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4-08-22 20:01
현 시대에 맞는 전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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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337  

현 시대에 맞는 전도법

- 지상 명령 성취를 위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범죄하기 이전의 사람들로 땅을 가득 채우라는 명령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그 명령은 수행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부르시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으리라(창 12:3)"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를 통하여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9)"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박국을 통하여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합 2:14)"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갈릴리의 한 산에서 열한 제자들을 만나십니다. 그들에게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라(마 28:19)"고 명령하십니다. 지상 명령입니다. 예수님의 지상 명령은 창조 때에 범죄하기 이전의 사람들로 땅을 가득 채우라는 말씀과 같은 의미입니다. 아브람에게 주신 말씀, 이사야, 하박국을 통하신 말씀과도 같은 의미입니다.

교회의 수고와 현실


지상 명령을 믿음으로 받은 교회는 지금까지 나름대로 그 명령을 준수하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시대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났습니다. 때로는 창칼을 들고 위협하며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강요하기도 했습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에게도 지상 명령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성취하여야 할 과업입니다. 그렇지만 현실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아니 너무 어렵고 힘듭니다. 몇십 년 전에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외침만으로도 복음을 받아들이는 결실을 맺었는데, 지금은 전혀 아닙니다.

그 시대의 사람들에 비해 이 시대의 사람들이 완악하여져서 그렇게 되었을까요? 경우에 따라서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여지가 없진 않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그 시대에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근원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존재라는 사실에 있어서 차이가 없습니다. 복음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 시대에나 지금이나 여전히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 시대에 비하여 지금 시대의 사람들이 과학과 지성에 있어서 발달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 한반도 안에서만 살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전 세계의 문화를 접하며 살고 있습니다. 몸이 한반도를 벗어나지 않더라도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를 경험하며 살 수 있습니다.

경제적인 면에 있어서도 너무나도 발전하였습니다. 이전에는 예수님을 믿으면 잘 먹고 잘산다는 말이 강하게 통용되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예수님과 아무런 상관없이 잘 먹고 잘살 수 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믿으면 잘 먹고 잘사는 데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형편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으면 잘 먹고 잘산다는 주장 자체가 성경의 가르침도 아닙니다. 구약성경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읽지 않아 나타난 잘못입니다. 신약성경의 진술을 오해하여서 나타난 잘못입니다.

이 시대의 특징

현대인들은 이전 시대와 달리 감성과 소통을 중요시합니다. 설득과 수긍이라는 방식에 대해 불편해하거나 거부합니다. 오늘날의 대세인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은 감성과 소통의 방편입니다.

전도가 시대의 특성을 읽지 못하고 과거의 방식을 답습하면 효율적일 수가 없습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방식을 고수하면 거의 효과를 얻지 못합니다. 오히려 복음에 대한 거부감만 키우게 됩니다. 비록 그 당사자들의 열정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로 인한 부정적인 영향력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결실보다도 훨씬 큰 부정적인 영향력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과거에는 캠퍼스에서 4영리를 들고 복음을 전하면 많은 학생들이 들었습니다. 적지 않은 학생들이 영접 기도까지 따라 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아예 들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현대에는 현대인에게 맞는 효율적인 복음 전도 방식을 찾아야 합니다.

복음과 소통

하나님께서는 소통을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삼위 간에 완전한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너무나 완벽하여서 조금의 분리가 없는 소통입니다.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강제적이지 않습니다. 성육신은 성부의 뜻을 받아들인 성자가 자발적으로 따른 결과입니다. 비록 그 고통이 너무나 격심하여 피하고만 싶었던 십자가 죽으심도 예수님이 자발적으로 선택하신 결과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완벽한 소통으로 서로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과의 소통을 너무나도 중요시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한 구속 역사는 그 증거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요구를 담고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소통의 방편이 담겨 있습니다. 기도와 말씀으로 거룩해지는 것도 하나님과 신자 간 소통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본받는 신자, 예수님을 닮아 가는 신자,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는 신자에게 있어서도 소통은 중요합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은 사람과의 사랑으로 온전하게 됩니다.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까지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쌍방 간의 사랑은 소통을 담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착한 일을 하라고 권하였습니다. (갈 6:10) 착한 일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소통이 담겨 있습니다.

