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3-05-23 20:57
2.십계명/아더 핑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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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1,428  

제 5 계 명

부모를 공경하라는 이 계명은 첫눈에 얼핏 보이는 것보다 그 의미의 범위에 있어서 훨씬 광범위하다. 그것은 문자적인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윗사람에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 계명을 주신 목적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보존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그에 의해서 제정된 우열의 순위가 신성하게 보존되도록 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의 요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감독하기 위하여 높이신 자들을 우러러보고, 그들을 존경하고 순종하고 감사의 뜻을 표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 계명(복종해야 한다는)은 인간 본성의 타락으로 볼 때 극히 모순된 것이니 이는 스스로 높아지고자 하는 욕심에 부풀어 있기 때문에 스스로 종속적인 지위에 있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나면서부터 가장 사랑할만하며 가장 공평한 즉 윗사람과 같은 것을 실례로 들어서 인간들의 마음을 보다 쉽사리 달래고 복종하는 습성을 키워주도록 해주신 것이다.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우리시대의 악한 영이 되어 불순종과 불법을 조장하지만, 우리는 이 계명의 광의의 해석에 대하여 의의를 제기하지 않도록 다음의 몇 가지를 고찰하여 생각하겠다.

첫째, “공평”이라는 것은 원칙적으로 하나님께 속한다.
둘째, 파생된 의미로 그것은 하나님께서 권위를 부여하시고 존귀하게 한 사람들에게 속한다. 그는 그러한 자들을 다른 사람들 위에 높여서 칭호를 부여하시고 사람들을 지배하게 하신다. 우리는 이들을 우리의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하는 것과 똑같이 존경해야 한다. 성경상에서 “공경”이란 말은 디모데전서 5장 17절, 베드로전서 2장 17절 등등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광범위하게 적용된다.
이와 같은 이유로 해서 주님께서 보편적인 규범을 제정한 사실에 대하여는 의심할 여지가 없어야 하겠다. 즉 주님께서 우리 위에 감독자로 세운 사람에 대하여 존경과 순종과 감사를 돌리고 그에 대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봉사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들 윗사람들이 그러한 존경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냐 없느냐는 별개 문제이니 나는 그들이 어떠한 인물이든 간에 그들의 지위가 하나님의 섭리를 통하여 얻은 것이요, 입법자 자신이 그들을 존경하도록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를 세상에 태어나게 해준 우리 양친을 존경하라고 분명히 명한 것이다. 여기에 강조된 의무는 손아래 사람과 손윗사람에게 서로 부합하는 의무를 의미하는 상호관계성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다만 제한된 지면으로 여기에서 고찰하고자 하는 것은 지배자에 대한 피지배자의 의무만을 말하고자 한다.

첫째, 부모에 대한 자녀의 의무를 살펴보자.
자녀들은 그들을 낳은 부모라는 점에 있어서 노여워하는 것을 두려워함으로 마땅히 부모들을 사랑하고 존경해야 한다. 참다운 효성은 자녀들을 교육시켜 부모를 슬프게 하거나 노엽게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자녀들은 부모들에게 순종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남겨놓으신 복된 모본을 살펴보자(눅 2:51).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들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골 3:20) 다윗은 왕위로 기름 받은 후에도 자기 아버지가 맡긴 양치는 일을 했다. (삼상 16:19)
자녀들은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아비의 거룩한 행실을 본받아 행해야 된다.(잠 6:20) 부모의 언행은 언제나 존경받아야 하고 부모의 몸가짐은 언제나 자녀로 순종케 해야 한다.
요셉은 애굽에서 그렇게 높은 자리에 올랐지만 그의 아버지 앞에서는 그의 얼굴을 땅에 대고 절을 했다.(창 48:12) 솔로몬 왕이 그의 어머니를 얼마나 공경했는지를 보아라. (왕상 2:19) 자녀들은 될 수 있는 한 부모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보살펴야 한다. (딤전 5:16)

둘째, 하나님이 우리 위에 세우신 통치자나 다스리는 자들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살펴보자.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권위를 부여받은 하나님의 대행자요, 대권 자들이다.
“나(여호와)로 말미암아 왕들이 치리하며 …”(잠 8:15).
하나님은 인간들이 서로 간에 물고 뜯는 야수 같은 짐승들이 되지 않도록 인류의 보편적인 선을 위하여 국가라고 하는 권위를 제정하셨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들이 치안관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들이 일시적인 형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며 그래서 우리는 사자나 호랑이 같은 사람들 중에서도 안전하게 되는 것이다.
다스리는 자들은 땅 위에서 하나님의 공식적인 대행자로 간주되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 속에서 마땅히 존경받아야 된다. (전 10:20, 롬 31:1 이하, 행 23:5)
우리가 말을 할 때에도 그들의 직무와 권위를 높여 줌으로 존경해야 하는데 이는 성경이 약한 자들에 대해서 “그들은 권위자들에 대해 악한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벧후 2:20) 라고 밝혀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인간들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악행하는 자들을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칭찬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벧후 2:13,14)
우리는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를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해야”된다. (롬 13:7) 우리는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할 것이다. (딤전 2:1,2)

셋째, 우리는 주인에 대한 종의 직무를 살펴보자.
그들은 주인에게 복종해야 한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골 3:22).
그것은 “모든 선한 충성을 보여서”(딛 2:10) 주인의 이익을 얻게 해주기 위해 의무를 부지런히 감당해야 한다.
그들은 주안에서 “거스려 말하지 않음으로”(딛 2:9) 책망과 바르게 함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종들로 그들의 주인들에게 묵묵히 순종하라고 엄히 명령하셨기 때문에 종들이 하등 책망 받을 이유가 없더라도 주인의 근거 없는 노여움을 인정해야 한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애매히 고난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니라.”(벧전 1:18-19)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하신 거룩한 표준에서 얼마나 멀리 떠나가 버렸는가!

