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2-06-02 22:39
(13)유태인의 자녀를 낳고 기르는 53가지 지혜(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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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6,748  

35.텔레비전의 폭력장면은 보여주지 않지만, 다큐멘터리 전쟁영화는 꼭
보여준다
부모가 신경만 쓰면 텔레비전의 악영향은 없다
텔레비전의 대량보급으로 화면을 통한 폭력이 보편화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텔레비전의 폭력장면을 모방한 젊은이의 탈선 이야기가
이따금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텔레비전의 폐해를
실감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집 아이들은 텔레비전의 악영향으로부터 거의 안전지대에 놓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여덟 살인 둘째딸아이와 여섯 살인 아들에게는
안식일을 제외한 다른 날에는 오후 여섯 시 반까지만 텔레비전 시청을
허락한다. 그것도 어린이 프로에 한정되며, 혹시 그들이 어른 프로를 보고
있으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스위치를 꺼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집에선 폭력장면 따위가 어린이 시청 시간에 화면을
비치는 일이란 절대로 없다.
다만 폭력적이라 할지라도 다큐멘터리는 예외이다.
우리 유태인은 지난날 셀 수 없이 많은 박해의 역사를 갖고 있는 민족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스에 의한 대량 학살은 우리 유태인들 한 사람 한
사람과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다.
나의 경우만 하더라도 조부모는 물론이고 백부 내외가 모두 학살당해 지금은
한사람도 남아 있지 않다.
일본에 있는 단 한 사람의 랍비인 마빈 토케이어 씨 가족 역시 대부분
아우슈비츠에서 몰살당했다. 그의 어머니는 11형제나 되었지만, 그 어머니를
제외한 모든 형제와 자손들이 학살당했던 것이다.

'사실'과 '픽션'을 구별할 수 있는 안목을 길러준다
이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나치스의 학살 역사는 다큐멘터리 영화로 남아있다.
우리 집에서는 이와 같은 종류의 기록영화만은 폭력적인 장면이 있더라도
자녀들이 보는 것을 막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실을 정확히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언젠가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 물어온 적이 있다.
"우리에겐 사촌들이 없나요?"
나는 솔직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렇단다. 우리 친척은 모두 학살당했기 때문에 한 사람도 없단다."

'사실'과 '픽션'을 구별할 줄 아는 안목이 있다면 자녀들은 그 어떤
폭력장면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폭력장면이 자녀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는 것은 그들이 '사실'과 '픽션'을 혼동하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에서 죽어 가는 동포의 비참한 모습을 보는 것만큼 잔인한 것은
없다. 그러나 유태인들은 자녀들에게 그러한 비참한 일을 두 번 다시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역사적인 교훈'을 심어주기 위함이다.
우리집 큰딸아이는 텔레비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영화는 이따금
본다. 그러나 이제는 사실과 픽션을 분명히 구별할 줄 알기 때문에 모든 것을
그 애 재량에 맡긴다. 이것은 보고, 저것은 보지 말라고 일일이 간섭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무조건 '텔레비전은 나쁘다'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텔레비전과
현실의 차이점을 자녀들에게 올바르게 가르쳐주지 못한 부모 쪽에 더 큰 책임이
있지 않을까.

이것이 포인트!
무조건 '텔레비전은 나쁘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텔레비젼과
현실의 차이점을 자녀들에게 올바르게 가르쳐주지 못한 부모 쪽에 더 큰 책임이
있지 않을까.

36.자녀들에게 거짓말을 하여 헛된 꿈을 갖게 하지 않는다
유아 때부터 합리적인 사고를 심어준다
유태인은 합리주의자이다. 이를테면 <탈무드>의 해석을 둘러싸고 장장 몇
시간에 걸쳐 토론을 할 때라도, 서로가 이치를 따져가면서 전개해 나가는 것을
조건으로 삼고 있다. 이런 경향 때문에 더러는 '유태인은 추상적이다'라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우리 유태인은 합리적인 사고야말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유태의 어린이들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있다'는 그런
비현실적인 이야기는 귀담아듣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때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할지는 모르지만, 실질적으로 자녀들이 일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한낱 '허황된 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태인들은 자녀들에게 죽은 뒤에 '천당'에 가느니 '지옥'에
떨어지느니 하는 따위의 얘기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 나 자신조차 믿지 못하는
이야기를 해서 자녀들에게 득 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릴 적부터 합리주의적인 환경 아래에서 성장한 유태인 가운데,
상대성 이론을 발견한 아인슈타인이나 매독반응의 발견자인 와세루먼, 그리고
혈액형을 발견한 란드슈타이너 등의 과학자들과, 냉철한 현실 감각으로 세계
제일의 금융 재벌이 된 로스차일드 일가 등이 탄생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 아닌가 생각한다.
또한 합리주의 신봉자인 유태인들은 이 세상에 '기적'이란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믿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구약성서는 온통 기적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당신이라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구약성서에 나오는 기적들은 모두 다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것들뿐이다.
즉, 이 세상에서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은 한 가지도 실려 있지 않은
것이다.