소통이 이루어지는 전도 1


얼마 전에 가정 교회를 지향하는 한 교회의 담임목사님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한 목장에서 이루어진 일을 언급하십니다. 한 목원이 시부모님이 시골에서 서울의 아들 집에 오시는데 고민이라는 것입니다. 아들에 대한 자부심이 너무 강하시고 모시기에 어느 정도 까다롭고 어렵다는 것입니다. 목자가 듣고 목장에서 돕기로 결정합니다. 시부모님들이 오시는 역에 최고의 자가용을 가지고 가고 환영 플래카드까지 펼치고 맞이합니다. 집에서는 목원들이 함께 시부모님이 좋아하시는 음식을 장만하였습니다. 교회 생활에 대해 부정적이시기에 같은 아파트에 사는 이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서울에 계시는 동안 시부모님이 좋아하시는 장소로 모시며 관광합니다. 애교와 즐거운 대화 그리고 식사 시간을 가집니다. 저녁에 집에 들어오시면 웃음이 가득하게 됩니다. 아들도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부모님이 즐거워하시는 모습을 보게 되어 기분이 좋습니다. 시부모님들이 내려가실 때에는 교회의 식구임을 알게 되었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그 남편이 교회 예배에 참석하고 함께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나 현대에나 변함없이 통용되는 전도 방식입니다. 희생과 헌신에 기초한 사랑 실천은 어느 시대에나 통용됩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목숨을 내어주시는 사랑을 경험한 교회가 그 사랑에 감사하며 감격하고 그 사랑으로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것입니다. 이는 어느 시대에나 통용되는 전도 방식이지만 이 시대에는 특별히 중요합니다. 사랑을 통한 소통이 없이는 복음에 대해 아예 반응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병원 원목을 그만두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병원에서 안내와 경비를 담당한 보안 요원들에게 알리고 인사했습니다. 놀라면서 너무 섭섭해하십니다. 저를 보면서 심적으로 힘든 그 일을 함에 있어서 위로와 힘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한 분은 눈물이 나려고 한다고까지 말씀하십니다. 평소에 제가 별다르게 한 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나면 꼬박꼬박 인사를 드렸습니다. 필요가 생기면 언제나 정중하게 부탁을 드렸습니다. 식사 때에 같은 자리에 앉아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을 뿐입니다. 그분들의 반응에 제가 위로를 받았습니다.

현대에는 쌍방향의 소통을 바탕으로 효율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이전과 같이 모르는 이들에게 복음이라며 하는 말이 쉽게 수용되지 않습니다. 우리 편에서 무엇인가를 베푼다는 식의 전도는 거의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평소의 인간관계가 중요합니다. 이전에는 신앙생활을 하면 주위의 비신자인 친구들과 관계를 단절하여야 하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면이 있습니다. 복음 전파를 생각하면 지양하여야 하는 잘못된 분위기입니다. 그 관계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합니다. 평소의 언행으로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하는 것입니다. 쌍방향으로 소통이 이루어지면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인격과 삶이 중요합니다.

소통이 이루어지는 전도 2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만나 사귀면 양자가 별다른 차이가 없습니다. 주어진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큰 차이가 없습니다. 성품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착한 사람, 나쁜 사람의 빈도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신자나 비신자나 이혼율에 있어서 차이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에 대해 대한민국에서는 개독교라고 부르며 거부감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습니다. 신자들에게 대해 보수 꼴통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거부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자연히 복음에 대해서도 거부감이 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을 말하는 사람과 복음을 함께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 원인을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민주 사회의 민주 시민 의식과 연관됩니다. 깨어 있는 민주 시민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민주주의의 가치를 이해하고 그 실현을 위해 깨어 있는 시민을 가리킵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개신교는 여기에서 제외됩니다. 오늘날 개신교가 이 면에 있어서 매우 뒤떨어져 있습니다. 개신교 장로인 이명박 대통령이 이끄는 현 정부는 대표적입니다. 민주주의의 가치들을 노태우 정부 때로 후퇴시켰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자유, 평등, 평화, 정의, 인권, 복지, 환경이라는 민주주의의 가치들을 단 하나의 예외가 없이 과거로 후퇴시켰습니다.

기독교가 마땅히 가야할 길을 가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기독교는 하나님나라와 그 의를 추구하여야 합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다양하게 말할 수 있지만 민주주의의 가치와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자유, 평등, 평화, 정의, 인권, 복지, 환경이라는 가치들을 온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우리의 현실에서 민주주의의 가치들을 온전하게 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개신교의 현실은 하나님나라에 대한 이해 부족입니다. 안타깝지만 잘못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기독교가 추구하여야 하는 진정한 삶은 그 가치들을 지금보다 더 온전하게 하는 것임을 말하고 실천하여야 합니다. 기독교인은 현실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른 것을 더 온전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면에서 진보일 수밖에 없고 진보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깨어 있는 민주 시민보다 더 앞서서 그들을 이끌어 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와 그 의를 구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름대로 깨어 있는 민주 시민을 지향하는 비신자들과 만납니다. 이 부분에 대해 말했습니다. 공감합니다. 그러한 기독교라면 좋겠다고 반응합니다. 목사로서 저에 대해서도 좋게 생각합니다. 존경을 표합니다. 민주주의의 가치와 그 실현을 위한 생각과 삶에 대한 존경입니다. 일단 호의적이기에 복음에 대해서도 말하기가 훨씬 좋습니다. 복음 전파에 호의적인 토양을 갖추는 것입니다.

