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 (서론) / 아더 핑크
서론적 고찰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필수불가결한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하나는 의무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지식에 부응하는 양심적인 행위이다.
우리가 순종하지 않는다면 영원한 구원에 대한 빛나는 소망은 가질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다면 순종에 대한 확실한 방법도 모를 것이다. 행함이 없는 지식은 있을 수는 있어도 지식이 없는 행함이란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안다는 것은 우리에게 행동규범으로서 율법을 주시고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심판하시는 분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원래 우리 마음속에 기록된 본성의 율법을 우리가 더럽힘으로써 그 계명들을 더 이상 읽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율법을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과 십계명에 기록하도록 하신 것이다.
우리는 먼저 십계명의 공포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십계명이 공식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전달되었던 모습은 엄숙했고 우리에게 훌륭한 가르침으로 가득 찼다.
먼저 백성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존전에 서기 전에 외부적인 더러움을 깨끗이 하는 의식을 갖기 위해 이틀 동안 준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출 19:10,11).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 앞에서 기다리게 되거나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받기 전에 몸과 마음의 신중한 준비가 있어야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하나님 존전에 서기 위하여 자신들을 성결하게 했다면, 하물며 우리는 더욱 하늘에 계신 하나님 존전에 서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성결하게 해야만 되지 않겠는가?
또한 하나님이 강림하셨던 산은 지경이 정해져 있어 어느 누구도 그 거룩한 산에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엄격한 금령이 있었다. (출 19:12,13)
이것은, 하나님은 무한히 높으시고 최상의 존숭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는 것을 가르치며, 또한 그의 율법의 엄격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번에는 우리가 여호와께서 그의 율법을 전수하시기 위하여 강림하셨던 두려운 현현에 대한 묘사를 살펴보자(출 19:18,19).
여호와의 현현의 그의 권위에 대한 존중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두렵게 하기 위하여 의도된 것이며, 하나님께서 율법의 전수에서도 그렇게 무서운데 율법을 어김으로 우리에게 심판하러 오신다면 그 무서움이 얼마나 심하겠는가를 의미하기 위하여 의도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전달하셨을 때 백성들은 너무나 두려워서 모세에게 하나님과 그들 사이의 중재자와 통역자로 일해 달라고 간청했다. (출 20:18,19)
이는 율법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직접 전달된다면 그것은 정죄와 죽음의 역할을 한다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율법이 중재자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전달되었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보게 되고 지키게 된 것이다. (고전 3:19, 갈 9:21, 갈 6:2)
따라서 모세는 산으로 올라가서 두 돌판 위에 하나님께서 손수 쓰신 율법을 받았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원래가 악하여 하나님의 손가락 외에는 누구도 그의 율법의 흔적을 남길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저 돌판들은 모세의 거룩한 분노로 말미암아 깨뜨려져서(출 32:19) 하나님이 다시 기록하신 것이다.(출 34:1)
이것은 자연의 율법 창조시 우리 마음에 기록 되었으나 우리가 아담 안에서 타락했을 때 깨뜨려졌고 중생 시 우리 마음에 다시 기록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히 10:16).
그러나 혹자는,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에 오심으로 완전히 폐지되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아무도 질 수 없는 무거운 속박의 멍에로 우리를 데려가고자 하십니까? 신약에서는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고 분명히 선포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에서 자기 백성들을 자유케 하셨다고 하지 않습니까? 주께서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주셨던 그리스도인의 자유와는 전혀 모순되는 것으로 십계명의 권위를 인간의 양심에 부과하려는 시도가 아닙니까?” 라고 질문할지도 모른다.
그런 질문에 우리는 흔히 이렇게 답한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율법이 폐지되기는커녕 오히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고 계신다(마 5:17,18).
진실로 그리스도인은 행위언약이나 정죄하는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생활의 법도와 거룩케 하는 율법 아래 있는 것이다.
둘째, 우리는 십계명의 독특성에 대해 생각해 보자. 먼저는 이 독특성이 그의 거룩하심에 대해 두렵고도 웅장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시내산 하나님의 계시는 오는 모든 시대에 섬겨야 할 인간 의무를 집대성하였던 것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십계명에 특별하신 중요성을 부과하셨는데 그 공포 모습이 이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십계명은 구름과 어두움, 천둥과 번개와 나팔소리의 무시무시한 부대현상과 함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분명한 목소리로 들려 왔으며 그렇게 들려진 신적 계시는 유일무이한 부분들이었다. 어떠한 의식법이나 시민법도 이렇게 독특할 수 없었다.
그 열 가지 말씀들, 그것만이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돌판 위에 쓰여 졌으며 그것만이 보호되기 위해 언약궤에 넣어졌다. 이와 같이 십계명에 부여된 유일한 영광과 하나님의 통치 속에서 우리는 극도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셋째, 십계명의 원천인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우리는 십계명의 서두에 아주 보잘것없는 관심을 가져 왔었다.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아무리 웅장한 권위가 율법의 공포 때에 수반되었다 해도 율법의 원천은 사랑에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율법은 주님이 자기 백성에게 은혜로운 구속자이시며 의로우시다는 것(즉, 그의 성품)을 분명히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것을 분명히 이해함으로 얻어지는 결론이자, 원리는 다음과 같다. 즉 구속받은 사람들에게서는 하나님의 성품과 명령에 일치하는 생활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심은 사랑의 행위일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을 기초로 자기 백성에게서 사랑받으시기 때문이다. 그렇게 할 때에만 구속하시는 하나님과 구속함을 받는 백성들 사이에 일치와 동일함이 있게 된다.
제 2 계명 후반부에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수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순종이란 오직 사랑하는 데서만 나오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주님께서는 율법의 모든 필요조건이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데 요약되어 있다고 선포하셨다.
넷째, 우리는 십계명의 영속성에 대해 생각해 보자. 십계명이 모든 세대를 거쳐 각 사람들을 얽매고 있다는 점은 여러 면에서 생각해 볼 때 밝혀진다.
