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10-22 20:15
[2]목회자가 알아야 할 신학의 역사 요약
인쇄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9,106  

3. 사례 연구

1) 성경과 전통- 신학논쟁의 주요 현안은 성경해석 방법과 관계가 있다. 즉 성경을 정통적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중요했다. 특히 구원은 비의로써 가능하다는 영지주의는 기독교회에 큰 위협으로 대두했는데, 이에 대해 교부시대는 중요한 답변을 제시했다.

(1) 리용의 이레내우스 - 오직 전통을 아는 자만이 성경을 올바로 해석할 수 있다. 영지주의는 피상적이고 표피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도들의 교훈이 교회의 공적 가르침을 통해 알려졌으며, “온전히” 교회를 통해 “축적”된 것이다.

(2) 테르툴리아누스 - 정통성은 사도들과 역사적으로 연속된 상태로, 신학적으로 의존되고 있는 지에 좌우된다. 이단은 이런 연속성을 증명할 수 없다.

(3) 레랑의 빈켄티우스(Vincent of Lerins, 450년 이전 사망) - 경전이 사람들에 따라 달리 해석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단지 경전에 호소하는 것만은 부족하며, 무엇인가 추가해야 한다. 그러므로 “예언자와 사도들을 해석하는 척도”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즉 “언제, 어디서나, 만인에 의해”이다.

2) 아리우스 논쟁 : 그리스도의 신

(1) 순교자 유스티노스 - 기독교 신앙이 고전 그리스 철학과 유대주의의 통찰을 열매 맺게 했음을 증명하려고 애썼다. 기독교가 이방 철학을 통해 획득한 하나님의 계시의 암시와 예견 위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성취한다고 주장한다.

(2) 오리게네스 - 로고스 기독론을 만개시켰다. 로고스는 아버지에게 종속된 것이며, 로고스와 성부는 “모두 영원하지만” 로고스는 성부에게 종속된다는 것이다.

(3) 아리우스(Arius, 약 250-336) - 하나님의 자기본질을 강조했다. 성부는 성자에 앞서서 존재한다. 즉 성자는 피조물이다. “아들”이라는 용어는 은유적이며 서열을 강조하는 것이다. 성자의 지위는 본성의 결과가 아니라 성부의 의지의 결과이다.

(4) 아타나시우스 - 아리우스에 대한 해결책으로 예수가 성육신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수용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어느 피조물도 다른 피조물을 구원할 수 없으며, 아리우스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

3)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기독론 : 아폴리나리스 논쟁

아타나시우스가 대표인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구원을 신격화(deification)으로 표현한다. 그리스도은 인간 본성을 취했고, 그럼으로써 인간의 신격화를 확증했다는 것이다.

(1)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Cyril of Alexandria, 444년 사망) - 로고스는 살아있는 영혼을 지닌 인간 본성에 자신을 인격적으로 일체화했고, 인간 존재가 되었고, 사람의 아들로 불리웠다. 즉 그리스도의 한 가지 본성을 강조한 것이다.

(2) 라오디게아의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 of Laodicea, 약 310-399) - 그리스도 안에서 순수한 인간 성정과 영혼이 신적 정신과 영혼으로 대체되었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의 인간 성정의 역할을 완수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인간 본성은 불완전하다.

(3)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Gregory of Nazianzus, 329-389) - 아폴리나리스주의를 논박한다. 그리스도가 인간 성정을 취하지 않았다면 인간(성)은 구속되지 않는다.

4) 안디옥 학파의 기독론 : 네스토리우스 논쟁

안디옥 학파는 그리스도의 두 본성을 옹호했다. 그리스도는 동시에 하나님이며 인간이다. 그리스도 안에는 인성과 신성간의 “완전한 결합”이 존재한다.

(1)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스(Theodore of Mopsuestia, 약 350-428) - 로고스는 “인간 본성” 일반을 취하지 않았고 특수한 인간 존재를 취했다. 즉 추상적인 인간 본성을 취하는 대신 구체적 개별인간을 특별히 취했다고 암시한다.

(2) 네스토리우스(Nestorius, 약 451년 사망) - 네스토리우스 시대에 “테오토코스(하나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는 폭넓게 자리잡았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는 “안트로포토코스(사람을 낳은 자)” 혹은 “크리스토토코스(그리스도를 낳은 자)”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가 제기한 방식은 큰 반발을 초래했다.

5) 삼위일체

삼위일체 교리의 발전은 기독론의 전개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예수는 하나님과 “유사한 본질(호모이우시오스)”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본질(호모우시오스)”에 속한다는데 점차로 동의가 이루어졌다.

(1) 경륜적 삼위일체(이레네우스) - 각 위격이 구원의 경륜의 한 측면을 관장한다는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이해를 뜻한다.

(2) 테르툴리아누스 - 삼위일체 신학에 특별한 용어를 부여했다. 즉 구원의 경륜의 세 측면을 통합하는 것이 “본질(substance)"이요, 세 측면을 구별하는 것이 ”위격(person)"이다. 세 위격은 구별되나, 나뉘지 않으며 다르나 상호간에 분리, 독립되지 않는다.

(3) 동방교회 - 세 위격 혹은 세 본질의 독특한 개성을 강조하며, 성자와 성령이 성부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그들의 일체성을 옹호하는 경향이 있다.

(4) 서방교회 - 하나님의 통일성에서 출발하는 경향이 있다.

(5) 양태론(modalism) - 삼위일체 교리가 삼신교리의 형태로 전락하는 것을 우려하면서 신의 통일성을 옹호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상이한 시대에 상이한 방식으로 오직 한 분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했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와 성령의 신성을 신적 계시의 세 가지 상이한 방식이나 양태로 설명한다.