마지막으로 우리는 목자와 양떼 즉 사역자와 그의 교인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왜냐하면 그들 사이에도 5계명이 보여주는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개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 13:7)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권능으로 옷 입혔기 때문에 “너희에게 듣는 자는 나에게도 듣는 자요, 너희를 멸시하는 자는 나를 멸시하는 자다.”(눅 10:16) 라고 선포하신 것이다.
또 다시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딤전 5:17) 여기 “배나 존경”이라는 말은 존경을 하되 계속하라는 뜻이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 6:6 그리고 고전 9:11은 참고)

다음 경고는 얼마나 엄숙한 것인가.
그 백성이 하나님의 사자를 비웃고 말씀을 멸시하며 그 선지자를 능욕하여 여호와의 진노로 그 백성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둘째, 윗사람에게 순종하고 거룩한 생활을 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신약에서도 이 약속이 강조된다. (엡 6:2,3; 벧전 3:10)

셋째, 지상의 축복에 관한 모든 약속들은 반드시 다음의 조건들을 만족시켜야 한다. 즉 약속들은 아무리 영원한 축복이 있다 해도 현 세상에서 문자적으로 성취되어야만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그것은 약속이 아니라 위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가끔 그의 자비하신 은총 속에서 이 약속을 단축시켜서 그의 사랑하는 자들을 천국으로 데려 가신다.

제 6 계명

“살인하지 말지니라.” (출 20:13)

첫 다섯 계명들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지키시는가를 보았다.
둘째 다섯 계명들에서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안녕과 복지를 제공하시는가를 보게 될 것이다.
(1) 인간 인격의 보호 (“살인하지 말지니라.”)
(2) 가정의 신성함과 행복 (“간음하지 말지니라.”)
(3) 재산과 물질의 보호 (“도둑질하지 말지니라.”)
(4) 명예와 평판의 보호 (“너는 너의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말지니라.”)
(5)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십계명 전체에 튼튼한 담을 두름으로서 외부적인 죄를 금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감정 속에 있는 내부적인 악의 움직임까지도 금하신다. (“너는 탐내지 말지니라.”)

이제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첫 번째 내용은 “살인하지 말지니라.”라는 것으로서 이웃과 관련시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제 6계명은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살인죄를 금지한다.
왜냐하면 이 살인은 “처음부터 살인하는 자”(요 8:44)였던 마귀의 장자이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첫 번째 범죄가 바로 그것이다.
그들의 후손에게 전가된 부패성은 가인으로 말미암아 처참하게 저질러진다.
가인의 증오와 원한은 그로 하여금 동생 아벨을 죽이게 충동했는데 이는 “동생의 행위가 의로웠고 그의 행위는 악했기” 때문이었다. (요일 3:12)
그러나 이 계명은 실제적인 살인행위만을 금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급한 분노, 증오, 비방, 원한과 같은 모든 살인의 원인을 금하며 그밖에 우리 이웃의 안전을 해치는 무엇이든지, 이웃을 구해서 살릴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있는데도 죽어가게 버려두는 무엇이든지 금지한다.

사람을 죽인다는 모든 행위가 살인이 아니라는 것을 제시하고자 한다.
재판관이 살인자에게 사형선고를 할 때 합당한 권위로서 사형이 집행되기 때문에 살인이 아니다. 만약 재판관이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그를 죄로 벌하실 것이다.
“사람의 피를 흘린 자마다 사람에 의해서 그의 피도 흘려야 하리니”(창 9:6).
이러한 말들은 보편적이고 불변적인 원리들이다.
“네 눈이 긍휼히 보지 말라 생명은 생명으로니라.”(신 19:21)
이것은 재판장에게 하신 하나님의 명령이다. 성전에서 피를 흘리는 것은 살인자로 지탄받지 않는다.
침략자에게는 무기를 들고 부당하게 빼앗긴 것을 찾는다면 이것은 합당하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자기 부인을 포로로 잡아 도망가는 아말렉을 추격했다.
또한 어떠한 큰 악행이나 불법에 대해 벌주는 것도 합당하다.
다윗은 자기 신복들이 모욕을 당했기 때문에 암몬 자손들과 전쟁을 했다. (삼하 10장)
기독교의 제도에서 모든 전쟁을 불법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자 한다.
즉 군인들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눅 3:14)라고 그리스도 앞에 와서 물을 때 그는 더 이상 싸우지 말고 너의 직업을 포기해 버리라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 하는 가르침을 주셨다.
백부장이 주님께 와서 그의 군무에 관한 논증을 할 때 주님은 그의 고백을 정죄하지 않으셨고 그러한 직업 가진 것에도 견책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는 그의 믿음을 극찬하셨다. (눅 7:8,9)
그리스도께서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실 때 “나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라고 선포하셨다.
“내 나라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나의 종들이 싸워서 내가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
이 말씀들은 육체적인 방법들이 그리스도의 신령한 왕국으로 나아가는데 부적합하지만, 만약에 그의 비하상태가 왕홀을 취하는 데 방해 받는다면 그의 추종자들이 정당하게 싸워서 그의 칭호를 지켰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한 가지 또 다른 예외가 있다.
즉 그렇게 할 의도가 전혀 없었는데 생명이 취해지는 우발적인 살해가 있는데 그것은 살인자로 고소 받지 않는다.

