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09-27 09:06
[2]현대신학의 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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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2,655  

서남동은 김지하의 다음과 같은 선교철학을 핵심적인 내용으로 삼고 있다. "민중적 한을 풀어주는 위로자로서의 교회, 그리하여 한으로 인한 폭력의 순환 고리를 끊어야 하는 교회, 순환을 운동으로 바꿔야 하는 교회, 그렇기에 한정된 폭력을 접수 용납해야 할 교회, 모든 진보사상과 어둠속 투사와 레디칼의 지성소(至聖所)이어야 할 교회"(115쪽).

서남동은 이러한 선교철학을 바탕으로 예수를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한 인간의 정치적 경제적 해방자로 소개한다. 여기서 해방은 개인적 정신적 심령적인 것이기보다는 공동체적 역사적 정치적인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가난한 자, 눌린 자를 해방하시기 위해서 오셨고, 정치범으로서 십자가형을 받으셨다고 본다.
서남동은 기독교 종말론을 교회사적으로 조명한다. 유대교의 종말론을 메시아 왕국에서 출발하여 나중에는 역사의 궁극적인 종말인 신국(神國)과 준궁극적인 종말인 천년왕국으로 정형화된 것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신국은 보다 더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신앙의 내용으로, 천년왕국은 보다 더 사회적이고 외면적인 신앙의 내용으로 보면서 교회사에 있어서 혁명신앙의 동력으로 나타난 것은 천년왕국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전천년설의 입장의 종말론은 지연된 재림으로 인해서 제도적 교회 속에서 비종말화하였고, 콘스탄틴 황제 이후에는 교회가 호국종교화 하면서 부유하게 되었고, 교회를 신의 역사경륜의 최종양태로 인식함으로서 종말신앙의 미래적 혁명적 차원은 없어지고 기독교는 헬라화 하였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사의 유산을 거부하고 신앙을 재종말론화한 사람들로서 요아킴 플로리스와 토마스 뮨쩌를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의 혁명, 정치, 해방의 신학으로 인해서 기독교는 잃었던 복음의 사회적 차원의 구원을 되찾고 있다고 말한다. 이제 역사는 기독교 이후의 시대에 돌입했으며, 이 시대에는 교회관이 해체되고 복음의 혁명적인 잠재세력이 발휘되어 가난한 자, 눌린 자, '암하레쯔'의 종교, 민중의 종교가 이루어지는 신국 도래의 종말론적인 지평이 열리고 있다고 전망한다.

서남동은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 되어 민중 스스로 자기 권익을 찾는 민중의 교회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지금은 민중의 시대요, 민중이 역사의 주체가 되어 민중을 섬기는 시대라고 함석헌 선생의 글을 인용하여 말한다. 그러나 민중신학은 "악을 한꺼번에 제거하겠다는 전투적 결단"이나 "전쟁을 부르는 열광성" 또는 흑백논리가 아니라 평화의 이데올로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누르는 자와 눌린 자와의 화해는 구조악의 회개에서 비롯된다고 말함으로서 한정된 폭력을 인정하고 있다.

서남동은 "한의 사제"에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볼 줄 모르는 교회 지도자들, 정치, 경제의 제도적 모순과 상관이 없는 관념론적 신학, 기업과 경영능력으로 변질된 교회 확장, 반공의 보루 속에 숨어 잠든 교회, 모든 사회적 불의를 알고 있으면서도 조직 교회의 존속을 염려하여 말 못하는 교권"(43쪽)은 눌린 자의 상처를 싸매어 주고 상실된 주체성을 되찾게 해주고, 가슴속에 쌓인 한을 풀어 주는 사제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여기서 "한(恨)이란 눌린 자, 약한 자가 불의를 당하고 그 권리가 짓밟혀서 참으로 억울하다고 생각할 때, 그 호소를 들어주는 자도, 풀어 주겠다는 자도 없는 경우에 생기는 감정상태이다. 그렇기에 한은 하늘에 호소되는 억울함의 소리, 무명의 무고(無告)의 민중의 소리 바로 그것이다"(44쪽) 라고 말하고, "한의 사제는 이러한 민중의 갈망을 듣고 전달하는 매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44쪽) 라고 말한다.

성서적 전거(典據)에서 저자는 출애굽사건과 십자가형 사건을 민중구원의 핵심적인 사건으로 본다. 그리고 이들 두 사건을 철저하게 사회경제사의 차원에서 발생한 정치적 사건으로 본다. 이들 두 사건의 차이점이 있다면, 모세가 해방자라면, 예수는 저항적인 동행자였고, 출애굽사건이 일회적인 사건이라면, 십자가형 사건은 영구적 혁명의 첫 시발점이 된다. 일회적 혁명은 민중이 구원의 대상이 되지만(타력구원), 영구적 혁명은 민중이 구원의 주체가 된다(자력구원). 그리고 "이러한 예수의 태도가 지금 억눌리고 소외된 민중이 내일의 자기운명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민중신학의 전거가 되는 것이다"(54쪽) 고 말한다. 또한 저항적 동행자의 생은 십자가형을 각오하지 아니할 수 없고, 십자가형은 민중이 자기운명의 주인이 되는 투쟁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대가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서남동이 말하는 선교는 민중의 편에 서서 민중의 해방을 위해 싸우며, 민중의 소리 즉 유언비어(流言蜚語)를 듣고 대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민심이 천심이요, 유언비어가 민중의 신음소리라고 말한다. 또 이 한의 소리는 이 세속시대에 오신 그리스도의 음성이라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저자는 "고난받는 민중의 메시아성" 혹은 "한의 속죄적인 성격"을 말한다. 그리스도는 고난받는 민중의 신음소리, 한의 소리를 타고 오시기 때문이다(119쪽). 그러므로 선교는 노농자 농민들의 아픔에 함께 연대함으로서 그들의 인간화에 힘쓰는 일이며, "민중적 한을 풀어주는 위로자로서의 교회, 그리하여 한으로 인한 폭력의 순환고리를 끊어야 하는 교회, 순환을 (전진)운동으로 바꿔야 하는 교회, 그러기 위해서는 한정된 폭력을 접수 용납해야 할 교회, 모든 진보사상과 어둠 속 투사와 레디칼들의 성소(santuary)이어야 할 교회"(101쪽)가 되는 것임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민중신학이 교회론에 문제점을 노출시키고 있고, 영혼구원을 소홀히 하고, 사회구원에 전념함으로서 교회의 선교적 사명의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성교회가 신음하는 민중을 외면하고 있다는 비판은 백번 들어도 옳은 말이다. 한국 강토에 민중과 연대하여 민중의 한을 풀어 주는 위로자로서의 교회가 있다면 그것은 민중신학의 공헌일 것이다. 