첫째로 하나님의 진실하심에 대해 확고부동한 표현이 있지만 모든 도덕적 행위(moral agent)위에 십계명의 권위는 필연적으로 적용되어진다는 것이다. 즉 율법(다스리시는 법도)이 폐지되기 전에 하나님 자신의 특성도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창조 때부터 인간에게 주어진 율법을 말하며 그로부터 인간은 계속적으로 율법에서 떠남으로 구원받을 수 없었다. 이성과 의지가 부여된 피조물이 사는 곳은 어디든지 도덕적 율법이 그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둘째로 그리스도께서도 율법에 완전히 순종하심으로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셨다. 그래서 우리도 그의 발자취를 따라야 할 것이다.
셋째로 이방인들에게 바울 사도가 특별히 “그러면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라는 의문을 제기하고서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우리는 율법을 세우느니라.”라고 자문자답했다(롬 3:31).
마지막으로 율법의 영속성은 그의 백성들이 새로이 태어날 때마다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이 친히 기록하심으로 유지된다. (렘 31:33, 겔 36:26,27)
다섯째, 도덕률이 십계명의 숫자에 있어서 열 가지가 완전할 수가 있겠는가에 대해 몇 가지 생각해 보자. 이것은 성경상에서 “십계(十戒)”(출 34:28)라고 언급되었는데 열이란 숫자는 전체가 필요한 것들로서 완전하게 형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애굽에 내린 재앙들이 그렇게도 여러 번 계속되었다는 점은(10번 재앙이 내림) 하나님 심판의 완전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숫자의 상징적인 중요성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광야에서 히브리인들의 범죄가 열 번에 이르도록 허용되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그들은 열 번이나 죄를 범했기 때문에(민 14:21) 죄악의 모든 분량을 채웠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십일조, 혹은 십분의 일을 성별하여 하나님께 드림이 되며 모든 소산은 십이라는 숫자로 표현되고, 이들 중 하나는 모든 것이 주로 말미암고 주를 위하여 있다는 표시로 주께 바쳐진다.
여섯째, 십계명의 구분에 대해 생각해 보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납득할 만한 충분한 이유 없이 행동하시지 않기 때문에 십계명을 두 돌판 위에 기록하신 것에는 특별한 뜻이 계셨다. 이러한 의도는 표면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이들 계명의 내용은 하나님의 공의를 한 데 묶어서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두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지는데 전자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의무를, 후자는 인간을 향한 인간의 의무를 다루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전자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관계에 대해, 후자는 인간의 사회적 관계에 대해 다루고 있었다.
만약 우리가 하늘의 주관자에게 속하는 영광을 취한다면 우리 이웃에게 아무리 예의바르다 해도 그러한 의는 철저히 무가치하다. 마찬가지로 이웃에게 사랑의 의무는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처럼 된다 해도 이는 역시 헛된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면서 내가 음행하지 않았다. 도적질하지 않았다. 거짓말하지 않았다고 위안 받으면서 예배드리는 것도 하나님께서는 철저히 거부된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배의 의무가 첫 돌판에 기록된 것은 칼빈이 일컫는 바와 같이 그 계명들이 ‘종교의 제목’이기 때문이 아니라 ‘생명과 활기’를 이루는, 즉 ‘종교의 정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경배함이 없이는 인간들 사이의 어떠한 평등도, 사랑도 무익한 것이다. 경건치 않은 인간들이 제 아무리 자기들끼리 실시하는 정의가, 자비가, 인내가 있다 해도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는 쓸데없는 것들이다.
그와는 반대로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활에 올바른 위치를 차지하고 계시며 우리가 옳고 그름의 주관자로 그를 공경한다면 우리는 이웃들에게도 공평하게 대할 수가 있을 것이다. 5계명이 첫 돌판에서 끝났는지 둘째 돌판에서 시작되었는지 하는 십계명 구분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다. 개인적으로 나는 전자의 견해를 지지하고 싶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릴 대는 부모가 하나님의 위치에 서게 되고 성경상에서도 부모를 이웃과 동등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이유로는 첫 돌판의 다섯 계명이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포함하고 있으나 나머지 계명들에게서는 그 어디에도 그 용어가 없기 때문이다.
일곱째, 우리는 십계명의 영적인 면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율법이 신령하다”(롬 7:14)는 것은 율법이 신령한 입법자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서 단순히 외부적인 복종보다 더한 것 즉, 인간 마음의 순종을 가장 철저하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십계명이 우리 마음의 생각과 소원에까지 적용된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만 우리가 십계명을 얼마나 지키지 않는가를 알게 된다.
하나님은 “중심에서”(시 51:6) 진실을 요구하신다. 심지어 우리의 생각에서조차도 하나님의 거룩함에서 벗어나는 조그만 탈선해위도 금하시는 것이다. 율법은 우리가 가장 은밀한 성향과 의도를 감찰하고 있으며, 우리의 지성과 사랑과 의지를 거룩한 뜻에 따르기를 요구하고 있으며,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사랑에서 우러나와야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상의 모든 사실들을 볼 때 율법의 기원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아직까지 인간의 영을 주장한다고 장담한 법은 없었으나 여호와의 율법은 인간의 깊은 마음속을 감찰한다. 이러한 율법의 영적인 면은 예수께서 음욕을 품는 것이 곧 간음이라고, 분노가 살인이라고 말씀하셨던 관계로 명백해졌다.
“여덟째, 우리는 십계명의 임무에 대해 생각해 보자. 첫째로, 도덕적 율법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이 오직 의(義)이지만 우리에게는 불의(不義)밖에 없다는 것을 드러내준다. 죄는 우리의 판단을 어둡게 하고, 이기적인 사랑에 빠지게 하고, 잘못된 자신감을 갖도록 작용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율법의 높고 거룩한 요구에 비교해 본다면, 우리는 더러움과 허물과 오만함을 깨닫게 될 것이며 우리에게 요구되는 의무를 수행하는 데에 능력의 부족을 의식하게 된다.
칼빈은「기독교 강요」에서(2권, 7장 7절) “이와 같이 율법은 일종의 거울이다. 거울 속에서 우리는 얼굴에 묻어 있는 오점을 발견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율법 속에서 우리는 첫째 우리의 무능을, 둘째 우리의 허물을, 셋째 이상 두 결과로 인하여 저주를 알게 된다.”라고 잘 표현했다.