그러한 경우는 우리가 성경상에서도 볼 수 있다.
곧 나무를 찍는 도끼가 부지불식간에 미끄러져 이웃을 죽이는 경우이다. (신 19:5)
그러한 죄 없는 살해자에 대해서 주께서는 도피성을 지정하여 피의 보수자로부터 안전한 처소를 발견할 수 있게 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는 합당한 사실들에 대해서만 효력이 있다.
그렇지 않고 부당하게 다른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가면 이는 살인죄에서 헤어날 수 없다. (출 21:22-24 참조)

다음은 살인의 실례들을 생각해보자.
자살은 자기 살인이며 범행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범죄이다.
이 죄를 범한 자는 다시 회개할 수 없고 따라서 용서받지 못한다.
그러한 인간들은 영원한 구원에 참예하지 못하는 자들이며 하나님에 의해서 버림받은 자들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피 묻은 손을 가지고 심판주 앞에 나가야 한다. 그들은 자신의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까지도 파괴하는 자이기에 자아 살인자들이다.
타인을 살인한 것도 가장 가증스러운 죄이다.
그자에게는 무서운 공포심이 양심을 괴롭혀서 견딜 수 없게 한다.
공범자들도 살인죄에 해당된다. 즉 그것이 그렇게 되도록 맡기는 사람들 (삼하 11:15, 12:9) 혹은 그렇게 되도록 승낙하는 사람들(빌라도와 같이) 혹은 그것을 은폐하는 자들(신 21:6,7)이다.
이 계명은 살인 범죄를 금지할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유도하는 모든 원인과 이유를 금한다.
이들의 주범은 시기와 질투이다.
시기는 다른 사람의 행복을 자신의 슬픔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요 영혼을 썩히는 녹으로 잘 묘사되었다.
가인은 먼저 자기 동생의 제물의 결과에 시기하여 불평하였고 이것은 재빨리 그를 살인하게 충동질했다.
너무나 악하고 절제 못하는 분노가 사람의 마음에 들끓고 있다면 그것은 마침내 앙심품은 증오의 독기로 변하는 것이다.
그러한 분노는 마태복음 5장 21-22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밝히 가르치셨듯이 살인의 원인일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살인의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분노는 시기와 마찬가지로 단순히 그 자체만은 나쁜 것이 아니다. (죄와는 상관없이 고상하고 흠모할 만한) 즉 의분이 있다 (막 3:5을 보라).
하나님의 영광이 땅에 떨어지고 그 이름에 욕이 돌아가고 그의 성전이 더럽힘을 당하고 그의 백성이 중상을 받을 때 하나님을 인하여 분노를 내는 것은 거룩한 분노이다.
우리가 부당하게 화를 당할 때 인정할만한 분을 낼 수 있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죄를 짓지 않도록”(엡 4:26)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사리를 어둡게 하고 흥분상태로 사람을 몰고 가는 악하고 죄 많은 분노는 이유도 없고 한계도 없다. 요나서 4장 1절은 이유 없는 분노에 대해 설명한 것이다.
분노는 그것이 격렬하거나 과도할 때 혹은 그것이 계속적으로 끓어오를 때 절제하기 어렵다.
“해가 지도록 너의 분을 품지 말라” (엡 4:26).
분노를 품고 있으면 앙심의 찌꺼기가 마음속에서 다음 날 아침까지 있게 될 것이다!

본 장을 끝맺으면서 분노를 자제하기 위한 몇 가지 규칙을 제시하고자 한다.
(1)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일하고 기도하라. 너 자신을 낮추어 생각하고 다른 사람이 너를 얕볼 때에도 화를 내지 말라. 모든 다툼은 자만에서 나오느니라. (잠 13:10) 네가 자신을 낮추면 그럴수록 더 쉽사리 동료의 경멸을 참을 수 있을 것이다.
(2) 하나님의 무한하신 인내와 참으심에 대해서 자주 생각하라. 그분은 우리로부터 얼마나 모욕을 참으시는가. 우리가 얼마나 많이 그에게 노하게 하는 이유를 일으키는가. 그러나 “그는 우리의 죄를 따라 갚으시지 않으신다.” 이 위대한 모본이 우리의 것이 되게 하라.
(3) 어떤 사람에 대하여 편견을 갖지 않도록 하라. 왜냐하면 그들이 오해하여 행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시기나 분노가 일어날 때는 아예 초기에 조심하라.
(4) 분노한 사람을 피하라 (잠 22:24,25). 분은 급속히 퍼져 나가느니라.

제7계 명
“간음하지 말지니라.” (출 20:14)

정결의 덕목은 가정 관계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며 나아가서 가정은 사회관계에 있어서 기본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에 요구되는 정결의 의무는 인간의 생사문제에 버금가는 문제이다.
이 계명은 인간생활이 성결해야 할 것을 선포하고 가정을 보호하기 위해 울타리를 둘러서 거룩한 인간 생식기능을 유지케 한다.
사회질서를 살펴보면 모든 사람들이 소속되는 가정관계보다도 필수적인 것이 없기 때문에 가정은 모든 공격의 형태로부터 질투함으로 보호받아야 한다. 그 계명은 간단하고, 무조건적이며 변경할 수 없는 부정적인 “하지 말라”이다. 아무 것도 더 이상 요구되지 않기 때문에 어떠한 논증도 필요 없고 어떠한 이유도 주어질 수 없다. 이 죄는 너무나 파괴적이고 저주스럽기 때문에 간단하게 그 이름만 불러도 그 자체에서 벌써 이 엄격한 금령에 대하여 충분히 문제를 일으킨다.
이 계명은 하나님께서 그의 직무를 위해 영혼만큼이나 육체를 주장하시고 계심을 명백히 암시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라…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롬 6:12; 8:13).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 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6:13,15,20).
어떠한 기독교인에게 이 불결한 죄는 불경스러운 것이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19)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집이 도둑소굴로 된 것을 보시고 분개하셨는데 하물며 거룩한 성령의 전을 더러운 돼지우리로 전락시킨 행악함을 보았다면 그의 보시기에 얼마나 가증스럽겠는가!

