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무드에서 배우는 목회의 지혜를 주제로 글을 좀 써보라는 부탁을 받았다. 막막한 심정으로 며칠을 생각하다가 우선은 고난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목회의 현장은 어찌 보면 고난의 장소이다. 고난을 이해하는 자세에 따라서 목회의 모습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고난에 대해서 말하려니 시작부터 고난이다. 조금 딱딱한 이야기로 서두를 꺼내보자.
이스라엘은 고대 역사와 근세사에 있어서 고난과 대단히 가까운 거리를 유지한 민족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도 그러하지만, 팔레스틴이 갖는 지정학적 의미가 강대국과 몸을 부대끼며 살아야만 하는 틀 속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고난은 유대인들의 삶 속에 들러붙어 있어서 떼어낼 수 없는 상흔 같은 것이 되었다. 따라서 삶 속에서 고난을 이해하고 해석해온 노력이 곧 그들이 역사 속에서 걸어온 발자취가 되었으며, 우리는 그 발자취를 성경과 후기 유대주의(the Rabbinic Judaism)의 문학작품인 미쉬나(Mishna), 탈무드(Talmud) 그리고 미드라쉬(Midrash)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조금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바벨론 포로(주전 587년)와 제 이 성전 파괴(주후 70년)가 고대 이스라엘 국가가 체험한 대표적 고난이라고 할 수 있다. 바벨론 포로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들이 가지고 있던 선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의심하도록 한 사건이며, 제 이 성전 파괴는 이러한 의심을 구체화하도록 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다.
기독교인들은 이 두 사건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더 이상 유대인에 의한, 또 유대인들을 위한 그리고 유대인들만의 ‘선민’은 없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이 사건들을 그들로부터의 ‘선민박탈’의 계기로 삼았으며, ‘진정한 이스라엘’(Verus Israel)은 영적으로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신들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기독교인들의 생각은 유대인들을 대단히 괴롭게 했다. 다시 말해서 이 위기를 제대로 넘기지 못하면 그들의 역사와 삶이, 그리고 종교적 전통이 끝장을 볼 수도 있는 상황이 되었다. 심사숙고 끝에 그들은 이 두 사건을 하나님과의 관계의 종말로 보지 아니하고 일종의 ‘잘못을 수정할 수 있는 계기’(the corrective moment)로 삼기로 했다.
그 결과로 주후 70년 이후에 자치권의 상실과 더불어 성전파괴로 인해서 지도층이던 제사장 계급이 몰락한 팔레스틴에 새로운 지도력이 탄생했다. 바리새 전통을 지닌 랍비들과 서기관 계급이 새로운 중심 세력으로 부상했으며 요하난 벤 자카이(Yohanan Ben Zakai)가 그 핵심에 있었다. 이들이 일으킨 새로운 고난 이해 운동은 얌니아(Jamnia)를 중심으로 해서 흥왕하여 예루살렘 탈무드(Yerusalmi)와 미드라쉬(Midrash)를 열매로 남겼다. 또한 주후 135년에 일어난 바르 코흐바(Bar Kochba) 폭동 이후 바벨론으로 이주한 랍비들은 후기 유대주의 역사에 있어서 팔레스틴을 능가하는 역할을 해냈으며 이들에 의해서 오늘날 우리가 소위 탈무드라고 줄여서 말하는 바빌론 탈무드(Babylonian Talmud)가 탄생했다.
그리고 이 탈무드는 오늘날까지 살아서 유대인들의 정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들이 고난에 부딪힐 때 마다 그것을 넘어서게 하는 지혜와 종교적 전통의 창고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조금 장황하게 설명했다 싶지만, 이 이야기를 약간 끌어 당겨서 오늘의 삶 속으로 던져 넣는다면 어떨까. 고난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이 역사의 방향과 질을 결정한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인다면 과장이 심하다 하겠는가.
국가이든, 개인이든... 모든 종류의 삶에는 고난이 있다. 특히 목회의 현장이라는 것이 불가능한 일들을 이루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착각 내지는 착시가 가득한 곳이라고 한다면, 고난의 일상성은 피할 수 없는 것일 수밖에 없겠다. 그렇다면, 고난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것이 결국은 그 목회현장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 아니겠는가. 고난을 끝이요 종말로 이해하면 목회도 거기서 막을 내리는 것이고 이것을 교정을 통해서 새로이 시작할 수 있는 기회로 삼는다면 거기서 예기치 못했던 열매의 맛을 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싶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려움 속에서 늘 십자가를 지되, 잘 지다보면 힘줄도 튼튼해지고 근육의 양도 늘어서 목회의 수명을 늘이는데 혹여 도움이 될까 싶어 하는 말이다. 다음 주부터는 탈무드의 내용 속으로 들어가서 그 내용을 몇 가지 살펴보면서 보다 구체적인 도움을 받아볼까 한다. 기대해 주시기를 바란다.
