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08-29 14:24
유대인의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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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3,174  

유대인의 죄

 

 

(롬 2:17-29) “17.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19.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21.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22.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23.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25.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26.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27.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28.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여러분 태양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피했다면 그 자체가 죽음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예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바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전 세계 인류 중에 십계명과 율법을 하나님께 직접 받은 민족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의 신이요. 유대인의 혈통만으로도 구원을 받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은 하나님 앞에 개인으로 서지 않고 민족의 일원으로 선다고 말했습니다. 자랑스러운 혈통, 놀라운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결국 우리만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으로 나갔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 유대인의 죄를 고발합니다.

 

그들은 대단한 긍지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사람들은 아예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존재하는 이유를 지옥의 땔감을 위해서 라고 말하고 적혀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한 20cm되는 모자를 쓰고 회당에 들어갑니다. 심지어 전쟁터에 갈 때 철모 안에 이 모자를 씁니다. 그 뜻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분 표시입니다.

 

1장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믿지 않고 거부하며 정욕대로 사는 사람, 잘못인줄 알면서도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며 그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말합니다. 2장 앞부분은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고발이 나타납니다. 이들은 도덕적이며, 남을 평가할 수 있는 지식도 있습니다. 돌을 들어서 던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종교적인 사람들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책망이요, 경고입니다. 이들은 선택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알뿐만 아니라 예배하는 사람들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이방인들과는 근본적으로 뿌리가 다르다고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에 대한 분명한 경고와 책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들은 오늘 종교인들 성도들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1. 알면서도 행치 않음

 

그들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선민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은 12살 때 성인식을 하는데 그전에 모세오경을 거의 외운다고 합니다. 아무리 머리가 나빠도 첫 번째 외우는 신명기 정도는 모두 암송을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른 민족과는 다른 것이 나타납니다. 그들은 원리를 보는 눈이 있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다 의심합니다. 그들의 사고방식은 모세 오경의 가르침에 기초를 둡니다. 그래서 노벨 수상자의 23%가 유대인이라는 통계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중요한 문제가 나타납니다. 이들이 이렇게 성경을 어릴 때부터 외우고 배워서 잘 알면서도 실제 생활에서 그렇게 살지 않고, 생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언제부터 알고 있는가? 얼마나 알고 있는가? 많이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왜 실천하지 않는가? 하는 반문입니다. 여기서 그들은 하나님은 그의 법정에 피고의 신분으로 그들을 세우는 것입니다.

 

예수 믿습니까? 하고 물으니 우리 아버지가 장로님이세요, 합니다. 그것이 아니라 당신이 예수님을 믿는가 하고 다시 묻습니다. 나는 미션스쿨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묻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안 믿는다는 것입니다. 예배에 참석도 해보았고, 성경을 배워보기도 했고, 또 가족들이 다 교회에 다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본인이 정말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돌을 가지고도 아브라함의 후손을 만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혈통을 의지 말고, 역사를 자랑 말고, 바른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아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지식에서 머물러 버리면 위선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면서도 감사도 하지 않고,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로마 교회의 모습입니다. 기도를 해야 한다, 전도를 해야 한다, 십일조를 해야 한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실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우롱하는 것이요,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것입니다. 사랑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이 최고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랑을 노래합니다. 그러면 됩니까? 사랑은 실천하고 행하기 전에는 그 사람은 사랑과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유명한 바바라 월터는 저널리스트이자 텔레비전에서도 매우 인기가 있는 여자입니다. 그 남편도 유명한 기자이자 컴퓨터 전문가입니다. 이렇게 완벽한 여자와 남자가 부부가 되었다면 남보다 더 잘 살아야 할 텐데 이들은 이혼을 했습니다. 이 남자는 ‘이제는 좀 더 새로운 인생을 찾아야겠다. 나에게 가장 잘 맞고 적합한 사람을 찾아봐야겠다.’며 컴퓨터 통신에 광고도 내고 사람들의 추천도 받아서 컴퓨터에 많은 여자들의 리스트와 자료들을 입력하였습니다. 그 다음으로 그 여자들 가운데 자신과 잘 맞고 어울리는 사람을 순위별로 살펴본 결과 10위까지 리스트를 뽑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순위 중 가장 적합한 결과로 나온 1위의 여인은 바로 자기와 이혼했던 바바라 월터이었던 것입니다. 부인을 바꾸면 남보다 더 잘 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잘못된 결정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아니라 내가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방 때문에, 상대방이 바뀌면 좀 더 우리 가정이, 직장이, 사회가 바뀌겠지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 변화되고 바뀌어야 할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오늘 유대인들의 지식은 잘못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잘못은 그것을 실천하지 않고, 행동에 옮기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은 더 받을 말씀이 없고, 은혜가 없고, 다 되었다고 생각하는 자부심이었습니다. 이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과 생활이 떨어져서 사는 위선자의 삶이요 생활이었습니다. 이것이 로마교회의 모습이요 오늘 춘천 교회 교인들 여러분들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는 것만큼 살아야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네 명의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함께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어느 날 야고보서를 공부하던 중에 그들은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약 5:16)라는 말씀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약점에 대하여 서로 솔직하게 고백하기로 했습니다. 먼저 한 사람이 자기의 약점을 고백했습니다. “나는 교회에 다니긴 하지만 담배를 끊을 수가 없어서 교회에 갈 때는 담배 피우고 나서 입을 닦고 간다네.”