“간음하지 말지니라.”
이 금령은 가정의 신성함을 지키기 위해 의도된 것이다. 엄격히 말해서 “간음”이란 결혼한 사람이 지을 수 있는 죄이고 “사통”이란 미혼자들에 의해서 행해지는 것을 가리킴이다.
우리가 지켜야만 되는 것은 형용하기 어렵도록 순수하고 거룩하기 때문에 그는 우리에게 모든 불결에서 떠나라고 하신다. 이 계명은 사랑과 애정의 공동체 즉 가정을 어떠한 불순함도 부정함도 더럽히지 못하도록 보호하며 이 계명을 지키는 자들을 특별히 좋아한다.
하나님께서 인종의 번식을 위해 심어놓으신 사람들의 본능적 성향에 대해 적절히 훈련해야 할 것을 이 계명은 요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기에서 나오는 모든 유혹을 이기기 위해 모든 가능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이 죄의 원인이 되는 모든 것들을 피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더러움의 죄에 대하여 그의 말씀 속에 있는 여러 구절들에서 밝혀주셨다. 이 죄는 심지어 결혼하지 않은 사람의 편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큰 악”이라 불리었다. (창 39:9)
그러니 결혼한 사람의 편에서는 그것이 얼마나 변명할 여지가 없고 참을 수 없는 것이겠는가! 이스라엘 민법에 이 죄에 부과된 그 당시 형벌은 살인한 자에게 부과된 것과 똑같은 죽음, 그것이었다.
욥은 그것을 “중죄, 멸망하도록 사르는 불”이라 하였다(욥 31:11,12). 대부분 이러한 행악은 은밀하게 행해진다. 그 행악자들이 사람의 심판은 피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히 13:4)라고 기록되었기 때문에 하늘의 심판은 그들이 모면할 수 없을 것이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숭배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질하는 자나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
간음죄는 살인죄보다 더 나을 것이 없으며, 엄청나다. 후자는 인간의 일시적인 존재를 파괴시키지만, 전자는 은혜로 존재케 한 모든 것을 파괴시킨다. “인간 모두가 간음의 방종에 놀아난다면 인간들은 가까운 장래에 야수로 퇴화될 것이다.”(R.L Dabney)이 죄를 막기 위하여 하나님은 결혼의 법을 제정하셨다.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전 7:2). 간음죄는 결혼계약과 선서의 위반이며 그래서 부정하다는 증서를 첨부한다. 음행은 몸에게 하는 죄이다(고전 6:18). 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불쾌해 하심은 인간 생활의 모든 부분에 심한 형벌로 갚으신다는 사실을 보아서 알 수 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7,8).
결혼은 인간으로 하여금 방종하여 짐승과 같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성적 불결함의 죄에 대한 구제책으로 신적으로 제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결혼한 사람들은 모든 것이 그들에게 허용되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고 도리어 각자 자기 아내를 신중하게 접하고 또 각 아내는 그 남편에 대해서도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결혼의 품위와 절도에 적합지 않은 것이 일체 개입하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는 주님 안에서 계약된 부부 관계는 그러한 절제와 정숙에 의해서 규제되어 극도로 음란에 빠져들지 않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암부로스는 이러한 방자한 음욕을 엄하게 그러나 부당하지 않은 말로 지적하였는데 즉 “부부 생활을 지켜 나가는데 있어서 신중함과 예의바르게 행하지 않는 자는 자기 부인에 대해서 간음을 행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어떤 사람도 자기는 부정함으로 비난받을 수 없다고 자만하지 말라. 이는 그의 실제 행위에서 절제했을지 모르나 그의 마음은 음탕한 상상과 욕망의 더러운 생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율법은 신령한 것이기 때문에(롬 7:14) 그것은 바깥의 큼직한 더러움의 죄를 금할 뿐 아니라 모든 합당치 못한 상상과 생각 즉 마음의 부정함을 금하고 정죄한다. 마음에 살인과 같은 것이 있듯이 마음에 간음이 있고 사색적인 더러움을 품는 자와 그의 생각과 상상을 정욕의 불순한 접촉으로 매음하는 자는 이 계명을 범하는 죄를 짓는다.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그의 마음속에 이미 그녀와 간음하였느니라.” (마 5:28)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 사도가 남자마다 창기와 함께 자기를 더럽히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낫다고 한 말로 만족하지 않았고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고전 7:9)고 했던 것을 알게 된다. “간음” 죄만이 이 계명에 특별히 언급되었지만 이들 계명들이 해석되는 규칙들은 우리로 다른 모든 종류의 부정이 이 큼직한 죄의 종류 하에서 금지됨을 이해하게 한다. 몸을 더럽히는 모든 것은 여기서 금지된다. 모든 다른 도덕적 부패가 거기로 향하기 때문에 간음은 특별히 여기에서 언급된다. 모든 인간이 간음을 나쁜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부당한 정욕을 자제하도록 훈련받아야 한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하나님의 완전한 율법에 의해 지도받을 때 흠 없는 정숙함과 정결함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결혼관계를 제외한 모든 다른 성적관계는 하나님의 눈에서 저주받아 마땅하다. 이 계명은 음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불을 붙일 때와 간음으로 나아가는 모든 종류의 접근태도나 단계들을 단호히 금지한다. 본 계명이 요구하는 바는 당신이 언제든지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든지 당신 이웃의 정결을 해하지 말아야 하며 부정함으로 시험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계명은 또한 우리가 정숙치 못한 옷, 상스러운 언어, 정욕을 불러일으키는 음식이나 음료 그 외에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정욕을 유발시키는 모든 경향들에 대하여 조심할 것을 요구한다. 특별히 젊은 사람들로 남자나 여자 어느 편에서든지 결혼 전 부정한 행동은 마땅히 행복해야 할 결혼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명심하게 해야 한다. 이 계명은 부정적인 측면에서 하지 말라는 형태로 표현되었지만 보다 적극적인 의무가 있다.
즉 그것은 우리 몸의 정결, 마음의 성결, 하나님에 대한 애정의 표현 그리고 주어진 시간에 유익한 일을 하는 것 등을 명령하는 것이다. 불결한 죄를 피하게 하는 규칙과 조언
(1)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잠 15:3)는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 존전에 있다는 의식을 언제나 가지라.
(2) 감각들을 엄격히 통제하라. 왜냐하면 이들은 우리의 마음을 깨끗케 하는 맑은 물을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오염된 수렁과 진흙탕을 떠내려 보낸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당신은 당신의 눈과 약속을 하라 (욥 31:1). 모든 음담설화에서 귀를 돌리라. 마음과 육체를 더럽히는 책들은 아무것도 읽지 말라. 당신의 생각도 악한 것이 틈타지 못하게 주의하라.
(3) 절제와 근엄함에 이르도록 하라 (고전 9:27). 탐식하는 자들과 술 취하는 자들은 정욕으로 솟아남을 느낄 것이다.
(4) 정직하고 합당한 일에 종사하도록 하라. 게으름이 많은 사람에게 해를 끼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악한 무리의 회중을 피하라.
(5) 당신의 마음을 깨끗케 하려면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라. (시 119:37)
“간음하는 남녀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약 4:4)
이것은 영적인 간음죄를 언급하는 것이다. 영적인 간음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세상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며, 영(육체의 정욕에 미혹 당하게 하여) 하나님에게 분리하는 것이다. 하나님 자신 속에 만족을 누릴만한 행복을 찾기를 소원하는 신자들이 아직도 많다. 자연계에 수많은 등급이 있듯이 이러한 간음죄에도 수많은 등급이 많이 있다. 공공연한 표면화되지 아니한 생각과 욕망 속에서의 간음이 있을 수 있듯이 기독교인들이 완전히 세상 따라 살지는 않을지라도 은밀히 세상을 그리워하고 동경하는 자들이 있는 우리의 마음이 물질적인 만족이나 위안에 지나치게 집착되어 있을 때는 이러한 성향들을 세밀히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비천한 물질을 더 좋아한다든지 하나님께만 속하는 사랑과 경배를 다른 대상에 표할 때 보다 그를 더 진노하게 하는 것은 없다.
“처음 사랑을 버리지 말라”(계 2:4)
“우리의 신랑 되시는 예수님을 저버리지 말라” (고후 11:2)