보수 개신교에 이런 면에 대한 의식이 거의 없거나 매우 일천합니다. 한 목사님과 복지를 주제로 대화하였습니다. "목사님, 기독교는 잘 먹고 잘사는 것을 추구하는 종교가 아니지 않습니까?" 잘 믿으면 잘 먹고 잘살게 된다는 거짓 복음에 빠져 있지 않은 모습은 긍정적입니다. 반면에 복지에 대한 이해는 갑갑한 수준입니다.

"복지는 잘 먹고 잘살자는 것이 아닙니다.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생활비로 고통을 당하는 이들을 최소화하자는 것입니다. 최저 생활의 수준을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끌어올리자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각자 소유를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고 내어놓았고 서로 나누어 핍절한 신자가 없었습니다. 그 원리를 국가에 확장하여 적용하자는 것입니다."

복지에 대한 오해는 교정되었는데, 정당의 존재 목적이 정권 창출인 한에는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북구 유럽의 경우에도 정당의 목적은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곳에서는 복지를 실현하고 있습니다. 부자들이 기꺼이 더 많이 세금을 내어 최저 생활수준을 최대한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북쪽의 북조선과 대치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침략으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겪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부분에서 위협은 현재형입니다. 기독교의 입장에서 반공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렇지만 적절하고 정당한 수준이어야 합니다. 과도한 반공에 사로잡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박애를 저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대한민국은 과거에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해방 이후에 친일파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고 여전히 기득권을 유지하였습니다.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역사를 왜곡시키고 그것을 교육해 왔습니다. 그 방편으로 반공을 악용하였습니다. 민주주의의 발전을 꾀하지만 자신들의 입장에 맞지 않다 싶으면 빨갱이라고 몰았습니다. 요즘은 포퓰리즘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있습니다.

목회자들의 의식이 바뀌어야 합니다. 대한민국에서 대한민국의 국민들에게 복음을 전하여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성숙해지는 신앙인과 깨어 있는 민주 시민의 연관성을 바르게 직시하여야 합니다. 근대사에 대한 이해를 갖추고 잘못된 교육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지체들을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깨어 있는 민주 시민보다 더 깨어 있는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세워 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나라를 구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지금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사회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현재를 지키려는 보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이 더 온전해지도록 하는 진보입니다. 보수 꼴통, 개독교라는 딱지를 뗄 수 있어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예

예루살렘 교회는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 교회의 사랑은 각별하였습니다. 자신들의 소유를 팔아 유무상통하면서 핍절한 사람이 없도록 하였습니다. 그들 안에서는 모두가 형제였습니다. 사회적인 신분이 어떠하든지 교회 안에서 모두가 형제였습니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않았습니다. (히 13:2) 갇힌 자를 생각하고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였습니다. (히 13:3) 결혼을 귀히 여기고 가정을 아름답게 세움에 있어서 힘을 다했습니다. (히 13:4) 돈을 사랑하지 않고 있는 바를 족하게 여겼습니다. (히 13:5) 그 당대의 일반적인 모습에 비하여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노예제도가 있던 때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이 되면 모두가 한 형제라는 것은 파격적이었습니다. 그 당대의 일반적인 인식이나 관습과는 비교할 수 없이 진보적이었습니다. 인종과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형제라는 것은 파격적인 진보였습니다.

초대교회에 복음이 그렇게도 힘 있게 전파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서로 간에 사랑하며 교회 밖의 사람들을 사랑하였습니다. 사회적인 상황에 비추어서 윤리적으로 더 나은 모습을 유지했습니다. 인권에 있어서는 파격적인 진보였습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이 볼 때에 경이로움을 가지게 되는 요소가 있었던 것입니다.

결론


예수님의 지상 명령을 수행하고자 한다면 현 시대를 바르게 성찰하여야 합니다. 현대인들의 코드를 읽어야 합니다. 이 시대에 가장 적합한 전도 방식을 찾아야 합니다. 복음의 본질은 변하지 않지만 그 복음을 담는 그릇은 변하여야 합니다. 과거를 답습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대한민국에서 더 깨어 있는 민주 시민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민주주의의 가치와 하나님나라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추고 하나님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우리 안에서 더 깊고 넓고 높게 길게 경험하여야 합니다. 그 사랑으로 비신자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예수님의 지상 명령이 이 시대에 조금이라도 더 온전하게 이루어지도록 하는 길을 찾아가야 합니다. 감성과 소통이라는 현 시대의 코드를 가장 잘 활용하여 복음을 전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따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를 더 풍성히 맺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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