모세의 기적도 과학적으로 입증된다
한 가지 예로 모세의 기적을 들어보자.
노예의 몸인 유태인들을 이끌고 사막으로 도망친 모세가 홍해에 다다랐을 때,
앞은 바다가 가로막고 뒤쪽에서는 이집트 군사들이 추격해 오고 있어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 그야말로 기적이 일어났다.
출애굽기에는 그 장면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 밀 때 여호와께서 큰 돌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

홍해가 둘로 갈라지고 그 사이로 건너 위기를 모면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일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1백 년에 한
번쯤 강풍으로 인해 조류가 영향을 받고, 그로 인해 홍해가 사람이 다닐 수
있을 만큼 얕아지는 경우가 실제로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세의 기적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가능한 이야기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 유태인들은 모세가 일으킨 이 현상을 오로지 타이밍이 잘
맞아떨어진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세의
기적이 헛된 공상이라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이처럼 기적마저도 합리적으로 해석하는 데서 유태인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다.

러시아의 혁명가인 레온 트로츠키는 일곱 살 때 친구에게, '인간이 죽으면
하늘의 어디엔가로 올라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야'라고 이야기했는데,
그 사실을 죽기 직전까지 믿었다고 한다.
또 음악가인 다리우스 미요는, 어렸을 때 그의 어머니 소피로부터 '그림 같은
광경'이라는 터키의 추억담을 듣고 옛날 이야기를 들었을 때보다 훨씬 더
풍부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데는 밑도끝도없이 지어낸 허황된 옛날
이야기보다는, 현실에서 일어난 이야기가 훨씬 더 효과적이다.
우리 유태인들은 기적과 같은 공상을 부정하고 현실성이 짙은 것을 통해서만
이론을 관철하려고 에너지를 불태운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합리주의적인 교육은
수많은 과학자, 사업가, 음악가, 미술가 등을 배출하는 토대가 되었다.
부모가 자녀에게 '꿈을 심어주기' 위해서 공상적인 이야기를 했다면,
언젠가는 그것이 거짓이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어야 한다. 이런 번거로움을
생각해서라도 처음부터 사실대로 이야기해 주는 것이 가장 옳은 방법이 아닐까.

이것이 포인트!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데도 밑도끝도없이 지어낸 허황된 옛날
이야기보다는, 현실에서 일어난 이야기가 훨씬 더 효과적이다.

제 3장. 의를 기른다
37.자녀를 꾸짖을 때는 기준이 분명해야 한다
꾸중은 부모로서의 의무
"당신들 유태인들은 신앙심이 깊으니 자녀를 꾸짖을 때, 하나님이 화를
내신다고 말함으로써 착한 일과 나쁜 일을 구별시키지는 않습니까?"
이 말은 내가 흔히 듣는 질문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대답으로 일관한다. 유태인들은
자녀들을 꾸짖거나 타이를 때, 절대로 하나님을 끌어들이지 않는다.
가정교육이란 한마디로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인 만큼 거기에는 좋으냐,
나쁘냐의 기준 이외에는 다른 말이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뿐만이 아니다. 동양에서는 '그런 짓 하면 못써! 체면이 말이
아니잖아'라는 말로 자녀들을 꾸짖는데, 이는 옳지 못한 방법이다. 왜냐하면
꾸짖을 일이 있다면 선과 악의 기준에 의해서 판단하면 되는 것이지, 그 밖의
어떤 것도 꾸짖음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자녀들을 교육하는 것은 부모들이다. 부모는 자녀들에 대해서 모든 책임을
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만큼 꾸짖는다는 것은 부모로서의
책임을 완수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인 것이다.
잘못을 저지른 자녀들을 꾸짖을 때는 절대적인 의미가 내포된 것이 아니면 안
된다. 그런 만큼 하나님 핑계를 대거나 다른 이유를 둘러대며 부모로서의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초 인간적인 덕보다 현실적인 덕을 행하라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추리소설 중 '랍비 시리즈'라는 것이 있다. 이
소설은 유태계 작가인 해리 케멜만이 쓴 것으로서, 그의 첫 작품인 <화요일에
랍비가 격노했다> 가운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유태인의 종교는 매일 매일 의식하면서 선과 정의를 실현하는 일이다. 더욱이
우리들이 추구하고 있는 것은 인간적인 덕이지 초인간적인 성인의 덕은 아니다.