제 8 계 명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출 20:15)

도적질이 생기는 원인은 하나님께서 나눠주신 분량에 불만을 가진 데서 나오는 것이며,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는 금지하셨으나 다른 사람에게 주신 재물을 탐하게 되는 것이다. 칼빈의 정확성은 언제나 그러했듯이 여기에서도 안타를 쳤다
“이 계명은 우리의 손발에 대하여 제정되었던 만큼 우리의 마음에 대하여도 제정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의 재산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익을 증진시키는데 힘써야 할 것이다” (칼빈)
앞서 나온 제 7계명과 같이 이 계명도 세상적인 물질에 대한 욕망을 적당히 제어함으로 우리의 집착을 다스릴 수 있게 한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가 우리에게 베푸신 분량에 과도하게 넘어서서 남의 것을 탐내지 않는다.
이래서 우리에게는 아래와 같은 기도가 적합하다.
“허탄한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고 나로 가난하게도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 함이니이다.” (9잠 30:8,9)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여기에 부여된 적극적인 의무는 다음과 같다. 즉 당신은 당신의 재산을 보호하고 또한 당신의 이웃의 재산도 함께 보호해야 한다.
이 계명은 우리자신과 가족을 궁핍에 떨어뜨리지 않게 하기 위하여 부지런함과 근면함을 요구한다. 나태함과 게으름의 결과인 곤경에 처하지 않도록 합당하게 재산 모을 것을 이 계명은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해야” 한다. (롬 12:17) 나아가서 이 계명은 우리 이웃의 재산에 대해서 탐내지 않는 사랑의 율법이다.
그것은 대인관계에 제일 중요한 실천적 원리가 되는 정직과 신의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마 7:12).
이 계명은 소유주의 허락 없이는 어느 누구도 감히 침범할 수 없도록 재산 주위에 합법적으로 신성불가침한 울타리를 치는 것이다.
놀랍고도 엄연한 사실은 인간이 범했던 최초의 죄가 도적질이었다는 것이다.
하와는 금단의 열매를 취했다.(훔쳤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 간 후 기록된 최초의 죄도 도적질이었다.
인간은 약탈품 중에서 얼마를 훔쳤다. (수 7:21)
마찬가지로 초창기 그리스도 교회를 더럽혔던 최초의 죄도 도적질이었다.
아나니아와 삽리라는 돈의 얼마를 감추었다. (행 5:2)
이것은 어린이가 얼마나 짓기 쉬운 최초의 죄인가! 그러므로 이 계명은 가장 어린 유년기부터 그들을 가르쳐야 한다.

몇 년 전 우리는 한 가정을 방문했는데, 그 집 안주인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날 그녀는 자기 딸이 (약 네 살가량 된) 큰 포도송이 한 다발이 있었던 방으로 몰래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 어린 꼬마가 그들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더니 테이블 위로 올라가서는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도적질하지 말지어다.’”라고 말한 후 방에서 달려 나왔다는 것이다.

