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10-22 20:16
[3]목회자가 알아야 할 신학의 역사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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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9,101  

제 2 장 중세와 르네상스(약 500 - 1500)

1. 수도원 제도의 기원

초대 기독교 역사에서 발생한 가장 중요한 발전 중 하나는 수도원 제도의 발전이었다. 이 운동의 기원은 3세기 동안 이집트의 변방 구릉지역과 시리아 동쪽 지역에서 일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 수도원이 이상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매력을 심어 주었다. 4세기에 이르기까지 동쪽 기독교 지역, 특히 시리아와 소아시아 지역의 많은 곳에 수도원들이 세워졌다. 5세기에 이르러서는 서방교회도 이 운동을 이어받게 된다.

수도원들의 등장은 기독교 신학의 역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수도원은 자주 신학과 영적 활동의 중심지였다. 교부 시대와 중세 시대 동안에, 대부분의 중요한 기독교 신학자들은 모두 수도원 공동체의 회원이거나 수도원 공동체와 밀접한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었다.

 

2. 켈트 기독교의 등장

켈트 기독교의 발상지가 웨일즈에 있는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5세기와 6세기에 특색있는 선교의 중심지로 드러난 곳은 바로 아일랜드이다. 전통적으로 아일랜드의 복음화를 책임진 것으로 간주된 사람은 패트릭(Patrick, 약 390-460)이다. 켈트 교회 지도자들은 세속적인 부와 지위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비판했으며, 하나님을 아는 수단으로서 자연세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켈트 기독교는 위협적으로 감독 제도를 훼손시키며, 로마의 세력을 축소시키고, 기독교가 문화적으로 받아들여지기 더욱 어렵게 했다. 700년은 확실하게 켈트 기독교의 성장이 종지부를 찍게 된 해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중세”라고 알려진 새로운 시대의 여명을 알린 해로 널리 간주되었다.

 

3. 용어의 정의

1) 중세(The Middle Ages)- 중세라는 용어는 르네상스의 저술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16세기 말이 되었을 때는 일반적으로 사용되기에 이른 것 같다. 중세 시대 초기는 프랑스에서의 발전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특출한 기독교 저술가들과 사상사들을 배출했다.(랑프랑, 안젤무스, 토마스 아퀴나스, 보나벤투라)

2) 르네상스(The Renaissance)- 프랑스 말인 르네상스는 이제 14세기와 15세기의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문화적이고 예술적인 부흥을 지칭하는 말로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세계관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가 고대의 문화적인 영광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며, 중세의 지성적인 성취를 주변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즉 부분적으로 북유럽 대학들의 교양학부 및 신학부와 연합의 강도를 더해간 접근 방식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3) 스콜라주의(Scholasticism)- 스콜라주의는 아마 인간의 역사 가운데서 가장 비하된 지성적 운동의 하나일 것이다. 이 용어는 그것이 대변하는 운동을 평가절하하려고 애썼던 인문주의 저술가들에 의해 창안되었다고 할 수 있다. 스콜라주의는 1200-1500년 사이에 풍미했던 중세의 운동으로, 종교적 신앙의 합리적 정당화를 강조하여 그 신앙을 체계적으로 제시했다. 즉 “신학을 조직화하는 특별한 방식”을 가리킨다.

(1) 실재론과 유명론(Realism and nominalism) - 실재론은 보편적인 개념을 주장하며, 유명론은 특수한 개념을 주장한다. 실재론에는 “토미즘”(토마스 아퀴나스)과 “스코티즘”(스코투스), 유명론에는 “근대적 방식”과 “근대 아우구스티누스학파”가 알려져 있다.

(2) 근대적 방식(The Modern way) - 근대적 방식이라는 용어는 “유명론”을 가리키는가장 좋은 방법으로 수용되고 있다. 14-15세기의 오캄의 윌리엄 등이 있으며, 펠라기우스주의 교리를 채택했다. 이는 루터신학이 형성된 배경이 되었다.