이것은 소설의 주인공인 데이비드 스몰이란 랍비가 한 말이다. 선과 정의는
인간으로서 살아나가기 위한 조건으로, 날마다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만큼 구태여 하나님을 끄집어내지 않더라도 현실세계에 적용하는 착실한 방법을
우리들 스스로 알아서 실천해 나가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녀의 잘못을 꾸짖을 때도 그 목적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
<탈무드>에는, 대홍수 때 선이 노아의 방주에 함께 타려고 했지만 '무엇이든
짝이 있는 것만을 태워야 한다'는 원칙 때문에 거부당함으로써, 짝이 되는 악을
찾아 함께 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선과 악은 동전의 앞뒤와 같이 언제나 상반된 위치에 놓여 있다. 우리는 모든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먼저 그것이 어느 쪽에 해당되는지를 정확히 판단하고,
그것을 자녀들에게 전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올바른 가치 기준을
심어주려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꾸짖는다'는 것은 선과 악 중 한 가지 기준만을 부모의 책임 아래 자녀에게
심어주기 위한 행위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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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을 저지른 자녀들을 꾸짖을 때는 선과 악의 기준에 의해서 판단해야
하며, 절대적인 의미가 내포된 것이 안 된다. 선과 악은 동전의 앞뒤와 같이
언제나 상반된 위치에 놓여 있다. 따라서 모든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먼저
그것이 어느 쪽에 해당되는지를 정확히 판단하고, 그것을 자녀들에게 전해
주어야 한다.

38. 최고의 벌은 침묵이다
'침묵'이 매보다 효과적이다
자녀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어떤 벌을 줄 것인가-이것은 가정 교육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자녀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어떤 벌을 어떻게 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까?
예를 들면, 자녀들이 관여해서는 안 될 일에 나섰을 때, '그런 일에 나서지
말라고 했지'라며 말로써 꾸짖는 경우도 있겠고, 조금 심한 경우에는 매질을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은 어느 정도 잘못했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 벌인데, 벌은
미워서가 아니라 예방적인 차원에서 절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칫
이것을 잘못 다스리게 되면 부모의 경고나 꾸중이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버릇없는 아이로 자라기 십상이다.
이런 사정은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게나 마찬가지겠지만, 유태인
어머니들 역시 어느 나라에 뒤지지 않을 만큼 체벌의 강도가 심하다고 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자녀들이 학교나 외출에서 돌아와 책가방이나 입었던 코트를
아무렇게나 집어던지면 큰 소리로 꾸짖는다. 그래도 고쳐지지 않을 경우에는
엉덩이나 뺨을 때리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유태인 어머니들은 이런
체벌보다 한 차원 높은 방법을 항상 준비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침묵이라는
무기이다.
언젠가 겨우 세 살밖에 안된 딸아이가 제 친구한테서 받은 유리컵을 들고
다니면서 장난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내가 말했다.
"얘야, 깨뜨리기 전에 엄마에게 오렴."
"안 깨뜨려요."
그러고는 유리컵을 건네줄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이내 단념하고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랬더니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쨍그렁'소리와 함께 마루에 떨어진 유리컵은 박살이 나고 말았다. 나는 화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 봐, 엄마가 말했잖니. 너하고는 이제부터 말도 하기 싫으니 너도
엄마한테 말 걸지 마!"
그때부터 30분 동안 나는 계속 침묵을 지켰다.
이처럼 의사 소통의 수단인 대화를 끊는다는 것은 자녀들에게 최대의 벌이
아닐 수 없다. 즉, 자녀들의 존재를 아주 무시하는 것이 경우에 따라서는
매질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얘기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이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면서 자기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깊이 반성하는
계기를 갖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아무때나 이 방법을 사용해서는 안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말로써 타일러도 안 듣거나, 부모를 모욕하는 언동을 하는 등
가정교육의 근본에서 벗어났을 최악의 경우에만 비상수단으로 써야 하는
'무기'인 것이다.

