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4-01-01 15:19
[1]한국교회사 50대 사건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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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7,588  

한국교회사 50대 사건 개요

 

 

 1.1594년 초 기독교 성직자 세스페데스가 한국에 최초로 들어왔다.

 1592년에서 1598년에 끝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다. 이 전쟁 중에 처음으로 기독교와 관련을 맺게되며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첫째로 전쟁중 서양인 성직자가 최초로 들어오고 둘째로 전쟁 중에 한국인 포로 중에 상당수가 천주교 개종자가 나왔다.  조선 침략의 선봉장의 한 사람인 고니시 유키나가는 전쟁이 오래 끌자 본국에 예수회 신부들에게 종군 사제를 보내달라고 해서 스페인 출신의 예수회 신부 세스페데스와 일본인 수사 후칸 에이온을 조선에 파송했다. 세스페데스의 선교활동은 없었지만 조선인 포로들 중에 상당수가 개종자가 나왔고 순교에 이르는 자까지 나왔다. 임진왜란 중에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은 약 5만이상 추정되며 그중에 적어도 7천 명 가량이 천주교인으로 개종하였다.

 

  2. 1644년 소현세자와 선교사 예수회 신부 아담샬과의 교류

  1636년부터 10여 년 동안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볼모로 왕세자인 소현세자와 왕자 봉림대군을 데리고 갔다. 볼모로 잡혀 온지 7년째 되는 해에 그는 북경에 머무는 동안 예수회 신부 아담 샬과 사귀게 되었다. 중국 대륙을 통치하게 된 청도 예수회 중심의 천주교회에  대해 유화정책을 폈다. 이때 신부들은 볼모로 잡혀온 조선의 왕세자에게 관심이 깊었고 세자 역시 서구과학 지식에 관심을 두었다. 그래서 아담 샬은 조선 선교를 추구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소현세자의 북경체류가 짧아서 구체적으로 추진되지 못했다. 소현세자의 귀국으로 선교사들은 귀국하는 소현세자 일행 속에 교인을 배행시키는 방법으로 중국인 궁녀 감독관으로 선발된 환관5명을 교인들로 구성하여 1644년 11월 말에 북경을 출발하여 이듬해 2월 서울에 도착하였지만 귀국한 지 70여 일만에 죽고 말았다. 죽음의 원인이 북경에서 가져온 물품이 그 원인이라는 미신적인 소문이 퍼져 모든 물품을 불살랐고 중국인 궁녀와 환관들까지 본국으로 돌려보냄으로 조선 선교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3. 1770년 홍유한은 최초로 서학(천주학)이 요구하는 종교적 계율실천

  이벽의 제자인 홍유한은 영조 46년에 처음으로 천주학 서적을 얻어보고 그 이후로 7일마다 하루씩 노동을 금하고 기도와 금욕생활을 실천하였다고 한다. 보다 확실한 자료에 의해 밝혀진 신앙실천은 권철신, 정약용이 주도한 1777년 교리연구회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아침 저녁 기도, 주일의 노동금지, 금육재등 천주교계율을 지켜나가기 시작했다.

 

  4. 1783년(정조7년) 이승훈의 영세및 조선 천주교회 창설

  정조 7년에 이승훈의 아버지 이동욱이 동지사 서장관으로 임명되어 북경에 가게 될 때 이승훈도 가게되었다. 그래서 북경의 북천주당을 찾아 프랑스의 신부의 가르침도 받아 부친의 동의를 얻어 그라몽 신부에게 ‘베드로’란 영세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세례받은 이승훈은 북경에서 책과 십자가상과 상본등 천주교 성물을 선물로 받아 가지고 1784년 봄 서울로 귀환했다. 이벽은 이승훈으로부터 서적을 받자마자 외딴 집을 세내어 집중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후 천주교의 실체에 가까이 접근하여 이같은 체험의 바탕 위에서 조선 천주교회는 창설되었던 것이다.

 

  5. 을사추조적발사건(1785년 정조 9년)

  1785년 봄에 형조의 금리들이 우연히 김범우의 집을 지나다가 이상한 집회가 열리고 있음을 보게 되었다. 이 벽의 중앙에 앉아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고 있었고 이승훈, 정약전, 정약용, 그리고 3형제, 권일신, 권상학 부자 등이 모여 있었다. 또한 천주교 서적과 화상들이 있는 것을 보고 압수하여 형조에 갖다 바쳤다. 그래서 집주인인 김범우만 체포하고 나머지 양반계층 교인들은 풀어주고 김범우는 단양에 유배후 1년만에 죽음으로 “조선 천주교회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그후로 천주교가 배척당하기 시작했다.