“도적질하지 말지어다.” 이 죄의 가장 높은 형태는 하나님께 대해 지어지는 바 신성모독죄 이다.
예날 그는 이 죄를 지은 이스라엘을 책망하셨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도고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 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말 3:8,9)
그러나 이 땅위에서 물질적으로 하나님의 명분을 하나님께 돌리기를 거부함으로 범하는 죄 말고도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의 것에 도적질하는 실례들이 있다.
이를테면 우리가 하나님에게 속하는 영광을 취하고 있을 때는 하나님에게 도적질 한 것이 된다.
또한 하나님께 속하는 존귀와 찬양을 우리 자신에게 돌릴 때도 영적인 도둑이 되는 것이다.
알미니안 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나온 것을 인간 자유의지에 돌림으로서 가장 큰 잘못을 범한다.
그리스도께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한 것이니라.” (요 15:16)라고 말씀하셨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도적질하는 또 하나의 것은 청지기 직무를 불성실하게 이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위탁하신 것을 우리가 잘못 다룸으로 마치 우리가 다른 사람의 신용을 해쳤거나 이웃의 재산을 약탈했을 때처럼 모욕이 될 수 있다.
이 계명은 우리가 현세적인 재산을 그것이 크든 작든 간에 우리자신과 우리의 부양가족에게 공급하기 위하여 근면하게 관리해야 할 것을 요구한다.
게으른 자는 일종의 도둑이다.
그 자는 수벌의 역할을 하는 자며 다른 벌떼가 먹여 주기를 바라는 자다.
탕자도 일종의 도둑인데 이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나눠 주신 물질을 “허랑방탕한 생활”가운데서 사치와 안일함으로 허비했기 때문이다.

주일 날 세상일을 하려는 자도 도둑인데 이는 마땅히 예배에 바쳐야 하는 시간을 하나님으로부터 훔쳤기 때문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소명감도 없이 다만 편안하고 유여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야 주제넘게 복음사역에 참견하는 자는 “절도요 강도”라고 이 단락이 끝나기 전에 지적하고 넘어 가야겠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마에 땀이 흘려야만 빵을 얻을 수 있도록 하셨으며 우리는 정직하게 얻은 분깃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러나 혹자는 게을러서 일하기를 싫어하며 어떤 작자는 탐욕이 있어 더 많은 분깃을 얻으려한다. 이점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는 하등 권리가 없는 재산을 얻으려고 힘의 행사나 사기를 하곤 한다.
일반적으로 도둑은 타인이 합법적으로 취득한 재산을 부당하게 취득하는 것을 말한다.
이웃의 재산을 취하는 자와 마찬가지로 이웃의 소유로 되어 있는 것을 돌려주지 않는 자도 도둑이다. 이 계명은 경영자나 노동자로 말미암아 심하게 깨뜨려진다.
과거에는 가난한 자가 불충분한 노임으로 학대를 받았으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져서 고용된 자들이 고용주에게 지불할 수 없는 노임을 종종 요구한다.
한편 온전한 하루의 노동이 온전한 하루의 삯을 받는 것이 옳다면 온전한 하루의 노동에도 가치가 있어야 됨은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그러나 게으름뱅이는 그것을 받을 자격이 없다.

“도둑질하지 말지니라.”
거짓 광고는 이 계명을 어기는 것이다.
상인이 그들의 상품에 대해 불순물을 섞거나 과대선전을 하거나 저울질을 속이는 짓을 하면 이도 역시 죄짓는 것이다.
폭리를 취하는 것도 또 다른 도둑의 형태이다.
사도 바울은 “이 모든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고 권고했다(살전 4:6).
사치와 허영을 위하여 빚을 내는 것은 도둑이며 필수품을 얻는데 진 빚을 갚지 않는 것도 도둑이다.
파산하기 전에 재산을 아내에게 양도한자는 하나님 보시기에 도둑이며 또한 파산자가 후에 재정적으로 번창했는데도 그의 채권자에게 충분히 갚지 않으면 이 자도 도둑이다.
빌리고도 갚지 않는 자도 그 자가 남자든, 여자든 모두 도둑이다.
전세 든 사람이 주인의 재산이나 가구를 부주의하게 깨뜨리는 것도 이 계명을 어기는 행위이다.
세금지불을 회피하는 것도 또 다른 형태의 도둑질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좋은 전례를 남기셨다 (마 17:24).
노름은 사람들이 정직하게 일하지 않고 돈을 따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도 역시 도둑이다.
옛 격언에 나온 말씀이 꼭 맞다. “마귀가 번 것은 무엇이든지 마귀의 배속으로 내려간다.”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폭력이나 사기로 획득한 물건에 저주하신다.
그것은 부대에 구멍을 내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 아래 곧 소비되어 버린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심판을 행사하실 때 가끔 한 가지 죄를 또 다른 죄에 벌주는 자로 사용하시며 도둑질로 얻어진 것은 무절제함이나 짧아진 수명으로 재빨리 소비되게 하신다.
그러므로 기록되었으되
“악인의 강포는 자기를 소멸하나니 이는 공의 행하기를 싫어함이니라.” (잠 21:7)
“그러므로 이제 너는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시민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재앙을 버리며 계책을 베풀어 너희를 치려하노니 너희는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며 너희 길과 행위를 선하게 하라 하셨다 하라” (렘 18:11).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필경은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렘 17:11).
하나님은 여러 번에 걸쳐 다른 사람들에게 손해를 입혔던 대로 갚아주는 자들을 높이신다.
현대 사회에 이 범죄의 무서운 증가는 일일이 벌을 주지 못하게 한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독자가 과거에 다른 사람에게 잘못 저지른 것을 알게 된다면 하나님께 그 죄를 고백한 것으로 충분치 못하다.
적어도 두 배는 배상해 주어야 한다. (눅 19:8; 삼하 12:6) 만약 소유주가 죽었다면 그의 후손에게 갚고, 그 후손도 없다면 공공 자선사업에 내놓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 8계명이 금지한 죄를 피하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그것이 지시하는 의무수행을 위해 몇 가지 조언들을 제안하고자 한다.
(1) 정직하게 노동에 종사하라. 만약 고귀한 신분을 가진 부자가 있다면 공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하라. 비행에 가장 잘 유혹받는 사람은 바로 게으른 인간이다.
(2) 다른 사람의 복지를 위해 노력함으로 이기심을 버리도록 하라.
(3) 가난한 사람에게 도와주고 탐욕을 버리라.
(4) 당신의 구세주가 당신에게 구원의 선물을 주시기 위해 두 도둑들 사이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 어찌하여 당신은 부정직한 행동으로 그의 이름을 욕되게 할 수가 있겠는가.
(5) 자족하는 습성을 키우라. 이를 위해 만물이 한낱 일시적이고 헛된 것임을 생각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복종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묵상하고 (히 13:5,6), 모든 것에 절제하고, 위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며 그리스도께서 이 땅위에서 하신 일들을 매일 상기하라.