침묵은 부모에게도 반성의 기회가 된다
한편 '침묵'을 지킨다는 것은 부모 자신에게도 매우 가혹한 벌이라고 할 수
있다. 유태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말이 많은 민족이라는 딱지가 붙었으리만큼
대화를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탈무드>에는 '입'이나 '말'에 대한 경구가 수없이 많은데, '이스라엘은
누에이다. 유태인은 쉬지 않고 입을 움직인다'라는 말도 그 중의 하나이다.
누에가 항상 뽕잎을 먹고 있는 것처럼 입을 움직이고 있다, 즉 유태인은 언제나
말이 많다는 뜻이다.
그런 까닭에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것은 가정 교육에
불충실했던 자신에 대해 반성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자녀들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확인하는 계기도 된다.
이렇든 '침묵'이 보통 벌과 다른 점은, 벌을 주는 쪽이나 받는 쪽 모두에게
독특한 심리작용을 일으키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것은 가정교육에 불충실했던 자신에
대해 반성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자녀들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확인하는
계기도 된다.

39. 협박은 금물이다, 벌을 주든 용서를 하든지 하라
부모의 애매한 태도는 자녀들의 마음의 건강을 해친다
우리 유태인들은 '건강'에 대해서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다. 깨끗한 코우샤
푸드만을 먹으며, 식사 전에는 반드시 손을 씻는 것을 종교적 계율로까지 삼고
있을 정도다.
그러나 신체의 건강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마음의 건강이다. 마음의
건강이란, 육체적으로 말하자면 찌뿌드드한 상태에 빠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자녀들로 하여금 항상 우울하거나 부모의 눈치만 살피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배려해야 한다.
이처럼 자녀들의 솔직하고 그늘지지 않는 마음씨의 소유자로 키우는 최대의
요점은 자녀들을 억누르지 말고 솔직하고 명쾌한 태도로 대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자녀들의 마음을 올바르고 건강하게 만드는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인 것이다.
유태인의 격언에 '자녀들을 협박해서는 안된다. 벌을 주든 용서하든 둘 중에
하나밖에 없다'라는 말이 있다. 이 격언이야말로 자녀들의 마음에 건강을
심어주는 최상의 조언이라 하겠다.
유태인들은 아이들에게 벌을 주려고 결심한 이상 도중에 우물쭈물하지
않는다. 반면 벌을 주지 않겠다고 다짐하면 모든 일을 불문에 부치고 용서해
준다.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일곱 명의 충실한 제자가 있다. 그들은 스승인
프로이트에게 주피터의 머리모양을 조각한 고대 로마의 복제품 반지를 선물로
받고, 합심해서 정신분석학계를 지도해 나가기로 다짐했다. 그런데 제자 중 한
사람인 모토 랑크가 프로이트 학파로부터 탈퇴하여 스스로 한 학파를 만들었다.
랑크는 프로이트가 온 정열을 쏟아 정신분석을 훈련시킨, 프로이트에게는 마치
자식과도 같은 소중한 존재였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랑크의 배신에 대해서
'나는 모든 것을 용서했다. 이제는 끝이 났다'고 담담하게 이야기했을 뿐이다.
이 일화는 비록 스승과 제자라는 특수한 관계이긴 하지만, 명쾌한 판단을
내린 훌륭한 예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이와 같은 명쾌한 결단이 사제지간이 아닌 부모자식 간에 일어났다면
자식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자녀들은 벌을 주든지 용서해 주든지, 한
가지를 선택하는 부모의 명쾌한 태도에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고 건전하게
성장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벌을 주는 것인지, 용서해 주는지 분간할 수 없는 흐릿한 태도를
취한다면, 자녀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불안정한 심리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협박은 자녀들의 마음의 건강을 해친다
비근한 예이지만, 자녀가 그릇을 깨뜨렸을 때,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
앞으로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니. 가만 두지 않겠어'라고 위협을 했다면 아이는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분명 잔뜩 겁에 질려 불안한 심리 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다.
자녀들에게 협박조로 말하는 것은 용서하는 것도 벌을 주는 것도 아니다.
단지 자녀들의 마음속에 불안감만 심어줄 뿐 아무 이득도 없다.
부모의 미지근하고 불확실한 태도나 말의 이면에는 은근히 자녀들에 대한
협박이 포함되어 있는 셈이다. 협박은 부모가 자녀들의 잘못에 대한 명쾌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초조감이 변질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동양 어머니들의 '잔소리'는 자녀들의 행동에 큰 걸림돌이 된다. 물론
나쁜 의도에서 하는 말이 아니겠지만, 언제나 자녀들을 심리적으로 억압하고
있다는 점에서 협박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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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들을 솔직하고 그늘지지 않는 마음씨의 소유자로 키우는 최대의 요점은
부모들이 자녀들을 억누르지 말고 솔직하고 명쾌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미지근하고 불확실한 태도나 끊임없는 잔소리는 자녀들을 심리적으로 억압하고
있다는 점에서 협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0. 자녀들의 잘못은 매로 다스린다
자녀를 때릴 때는 구두끈으로 때려라
우리 유태인들은 자녀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지혜의 근원인 머리를 제외한
다른 신체 부위에 매질을 하는 것에 대해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외출을 했다가도, 아이들이 남에게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했을 경우에는 즉시 집으로 돌아와서 엉덩이나 뺨을 때리며 꾸짖는다.
내가 아는 성미 급한 친구는, 아이가 잘못을 했을 경우 길거리든 식당이든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때리기도 한다.
유태인들은 부모의 손도 입(말로 꾸짖는 거)이나 눈(침묵으로 꾸짖는 것)처럼
자녀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하나의 '교육적 도구'라고 생각한다.
특히 손은 눈이나 입과는 달리 실제로 육체적 '고통'을 주기 때문에
자녀들에게 스스로의 행동을 반성하게 하는 효과가 크다. 그러므로 유태인들은,
매질은 자녀들의 마음을 순간적으로 고쳐주는 데 절대 필요하며, 동시에
자녀들에게 신체적 고통을 주는 것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구약성서의 잠언 13장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다.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어떤 자녀이건 응석을 마냥 받아주며 방임하는 것은 부모된 자의 책임을
다하지 것이 못 될 뿐 아니라, 자녀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진정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만이 자녀들의 잘못을 매로 다스린다는
뜻이다.
또 이런 말도 있다.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잠언 22장 15절)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내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잠언 29장 15절)