 

두 번째 사람도 어쩔 수 없는 자신을 고백했습니다. “나는 어떤 사실을 말할 때 자꾸만 거짓말이 입에서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다네. 나도 어쩔 수가 없어.”세 번째 사람도 고백했습니다. “나는 교인이면서도 아직 도벽을 버리지 못했어. 남의 물건만 보면 자꾸만 손이 간다네.” 그런데 이야기를 다 듣고 있던 네 번째 사람은 전혀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야, 너는 약점이 없냐? 너도 자백하라고!” 세 사람이 모두 재촉하니까 한참 후에야 네 번째 사람이 고백을 했습니다. “실은 난 남의 약점을 알기만 하면 그것을 불고 다니는 것이 내 약점이야.”

 

빛과 어두움이 같이 있을 수 없는 것 같이 하나님의 말씀과 나의 생활이 따로 놀 수가 없습니다. 순종하고 실천할 결심이 없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왜 듣고, 배웁니까? 그것이 옳은 것이요, 복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이라면 왜 생활에서 안보입니까? 우리는 한 가지 고백을 해야 합니다. 아는 대로 사는 것이 내 마음이나 결심으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아야합니다. 은혜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으면 알아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그 작은 지식하나도 내 마음대로 실천할 수 없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지 않고, 은혜가 떨어져 보세요. 새벽기도 한번 나오는 것도 어렵고, 주일 지키는 것도 힘듭니다. 겸손하게 무력함을 고백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합니다.

 

2. 받았으면서도 겸손치 않음

 

오늘 성경에 보면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을 선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도자라고 말합니다. 훈도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재로 예수님이 그들에게 말씀을 전했을 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미 율법이 있다, 모세 같은 선지자가 있다, 하나님의 택한 선민이다, 그런데 너는 무어냐? 우리가 가진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은혜가 필요하지 않다. 이런 그들의 마음이 예수님을 배척하였고, 교회를 핍박하였습니다.

 

여러분 지나간 물로는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습니다. 오늘의 신앙생활을 과거에 의해서 하는 사람이 되지 말기를 바랍니다. 흘러 간 옛 노래를 부르면서 위로를 받는 사람이 아니라 오늘의 노래를 부르고 오늘 나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유대인들만큼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을 받은 민족이나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습니다. 무릎을 꿇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감사하고, 겸손으로 섬기는 자리를 버렸습니다. 떠났습니다. 마귀는 그들에게 교만이라는 불을 붙여 주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을 태웠습니다. 그들은 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나 민족이 없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어께에 힘이 들어가고, 고개는 세워졌습니다. 내가 선생인데 누가 우리를 가르칠 것인가? 그들은 귀를 막았습니다. 그들은 겸손을 잃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자신을 무장하고, 자신들의 위신과 격을 높이는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모습이요, 로마 교인들의 모습이요, 춘천교회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무릎을 꿇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고개를 숙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입을 열어서 누구를 가르치려고만 하지 말고, 귀를 열고 들으려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식이나 아는 것을 내세우지 말고, 말없이 실천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되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도 내 힘으로 안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됩니다. 성령이 역사하면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주기 위해서 허리를 굽히고, 손에 물을 묻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힘으로는 안 됩니다. 못합니다. 설사 내가 겸손의 자리에 내려간다고 하더라도 머물 수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나의 실체를 맡겨야합니다. 그렇게 살기를 소원하여야합니다. 무엇이든 남보다 나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감사하고 그것 때문에 교만의 죄에 빠지지 않게 기도해야합니다.

