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5-20 19:29
(1)한국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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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6,792  

한국 교회사 정리


1. 서론

 지난 2세기 동안 세계 사조, 특별히 기독교 사상은 역사상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격변의 변천 과정을 거쳐왔다. 서구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 역사에 등장하면서 종교를 시대적 역사적 산물로 보려는 움직임이 기독교계 일각에서 일어나 종교 진화론과 종교 사학파의 영향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유럽 기독교 지성사의 변천이 19세기 중반부터 미국 기독교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전통적인 청교도 개혁주의가 지배하던 미국 기독교가 유럽으로부터 밀려오는 고등비평과 찰스 다윈의 진화론등 현대사조로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거의 같은 시기, 특히 19세기 후반 남북전쟁 이후부터 미국 사회는 농업중심의 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전환되면서 산업화로 인한 도시집중화 현상이 발생하고 그와 같은 전통적인 가치관이 일대 변혁을 맞기 시작하였다.

1870년부터 1925년까지의 기간동안 미국의 기독교는 전통적인 기독교를 고수하려는 공동체와 현대사조와 보조를 맞추려는 공동체로 뚜렷이 이분화 되기 시작하였다. 전자를 가리켜 근본주의라고 칭하고 후자를 현대주의라고 부른다.

미국기독교 지성과 사회가 변혁을 맞던 19세기후반과 20세기 초엽 격변의 시대에 한국 선교는 시작되었다. 1884년 9월 20일 알렌이 입국하고 그 이듬해 4월 5일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입국하기 시작한 이래 1910년까지 한국에서는 수많은 다양한 개신교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다양한 개신교 유산들을 한국교회에 남겨주었다.

한국 개신교 역사가 한 세기를 넘어선 오늘의 시점에서 한국교회사를 돌이켜  보았을 때 한국 개신교 역사의 사상적인 맥은 뚜렷이 1930년 이전, 1930년부터 1960년까지 그리고 1960년 이후부터 현재까지 세단계로 뚜렷이 대별해 볼 수 있다. 1930년 즉 1934년 한국개신교 회년을 맞는 그때까지 한국교회를 주도한 중심세력은 역시 선교사들이었고, 1930년 이후부터 한국개신교는 선교 1세대들이 선교지를 떠나서 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한국의 신학자들과 교계 지도자들이 한국교계를 이끌면서 한국개신교는 한국인들이 주도하는 교회로 리더쉽이 전환되었다.그리고 1950년대 일련의 분열을 맞았다. 6.25이후 사회 및 경제적 정치적 불안정이 한국교회에도 그대로 반영되면서 한국기독교는 신사참배, 성경관, 교권문제등의 문제로부터 분열하기 시작한 것이다. 1930년대 미국 교회가 안고 있는 똑 같은 분열현상이 한국교회에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이 분열 특별히 1950년대에 장로교 안에서 발생한 분열은 전통적인 신학을 고수하려는 자들과 현대사조에 한국 기독교를 조정하려고 하는 공동체 사이에 벌어진 일련의 보수주의 대 진보주의 논쟁의 결과이다.

한국교회는 1960년이후 한국교회는 자신들의 나갈 방향을 진중하게 고민하면서 정체성을 정립하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교파를 막론하고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 사이에는 자신들이 걸어온 길, 그리고 걷고 있는 길을 반추해 보면서 제 삼의 길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 움직임은 대체로 전통적인 보수주의 신앙을 계승하려는 전통주의, 한국적 신학을 추구하려는 자유주의 토착화 신학, 그리고 이 시대에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려는 복음주의 세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1960년대 이후 한국개신교는 교파를 초월해 토착화운동, 근본주의 운동, 복음주의 운동으로 대별되어 한국교회를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복음주의 공통체는 한편으로는 토착화 신학을 경계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극단으로 흐르는 근본주의자들을 동시에 경계하는 것이다. 복음주의 한편으로는 양 극단을 극복하려는 움직임, 영미에서 일고 있던 복음주의 운동의 영향 그리고 한국 복음주의 협회, 한국복음주의 신학회, 생명의 말씀사를 비롯한 초교파적 복음주의 출판사, 그리고 교파를 초월한 복음주의 교회의 성장으로 한국교회에 쉽게 정착할 수 있었다. 전통적인 신학을 양보하지 않으면서 사회적인 책임을 소홀히 하지 않는 교파를 초월한 복음주의 운동이 한국교회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2. 서양 문화와의 접촉  :

역사적인 기록을 통해 우리들에게 구체적으로 알려진 한국입국 서양인들로는 1627년 경주 앞바다에서 표류해 입국한 벨트브레(박연), 1653년 제주도에 표착한 헨드릭 하멜, 1816년 군함을 이끌고 조선의 서해안을 탐사하기 위해 입국한 영국 해군 대령 머리 멕스웰과 바질 홀, 네덜란드 선교회의 파송을 받고 입국한 칼 구출라프 선교사, 그리고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를 들을 수 있다.