(6) 삼위일체에 대한 갑바도기아식 접근 - “세 위격 속의 한 실체”로서, 불가분적 한 분 하나님이 삼위일체의 세 위격 모두에 공통적이다. 종속적이라는 주장을 용인하지 않았지만, 성부는 삼위일체의 근원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명시적으로 진술했다.

(7)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 모델 - 성자를 “지혜”로 성령을 “사랑”으로 말한다. 성령은 우리를 하나님과 묶는 하나님의 은사이다. 삼위일체 자체 내에 이와 상응하는 관계가 존재한다. 즉 성령은 삼위일체 안에서 위격들을 서로 묶어주는 사랑이신 하나님이다.

(8) 필리오케 논쟁(filioque-그리고 아들로부터) - 니케아 신경은 성령을 “성부에게서 나오는 존재”로 언급한다. 그러나 9세기까지 서방교회는 성령을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는 존재”로 불렀다. 이 사상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전적 진술로써 조심스럽게 제기 발전되었다. 그러나 이런 성령의 “이중 산출” 개념은 헬라 저술가들을 크게 자극했다. 다수의 학자들은 1054년에 발생한 동,서방 교회의 분열이 이 혐오감으로 촉발되었다고 본다.

5) 도나투스 논쟁

303년 2월 칙령으로 기독교 서적과 교회에 소각과 파괴명령이 떨어졌다. 이때 자기가 소유한 책들을 불태우도록 넘겨준 교회지도자들(traditores-넘겨준 자들)이 성직 수임을 허락받았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분개했다. 즉 이런 사람들을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의 문제가 대두된 것이다. 이때 도나투스주의자는 배교라는 측면을 강조했고, 가톨릭주의자(키프리아누스, 어거스틴)는 분파 불가성을 강조했다.

6) 펠라기우스 논쟁

(1) 의지의 자유 - 자유의지(liberum arbitrium)는 스토아 철학에서 유래했다. 어거스틴은 인간의 자유의지가 회복되고 치유되려면 신적 은총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에 펠라기우스는 인간은 의지상 전적 자유를 소유하며 죄악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진다고 했다.

(2) 죄의 본성 -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인간성은 타락의 결과로 죄의 보편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펠라기우스는 인간은 무죄하게 태어났으며 오직 의도적 행위를 통해서만 죄를 범한다고 주장했다.

(3) 은총의 본질 - 어거스틴은 은총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관대하고 무조건적인 관심이요, 이것으로서 치유의 도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에 따르면 은총은 인간의 자연적인 능력이다. 즉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사한 것이고 사용하도록 되어 있다.

(4) 구원의 토대 - 어거스틴은 우리의 칭의가 하나님의 은총의 약속에 있다는 중요한 신학적 결론을 도출했다. 하나님은 그 약속에 충실했고, 죄인들을 의롭게 만든다. 그러나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선행은 전적으로 자율적인 인간 자유의지의 실행 결과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한 구원”이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7) 신앙과 철학

(1) 기독교가 확산됨으로써 기독교 사상가들에게 제기된 현안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독교와 고전철학 간의 관계였다. 즉 복음은 이들과 전적으로 상충하는가? 이를 기독교 복음의 예비형태 중 하나로 간주해야 하는가? 이는 터툴리안이 훗날 제기한 “예루살렘이 아테네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의 문제였다.

(2) 져스틴 -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 “로고스”에 따라 살려고 노력한 사람들은 기독교인이라 생각할 수 있다고 했다. 이는 후에 너무 진보적인 생각으로 배격당한다.

(3)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lement of Alexandria, 약 150-215) - 고전 철학이 복음에 이르는 길을 예비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제기했다.

(4) 터툴리안 - 기독교 사상 내에 철학이 점하는 위치에 대해서 크게 불신했다. 철학은 외양상 이교적이며 그것을 신학에 도입하는 것은 교회 안에 이단을 키우는 것이다.


 
 

일반형 뉴스형 사진형 Total 3,387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2491 [6]반드시 읽어야 할 살교학 요약 웹섬김이 10-17 7199
2490 [7]반드시 읽어야 할 설교학 요약 웹섬김이 10-17 7787
2489 [8]반드시 읽어야 할 설교학 요약 웹섬김이 10-17 6650
2488 [9]반드시 읽어야 할 설교학 요약 웹섬김이 10-17 8709
2487 [10]반드시 읽어야 할 설교학 요약 웹섬김이 10-17 7505
2486 [11]반드시 읽어야 할 설교학 요약 웹섬김이 10-17 7752
2485 [12]반드시 읽어야 할 설교학 요약 웹섬김이 10-17 9137
2484 [13]반드시 읽어야 할 설교학 요약 웹섬김이 10-17 7644
2483 [14]반드시 읽어야 할 설교학 요약 웹섬김이 10-17 8469
2482 [15]반드시 읽어야 할 설교학 요약 웹섬김이 10-17 7693
2481 [16]반드시 읽어야 할 설교학 요약 웹섬김이 10-17 7963
2480 [16]반드시 읽어야 할 설교학 요약 웹섬김이 10-17 7666
2479 알아야 할 귀신의 실체 웹섬김이 10-22 10604
2478 [1]목회자가 알아야 할 신학의 역사 요약 웹섬김이 10-22 9989
2477 [2]목회자가 알아야 할 신학의 역사 요약 웹섬김이 10-22 9107
2476 [3]목회자가 알아야 할 신학의 역사 요약 웹섬김이 10-22 9102
   51  52  53  54  55  56  57  58  59  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