창세기 22장을 보면 참 불가사의한 사건이 하나 소개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신 사건이다. 이 사건의 불가해성은 ‘하나님의 자해’가 이 일 속에 두드러 진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보면 그저 아들 하나 잃고 대가 끊기면 그뿐이다. 그러나 하나님 입장에서는 어떤가? 구속사가 폭삭 주저앉을 판이다.
이삭이 죽으면 이스라엘도 없고 이스라엘이 없으면 다윗왕도 없으며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오실 육신의 자리도 없어지는 셈이 되지 않겠는가. 이쯤 되면 자해도 보통 수준을 넘는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이해를 넘어선 주문을 하고 있다. 탈무드의 전통과 미드라쉬의 전통은 이 사건을 ‘아케다’로 총칭해서 부른다 ‘묶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에서 비롯된 표현이다.
랍비들이 쓴 창세기 주석서인 ‘브레쉬트 라바’를 보면, 대단히 독특한 해석이 그 안에 담겨있다. 보통 아들 사랑이 겉으로 치열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비의 경우보다 어미의 경우가 더 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창세기 22장에는 사라가 이름이 그래서인지 사라지고 없다. 아들이 죽으러가는 판국인데 어미가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랍비들은 그들의 글에 사라를 등장시킨다. 조금 설명하자면 이렇다. 아브라함이 이삭과 함께 없어진 후에 사라에게 사탄이 변장하고 나타난다. 별일 없이 손님을 맞는 사라에게 사탄은 네가 사랑하는 하나님이 이삭을 바치라고 해서 아브라함이 끌고 갔다고 일러바친다. 그 순간 사라의 심장이 터진다. 심장이 터진 인간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은 자명한 노릇이다. 거기서 사라는 정말로 ‘사라’진다.
그러면 이야기의 끝은 어떠한가. 물론 하나님이 이삭을 건지실 뿐 아니라, 다시 사라도 살려주신다. 그야말로 자식과 어미가 함께 부활하여 구원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리하여서, ‘아케다’의 결말은 ‘회복’이며 ‘구원’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구속사가 망가질 위험까지도 감수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가르치려 하셨던 것은 바로 구원의 은혜였다. 절대절명의 위기와 고난에서 아브라함을 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을 지탱케 하는 힘이라고 하는 것이다. 결국 옛날 유대의 랍비들은 자신들의 몰락을 이삭의 고난에 비유하고 종내는 하나님이 그들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아케다’의 사건을 통해서 조명하고 확신한 것이다.
목회의 사역에서 목회자들은 절대절명의 위기를 경험한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말씀이면 꺼뻑 죽는 시늉이라도 하면서 충성하고 순종했는데도 아들을 내어놓아야 하는 것 같은 고난이 올 때가 있다. 하나님이 나를 망가뜨리시면 그 분의 교회가 무너질 판인데도 하나님은 눈 하나 깜짝 않으시고 목회자들을 얼굴색이 죽어가도록 내모시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 바로 그런 상황에서의 구원은 하나님에게서만 온다는 것을 알기 원하시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더욱 더 역설적으로 하나님께 매어 달려서 내가 죽는 길이더라도 순종하는 그런 철저한 삶을 살라고 하시는 것은 아닌가 싶다.
이야기를 조금 더 발전시켜보자. ‘아케다’ 이야기 속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향하여 고개를 돌려 구원을 베푸셨다. 그런데 때로 목회의 현장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의 외면’이다. 좀 해피 엔딩이면 좋을 텐데 우리가 걸어가는 길에서는 해피 엔딩이 그리 흔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님이 외면하신다고 나도 외면하고 이 길을 그 자리에서 ‘홱’ 소리나게 접을 것인가. 어쩌면 하나님은 오늘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에게 아브라함보다 더 큰 순종의 요구를 하시는지도 모르겠다. 하나님이 외면하시더라도 눈물을 흘려가면서 우리가 끝내 머물러야 할 곳은 하나님의 섭리와 그 분의 뜻이 아니겠는가. 영광스럽게도 아브라함이 겪었던 것보다 더 큰 도전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깊은 뜻은 어디에 있는 것인지 늘 궁금하기만 할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