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12-12 18:45
[2]'영성'의 성경적 뿌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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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2,323  

(iv) 넷째, 참된 영성의 표징은 사랑이다.

무엇이 참된 영성의 필수불가결한 표징일까? 많은 이들은 성령의 은사를 제일가는 목록으로 꼽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사랑이 참된 영성의 양도할 수 없는 표징임을 밝히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고린도교회의 성도들로부터 배울 수 있다. 사실 성령의 은사라는 면에서 이야기하자면, 고린도 교회만큼 풍족히 받은 예도 드물 것이다. 그들은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했는데 (고전 1:6), 이는 그들이 결국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었다’(고전 1:7)는 뜻이다. 어느 정도로 풍족했느냐 하면 바울은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항상 감사할 지경이었다(고전 1:4). 성령의 은사에 대해 바울 편에서 자세히 설명을 베푼 것(고전 12:4~11) 또한 그들이 은사를 풍족히 누리고 있던 때문이었다.

 

자, 그러면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은 신령한 자, 곧 성숙한 그리스도인들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는가? 웬걸!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육신에 속한 자(고전 3:1, 3)요, 영적으로 어린 아이들이었다(고전 3:1).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그들의 풍족한 영적 은사에도 불구하고 미숙한 그리스도인으로 판정을 받은 것은,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기’ 때문이요 (고전 3:3), 더 구체적으로는 그들 사이에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라는 이름의 파당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고전 1:11~12; 3:4). 그들 사이에 이러한 시기와 분쟁이 존재하는 한, 아무리 성령의 은사를 풍족히 누린다 하더라도 그들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신령한 자)은 아니라는 말이다.

 

바울은 후에 성령의 은사를 설명하는 맥락에서 이 점을 다시 한 번 더 밝히고 있다. 그들 가운데에는 성령의 은사와 관련하여 열등의식에 빠진 이도 있었고(고전 12:15~16), 반대로 우월의식에 휩싸인 이도 있었다(고전 12:21). 이러한 그릇된 태도를 시정하기 위하여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활용하는 가장 좋은 길로서 ‘사랑’을 제시한다 (고전 12:31 하반). 사실 우리가 사랑 장(章)이라고 이야기하는 고전 13장은 철두철미하게 성령의 은사 활용 문제와 관련하여 주어진 바이다. 

 

사랑의 특성으로 제시된 구절들 (고전 13:4~7)은 실상 성령의 은사를 활용하고자 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특성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따라서 우리는 참된 영성의 표징을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인 사랑(갈 5:22~23)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에게 은사가 많든 적든 사랑으로 하면 그것을 통해 참된 영성이 발현되는 것이다. 반대로 우리에게 은사가 많든 적든 사랑이 없이 은사를 활용하면, 이는 우리가 아직도 육에 속한 자요 영적 어린아이임을 노정하는 것이다.
 
(v) 다섯째, 참된 영성의 원동력은 성령 충만으로부터 생긴다.

성령 충만이란 ‘그리스도인이 일시적으로나 항구적으로 성령께 장악되어 그 분이 원하시는 바를 이루어 드리는 영적 활동’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성령님의 역사와 관련하여 성령 충만을 간구하지 않아도 될 사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참된 영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심령에 참된 영성이 이루어지는 것이 성령님의 소원이실진대, 성령께서 우리에게 성령 충만의 은혜를 덧입혀 주시지 않을 리가 없다. 단지 우리 편에서 일시적으로나 항구적으로나 성령 충만에 대한 열망이 사라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에 바울은 지속적으로 성령 충만을 받으라(엡 5:18)고 권면한 것이다.
 
(vi) 여섯째, 참된 영성의 실상은 그것이 성령으로 사는 삶, 곧 하나의 삶이라는 데에 존재한다.

참된 영성은 종교적 의미를 반영하는 어떤 특정한 시간이나 어떤 특정한 활동과만 연관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삶의 문제이다. 이러한 삶은 성령님과의 동행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터인데, 여기에는 ①종교적 영역과 일상생활을 망라한 총체적 삶, ②우리가 경험하는 삶의 과정 전체가 연관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바울은 이런 사상을 성경 몇 곳에서 밝히고 있는데, 이는 성령을 언급하는 권면에 있어 함께 등장하는 동사들을 보아 알 수 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 5:16)  
“너희가 만일 성령에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갈 5:18)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갈 5:25)

 

상기 구절에서 성령과 연계되어 나타나는 동사는 세 가지이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롬 8:4; 갈 5:16)는 ‘성령의 자극과 능력에 의거해 생활하라’는 뜻이다.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다’(롬 8:14; 갈 5:18)는 ‘성령의 통제와 주관 하에서 이끌림을 받다’라는 뜻이다. ‘성령으로 행하라’(갈 5:25)는 갈 5:16의 경우와 다른 동사가 사용되었는데, 이 말의 의미는 ‘규칙에 맞추어 걷다’이다. 

그래서 신국제역(NIV)은 이 동사를 ‘성령과 지속적으로 보조를 맞추다’(to keep in step with the Spirit)라고 번역했다. 이 세 가지 동사의 의미를 종합적으로 정리해 본다면 ‘성령으로 산다는 것’은 ‘성령의 주관 하에서 그의 통제를 받는 가운데 성령께서 주시는 자극과 능력에 의거해 그의 뜻에 맞게 생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성령으로 사는 삶에는 필연적으로 내면적 싸움이 포함된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도 우리의 죄성이 엄연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바울의 표현에 의하면 그 실상은 다음과 같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 5:16~17)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거룩한 투쟁, 선한 싸움을 지치지 말고 계속해 나가야 한다. 이러한 영적 씨름이 없이는 ‘성령으로 사는 삶’을 운운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참된 영성을 위한 길로서 참된 영성의 출발점, 목표, 형성, 표징, 원동력, 실상의 여섯 가지 주장을 펼쳤다. 우리가 이러한 영성의 길을 걸어갈 때, 오늘날 영성과 관련한 혼란한 풍조를 넉넉히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영성이 흡사 성경의 교훈과 무관한 것처럼 이교도시(視)하는 순수주의적 오류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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