율법의 두 번째 임무는 악인들을 경고한다. 악인들이 비록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에는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를 기쁘시게 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을지라도 형벌의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악한 행동을 삼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악인들이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살고 있는 공동사회에 유익이 된다. 세 번째, 율법은 성도들의 생활규범이 되는 것으로 그들을 지도하고 하나님의 은총 속에 지켜주는 것이다.
아홉째, 우리는 십계명의 상벌에 대해 생각하자. 여호와는 우리를 죄의 예속상태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많은 의무를 감당케 하셨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엄숙한 광경을 보여줌으로 그들 마음속에 공경심을 불러일으키게 하셨다.
그 다음에 그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는 약속과 경고의 말씀을 후반부에 추가시키셨다. 이는 우리가 그의 권위에 순종하고 그의 명령을 기쁘게 순복하며 그가 금하신 것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그의 명령을 수행하는 자들이 헛되이 일하는 것이 아니며 반역자가 형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열 번째, 마지막으로 우리는 십계명의 해석에 대해 생각해 보자. 시편 기자는 “주의 계명은 심히 넓으니이다.” (시 119:96)라고 했다. 도덕적 율법은 대단히 넓어서 그 권위가 우리 생활의 모든 도덕적 행위에까지 미친다. 성경의 다른 부분들은 십계명에 관한 주석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성경은 논리적으로 우리를 경고함으로 자극하고, 약속함으로 우리를 달래며, 경고함으로 죄를 짓지 못하게 하며, 그렇지 않으면 역사적으로 기록된 실례들을 취하여 전자는 고무시키고 후자는 금지시킨다.
신약의 명령들은 단지 십계명에 대한 설명, 확충 그리고 적용이라는 사실을 올바로 이해하자. 특별히 명령되거나 혹은 금지되는 부분들이 있다면 이는 형식적으로 말하는 바 그 이상의 중요한 의미가 함축되었음을 주의 깊게 살펴보자.
그러나 좀 더 특별한 의미를 생각해 보자.
첫째, 각각의 계명들에 있어서 주요한 의무나 죄악은 그보다 사소한 것들의 전형으로 나와 있다. 그리고 나타난 행위에는 그 행위를 일으키게 하는 모든 관련된 원인까지도 포함된다. 어떤 죄가 거론된다 해도 그러한 죄의 원인과 결과와 동일한 종류의 모든 죄는 금지된다. 그리스도께서도 실제로 사람을 죽인 것뿐만 아니라 마음의 분노도 육 계명에 저촉된다고 설명하셨다.
둘째 어떠한 악이 금지되면 그 반대로 선이 요청되며, 어떠한 선이 명령되면 악은 정죄 받는다. 이를테면 제 3계명에 있어서 하나님은 자기 이름이 망녕되이 일컫게 되는 것을 금하셨으며 그 결과로 자기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구하시는 것이다.
제 8계명에서 도둑질하는 것을 금했던 것은 그 반대의 의무, 즉 우리가 일하여 마땅히 받아야 할 것에는 대가를 주신다는 것이다(엡 4:28).
제 1 계 명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출 20:1-2)
이 율법의 서문은 십계명 전체에 동일한 관계를 가지며 (첫 계명만 아니라), 그것은 우리가 십계명에 순종해야 된다는 것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것은 마치 왕이나 통치자가 칙령을 반포하기 전에 그들의 이름과 제목을 서두에 붙여 그들이 공포하는 것에 더 많은 주의와 경의를 얻게 하는 관계와 같다.
만왕의 왕이시오, 하늘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도 자기 백성에게 율법을 선포하셨는데 이는 그의 권위에 깊은 존숭을 표하는 백성들을 사랑하신다는 의도이며, 반대로 권세 많은 주권자시오, 영화로운 주님에 의해 선포된 그 율법을 어기는 사람들에게는 보다 두렵게 하신다는 뜻이다.
방금 위에서 지적되었던 것은 모세의 이스라엘에게 한 엄숙한 말 “너는 너의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해야 하느니라.”(신 28:58)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나는 주 너의 하나님이다.” ‘주’라는 말은 지존자시오, 영원하시고 자존하시는 즉 ‘여호와’라는 뜻이며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이시다(계 4:8).
‘하나님’이라는 말은 그분이 본체에서는 하나이시나 위(位)에 있어서는 셋이 되는 엘로아의 복수형 “엘로힘”이다.
예배의 지존자이신 여호와는 과거에는 창조자였고, 현재에는 통치자이며, 미래에는 심판주가 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되신다.
덧붙여 말하면 그는 언약을 세우신 하나님이시며 구속주로 말미암아 택하심 받은 사람들의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율법을 순종하여야 한다.
우리 안에 두려움을 일으키는 그의 절대적인 권위는 “여호와 너의 하나님” 이란 구절에서 나타나며 사랑으로 역사하시는 그의 은혜와 자비는 “종 되었던 집(비유)에서 너를 인도하여 낸 여호와로라”라는 구절에서 나타난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출 20:3)는 첫 계명이다.
그것의 의미를 간단히 살펴보겠다. 우리는 각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말하는 ‘너희가’가 아닌 ‘너’라는 단수에 주목해야겠다.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있게 하지 말라”는 것은 당신이 다른 신을 소유하지도, 섬기지도 말라는 것을 강조한다.
‘다른 신들’이란 있을 수 없다.
그들이 그렇게 불리운 것은 본질이나 직무가 그렇기 때문이 아니고(시 82:6) 다만 인간들의 마음의 부패가 “그들의 신은 배요” (빌 3:19)라는 구절에서와 같이 그렇게 만들었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내 앞에” 혹은 “내 얼굴 앞에”라는 말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 혹은 “의로와라” (창 17:1)는 말씀과 동의어이다.
이는 네가 언제나 내 앞에 있고 나의 눈이 언제나 너에게 있다는 것을 깨달음으로 행동하라는 뜻이다.
이것은 아주 철저한 보습이다.
