 앞에 교만하고 거짓된 태도를 고집하지만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가 어떤 견해를 주장하건, 사모하고 무릎끊는 심령 속에 성령으로 임하셔서, 풍성한 체험과 축복을 틀림없이 역사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적어도 성령론에 관한 한, 말씀이 울타리 쳐주신 범위 내에서는 얼마든지 약속된 것들을 제한없이 체험해야 하며, 그것만이 성령론을 언급할 만한 최소한의 자격요건이 아닐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알다’라는 히브리어는 바로 ‘체험하다’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불신자에게 구원론을 기대하지 않듯, 미체험자에게서 성령론을 기대하지 않는 것이 정상이다. 성령을 ‘아는’ 자 곧 성령을 ‘체험한’ 자의 더 확실하고 더 정확한 성령론을 고대하며 이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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