자녀들을 길들이는 데 있어 매는 꼭 필요한 것이고, 나아가서 그것을 통해
지혜까지도 얻을 수 있음을 강조한 말들이다.
물론 채찍으로 노예를 때리듯이 자녀들을 다루라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다만
상징적인 의미로서, 부모의 손으로 직접 때린다는 것은 미움이 아닌 '사랑의
채찍'임을 강조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일종의 스킨쉽인 것이다.
한편 유태인의 격언 중에 '아이들을 때려야 할 때는 구두끈으로 때리라'는
말이 있다. 즉 매를 때리는 목적은 아이들에게 육체적 고통을 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마음을 바로잡는데 있으므로 아이의 몸에 상처를
입히는 심한 매질은 피하라는 뜻이다.

신념이 없는 부모는 자녀들을 때리지 못한다
요즘은 어느 나라에서건 아이들을 때리는 것은 야만적이라는 인식 때문인지,
자녀들이 잘못을 했더라도 매를 들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인 것 같다.
그렇지만 매질이 자녀들에게 육체적 고통을 주기 위한 도구로 사용될 때에는
예외이겠지만, 잘못을 저지는 자녀들의 마음을 바로잡는 수단일 때는 결코
야만적이라 할 수 없다. 사용하는 시기와 정도를 분별할 줄만 안다면, 오히려
장려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다.
부모가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쳐서 매를 드는 경우가 아니라면, 매를 맞는
자녀들도 부모의 손길에서 진심 어린 애정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한편 부모로서 자녀들에게 매를 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부모에게 신념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 처하는 자기 자신이
옳다고 믿고 있는 가치관이 있고, 그것을 자녀들에게 인식시키는 것을
부모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한다면, 이와 같은 매를 포함한 그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자녀를 옳게 가르치려고 노력할 것이다.
지신의 신념에 자신감을 갖지 못한 채 자녀들을 어정쩡하게 다스리는 부모가,
자녀들만큼은 신념 있는 확고한 사람으로서 성장해 줄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한 바람이다. 즉 부모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매질을 혐오하는 풍조는 민주주의적 교육 방식과는 무관하다. 자신감을
상실한 부모만이 그저 자녀들을 먼발치서 지켜볼 따름이다.

이것이 포인트!
자녀의 응석을 받아주며 방임하는 것은 부모된 자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 못
될 뿐 아니라, 자녀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매질을 혐오하는
풍조는 민주주의적 교육과는 무관하다. 자신감을 상실한 부모만이 그저
자녀들을 먼발치서 지켜볼 따름이다.