무리는 사람 앞에서 인정받고 또 거룩한 모습을 외부로 전시함으로 너무나 쉽사리 안주해 버리기 쉽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중심을 감찰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어떠한 은밀한 정욕이나 숨겨진 우상을 여호와 앞에서 감출 수가 없다.
다음에 우리는 첫째 계명에 부과된 적극적인 의무를 생각해 보자.
간단히 말해서, 너의 하나님 여호와 오직 그만 선택하고 예배하고 섬기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조성자시요, 통치자시며, 권위자시요, 예배의 지존자이시기 때문에 그는 어떠한 경쟁자도 인정치 않으시고 그와는 어느 누구도 싸울 수가 없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요구는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그것을 범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제 1계명은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일치되는 가운데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고 영혼을 만족케 하실 수 있는 유일 지존자이시다.
그것은 우리가 지상의 모든 사랑보다도 더욱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됨을 요구하며 그를 가장 높은 위치에 모셔서 섬기고 복종해야 됨을 요구한다.
그것은 우리가 참되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봉사함에 있어서 모든 태만과 위선을 좌우로 물리치고 오직 진실한 마음으로 헌신해야 할 것을 요구한다.
제 1계명이 요구하는 의무들을 표현할 때는 웨스트민스터의 신앙고백서를 인용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 고백서는?유일하시고 참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신 것을 알고 인정하는 것이며(대상 28:9, 신 26:17등등), 생각함으로 (말 3:16), 묵상함으로(시 63:6), 기억함으로 (전 12:1), 높게 받들므로(시 71:19), 경외함으로(말 1:6), 숭배함으로 (사 45:23), 선택함으로 (수 24:15), 사랑함으로 (신 6:5), 사모해야 (시 73:25) 한다.
또한 그를 두려워함으로 (사 8:13), 그를 믿음으로 (출 14:31), 신뢰함으로 (사 26:4), 소망함으로 (시 103:7), 그를 기쁘시게 함으로 (시 37:4), 그를 즐겁게 함으로 (시 32:11), 그를 위해 열심을 품음으로 (롬 12:11), 그를 찾음으로, 모든 찬양과 감사를 드림으로 (빌 4:6), 그리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 그에게 모든 순종과 복종을 드림으로 (렘 7:23), 모든 물질에 주의하여 그를 기쁘시게 함으로 (요일 3:22), 그를 슬프게 하지 않음으로 (렘 31:18, 시 119:136) 그리고 하나님과 겸손히 행함으로 (미 6:8) 그에게 영광 돌려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의무들은 다음의 주요한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우리가 모르는 하나님께 예배할 수 없기 때문에 말씀과 사역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충만한 지식을 따라 끊임없이 일생 동안 추구하는 것이다.
둘째, 성실하게 그를 찾아 그 안에서 기쁨을 누리고, 나아가서 열과 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셋째, 그의 위대하심에 대한 경의와 그의 권위에 대한 지고의 존숭과 그의 영광에 대한 갈망을 표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순종의 원동력인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불순종을 못하게 하는 것이 된다.
넷째,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말씀과 기도에 따라 연구와 묵상을 계속 하고, 배운 것들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너는 내 앞에 다른 신들 두지 말지니라.”하는 것은 마땅히 하나님께만 있어야 하는 신앙심과 찬양과 신뢰함을 하늘이나 땅의 아무에게나 어떤 것에도 두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오직 하나님께만 속하는 것을 다른 어떤 물질이나 피조물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과 다른 피조물 사이에 그러한 것들을 나누려고 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
다음에 나와 있는 것들은 제 1계명에서 금지하고 있는 큼직한 죄목들이다.
첫째, 우리가 마땅히 하나님을 알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을 멸시함으로써 하나님과 그의 뜻을 고의적으로 알지 않는 것이다.
둘째, 무신론이나 하나님을 부정하는 행위이다.
셋째, 우상숭배나 다른 신을 만들어 섬기는 일이다.
넷째, 불순종과 자기 옹고집 혹은 공공연히 하나님께 반항하는 행위이다.
다섯째, 우리의 가슴과 마음을 다른 대상에게 두거나 과도하고 무절제하게 사랑하는 행위 등이다.
어떤 자가 마음에 생각함으로 신을 만들어낸다면 그는 우상숭배자이며 제 1계명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그 자들은 신성 안에 삼위가 있음을 부정하는 유니테리안들이며,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하고 교황이 죄사할 권세가 있다고 믿는 카톨릭 교도들이며, 신성이 무너지고 파괴되었다고 믿는 대부분의 알미니안주의자들이며, 관능적인 쾌락주의자인 에피큐리안들이다. (빌 3:19)
왜냐하면 그러한 자들은 외부적인 우상을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겔 14:3)라는 구절이 이것을 보여준다.
사도 바울이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골 3:5)라고 말한 것을 보아도 모든 무절제한 욕망은 우상이다.
우리가 드려야 할 소원과 예배의 대상은 홀로 한 분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것이 자신이든지, 금과 명예와 기쁨이든지, 혹은 친구이든지, 모두가 하나님께 속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고 만다.
당신의 하나님은 무엇인가?
무엇에다 당신의 삶을 바치고 있는가?
제 2 계 명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3,4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4-6)
제 2계명은 제 1계명과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그들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여러 가지 모양으로 표현된다.
첫째 계명은 참되신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으로 선택하는 것과 관계되지만 둘째 계명은 예배하는 우리의 실제적인 고백에 관계된다.