 

  6. 진산사건(신해박해) ,1791년 정조15년

  윤지충은 진사 시험에 합격한 양반계층 신분으로 1784년 서울에 갔다가 김범우의 집에 들러 《천주실의》와 《칠극》을 얻어 고향에 돌아와 그의 외종형되는 권상연과 함께 서학을 연구하던 중 둘이 입교하였다.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은밀하게 신앙을 유지했고 1790년 말 윤유일을 통해 전달된 북경주교의 조상제사 금지령에 따라 조상제사를 폐지하고 그 신주들을 땅에 묻었다. 그러나 1791년 여름 그의 어머니 권씨가 별세하게 되었는데 상례에 제사를 지내지 않고 신위마저 만들지 않은 것이 중앙에 알려져 윤지충과 권상연은 진산군수에게 체포되어 “멸륜패상”, “무군무부”의 난행을 범한 죄목으로 사형이 선고되어 1791년 12월 8일(음 11월13일) 전주 풍남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7. 신유박해(1801년1월10일, 음력)

  1799년 정조가 승하하고 뒤를 이어 순조가 즉위했으나 나이가 11세에 불과해 순조의 증조모이자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노론 벽파에 속한 정순왕후는 남인시파에 눌린 한을 풀기 위해 야기된 정치적 갈등의 배경에서 신유박해로 표현되는 천주교 박해가 1801년 대규모 교난사건이었다. 1800년 11월 하순 국장이 끝나자 1801년 1월10일(음)에 각 고을 수령들에 오가작통의 법을 만들어 다섯가정이 서로 감시하게 하여 사학을 따르는 자가 있으면 수령에게 보고하여 개심케 해야하고 그래도 말을 안 들으면 국법이 있으니 싹도 나지 않게 뿌리 뽑아 버리라는 지시를 하였다. 이때 이가환,정약용, 이승훈, 홍낙민, 권철신, 홍교만, 정약종등이 체포되어 참수되거나 유배되고 옥사 당했다.

  많은 사람이 순교 당하자 주문모 신부는 교인들이 피해를 줄일 목적으로 의금부에 자수하자 그 동안의 행적이 밝혀져 그를 숨겨주거나 도와 주었던 사람들이 처형 당하는 엄청난 박해가 일어났으며 이때 희생된 천주교인의 수는 3백명이 넘는다.

 

  8. 기해박해(1839년, 헌종 5년)

  이지연을 비롯한 풍양조씨 세력이 순원왕후에게 천주교 처벌을 끈질기게 요구하여 이를 물리치지 못한 순원왕후의 박해령 포고로 시작되었다. 오가작통법 실시를 골자로 한 이 교서가 발표되면서 전국적으로 교인 체포가 실행되고 잡혀온 교인들에 대한 심문과 처형이 실시되었다. 5월24일 남명혁, 권득인, 이광헌, 박희순, 이아가다, 김업등이 처형되고 김순성이란자가 배교함으로 많은 사람이 체포되고 앵베르 주교까지 체포되고 모방?샤스땅 신부도 자수하여 체포당했다. 세명의 신부는 심문을 받은후 9월21일 새남터에서 처형되었다. 그 이튿날에는 장하상, 유진길이 서소문 밖에서 처형당했고 그외에도 많은 사람이 처형당했다. 그해(1839) 11월에 정부는 <척사윤음>을 반포하여 정부 처사의 정당성을 백성에게 선전하였다. 이 무렵에 기록된 《기해일기》에 따르면 참수된 순교자가 54명, 옥중에서 죽은 자가 60여명에 이르며 배교하고 석방된 자가 4,50명에 이른다.

 

  9. 병인박해(1866년, 고종3년)

  병인박해는 종래 천주교 박해의 원인이 되었던 다양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이루어졌다. 또한 정치 세력간의 갈등에 의한 정치적 요인에다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에 의한 위기의식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일어난 박해였다. 앞에 있었던 박해는 1, 2년 사이에 마무리되었으나 병인박해는 1866년에 시작되어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할 때까지 무려 8년간 계속되었으며 그 범위는 한반도 전역에 미쳤으며 8년간 순교한 교인 수는 대략 8천-2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박해가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천주교회가 한반도 전역에 넓게 확산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10. 토마스와 제너럴 셔어먼호 사건(1866년 9월2일 토마스목사는 27세에 순교)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펴고 있는 동안 한국 개신교사에서 ‘첫 순교’의 영광된 자리를 차지한 영국의 선교사 토마스목사이다. 그들이 타고 온 선박의 이름을 따서 ‘제너럴 셔어먼호 사건’ 이라 한다.

 

  토마스는 북경에 체제하면서 조선의 동지사와 친숙한 교제를 나누었고 기회만 되면 한국에 가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우연히 제너럴 셔머언호가 한국을 향해 떠난다는 것을 알고 복음을 전할 목적으로 승선하였다. 이 배는 미국 프레스톤 소유로서 중무장한 일종의 상선이었다.

 

1866년 8월 9일 지푸를 떠나 한국을 향했다. 대동강을 통하여 평양 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한국측과 긴장이 고조되었고 통역으로 승선한 토마스는 한국의 문정관에게 목적지는 평양이며 통상을 원한다고 하고 천주교인 학살을 문책하기도 하면서 그들이 목적이 야소교를 전파하려는 데 있음도 밝혔다. 처음에는 양식과 땔감을 요구하던 그들에게 친절을 보이던 한국측도 중군 이현익을 억류시키고 제너럴 셔머언호에서 대완구와 조총을 쏘아대자 평양성의 백성들과 장졸들은 강변에 운집하여 중군을 방면을 요청하는 한편 돌덩이를 던지며 활과 총을 쏘았다. 며칠동안 더 버틴 제너럴 셔머언호는 양각도 모래톱에 좌초되고 토마스 일행은 배에서 내려 살려 달라고 했으나 분격한 군민들이 그들을 결박, 타살하니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1866년 9월2일 토마스는 27세의 나이로 평양의 대동강 가에서 피를 흘렸다. 이때 토마스에게서 한문 성경을 받았던 한 사람이 뒷날 선교사 마펫을 찾았다는 일화는 그의 최후가 어떠했으리라는 것을 암시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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