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11-19 15:29
안찰기도는 성서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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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10,100  
● 금식(기도)

종교적, 문화적, 정치적, 혹은 건강상의 이유에서 음식을 주의 깊게 금하는 금식은 모든 사회와 문화에서 그리고 모든 시대에 행해졌던 관행이다. 사실 이 세상 모든 종교에서 금식이 행해지고 있다. 심지어 비종교적인 사람도 정치적인 이유나 건강상의 이유로 금식한다. 따라서 금식은 기독교만의 독특한 신앙행위는 아니다.

구약에서 금식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때(출34:28), 회개할 때(삼상7:6), 탄원할 때(삼하12:16), 슬픔의 표시(삼상31:13)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행해졌다. 대부분 자발적으로 행해졌으나 왕이 명령하기도 했다(왕상21:9,욘3:7). 선지자들은 종종 이 관습의 남용을 책망했다. 그것은 백성들이 순결과 의를 떠났으면서도 이것이 가치 있는 것이라는 미신적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사58:3-7,렘14:10-12). 금식을 통해 육체의 욕구를 누르면 교만과 자기 신뢰에 빠지게 되므로 탐식보다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신약의 금식 역시 자발적인 것으로 영적 생활의 깊이를 위해(행13:2), 사도의 파견과 장로의 임직 등 중요한 일을 위해(행13:3,14:23) 행해졌다. 예수님께서도 시험받기 전에 금식하셨다(마4:2). 그러나 금식을 명령하지는 않으셨다. 오히려 외식적인 금식을 경고하셨다(마6:16-18). 하지만 후에 금식은 기독교회사에서 훌륭한 종교적 실천으로 간주되었다.

구약에서 규정해 놓은 유일한 금식일은 7월10일에 행해진 속죄일 때이다(레16:29,31, 렘36:6). 이 금식일은 아주 거룩하고 엄숙하게 행해졌다. 그러나 바벨론 포로 기간 동안, 그리고 그 이후에 유대인들은 네 가지 금식일을 만들어 지켰는데(슥8:19), 그것은 예루살렘이 함락한 4월9일, 성전이 파괴된 5월9일, 그다랴가 살해된 7월2일, 그리고 예루살렘이 포위된 10월10일이었다. 이 중 정통 유대인들은 5월9일의 금식일을 오늘날까지도 지키고 있다. 그리고 신약시대에 바리새인들도 주 2회를 금식일로 지켰다(눅18:12). 즉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다는 목요일과 하산했다는 월요일이다. 사도 시대 후에 기록된 디다케에 보면,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바리새인들과 달리 수요일과 금요일에 금식을 하도록 권고 받고 있다. 그러나 성경이 지시한 금식일은 속죄일의 금식뿐이다.

우리의 육신적 본성을 진정으로 억제하는 일은 단순한 거부나 극기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음식 안에서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더 큰 만족을 찾는 내적이고 영적인 문제이다. 바울은 먹거나 먹지 않는 것을 비본질적인 문제로 간주했으며, 이것은 하나님 안에 있는 탁월한 만족과 사랑을 표현할 때 비로소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다시말해, 금식 자체가 결코 목적이 될 수 없으며, 되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믿음의 행위로서의 기독교적 금식은 그리스도의 충만하심 안에서 만족되지 않은 만족의 표현이다. 이것은 모든 것을 만족시키시는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에 대한 확고하고도 복된 갈망의 표현이다. 기독교적 금식은 그리스도께로부터 무엇인가를 얻고자 하는 기대감에서 전전긍긍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적 금식은 하나님께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기에 합당한 존재가 되기 위한 극기훈련이 아니다. 그것은 복음 안에서 거저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을 맛봄으로써 불러일으켜진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다.

바울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를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는(골2:23)” 금식이 있음을 경고한다. 즉 이런 금식은 ‘결단력을 과시하는 종교적 행위’로서, 육체적 욕구를 제어하는 반면 육신의 교만을 고취시킨다.

그러나 기독교적 금식은 이와 정반대이다. 기독교적 금식은 상심하고 회개하는 가련한 심령으로부터 시작하며, 그리스도의 거저 주시는 자비 속에서 달콤한 만족을 얻게 하고, 또한 하나님의 무궁무진한 은혜를 더욱 사모하고 누리는 데까지 나아가게 한다. 기독교적 금식은 교만을 강화시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을 이생에서 누릴 수 있기를 사모하면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확고하게 완성된 하나님의 칭의로 말미암아 어린아이같이 순진하고 겸손한 만족을 체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금식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를 위해 그리고 우리 안에서 이루신 일의 결과이다. 그것은 우리의 공적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이다. 절제(갈5:23)는 성령의 열매이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일찍 일어나는 것도 일종의 금식이다. 힘든 난관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러 나가는 것 역시 또 다른 종류의 금식이다. 이런 선택을 할 때, 우리는 우리 욕구의 기만성에 대항하여 싸우며, 또한 기도의 소중함과 모든 것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고귀하심을 선언하게 되는 것이다.(기독교사전과 존 파이퍼의「금식기도 - A Hunger for God」내용을 정리함)

● 안수(기도)
안수는 고대에 기원을 둔 의식이며 여러 가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고, 다양한 성경 문맥에 나타난 사건에 등장하고 있는 의식이다.