전자는 예배의 대상에 고정시키지만 후자는 종교적인 예배의 모양에 초점을 맞춘다. 첫째 계명에서는 여호와가 자신을 참되신 하나님으로 선포하시지만 여기에서 그는 자신의 본성과 어떻게 자신이 경배 받아야 하는가를 계시하셨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이 계명은 인간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욕망이라든지 혹은 병적인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그러한 것들을 쳐부수어 버린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예배의 보조수단으로 도움받기 위해 감각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물질을 사용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찾는 데는 어렵지 않다. 하나님은 형체가 아니며, 볼 수도 없고 다만 신령한 원리에 의해서만 깨달아 질 수 있다. 이 원리가 타락한 인간에게는 죽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연히 육체와 연관되는 것을 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에게는 큰 차이가 있게 된다. 하나님을 살아 계신 본체로 참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헌신하는 수단으로써 어떤 형상이든지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와 매일 교제를 나누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기도하고 찬양하는 데에 그의 형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는 환상으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 그를 깨달아 알고 섬기기 때문이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제 2계명은 모든 우상이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강조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저주가 뒤따른다. 문제는 형상을 만들어 내는 재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라”는 말씀에서 보여주신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라”(출 25:18)고 하셨고, 후에는 놋뱀을 만들라고 명령하셨던 것과 같이, 저주받은 물질이나 형상에 절하는 미련함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볼 수 없고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물질이나 한정된 형태로 나타낸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며 그의 권위에 대한 신성모독이다. 이와 같이 극도로 저주받은 성상숭배 즉 아주 잘못된 하나님 숭배는 합당한 하나님 숭배가 어떤 미신적인 의식으로 말미암아 모독되어서는 안 된다.
이 둘째 계명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에게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라고 말하는 소극적인 면뿐이다. 그러나 여기에 요구되는 의무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이러하다. 즉 하나님께서 말씀 가운데 제정하신 모든 예배와 법도를 순전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준수하고 지키는 것(신 32:46,47, 마 28:20, 행 2:42, 딤전 6:13,14), 특별히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와 감사를 드리는 것(빌 4:6, 엡 5:20), 말씀을 읽고 전파하고 듣는 것(신 17:18,19, 행 15:21, 딤후 4:2등등)이다.
또한 성령의 시행과 수납(마 28:19, 고전 11:21-30), 교회의 치리와 권징(마 18:15,17, 16:19, 고전 5장), 직무와 사역(엡 4:11,12등등) 거룩한 금식(고전 8:5), 하나님의 이름으로 수고하는 것(신 6:13), 서원하는 것(사 19:21, 시 76:11), 모든 거짓 숭배를 인정치 않고 혐오하고 반대하는 것(행 16:16,17등등), 각자의 주어진 위치와 사명을 따라 모든 우상을 제거하는 것(신 7:5, 사 30:22) 등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 우리가 간단히 덧붙여 말하자면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기 전에 성실한 준비를 갖추는 것이며 올바른 마음자세를 가다듬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말씀을 읽거나 들을 땐 우리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지 그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이다.
인간 이성의 판단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든다거나 그러한 수단들은 모두가 정죄 받는다. 모든 예배의 형태 심지어는 참되신 하나님에게 드리는 경배일지라도 그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과는 모순되거나 반대되고, 사도 바울이 표현했던 “자의적 숭배”(골 2:23)와 같은 것이라면 제 2계명은 호되게 책망한다.
그것은 참되신 하나님께 예배를 타락시킨 형태이며 미신으로 나아가는 인간 마음의 성향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기능과 재주로 어떤 형상이든지 만들려고 할 때 이 점에 있어서 허용 받지 못하며 그리스도께서는 당시의 종교의식적인 손 씻는 결례를 정죄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의 법에다 인간의 유전을 덧붙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제 2계명은 현대인의 의식주의(예배에 단일복장을 입는 것)를 비난한다. 또한 성만찬에 참예함으로 주술적인 효능이나 특별한 힘이 덧붙여진다고 하는 것이나 십자가를 사용함으로 그렇게 된다는 것들을 비난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제정하시고 경배 받으시는 예배마저도 경시하거나 취소하는 자들을 정죄한다.
성경이 우리에게 예배의 범위를 설정했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에 덧붙여서도 안 되고 거기에서 축소해도 안 된다. 이 원리를 적용함에 있어서는 예배의 본질과 부수적인 것들을 엄밀히 구분해야 한다.
사람들이 경배의 요소라고 우리에게 강요하려 할 때 그것이 만약 성경 상에서 명백히 요구되지 않는 이를테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릎을 꿇는 것이라든지 십자가를 그리는 것 따위는 증오할만한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예배의 분위기나 변화가 예배 중에 요구된다면, 그들에 대한 성경적인 표현이 없을지라도 그들이 신령한 예배의 규모와 질서에서 떠나지 않고 온당하고 질서 있게 나아가는 것들이라면 우리가 받아들여도 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암부로스가 터득해서 가르쳐 준 좋은 실례가 나와 있다.
“그대가 죄를 짓지 않거나 죄를 짓게 하지 않으려거든 그대가 처한 교회의 합당한 관례를 따를지니라.” 우리가 만약 하나님께서 세우신 예배의 법도를 무시한다면 이 계명을 위반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냉랭한 사랑, 어수선한 마음 거룩한 열심의 부족, 불신앙, 마음은 그에게 떠나 있으면서도 입술로만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하는 것들도 역시 이 계명을 위반하는 것이다.
제 2계명은 세 가지 이유에 의해 시행되어진다.
첫째 이유는 계명을 어기는 자에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그가 우리와의 관계를 “너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하셨다. 여기 ‘하나님’이란 히브리어 개념은 권위를 입증할 수 있고 불명예를 받을 땐 능히 보복할 수 있는 ‘상한 자’라는 뜻이다.
결혼생활에서 상대방이 계약관계를 어겼을 때 취해지는 비유적 용어인 ‘질투하시는 하나님’ 이시기 때문에 어떤 불륜에 대해선 형벌이 가해진다. 인간의 방식을 따라 말씀하시는 주님은 그를 비웃거나 업신여기는 자를 용서치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들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중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 …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로 나의 질투를 일으켰도다.”(신 32:16-21 참고).