제 9 계 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말지니라.” (출20:16)

이 말들을 문자 그대로 지켜라. 심지어 법정에서도 위증이나 거짓 증거를 해서 죄를 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전에 나왔던 계명들과 같이 여기에서도 구체적으로 지적되었던 것 이상으로 함축되고 의미되고 가르치는 바가 많다.
우리가 이제까지 많이 지적해 온 바대로, 십계명 모두가 보편적인 원리를 선포했으며 나아가서 한 가지 대표적인 죄와 관련된 모든 죄들을 금지하고 있는가 하면 모든 죄의 원인이나 그러한 경향들을 금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상반되는 덕목이 적극적으로 요구되며 그것을 유념하고 고양시키는 그 밖에 행위도 요구된다.
이와 같이 열 계명이 모두 확대 적용되었던 연고로 제 9계명도 광의의 의미에서 이웃의 평판을 해치거나 공, 사설에서 험담하는 우리의 모든 말을 문책한다.
이러한 확대 적용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도 논란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이것을 문자적인 의미에만 제한한다면 법정에 증언하기 위해 호출 받은 소수만을 제외하고는 아무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계명을 가장 넓게 적용함에 있어서 이 계명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가장 우수하고 고귀한 기능중의 하나인 우리의 언어에 관한 규정을 말하고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이 혀의 끝에 달렸나니” (잠 18:21), “온유한 혀는 생명의 나무니라.” (잠 15:4), 그리고 고삐 풀린 혀는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다” (약 3:8)고 하였다.
우리가 가볍게 혹은 무심코 말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우리 주님의 무한히 엄숙한 말씀 속에서 분명해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마 13:36,37)
우리는 다음과 같이 기도해야 하지 않겠는가.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시 141:3)
우리의 혀에 대한 의무들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즉 우리의 혀는 항상 진실해야 하고 사랑 안에서 말해야 한다. (엡 4:15) 팔 계명이 이웃의 재산을 탐내지 말라고 하였듯이 이 계명은 이웃에 대하여 사랑 안에서 진실을 말함으로 이웃의 명예를 존중하도록 가르친다.
부정적으로 9계명은 이웃에 대한 모든 거짓말과 해하는 말들을 금한다. 적극적으로 이것은 진실한 말만 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이 계명을 주신 목적은 진리 자체이요, 거짓을 저주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조금도 위선 없는 진실을 보존하기 위함이다.” (칼빈)
진실이란 우리의 모든 인간관계에서 진정한 마음으로 엄격히 준수하는 것을 이름이다. 진실의 중요성과 필요성은 인간이 아는 거의 모든 것이 대화 가운데서 기인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아들이는 말의 가치는 전적으로 말의 진실성과 신빙성에 달려 있다. 만약 그 말들이 거짓이라면, 그들은 무가치하고 악한 것이며 미혹케 하는 것이다.
진실성은 한 종류의 덕목일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덕목의 뿌리가 되며 모든 올바른 성품에 근본이 된다. 성경에는 “진리”가 가끔 “의”와 동의어로 사용된다.
의로운 사람은 “그의 마음속에서 참된 것을 말하느니라.” (시 15:2) “진리를 좇는 자들은” (요 3:21) 자신의 의무를 이미 이행하는 자들이다. 진리로 거룩케 한다. (요 17:17)
9계명의 적극적인 형태는 다음 말들에서 발견된다.
너희는 이웃에 대해 진실을 말하라(슥 8:16).
성경 구절이 금지하는 최초의 죄는 거짓말하는 죄이다.
적당히 말해서 거짓말은 세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다. 즉 참되지 않은 말을 하는 것, 또 유유히 그렇게 행하는 것, 마지막은 타인을 속일 의도로 그렇게 행하는 것 등이다.
모든 거짓말이 다 거짓일 수 없다. 우리는 잘못 전해 듣거나 속일 수도 있고 우리가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진지하게 생각할 수도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타인을 미혹하거나 속일 의도를 전혀 가지지 않는다.
한편 다음의 실례들을 보면 우리는 사실을 그대로 말함으로 거짓말을 할 때가 있다. 즉 사실을 보고하나 그것을 틀린 것으로 믿게 하며 속일 의도로 말하는 것이다.
혹은 그리스도에 대해 거짓 증거를 한 사람의 경우와 같이(마 26:60) 비유적인 표현인 데도 문자적으로 믿게 하는 것이다.
가장 나쁜 거짓말의 형태는 이웃의 평판을 해칠 목적으로 악의를 품고 거짓말을 꾸며대는 것이며 그러한 것은 9계명에 비추어 더욱더 나쁜 것이다.
이러한 죄가 얼마나 비열하고 증오할 만한 것인가는 다음 고찰들에서 나타난다. 그것은 사람을 마귀와 같이 되게 하는 것이다.
마귀는 영물이기에 사소한 육체적인 죄는 마귀의 본성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즉 마귀가 좋아하는 것은 교만, 악의, 거짓, 사기와 같은 것이다.
“그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니라”(요 8:44).
악의가 일단 어떤 거짓의 형태에 들어오면 그만큼 사람은 마귀를 닮게 된다. 그러므로 거짓말은 하나님의 성품과 특성에 가장 반대가 되는 죄이다. 왜냐하면 그는 “진리의 주 하나님” 이시기 때문이다(시 31:5).