(2) 근대 아우구스티누스 학파 -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로 이해된다. 죄를 그만두고 의로 돌아올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의 행동을 통해서 생겨난다.(리니미의 그레고리우스)

4) 인문주의(Humanism) - 인문주의라는 용어는 오늘날 하나님의 존재나 관련성을 부인하는 세계관을 의미하거나, 세속적인 세계관에 관심을 가진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당대의 대부분의 인문주의자들은 기독교를 정화하고 갱신하는 일에 관심을 가졌다.

(1) 북유럽의 인문주의 - 이는 고전시대의 방식을 따르며, 기독교회의 집단적 부흥을 목표로 행해진 종교적 프로그램이 발견된다. “다시 태어난 기독교(Christianismus renascens)”라는 라틴어 슬로건은 이 같은 프로그램의 목적을 요약하고 있으며, 르네상스와 연관된 문학의 “부활”과 관련되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2) 스위스 인문주의 - 스위스 인문주의는 기풍은 강력한 도덕주의였는데, 이러한 기풍은 성경을 하나님의 약속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인들의 바른 도덕적 행위를 규정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했다.

(3) 프랑스 인문주의 - 16세기 초 프랑스에서 법 연구는 급진적인 개혁과정에 있었다. 이런 법적인 인문주의가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때, 칼뱅이 등장했다. 프랑스 인문주의는 칼뱅에게 옛날의 문헌과 1550년대의 제네바 시의 상황이 상호작용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도구를 제공했다.

(4) 영국 인문주의 - 16세기 초 옥스퍼드와 런던, 로버트 반즈 등이 부각된다.

4) 주요 신학자들

(1) 캔터베리의 안젤무스(Anselm of Canterbury, 약 1033-1109) - 12세기의 신학적인 르네상스의 여명기를 이끄는 가운데, 안젤무스는 하나님의 존재증명,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합리적인 해석을 했다. “왜 하나님은 인간이 되셨는가(Cur Deus homo)"에서 성육신과 하나님의 아들의 순종의 결과 인간에게 주어진 혜택을 분석하고 있다.

(2)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약 1225-74) - 1266년에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을 저술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제1부 창조주 하나님, 제2부 인간의 하나님에게 회복, 제3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 인류에게 구원을 가져오는 방식에 관해 다루고 있다.

(3)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약 1265-1308) - 주의설(voluntarism)에서 신적 의지가 신적 지성보다 우선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또한 무죄수태설에서 그리스도가 그의 완전한 구속사역으로 마리아를 원죄로 물드는 것에서 보호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4) 오캄의 윌리엄(William of Ockham, 약 1285-1347) - 오캄의 면도날은 “절약의 원리”로서 언급된다. 단순성이 신학적이고 동시에 철학적인 덕목이라고 주장했다.

(5)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Erasmus of Rotterdam, 약 1469-1536) - 르네상스의 가장 중요한 인문주의 저술가로 간주되며, 16세기 전반부 기독교 신학에서 심원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인정받는다. 최초로 헬라어 신약성경을 만들었으며,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시도했다.

 

4. 주요 신학적 발전들

1) 교부적 유산의 강화- 서방교회가 라틴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신학자들은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의 문헌으로 돌아와야만 했고, 신학적 성찰의 출발점을 삼았다.

2) 신학에 있어서 이성의 역할적 탐구- 11세기 저술가인 캔터베리의 안젤무스는 기독교 신학의 합리성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을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나는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credo ut intellegam)로 표현했다.

3) 성례전 신학의 발전- 교회는 공적 예배의 행위를 안전한 지적 기초에 두어야 할 압력을 받았고, 예배의 이론적 측면을 강화해야 했다. 성례전 신학은 그 시대에 크게 발전했으며 성례의 정의, 성례의 수, 본질적인 면모에 관해 의견의 일치를 보게 되었다.