둘째, 엄격한 심판으로 위협한다.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3,4대까지 이르게 한다.” 여기서 ‘갚는다.’라는 말은 비유적인 표현으로 하나님께서는 마치 시간이 경과하기까지 모르거나 잊어버렸던 것처럼 하셨다가 그의 경륜과 섭리에 따라 인간의 악한 행사와 길을 예의 주시하시고 드러내신다는 뜻이다.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어찌 이 일들을 인하여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런 나라에 보수하지 않겠느냐?” (렘 5:9, 참고 렘 32:18, 마 23:34-36) 이것은 사람들의 본래적인 애정에 호소함으로써 우상숭배에서 돌이키게 하기위한 것이다. “주님의 공의로우신 저주는 악한자의 머리 위에만 임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전 가족에게까지 미친다.”(칼빈)
훈도나 모본을 잘못 보임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개념을 자녀에게 가르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형벌은 지은 죄과에 따라 가해진다. 하나님은 부모가 지은 죄를 자식에게도 벌할 뿐만 아니라 범죄의 당사자 부모들에게 벌하신다. 왜냐하면 부모가 죄짓고 벌 받는 것 만으로서는 자식이 죄를 짓지 않는다는 보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셋째로 계명에 순종하면 다음의 약속 속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지고의 축복을 받게 된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수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라는 말씀에서이다. “완전히 행하는 자가 의인이라 그 후손에게 복이 있느니라.”(잠 20:7)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계명을 지킴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카톨릭 교도들은 그들 앞에 보이는 형상을 만들어 놓고 성상숭배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촉진시키는 수단이 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을 미워하기 때문에 우상을 사용한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자들의 자손들 수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신다는 이 약속은 보편적인 원리를 포함한 것이 아니다.
이삭의 경우 경건치 못한 에서가 있었고, 다윗의 경우 압살롬이 있었다는 점에서 보여 지기 때문이다. “입법자께서는 그러한 사건에서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을 포기하면서까지 불변한 법칙을 마련할 뜻이 전혀 없었다. …다만 주께서는 부모 때문에 자녀에게 그의 긍휼과 자비를 베푸신다는 한 예만을 들어 보이심으로 그를 경배하는 자들에게 불변한 은혜에 증거를 제공하시는 것이다.”(칼빈)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수천의 사람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된다. 사람들이 흔히 수백만이라고 말하나 (유 14) 여기서는 수천의 무리이다.
주님의 양떼는 오히려 적은 무리다 (눅 12:32). 자녀를 위하여 하나님을 진노를 쌓지 아니하고 기도로 쌓아 올린 경건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들이 있다면 이는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해야 될 일인가?
제 3 계 명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아니하리라”(출 2:7).
제 2계명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방법에 대해 언급하나 제 3계명은 합당한 영적인 태도로 하나님께 경배드릴 것을 요구한다.
곧 우리는 최상의 성실, 겸손 그리고 경배를 드림으로 엄위하신 하나님의 권위에 만족할만한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 여호와 너의 하나님을 경외하라”(신 28:58). 우리가 지존자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야말로 그 얼마나 거룩한 심성으로서 엄위하신 하나님의 존전에 설 수 있단 말인가!
“이 명령의 끝 부분은 주께서 자기 이름의 위엄을 신성불가침하게 하시고자 하는 데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에 대해서 무엇을 생각하든지 무엇을 말하든지 그의 이름의 장엄함에 따라 그의 뛰어나심을 나타내어야 하며 그의 위엄을 높여야 된다.” (칼빈) 하나님에게 속하는 그 어떤 것도 가장 진지하게 표현되어야 할 것이다.
먼저 우리는 이 계명의 범위와 인식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대로 여호와란 이름은 그로 말미암아 그의 말씀, 칭호, 속성, 법도, 사역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다. 하나님이란 이름은 그의 본성과 존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시편 20편 1절, 135편 3절, 요한복음 1장 12절 등에서 잘 타나나 있다.
때로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한 진리를 모두 포함한 집대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우리가 주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 하리이다.”(미 4:5) 이때는 그 이름의 뜻이 하나님께서 정하여주신 진리와 경배의 방식을 의미한다. “내가 당신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당신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요 17:6) 즉,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하늘나라의 교훈을 가르치셨다는 뜻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혹은 특수하게 우리가 부르고 알게 된 이름이 사용되어진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다”라는 것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대상으로 혹은 그에 관해 말하는 주제로서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않는다는 것은 최상의 경외심을 가지고 생각과 말과 행실에 있어서 거룩하게 사용해야 함을 말하는 부정적인 측면이다.
제 3계명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이와 같은 태도로 일컫기를 요구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총 가운데 많은 것들을 주셨는데 우리가 함부로 상용하거나 아무렇게나 나타낸다면 가장 위대한 특권을 가진 우리가 가장 사악한 경멸을 받아도 마땅할 것이다.
신앙적인 고백을 하지 않는 사람이나 거룩한 지존자의 것들을 배우려 하지 않는 인간들은 그를 무시하는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공중예배 에서나 개인 기도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또한 종교적인 선서를 할 때나 엄격한 약속을 할 때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
우리가 기도드림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때 아브라함(창 18:27), 야곱(창 32:10), 모세(출 15:11), 솔로몬(왕상 8:33), 히스기야(왕하 19:15), 다니엘(9:4) 그리고 천군 천사가 (계 4:10,11)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처럼 우리는 겸손하게 낮아져서 거룩한 신성을 찬양해야 된다.
부정적인 측면에서 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모든 불명예스러운 생각, 불필요한 짓, 건방진 행동, 불경스러운 언행, 신성모독적인 언사, 그의 말씀에 대한 무분별한 사용, 그의 섭리에 대한 불평,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게 하시는데 쓰시는 것의 남용, 이 모두를 금지하고 있다.
하나님의 이름이 어떻게 하여 망령되이 일컬어지는가를 보다 구체적으로 몇 가지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는 합당한 목적을 생각지 않고 사용될 때이다. 우리가 그의 이름, 칭호, 속성들을 사용하는 데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하나는 그의 영광을 위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의 교화를 위해서이다. 이 밖에 모든 것은 시시하고 사악한 것들이라서 영광과 존귀가 충만하시며 위대하시고 거룩하신 이름을 들어 사용할 수 없다.
우리가 언어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말하는 상대방의 유익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우리의 입술로 하나님의 형용하기 어려운 이름을 부르는 데 합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우리가 그의 이름을 쓸데없는 목적에 따라 함부로 말할 때 대단한 치욕거리가 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우리가 그것을 합당한 생각이나 경외심이 없이 사용하면 우리로 말미암아 망령되이 일컬어진다. 스랍 천사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바 그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때 언제든지 우리는 그의 무한하신 존귀와 영광을 신중하게 엄숙하게 생각해야 하며 그 이름 앞에서 우리의 마음에 가장 깊이 엎드린 경배가 있어야만 할 것이다.