우리는 “거짓의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는다.” 라는 말씀을 경청해야 한다. (잠 12:22) 마귀가 거짓말쟁이이고 거짓의 아비인 것같이 하나님은 진리의 주 하나님이심으로 하나님의 자녀들도 “그들은 나의 백성이라 거짓말을 하지 않는 자녀들이라”(사 63:8)는 말씀을 명심하여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거짓말하는 자들에게 가장 무서운 벌을 내리신다고 경고하셨다.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계 21:8).
이러한 죄가 얼마나 높은 위험 수위까지 올랐는가. 거짓말하는 죄는 너무 흔해서 참으로 적은 소수만이 그 죄에 가책을 느끼고 있다.
이때 우리는 “진리가 거리에 떨어졌도다.”라고 통곡해야 할 것이다(사 59:14). 첫째 진리가 강단에서 떨어졌다. 진화론의 거짓말쟁이가 과학계를 사로잡고 또 거듭나지 못한 수천 명의 설교자들을 휘어잡은 지 1세기가 지났다.
진화론은 인간의 타락을 반박하고 구속과 중생에 대한 인간의 동시적인 필요성을 제체두기 때문에 그것은 진리의 근본을 말살시키려는 거짓말쟁이다.
같은 기간 동안 소위 독을 신신학자들이 주장한 “고등비평”이란 것도 인간이 지적으로 우수하다고 여김 받기를 원하는 수천 명의 불경건한 목사들에게 영어를 사용하는 세계에서 만연되었다.
일단 진리가 강단에서 사라지자 얼마 안 되어 그것은 국회나 시장에서 사라졌고 현금에 이르러 우리 인간은 국가 간에 신의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살게 되고 우리 동료 간에 대화에도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세계에서 살게 되었다.
진리에 대한 거룩한 열정이 젊은 사람들에게 확고부동하게 뿌리박히며, 또한 그들이 거짓말은 모든 악과 부패에 이르는 통로가 된다고 교육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마찬가지로 어린이를 보호하는 자들 특별히 부모들은 어린이 앞에서 자신의 모범에 따라 가르쳐야 한다.
그들은 어린이들이 성취하지 못할 것을 약속하게 하거나 그들이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에 위협을 가함으로 그와 같은 것들을 무위로 돌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 각자가 약속을 할 때는 아주 천천히 신중하게 해야 한다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다. 그러나 일단 약속이 맺어지면 하나님께 죄짓는 것이 아닌 한 어떠한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그것은 지켜져야 한다.
나의 이웃에 대해 거짓증거를 금하는 것은 내 자신에게도 거짓증거를 금한다. 내 자신은 실재의 나보다도 더 거룩한 채하며, 또한 실재의 경우에서 보다 더 더욱 겸손한 채하는 태도를 지니기가 쉽다.
우리가 진실을 말하는 때에도 불필요하게 말하거나 불순한 동기에서 말하면 9계명을 깨뜨리는 것이다.
“우리가 이웃의 잘못을 특정한 필요 없이 사람들에게 열거하여 폭로시키면 이웃의 인격을 해치는 것이 된다. 우리는 이웃의 허물을 알 권리가 없는 사람에게 말하거나, 어떤 선한 목적 없이 사회적으로 이웃의 평판을 떨어뜨릴 목적으로 말해서도 안 된다 … 우리가 묵시적으로 같이 하는 사람에게 어떤 피해가 가해질 때에 잠잠하거나, 반대로 우리가 아는 것을 숨김으로서 도무지 말을 하지 않을 때도 9계명을 범하는 것이다.”(존 딬)
사람에게 아부하는 것도 또 다른 형태로 이 계명을 어기는 것이다. 단순히 그의 비위를 맞추고 그의 허영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인사하는 것은 당신의 영혼을 속이는 것이며 그의 안전을 위험하게 한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추천서에 합당치 않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특성에 대해 거짓증명을 나열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추천하는 것도 “거짓증거”를 하는 것이다.
다음의 지침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사람이 일상적인 죄들을 짓지 않도록 하는데 유익될 것이다.
(1) 당신이 타인을 중상모략하지 않으려면 당파심에 좌우되지 말라. 종파심은 편견을 낳게 하고 편견은 우리와 함께 행하지 않는 사람들의 장점을 인정하지도 인정받지도 않게 하고, 그들을 가장 나쁜 사람들이라고 믿게 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 책을 쓴다는 사람들이 흔히 죄를 많이 짓는다. 교파심이 강한 골동분자는 많은 사람들로 그와 달리하는 자에게 오해를 일으키게 하고 그가 주장하지도 않은 오류들을 그에게 전가시킨다.
(2) 다른 사람의 일에 참견하지 말라. 당신 자신 일에나 열중하고 다른 사람의 일은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도록 내버려두라.
(3) 당신 자신의 허물과 약점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세요. 당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려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당신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대들보를 찾아보라.
(4) 말 만들어 내는 자들이나 잡담하는 자들의 무리를 피하라. 무익한 소문은 영혼을 해치기 때문이니까.
(5) 타인이 당신을 비방한다면 당신이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양심에 거리낌이 있는지를 살펴보고 난 후에는 타인이 당신에게 대하여 무엇을 생각하는지 무엇을 말하든지 상관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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