벨트브레는 병자호란도 참전한 기록도 있으며, 자신과 같이 표류하다 조선에 입국한 하멜과 그 일행의 통역도 맡아보았다. 하멜은 제주도 앞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표류하여 제주도에 도착했다. 그후 13년간 그는 조선에서 있었으며, 탈출 후 표류기를 기술하여 조선을 세계에 널리 알렸다. 영국해군 대령 맥스웰과 홀은 1816년 군함을 이끌고 서해안에 입항해 해도를 작성하고 한문성경도 전해주었다.

칼 구출라프선교사는 상업이나 정치적이 목적으로 조선에 입국한 사람과는 달리 최초로 한국선교를 타진한 사람이다. 당시는 제국주의 정책의 붐을 타고 동양과의 통상확대를 통해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시키면서 식민지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런 두가지 이유 즉, 상업과 선교의 목적으로 동양에 대한 유럽과 북미인들의 관심이 고조되었다.

구출라프는 서해인을 세차례 항해하며 주민을 만나 감자씨를 전해주었으며 또한 성경도 주었다.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는 1866년에 제너랄 셔먼호를 타고 조선에 입국했다. 그는 황해도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입국했으나 순교를 하였다.


3. 개신교 선교준비 :

c19세기 중엽 특히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발생하고나서 한국 국내의 최대의 이슈는 개항이었다. 우리가 개항을 해야 하느냐 하지 말아야 하느냐하는 문제를 두고 개항을 반대하는 세력과 개항을 찬성하는 세력이 국내에서 끊임없이 논쟁과 세력 다툼을 벌여왔다. 개항을 반대했던 사람들을 위정척사파로 알려졌다. 이와는 달리 국제 질서에 합류하기 위해서는 문호를 열고 개화를 해야 한다고 외쳤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개화파로 알려졌다. 이 개화파는 크게 방법론을 두고 온건하게 개화를 추진하고자 하는 동도서기파와 급진적으로 개화하자고 하는 개화당 둘로 나뉜다.

위정척사파는 보수적인 민족주의 입장을 갖고 있었다. 이들이 갖고 있던 모토는 한국의 전통문화가 서구의 문화와 비교해서 결코 손색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은 개항할 필요가 없고, 개항을 하면 전통문화가 파괴되어 버린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기독교를 위험한 종교로 보고 기독교를 배척하였다.

동도서기파는 온건한 개화를 주장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이 모델로 삼은 것은 중국식 개화이다. 중국에서는 전통적인 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고 서구의 문물을 선별적으로 받아들이는 즉 온건한 개화를 추진한 결과 자신들이 고유한 전통을 상실하지 않으면서도 경제적인 여유를 갖는 국가가 되었다는 것이다.

급진 개화당은 일본을 모델로 하여 개화를 하자는 것이다. 일본이 명치유신을 모델로 철저한 개화를 추진하기 이해서는 먼저 봉건질서의 재편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봉건질서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키고 빠른 시일 내에 서구의 기술문명을 우리가 받아들이고, 서구 문화의 근간이 된 기독교 마저도 주저할 것 없이 과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만주에서의 개신교 준비에서는 이응찬을 비롯하여 네사람과 존로스 선교사는 한국선교를 위해서 성서번역을  착수하였다. 이 네명의 사람들은 성서번역을 위해서 성경을 읽고 한문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고 1876년 로스의 동료 선교사 존매킨타이어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기에 이르렀다. 성경번역을 한 후 이들은 전부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들에 의해서 국내의 복음전도가 시작되었다.

일본에서는 이수정에 의해서 복음이 준비가 되고 있었다. 율전 박사가 안천양이라는 일본 목사를 이수정에게 소개해 12월 크리스마스 때 처음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하게되었고, 이수정은 1883년 4월 29일 일본에 건너간지 9개월만에 노월정 교회에서 미국선교사 존 낙스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수정은 당시 일본주재 미국성서 공회 헨리 루미스선교사로부터 한글 성서번역을 의뢰받자 주저하지 않고 성경번역에 착수했으며 자신이 만나는 일본주재 미국선교사들에게 한국선교를 호소하였다.

이수정의 한국선교의 공헌은 감리교 선교사 매클레이 선교사의 요청을 받고 감리교 요리문답도 번역하여 1천부가 출판되어 국내에 널리 유포되어 한국선교의 효율을 높일수 있었다. 요코하마에서 그의 마가복음 성경 1천권이 출판되었다.

이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첫째 한국선교는 성서번역에서부터 출발했다는 것이다. 둘째, 한국인에 의해서 스스로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점이다. 셋째, 한국인에 의해서 복음이 전파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가 한국인 스스로에 의해서 자립의 틀을 형성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4. 한국선교를 위한 준비 : 19세기 한국의 고위층 위정자들이 기독교를 반대했던 것은 기독교 자체가 아니라 기독교와 한국의 전통문화가 서로 대립적인 관계에 있다고 보고 그로 인해 한국의 전통문화를 파괴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조선의 고위 정치인들 중에는 천주교와는 달리 개신교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다. 한국왕실이 공식적으로 개신교선교를 허용하지는 않았지만 간접적으로 개신교 선교를 묵인하고 있었다는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요인들은 한국의 복음수용과 확장을 가져오는 요인이 되었다는 점이다.