엄위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생각하고 말하는 자들과 모든 대화 가운데 빈 말이나 허탄한 말만 하는 자들이 어떻게 그의 이름을 존숭함으로 높여 부를 수 있겠는가? 그 이름으로는 장난쳐도 안 되고 가벼운 혓바닥으로 이리저리 갖고 놀아도 안 되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을 부름은 그 이름을 엄숙하게 다시 한 번 생각하는 습성으로 임해야 한다. 왜냐하면 언제나 그분은 살아 계셔서 발설하는 모든 것들 듣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고백하든지 않든지 그것이 위선적으로 사용되어질 때에 망령되이 일컬어진다. “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으며 유다의 근원에서 나왔으며 거룩한 백성이라 칭하며 그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성실치 아니하고 의로움이 없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부르는 너희는 이를 들을지어다.”(사 48:1)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으나 거기에 포함된 계시에는 순종치 않았고 결국은 제 3계명을 범하게 된 것이다.(마 7:22,23 비교).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할 때는 그 의미와 함축된 뜻에 맞는 방법으로 사용해야 한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라고 말씀하셨다.(눅 6:46).
마찬가지로 우리가 거룩한 의무에 애정은 두지 않고 가볍게 기계적으로 처리하면 이것도 무서운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행함이 없는 기도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며 마음은 그에게서 떠나 있으면서도 입술로만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그를 만홀히 여기는 결과이며 정죄를 가중시키는 행위이다.
우리가 사람의 이름을 대하듯이 대수롭지 않게 하나님의 이름을 대하여 부르고 가볍게 맹세할 때에 그리고 이웃에 대해 거짓증거 할 때에 하나님의 이름은 망령되이 일컬어진다. 우리가 진실을 알지 못하고 또한 거짓말로 꾸며서 맹세하거나 증거 할 때 우리는 사람들이 범할 수 있는 가장 큰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본인은 원치 않았는데 거짓의 아비가 거짓을 말하게 했다고 하나님을 증인으로 요청했기 때문이다. “땅으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함이니라.”(사 65:16)라는 구절에서 진리의 하나님은 사람들 사이에 증거 되는 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구별해야 한다고 하셨다. 서약이 우리 중에서 정치적 목적과 뒤엉켜 얼마나 남발되었고 무시되어 왔는가, 그 죄가의 엄청남을 그대는 생각할 수 있는가!
“심중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나의 미워하는 것임이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슥 8:17) 평소의 일상 대화중에서 온갖 저주와 모독하는 언사로서 우리의 언어를 오염시키고, 우리의 귀를 다치게 하는 바 이 무수한 거짓맹세 자들의 무리에게 우리가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들의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들의 입에는 저주와 고통이 가득하였다”(롬 3:13,14). 이웃을 해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는 보잘 것 없는 변명도 하나님께는 망령된 것이고, 그들의 모든 동료가 그렇게 하니까 따라서 했다는 구실도 망령되고, 단지 사람들의 감정을 누그러지게 하는 의도뿐이었다는 탄원도 망령된 것이다!
사람들이 당신에게 모욕을 줄 수 있는 최대한도로 하나님께 대항하고 모욕함으로 당신의 마음을 분노하게 했다면 그 얼마나 미칠 노릇인가! 비록 이웃이 비난하지 않고 경찰이 체포하지 않고 검사가 벌주지 않아도 “주님께서는 자기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않을 것이다.”
“저가 저주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또 저주하기를 옷 입듯이 하더니 저주가 그 내장에 들어가며 기름같이 그 뼈에 들어갔나이다.”(시 109:17,18) 하나님은 우리의 사회가 범하는 신성모독 죄로 대단히 두렵게 격분하신다.
오늘날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언사를 듣지 않고서는 거리에 나가거나 모인 무리 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일간 신문의 소설, 무대, 심지어 라디오까지도 (그리고 최근에는 텔레비전, 영화, 인쇄물) 무서운 범법자들이며, 의심할 여지없이 이것들은 무서운 죄악이며 이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심판을 쏟아 붓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말하기를 “저주로 인하여(맹세) 땅이 슬퍼하며 광야의 초장들이 마르나니 그들의 행위가 악하고 힘쓰는 것이 정직하지 못함이로다.”(렘 23:10) 그리고 하나님은 오늘날도 동일하게 말씀하신다. “주님은 자기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아니하리라.” 쓰라린 형벌이 현재의 생활에 주어지지 않는다면 장차 오는 그 때에 가장 확실히 그리고도 영원히 그의 몫으로 주어질 것이다.
제 4 계 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 20:8-10)
제 4계명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시간을 주관하시는 주인이라는 것과 그가 이 계명에서 밝히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시간을 선용하며 개선해야 할 것을 보여준다. 이 계명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이들은 상호간에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하라”(행하여도 좋다는 것이 아님)는 부분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 날을 거룩히 지켜라”는 부분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거룩한 의무임을 보여준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우리에게 맡기신 직업과 생활에 부지런히 참예하여 주의 깊게 양심적으로 일을 하라고 하는 것이다. 이 계명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인간이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일을 해야 된다는 것이며 그것도 일주일에 5일간 일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한때 노동조합이 이 문제로 선동했음) 육일간이다.
일을 하지 않는 자는 예배에 합당치 못하다. 일은 예배드리러 가는 길을 닦는 것이며 예배는 우리로 일을 더욱 충실히 하게 하는데 합당케 한다. 누군가가 본 계명의 상반부에 순종하지 않아도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오늘날 사회제도에서 빚어지는 어두운 면이며 이는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서 얼마나 빗나갔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우리가 6일 동안 부지런하고 충실하게 일을 한다면 제 7일째의 안식일은 더욱 가치 있을 것이다. 안식일의 제정은 인간 자유를 독단적으로 제한하려는 것이 아니라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섭리이다.