1. 희생제사 절차와의 관계
모세 율법의 규정에 의하면 예배자가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려고 번제나 속죄제의 제물을 가져올 때, 그 희생되는 동물을 죽이기 전에 그 머리에 손을 얹어야 했다(출29:10,레1:4,4:4,24,8:14,민8:10,12). 이러한 상징적 행위가 예배자로부터 희생물에게 죄를 전가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지는 확실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것은 단지 대속죄일에 속죄 염소에게 안수하는 일에서만 나타나기 때문이다(레16:21). 그보다도 안수하는 행위는 그 희생물을 그 특별한 임무를 위하여 성별하는 것으로 보인다.

2. 형벌과의 관계
신성 모독자는 온 회중이 돌로 치기 전에 증인들의 손을 그 머리에 얹게 하였다(레24:14).

3. 축복과의 관계
야곱은 이러한 방법으로 요셉의 자녀들을 축복했다(창48:14).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어린 아이들을 축복하셨다(마19:15,막10:13,16). 무리에 대한 축복의 기원은 팔을 뻗치고 했으며 제사장의 축복(레9:22)이나 그리스도의 승천 사건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이다(눅24:50).

4. 치유와의 관계
신약성경에서 그 행위 배후의 개념은 다음과 같다. 즉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인 치유를 베푸는 데 있어서 안수받는 자가 온전해지도록 영적인 생명력을 전가시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례는 야이로의 딸의 치유를 포함하는데(막5:23) 이 경우에 그리스도께서는 최종적으로 “그 아이의 손을 잡으셨다(막5:41).” 예수께서는 병인들에게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셨다(눅4:40).”

동일한 방법으로 아나니아는 바울에게 안수하여 그의 시력을 회복시킬 수 있었고(행 9:12,17), 다음에 바울은 멜리데 섬에서 보블리오의 부친을 낫게 하였는데, 그는 말라리아를 겸한 이질로 고생했던 것으로 보인다(행28:8). 일반적인 성질의 치유는 사도들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행5:12).

5. 성령의 은사의 전달
안수는 또한 성령의 은사를 전달해 주었다(행8:18,19,19:6). 그 영적 생명력의 결과로서 표현되는 것은 보통 방언이나 예언 같은 외적인 변화였다. 이러한 구절들(히6:2)을 가지고 세례 후의 안수례를 정당화시키는 교파들은 분명히 초기 사도 시대의 이 의식의 의미를 오해하고 있다.

6. 성직 수임식
모세가 그의 후계자로서 여호수아를 임명하던 의식에서와 같이 어떤 특별한 축복을 기대하였다(민27:18,23,신34:9). 그 의식에서 여호수아는 그의 새 임무를 위임받았으며 지도력이나 지혜의 은사를 소유하고 있었다. 사실상 이 수임식은 그의 자격을 보증해 주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지도하는 직능을 행사하도록 공적인 권위를 주는 의식이었다. 동일한 원리가 일곱 집사 임명과(행6:6) 바울과 바나바에 대한 위임에 적용되었다(행13:3). 바울은 영적인 은사의 분배를 암시하고 있다(딤전4:14,딤후1:6). 디모데에 대한 바울의 충고는 지도력에 대한 참회하는 자의 회복을 포함하였다(딤전5:22).

이처럼 안수(기도)는 성경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나는데, 일반적으로 안수는 축복과 신유, 은총과 새 능력을 받는 행위로 이해되었다. 그러다보니 한국교회에서는 이러한 안수의 의미가 부흥강사들에 의해 크게 부각되어, 집회시마다 남발되는 가운데 안수에 주술적, 미신적 요소까지 덧붙여지게 되었다. 안수는 안수자의 어떤 특별한 능력 때문에 유효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유효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역자들과 신도들이 오해하여, 안수자의 개인적 능력이나 영적 힘이 안수를 통해 발휘된다고 생각한다.