이상으로 

복음화유형과 대화유형 그리고 상황화 유형으로 나누어 각각 세 권씩의 총 아홉 권의 책을 중심으로 현대 신학의 유형을 살펴보았고, 비평도 하였다.


선교는 하나님의 나라 운동이며, 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 주신 십자가의 삶의 방식에 의해서 우리의 삶 속에서 선취된다.

하나님의 나라의 선취는 미래종말에 대한 확실한 믿음과 기독교적 인간관과 역사관에 근거한다. 마르틴 루터가 말한 것처럼 신앙인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다. 의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으로 시작되었고, 죄인이기 때문에 실질적인 구원을 향해서 나아간다. 성령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신앙인의 삶 속에서 미리 맛보아지고 누려진다. 또한 성령의 능력 안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종말의 완성을 향해서 나아간다. 그리고 이 완성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 질 것이다.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인 평안과 행복이 있는 개인구원으로 출발한다. 그리고 정의와 평화가 구현된 나라, 즉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나라에서 완성된다. 그렇기 때문에 선교는 영적인 구원에서 출발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사회구원을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영혼구원은 온전한 구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서가 말하는 온전한 구원은 몸의 구속과 우주의 회복에 있다.


영혼구원은 사회구원을 위한 도구이다. 영혼구원은 신인(神人)관계의 회복, 대인(對人)관계의 회복, 대자연(對自然)관계의 회복을 위한 평화의 도구로 보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이며,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화평케 할 자의 삶의 방식은 하나님께서 친히 실천해 보이신 십자가의 방법이다. 그리고 인간이 희망하는 정의와 평화의 나라는 이 십자가의 삶의 방식으로 완성될 것이다. 영혼구원은 사회구원을 위한 도구이며, 영혼구원이 없는 사회구원은 인간의 죄성을 망각한 비성서적이고 비합리적인 유토피아론에 지나지 않는다. 또 사회구원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 영혼구원은 현세를 죄악시하여 이 세상을 잠시 거처 가는 나그네길로 여기는 염세적이고 가현설적 말세론에 빠지게 함으로서 소금과 빛의 사명을 잃게 된다. 따라서 선교는 영혼구원은 물론, 불의한 정치 경제 사회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물질적 빈곤과 정신적 고뇌로부터의 탈출을 포함하는 전인격적이고 사회적인 구원과 우주의 회복에까지 그 관심의 폭을 넓혀야 한다.


선교는 정복이나 강요이기보다는 대화와 선택의 문제이다. 영혼구원 혹은 개인구원은 신앙인의 삶의 존재방식 즉 가치관과 세계관에 관련해서 매우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신인식의 다양성과 종교들의 역할과 기능의 다양성은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통일종교를 꿈꾸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것이 개종을 통한 것이든지 통합에 의한 것이든지 통일종교는 인류사회에 건전하지 못하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회는 언제나 불건전할 수밖에 없다. 신앙의 선택은 각자의 삶의 존재방식에 관련되기 때문에 내가 무엇을 선택해서 믿느냐의 문제는 내가 어떻게 살 것이며, 어떤 가치관과 세계관 속에서 살아 갈 것인가와 관련되는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므로 종교다원화 사회 속에서의 종교간의 문제는 종교간의 특수성의 관점에서 볼 때, 무엇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 관심을 가지고 이루어 져야 한다고 보아진다. 그리고 인간의 종교적인 선택의 자유는 그것이 건전한 것이라면 언제든지 인정되고 보호되어야 할 것이다. 모든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정의와 평화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종교간의 불화와 반목은 어떤 이유에서든 정당화될 수 없다. 우리는 획일성을 지양하고 다양성을 인정해야 하며, 그 속에서 선의의 경쟁을 해야 한다. 이것이 인류사회가 발전할 수 있는 건강한 삶이다. 여기에 선교의 당위성이 있고, 삶의 활력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 여러 회사들이 구간을 나누어 도로를 건설하여 개통하는 것과 같을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선교는 개인구원을 위한 선의의 노력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평화와 정의사회의 구현을 위해서 몸으로 실천하는 일이다.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의 속성을 지닌 분이시다. 기독교적 사랑의 실천은 물론 분배와 보복의 정의를 위해 몸으로 실천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 지상에 앞당겨 오는 일이 선교의 과제이다. 이를 위해서는 모든 기독교인이 성육신과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삶의 방식을 따르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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