 

3. 있으면서도 사용하지 않음

 

역사와 전통 율법과 선지자들의 가르침,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을 가진 민족이지만 이들은 그것을 주지 않았고, 전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선민의식이었습니다. 유대인의 하나님, 우리 민족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만 되셨습니다. 너는 내가 아니니까, 살던지 죽던 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초대교회 수장이 되는 베드로에게 이방인 고넬료의 구원을 위해서서 세 번씩이나 환상을 보여주고, 증거를 주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겨우 갔습니다. 그리고 고넬료의 집에 와서 복음의 핵심인 예수님을 전하면서 이것은 위법이지만 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베드로같이 성령 받은 사도도 선입관념을 가졌고 그 장벽을 뛰어 넘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믿었지만 전하지 않았고, 가졌지만 나누어 줄 생각이 없었고, 받았지만 혼자서 독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죄악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해서 유대민족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부자를 구원하기 위해서 가난한 사람을 세상에 두셨다는 말이 있습니다. 병 있는 사람을 의사가 치료를 해주지만 반대로 이야기 하면 환자들이 의사를 먹여 살리는 것입니다.

 

근래에 와서 없어진 직종이 많습니다. 양복점, 다방, 안내양, 땜쟁이(냄비, 물동이, 솥단지)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습니다. 사용한다는 것이 바로 존재가치요, 살아 있는 것입니다. 죽은 것은 사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자신만을 위해서 살고, 그 좋은 것을 사용하고, 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수천 년 지나와도, 아브라함의 신앙이나, 다윗의 용기, 솔로몬의 지혜를 다른 민족이 몰랐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통해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사람들, 위대한 역사, 그리고 율법은 새롭게 옷을 입혀서 전 세계로 전파 되는 것입니다.

 

사용하지 않는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욕심입니다. 나만 가지고 살면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나는 좋지만 다른 사람에게 실례가 되지 않을까? 정말 도움이 될까? 셋째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죽던지 말든지 내만 살면 된다. 는 이기심입니다. 이중에 유대인들은 세 번째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입니다. 오늘 신자들이 자신만 생각하고, 사용하지 않고, 나누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 자체가 잘못이요 죄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다른 사람에게 눈이 뜨지는 것입니다. 나 아닌 이웃을 위해서 주신 것을 사용하는 것이 나를 살리는 것을 알게 됩니다.(눈보라 산길-쓰러진 사람-그냥 가는 사람-업고 간사람-같이 사는 길이다.) 전도하면 내가 은혜 받습니다. 가르치면 내가 성장합니다. 도와주면 받는 사람보다 내가 더 기쁩니다.

 

결론

 

한 세기에 가장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던 실존주의 철학자 샤르트르(Chartre)는 1980년 3월에 불란서 파리의 부르세 병원에 폐수종으로 입원했습니다. 그는 한 달 동안을 이 병원에서 발악하며 보냈습니다. 소리를 지르고 찾아온 사람들을 향하여 고함을 치며 절규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때문에 자기의 병명이 무엇인지 곁에 있는 아내에게조차 묻지 못했습니다. 그는 현대인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고 자유라는 수많은 수필과 글을 남겼지만 그의 마지막은 실로 비참했습니다. 그는 1980년 4월 16일 입원한 지 한 달 만에 몹시 괴로워하다가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 불란서의 신문들은 샤르트르의 죽음에 대하여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그렇게도 외쳤던 그의 말로가 이렇게 비참했던 이유에 대해서 어떤 독자는 이렇게 신문에 투고했습니다. “샤르트르의 말로가 그렇게도 비참했던 이유는 샤르트르에게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이다.” 샤르트르에게는 진정으로 돌아갈 고향이 없었습니다. 반면 독일 고백교회 신학자인 디트리히 본 훼퍼(Dietrich Bonhoeffer)는 세계 대전 중에 독일의 수용소에서 나치에게 항거하다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한 간수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오는데 그는 직감적으로 이것이 자기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벌떡 일어나 감방에 있던 자기의 동지들에게 이렇게 인사를 했습니다.

 

“동지 여러분! 이제 나에게는 죽음이 왔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마지막이 아니고 시작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예비하신 아버지의 집에서 만날 때까지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마지막 인사를 하고 감방을 나서는 그에게서 놀라운 평안과 기쁨이 넘쳐 났습니다. 그 감옥에 있었던 사람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의 마지막 모습을 충격과 감동으로 보았습니다. 본 훼퍼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야할 곳이 어디입니까? 그때 어떤 사람으로 설 것입니까? 알면서 행치 못한 사람, 받았는데도 겸손하지 않는 사람, 있는데도 사용하지 않는 사람으로 설 것입니까? 아낌없이 주고, 쓰고, 사랑하고, 섬기고, 갑시다.

 

▲조영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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