4) 구원의 구도 안에서의 마리아의 역할- 은총과 칭의에 관한 이러한 새로운 관심은 구원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역할에 새롭게 주목하게 만들었다.

5) 기독교 신학의 자료로 직접 회귀하는 문제- 성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이 원천에 대한 라틴어 번역들은 점점 더 부적절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 중 가장 뛰어난 것은 중세에 광범한 영향력을 가졌던 성경에 대한 라틴어 번역 중의 하나인 “불가타(Vulgate)"였다.

6) 성경의 불가타 번역에 대한 비판- 이탈리아 인문주의자 로렌조 발라에 의해 쓰여진 글을 인용하면서, 에라스무스는 몇 권의 주요한 신약성경 본문에 대한 불가타 번역이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7) 비잔틴 신학 - 비잔틴 신학은 비잔티움이라는 헬라 도시로부터 그 이름을 취하고 있는데, 콘스탄티누스가 330년에 새로운 수도로 정한 도시이다. 비잔틴 저술가들은 구원을 서방의 법적 혹은 합리적 범주보다는 오히려 “신성화(deification)"의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비잔틴 신학은 전통의 개념, 특별히 헬라 교부들의 문헌이란 개념에 강하게 경도되고 있다.

 

5. 사례 연구

1) 하나님의 존재 증명

(1) 안젤무스 - 존재론적 증명은 1079년에 출판된 안젤무스의 “프로슬로기온”에 처음으로 나온다. 안젤무스는 하나님에 대한 정의를 “더 이상 생각되어질 수 없는 가장 위대한 존재”로서 제시한다. 그런데 베네딕트 수도사 가우닐로에 의하면 안젤무스의 증명에는 분명한 논리적인 약점이 있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더 이상 완전한 섬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섬을 상상할 때, 그 섬의 실재는 단지 개념보다 필연적으로 더 완전하기 때문에, 그런 섬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고 말한다.

(2) 아퀴나스 - 토마스 아퀴나스는 세계에 대한 인간의 보편적 경험으로부터 이끌어내어, 하나님의 존재를 지시해주는 것들을 식별하는 것이 전적으로 타당하다고 믿었다. 세계의 질서가 하나님의 존재와 지혜에 대한 가장 신빙성 있는 증거라는 것이다. 결국 아퀴나스의 증명은 오로지 세계의 창조자 혹은 세계 속의 결과들을 야기시킬 수 있는 지적 존재를 믿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비약은 여전히 요구되고 있다. 이 창조자 혹은 지적 존재가 기독교인들이 알고, 예배하고, 찬양하는 하나님“이다”라는 사실은 여전히 증명되어야 할 과제로 남는다.

2) 속죄에 대한 이해

(1) 교부들 - 중세시대에는 학문적인 신학과 대중적인 종교에서 모두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한 교리에 상당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대속물로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의 표상은 이레니우스와 같은 헬라 교부작가들에게 매우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대속물이라면 그것은 누구에겐가 지불되었어야 했던 것이라고 오리게네스는 주장했다. 그레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인간성은 미끼이고, 그의 신성은 낚시 바늘로서 마귀는 그 미끼를 물었다는 것이다. 또한 캔터베리의 안젤무스는 하나님의 의를 전적으로 강조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의 특성에 전적으로 일치되는 방식으로 인간을 구속하신다.

(2) 아퀴나스 - 아퀴나스는 무엇보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제공한 만족이 어떻게 인류가 저지른 범죄보다 크다고 간주될 수 있는지를 확실히 보여주었다. 아퀴나스의 분석은 속죄의 “만족” 모델에 대한 신학적 잠재력을 보여준다. 아벨라르두스는 인간의 죄를 위한 희생제물로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전통적 개념을 포함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찾는 그의 방법론은 그러한 죽음이 가지는 강력한 주관적 영향력을 바로 깨닫게 해주었다.