41. 어떤 일이든 제한된 시간 내에 마치는 습관을 길러준다.
시간의 소중함을 깨우쳐준다
유태인 가정의 자녀들은, 가장인 아버지가 귀가하기 전에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다. 그 이유인즉 아버지가 귀가해서 샤워를 끝내는
즉시, 가족 모두가 단란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하기 위함이다. 가정의 저녁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유태인의 자녀들은 어렸을 때부터 정해진 순서와 정해진 시간 안에
일을 끝마치는 훈련을 철저하게 받으며 자란다. 그것은 비단 샤워뿐만 아니라
모든 생활에 그대로 적용된다.
금요일 일몰 때부터 시작되는 안식일 날, 자녀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는 즉시
숙제 등을 재빨리 마친 다음 목욕을 하고는 제일 좋은 옷으로 갈아입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모든 일과는 어머니가 일몰과 동시에 양초에 불을 켤 때까지
마치도록 정해져 있다.
이런 까닭으로 자녀들은 매일, 또는 매주 시간과 승부를 걸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간을 엄수함으로써 자녀들은 자기가 해야 할 일들을 한정된
시간 안에 끝내는 습관을 자연스럽게 몸에 익혀 가는 것이다.
그 밖에 유태교의 축제행사 때에도 시간의 중요성을 통감하게 하는 시스템이
있다.
예를 들면 봄철에 치르는 가장 큰 축제인 '유월절(Passover)'에는 빵을 못
먹게 되어 있다. 그날에만 먹는 딱딱한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샌드위치를 대단히 좋아하는 우리 집 아이들은 이것이 큰 고통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신성한 행사인 만큼, 축제가 계속되는 7일 동안은 참아야
할 의무가 있다.
이렇게 해서 유태인 자녀들은 시간의 중요성을 거의 생리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 유태인에게 있어서 시간에 대한 규율은 삶의 전부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우리들은 기독교의 영생이나 불교의 윤회 사상을 믿지 않는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유태인들은
항상 자신에게 주어진 짧은 인생을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부심 한다.

시간관리가 공부의 기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유태인 소년들은 열세 살이 되면 성인식을 치르게
되는데, 이때 주로 손목시계를 선물로 준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사람이
되라는 다짐을 주기 위해 시계를 선물하는 것이다.
'내일은 내일의 바람이 분다'는 사고방식은 유태인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오늘 할 일을 오늘이라는 시간 안에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계획서를
상세하게 짜는 습관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계획에 맞춰 일을 확실히
해치웠을 때는 일종이 쾌감마저 느낀다.
흔히 동양의 어머니들은 자녀들이 공부를 하지 않아서 걱정이라고 말하는데,
그러나 나는 그 원인이 자녀들이나 부모가 사전에 시간을 제대로 관리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녀들은 부모들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공부 계획표를 짜기는 하지만, 이내
그것이 무리인 것을 알고는 몇 번씩 변경을 하는 동안에 싫증을 느끼고 만다.
그러나 어머니들은 자녀들이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있기만 하면 공부를 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한 책상에 모래 붙들어 앉히려고 한다.
이것은 곧 짧은 시간에 효과적으로 공부하는 방법을 자녀들에게 가르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부모는 자녀들이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어떻게 시간을 유효 적절하게
이용하는가 하는 방법을 깨우쳐주도록 해야 한다. 아주 어릴 때부터 시간
관리를 철저히 할 수 있도록 리듬을 만들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식사는 30분 이내에 끝내도록 시간을 정해 놓고, 제한 시간을
지키지 못하고 우물거린다면 사정을 보지 않고 모두 치워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녀들은 30분이라는 시간의 중요성을 알고, 그 시간 안에 식사를
끝마치는 습관을 몸에 익히게 된다.
나는 아침에 텔레비전을 보지 못하게 한다. 학교에 늦지 않으려면 정해진
시간 내에 세수하고,식사하고, 옷을 갈아 입어야 하는 등 여러 가지 일을
재빨리 끝내야 하기 때문에 텔레비전을 볼 시간적 여유가 있을 리 없다. 즉
아이들이 텔레비전에 정신이 팔려 더욱 중요한 일을 등한시하는 따위의 나쁜
버릇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결국 어렸을 때의 시간관리가 가장 능률적인 공부 방법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유태인에게 있어서 시간에 대한 규율은 삶의 전부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유태인들은 항상 자신에게 주어진 짧은 인생을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부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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