그것은 슬픔의 날이 아니라 기쁨의 날로 제정된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일주일 중 하루를 현세의 수고스런 생활에서 면제시켜 주는 창조주의 자비이며 우리가 물질적인 날에서 영적인 날로 완전히 돌아오는 날들을 위해 새로이 성결해지고 새롭게 된 힘을 공급받아 가짐으로 고난과 시련뿐인 현재의 생활을 더 좋게 하고 미구에 올 미래를 예상케 한다.
인간의 시간을 규정하는 이 계명은 특수한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계획되어진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향하여 영속적이고 영구적인 것이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막 2:27) 제정되었지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위에서 지적된 이 계명의 이중성은 다음에 이어지는 부분에서 그 이유가 분명하고 명확하게 밝혀진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7일에 쉬었음이라”(출 20:11).
이 계명의 이중성을 유의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엄위하신 창조주께서도 6일 동안 일을 하시고 제 7일에 쉬셨음으로 그의 피조물 앞에서 지켜야 할 모본(계명의 이중성)을 세워 놓으셨다. 또한 남자에게 노동을 맡기신 것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미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은 그를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던 것이다(창 2:15).
이 이중성을 내포한 계명의 영속성 혹은 영원성은 위에서 보여 진 설명에서 특수하게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분명하게 선포되어진 것이라는 데서 명백해진다. 더구나 이 계명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성취하셨을 때 폐지된 이스라엘의 의식적 율법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손가락으로 돌판에 쓰심으로 율법의 영원성을 의미하는 도덕적 율법에 주어진 것이다.
결국은 이 계명에서 쓰여 진 바로 그 용어가 유대인만을 위해 쓰여 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백히 밝혀 준다. 왜냐하면 유대인 중에 거주하는 이방인에게도 이 계명은 관계하였기 때문이다. 비록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의 의식적 율법 하에 있지 않고 하나님과의 계약관계는 없었을지라도 그들도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것을 요구받고 있었던 것이다. “너는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일하지 말라”(출 20:10).
“제 7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이니라.”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제 7일’이란 말이 한 주일의 제 7일 (여기에서나 성경 다른 어디에서도) 이 아니고 그냥 “제 7일” 즉 6일간 일한 그 다음날이라는 것이다. 유대인에게 제 7일은 한 주간의 일곱째 날인 토요일이었으나 우리에게 이 날은 히브리서 4장 8절에 명백히 보여준 대로 ‘다른 날’, 다시 말해 한 주간의 첫째 날이었다.
왜냐하면 이 안식일이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기념할 뿐만 아니라 보다 더욱 큰 사역인 구속을 기념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유대인과 기독교인에게 동시에 부합하도록 제 4계명을 주셨으며 그로 말미암아 이 계명의 영속성이 알려진다.
기독교인의 안식일은 토요일 자정에 시작하여 일요일 자정에 끝난다. 그것은 요한복음 20장 1절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해뜨기 전에 시작된 것이 분명함으로 우리는 안식일이 토요일 한 밤중에 시작된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요한복음 20장 19절에 보면 (그 사실로 미루어 보아 그것이 “둘째 날 저녁”이라 불리지 않았다.) 우리가 안식일이 저녁 내내 계속되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우리의 예배도 저녁 동안까지 계속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기독교인의 안식일은 토요일 자정에 시작되지만 그것에 대한 준비는 좀 더 일찍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가 어찌 “너는 아무 일도 하지 말지니라.”라는 계명의 요구조건에 만족될 수가 있겠는가? 안식일에는 우리 자신의 즐거움을 위하여 오락은 물론 모든 세상적인 번거로운 일에서도 벗어나 종일토록 온전한 안식이 되게 해야 할 것이다. (사 58:13) 아내도 그녀의 남편과 온전한 하루의 안식이 필요하다. 그녀는 “연약한 그릇”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포리지(음식의 이름)나 수프와 같은 것들은 토요일에 미리 준비되어 안식일에는 간단히 데워 먹을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자신을 주 안에서 기쁘게 할 수 있고 예배와 봉사에 전적으로 헌신할 수 있다.
또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토요일 밤에 일을 하거나 앉아 있어서 주의 날에 침대에 오래도록 누워 있거나 거룩한 의무를 하는 데 조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 계명은 하나님이 가정에서 경배 받으신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준다. 그것은 물론 가정예배를 시행해야 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아홉 계명의 어떤 것보다도 특별히 가정의 가장이나 고용주에게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의 책임 하에 모두가 안식일을 지킬 수 있도록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더욱 더 직접적으로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신다. 그것은 무한히 거룩하신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하여 엄격히 선별해 놓은 것이며, 우리는 묵상과 명상과 찬양을 드리는 데에 안식일을 보내야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제정하셨기 때문이며 (시 118:24), 우리는 그것을 폐지할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이 계명은 마땅히 해야 할 의무들을 생각해 버리거나 부주의하게 행하거나 싫증나게 하는 것을 금한다. 우리가 이 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면 나머지 아홉 가지 계명도 잘 지키게 될 것이다.
우리가 “거룩한 안식일”날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세 종류이다.
첫째는 필요에 의한 일이다. 이를테면 전날 할 수 없고 다음 날까지 미룰 수 없는 일 - 가축을 치는 일이다.
둘째, 자비에 관한 일이다. 이를테면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하는 동정과 사랑의 일 - 병자를 돌보는 일이다.
셋째, 경건에 관한 일이다. 이를테면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은혜를 감사하고 기뻐함으로 드리는 공중예배와 가정예배이다.
우리는 이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가 우리에게 주시는 것을 받아 누리기 위하여 성실히 기도를 드려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날 우리의 마음을 부패시키고 우리의 머리를 혼탁하게 하며 거룩한 의무에서 돌아서게 하는 사단의 역사에 주의를 기울여 싸워야만 할 것이다.
주님은 그의 날을 성도로 복 주어 지키게 하신다. 한편 우리의 범죄한 땅이 쓰디 쓴 대가를 증거 하는 날에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모독한 죄 값으로 특별한 저주를 내리신다. (느 13:17-18 참조)
“안식일을 잘 지킨 자여, 그대에게 만족한 일주일이 있을지어다. 힘에 힘이 진하도록 수고하리로다. 그러나 안식일을 모독한 자, 그대를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아직도 슬픔의 사자가 보이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