3) 성례에 대한 논의

(1) 아우구스티누스 - 기독교 전통의 처음 몇 세기에는 성례전 신학에 대한 관심이 비교적 적었던 것이 특징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례를 표지로서, “표지가 신적인 것들에 적용될 때 성례라 부른다”고 했다. 성례전 신학이 크게 발전한 시기는 중세였다. 12세기 전반부에 쓰여진 성례전 신학에 대한 포괄적인 설명을 통해 휴(Hugh of Victor, 1142년 사망)는 물질적 요소에 대한 필요를 포함하는 것으로서, 물질적 요소가 지시한 은총을 어떻게든 닮고 있는 것이었다. 휴에 따르면 성육신, 교회, 그리고 죽음과 같은 것들은 “성례”였다.

(2) 롬바르두스 - 페트루스 롬바르두스는 일곱 성례의 목록을 확정하여 중세 가톨릭 신학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는 세례, 견진, 축복의 빵(성만찬), 고해, 종부성사, 임직, 결혼으로서 중세 기독교 신학과 실천에 있어서 규범이 되었다.

4) 성경의 해석

(1) 4중 의미 - 성경이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느냐의 문제는 항상 신학적으로 중요했으며, 중세시대에도 어느 정도 많이 논의되었다. 보통 “성경의 4중 의미”라고 알려진 해석의 체계가 완성된 것은 바로 기독교 사상사 중 이 시기였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성경의 피상적인 의미 아래 감추어진 “영적”의미를 강조했으며, 안디옥 학파는 성경의 문맥의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을 강조했다.

(2) 중세교회 - 아우구스티누스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통일성을 강조할 수 있었다. 비록 그 표현방식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구약과 신약은 동일한 신앙을 증거한다. 한편으로 성경에 대한 “문자적”, “역사적” 혹은 “영적”. “알레고리적‘ 의미 사이의 차이는 초기 중세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이는 ”꽈드리가(Quadriga)" 로서 알려져 있다.

5) 르네상스 인문주의와 성경

(1) 불가타 - 중세 신학자가 “경전”을 언급할 때, 그는 거의 변함없이 성경에 대한 라틴어 번역을 의미한다. 라틴어 번역 성경은 “텍스투스 불가투스(textus vulgatus)"로서 널리 언급되던 것인데, 이는 위대한 교부 성서학자였던 히에로니무스(Jerome)가 4세기 후기와 5세기 초기에 번역한 것이다.

(2) Ad Fontes - 그렇다면 성경의 권위, 해석 그리고 적용에 관심을 기울이는 많은 신학적 질문들과 관련하여 인문주의의 중요성은 무엇이었는가? 이는 “원전으로 돌아가라”(ad fontes)였으며, 성경의 가장 훌륭한 본문을 정확하게 확정하는데 필요한 본문비평 방법을 발전시켰다. 에라스무스는 성서적 전문지식을 갖춘 평신도가 교회 갱신에 열쇠를 쥐고 있다고 주장했다. 성령에 대한 평신도 독자가 그래서 기독교 신앙과 특별히 실천의 본질을 더욱 적절하게 안내할 수 있었다.

6) 후기 중세 스콜라 신학의 몇 가지 주제들

(1) 유명론 - 초기 세대의 학자들은 “유명론”을 가리켜, 보다 후기의 중세에 속한 대부분의 북유럽 대학의 신학 교수진을 사로잡은 종교사상학파로 간주했다. 이는 “근대적 방식(via moderna)"이라는 용어로 알려졌는데, 구원의 교리에 있어서 핵심적인 특징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언약이다. 왕과 그의 백성간의 정치적 언약이 왕이 그 백성에 대한 의무를 규정했듯이, 하나님과 그의 백성간의 종교적 언약도 그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의무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의무를 규정했다.

(2) 근대 아우구스티누스 학파 - 그레고리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력을 반영하는 구원론을 발전시켰다. 은총의 필요, 인간의 타락과 죄성, 칭의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도적 역할, 하나님의 예정에 관한 강조를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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