안수는 사랑과 신뢰, 성실한 책임성이 동반되는 신앙행위이다. 따라서 이같은 것들이 전제되지 않는 안수는 무의미하다. 이런 점에서 자녀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한 부모의 안수는 의미가 있다. 교우들을 사랑과 진정으로 목양하는 목회자의 안수는 능력이 있다. 교회의 직임을 맡기 위해 안수받는 것은, 그 직임을 감당할 수 있는 신령한 힘을 공급받는 엄숙한 순간이다. 안수기도는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가장 흔히 접하게 되는 신앙행위이다. 인생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한 기대와 전적 의뢰의 겸비한 자세가 사라져버릴 때, 안수기도는 공허하고 냄새나는 주술적 종교행위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 안찰기도
한국 교회에는 이른바 안찰기도라는 독특한 것이 존재한다. 안찰기도는 어감상 안수기도와 비슷한 듯하지만, 사람들은 그 의미를 이렇게 해석한다. 안수기도가 단순히 손을 얹고 하는 기도라면 안찰기도는 이른바 필요한 부위를 강하게 때리거나 주무르거나 긁는 기도라고. 학계에서는 안찰기도를 1950년대 이후 안수기도가 주술적인 요소와 결합한 것으로 설명하면서, 안찰기도의 원조를 이단에 속하는 전도관의 박태선 등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 안찰기도가 어느새 정통 교회에까지 자연스럽게 퍼져 있는데, 문제는 이 안찰기도가 지금까지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를 일으켜 왔다는 데 있다. 예를 들면, 기도자가 안찰기도를 하면서 상대방 이성의 몸을 지나치게 접촉한 것 때문에 일어난 가정불화의 경우, 부흥회 때 강사에게 안찰기도를 받으면서 상처부위를 심하게 긁히거나 맞고 상처가 덧나서 병원에 다니며 고생하는 경우, 그리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안찰기도를 받다가 맞아 죽는 경우 등이 있다.

물론 정성스러운 마사지 식의 안찰기도가 전혀 효과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할머니가 아이의 아픈 배를 쓰다듬으면 배가 낫듯이 혹은 마사지를 하면 육신의 피로가 풀리듯이, 분명 사랑과 정성이 담긴 쓰다듬음에는 하나님이 주신 긍정적 치유의 힘도 있다. 그러나 기독교계에서 계속해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주술적 안찰기도에 대한 정확한 성경적 이해가 이 시점에서 필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아무리 그것이 관행이요 당연한 것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해도 그 진위여부를 가리는 데는 오직 성경만이 유일한 잣대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경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안찰기도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성경에는 상대방을 때리며 문지르거나 긁으면서 드리는 안찰기도를 가르친 본문이 없다. 이처럼 몸을 상하게 하는 종교행위는 주술적 우상숭배의 종교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왕상18:28). 개역성경에 보면 ‘안찰’이라는 말이 딱 한 번 나온다.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왕의 손으로 활을 잡으소서 곧 손으로 잡으매 엘리사가 자기 손으로 왕의 손을 안찰하고(왕하13:16).” 엘리사 선지자가 요아스 왕에게 활을 쏘라고 명령하고는 활시위를 당긴 왕의 손을 ‘안찰’했다는 표현이다. 이때 ‘안찰’은 ‘按察’(누를 안, 살필 찰)로서 덥석 손을 올려놓은 것이 아니라 조심스럽게 살피면서 살며시 손을 올려놓았다는 뜻이다. 이 단어를 굳이 ‘안찰’로 번역한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개역성경을 제외한 다른 우리말 성경들은 이 구절을 원문대로 ‘엘리사가 왕의 손에 자기 손을 얹었다.’로 번역하고 있다. 만일 개역성경의 ‘안찰’이란 말을 인정한다손 치더라도, 이 안찰이란 말에는 상대방을 때리거나 문지르며 기도하는 오늘날의 ‘안찰기도’의 의미는 결코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한국 교회가 그같이 받아들이게 되었을까?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째, 안찰이라는 한문에 대한 오해이다. 개역성경의 안찰은 ‘按察’이다. 그런데 누군가 이것을 ‘按擦’(누를 안, 문지를 찰)로 오해한 것이다. 조심스레 손을 얹는다는 의미를, 누르고 문지르면서 하는 것으로 곡해한 것이다. 둘째, 실제 교인들의 경우 ‘안찰’이란 단어의 ‘찰’이라는 글자가 ‘찰싹’하고 얻어맞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안찰기도가 때리는 기도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병자를 위해 기도하다 보면 간절해지는 마음 때문에 안수한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힘껏 주무르거나 때리면 신음이든 비명이든 간에, 일단 즉각적인 반응이 오니까 안수가 점차 오늘날 말하는 안찰로 바뀌어 간 것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병을 낫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고 모든 주도권이 하나님께만 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낫게 해 주시려면 굳이 때리거나 심하게 문지르지 않아도 나을 것이다. 반면 하나님께서 낫게 해 주시지 않는다면 아무리 때리고 꼬집고 긁으면서 기도해도 치료되지 않을 것이다. 바울같이 능력 많은 사도도 세 번이나 자신의 질고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지만 치료되지 않았다.

분명히 우리는 질병을 위해 그리고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간절한 회복의 소망을 주님께 아뢰어야 한다. 하지만 기도하면서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아무리 신통력 있는 사람이 별짓을 다하며 기도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원하실 때에만 병이 낫는다는 사실이다. 성경적 근거가 없는 심한 구타를 동반한 기도가 한국 교회에서 사라지기를 소망한다. 또 권능 있는 아무개의 특별안찰기도라는 주술적 메뉴도 사라지기를 바란다. 모든 신유 치유의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병을 낫지 않게 하시고 심지어 그냥 죽도록 놓아두실 때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시지 않으셔서가 아니라 속히 천국으로 그를 부르신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죽고 살고 병들고 병 낫는 문제의 주도권이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자세로 오늘날의 교회가 성숙해 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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