한국선교는 개항과 함께 시작하였다. 일본은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의 개항을 이루어냈다. 미국과의 수교도 이홍장과 슈펠트 사이에서 1882년 5월 제물포 해안에 마련된 장막에서 조미수호통상 조약이 체결되었다. 미국과의 조약은 지극히 정치적인 사건이었으나 이것이 미국과의 수교뿐만 아니라 선교관계를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견미사절단이 파견되었고 견미사절단은 가우쳐 목사를 만나 한국선교를 타진하기에 이르렸다.

감리교에서는 가우쳐와 매클레이가 장로교에서는 엘린우드가 조선선교를 준비하였고 만주에서는 존로스와 매킨타이어 선교사가 조선선교를 백방으로 모색하였다. 이들 뿐만 아니라 일본주재 조지낙스 선교사와 중국에서 활동하던 길버트 리드 선교사도 조선 선교의 즉각적인 점유를 선교본분에 촉구하는 서한을 보내 조선선교를 공식적으로 요청하고 나섰다. 특히 일본에서 활동하던 조지낙스 선교사는 조선선교에 장을 여는데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이런 일련의 노력으로 장로교 선교사 알렌과 언더우드가 입국하였고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와 스크랜톤의 입국이 이루어졌다.


5. 각국 선교사들의 입국 : 미장로교와 감리교에서 교단적인 차원에서 한국선교를 위한 계획이 추진되고 있는 동안 중국에서 활동하던 북장로교 파송 의료 선교사 알렌이 전혀 예기치 않게 한국으로 선교방향을 돌렸다. 알렌은 갑신정변 때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민영익을 치료하였고 이것을 개기로 알렌은 고종에게 재가를 얻어 정2품에 해당하는 참판 벼슬까지 얻게 되었다. 알렌은 이것을 계기로 광혜원이라는 병원을 설립하는 기회를 마련하였다. 광혜원이 제중원으로 개명되고 왕실과의 유대도 더욱 강화되었다. 광혜원은 자연스럽게 한국개신교 선교의 거점이 되어 선교의 효과를 극대화 시킬 수 있었다.

알렌 이후 개신교를 대표할 만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입국하였다. 한국에 도착한 언더우드는 한국어를 배우는데 심혈을 기울였고, 동시에 마기복음의 번역과 사전편찬을 착수했다. 경신학교의 전신인 존 디 웰즈 학교를 설립해 인재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1887년 아펜젤러와 함께 상임성서번역위원회을 발족해 성경번역을 시작한 언더우드는 성경번역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1910년에 신구약 번역을 끝내고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개정작업에 물두하다 그만 건강을 잃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언더우드는 개신교 최초의 세례를 베푼 인물이며 남장로교 선교회와 카나다 선교회의 대 한국선교의 문을 열어준 인물이며, 연합선교의 이상을 통해 한국선교를 성공적으로 이끄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한국선교의 개척자였다.

언더우드와 함께 아펜젤러는 한국선교에 초석을 놓는 금세기 최고의 선교사였다. 이둘은 신앙도 유사했다. 복음에 대한 열정,남을 먼저 생각하는 이타적인 사랑, 한국선교에 대한 비젼에서 어느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놀라운 공헌을 했다. 1902년 목포로 가는 작은배를 타고 가다 난파되어 세상을 떠나기까지 한국선교에 헌신했던 사람이다.

한국의 이들을 통해 시작되었고 1898년까지 한국에서 북장로교, 남장로교, 호주장로교, 카나다 장로교등 네 개의 장로교 선교회가 입국해 한국 장로교 선교를 가속화시켰다. 한국에 입국한 네 개의 선교회는 1893년에 결성된 장로교공의회의 구성원이 되어 교단별로 한국 선교를 추진하기보다 범장로교 연합을 통해 선교의 효율을 증대시켜 나갔다. 또한 빅토리아 선교회, 미 감리교 선교단, 남 감리교 선교단. 러시아 선교회, 동아기독교, 동양선교회, 안식교 선교회, 플리머스 형제단, 등이 차례로 한국선교를 시작함으로써 1910년까지 다양한 개신교 선교사들이 한국에 입국하였다.

우리의 한국선교와 관련하여 다음 몇가지 사실을 발견할수 있다. 첫째, 거의 같은 시기에 다양한 선교회가 동시에 입국하여 한국개신교 선교를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둘째, 장로교 네 개의 선교회가 감리교는 두 개의 선교회가 거의 같은 시기에 입국함으로써 장.감 선교회가 거의 한국개신교 선교를 주도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이들의 연합은 선교지의 난관을 극복하고 상당한 선교의 결실을 거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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