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2-02-12 23:41
종교다원주의와 종교적 상대주의(손봉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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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6,807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사고방식이 유행하기 시작한 요즘 종교적 다원주의는 우리 나라처럼 다종교 사회에서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다종교사회가 가장 두려워해야 하고 피해야 할 것은 종교간의 분쟁이다. 우리는 북 아일랜드, 레바논 등에서 종교간의 갈등이 국민 모두에게 얼마나 큰 재앙을 가져오는가를 보아 왔다.

인간적인 관계로 보나, 종교계의 민감한 관심을 고려하면 논란에 끼어들지 않는 것이 개인적으로 가장 안전한 태도인 줄 알면서도, 사안의 중요성에 비추어 논의에 참여함으로 문제의 올바른 이해와 원만한 해결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

한 국 사회는 다종교 사회요, 원칙적으로 다원주의를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 사회의 구성원은 누구도 어떤 특정한 이데올로기나 종교를 받아들이도록 강요받을 수 없으며,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여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제공되는 어떤 이익으로부터도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다행하게도 종교인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이 사실을 인정하고, 나아가서는 그런 사실에 대해서 오히려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개인적으로 종교다원주의에 대해서 불만을 품을 수 있으나, 그것이 우리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에 의하여 수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의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론 상당수의 사람들은 자기 종교가 모든 사람에 의하여 받아들여지기를 바라겠지만, 다른 종교를 따르는 사람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므로, 최상의 해결책은 종교다원주의를 수용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기독교나 이슬람처럼 비교적 배타적인 교리를 가진 종교의 신봉자들에게도 불가피한 입장이며, '관용'이란 이름으로 정당화되어 왔다.

그러나,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런 다원주의를 각 종교의 교리로 수용하기는 그렇게 쉽지 않고 반드시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종교 내에서는 기껏해야 종교다원주의를 소극적으로 수용하는 수밖에 없다. 종교외적 관점에서는 적극적 종교 다원주의를, 종교 내적 관점에서는 소극적 종교 다원주의가 수용되어야 하고, 실제로 그런 공생방식이 엄연한 사실로 잘 유지되고 있다.

그리고 일반대학에서 종교학 교수가 종교적 다원주의를 주장한다 하여 비판을 받거나 어떤 불이익을 당해서는 안될 것이다. 어떤 사상이나 입장이 국민의 다수에게 직접 혹은 간접으로 해를 끼칠 것이 매우 확실하거나 소수에게 치명적인 손해를 끼칠 것이 예상될 때만 제재받아야 할 것이요, 그것도 민주적으로 제정된 법률에 의해서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종교적 다원주의는 그런 해악을 끼칠 위험을 전혀 내포하고 있지 않다. 학문과 사상의 자유는 역사를 통하여 인류가 얻어낸 가장 귀중한 유산이므로, 특별한 경우와 상황이 아니고는 결코 제한을 받아서는 안 된다.

종교 다원주의에 대한 논의가 의미있게 이루어지려면, 우선 종교 다원주의란 개념부터 분명히 밝혀져야 하고, 그것이 분명해질 때, 이미 많은 문제가 스스로 해결될 것이다. <철학과 현실>에서 정대현 교수가 종교적 다원주의가 뜻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밝혀주었다. 정교수는 거기서 종교적 다원주의란 "모든 종교는 각기 구원의 방식을 갖는다" (가)라는 명제로 요약될 수 있으며, 그것은 "모든 종교는 구원을 갖는다" (나)란 명제와 구별되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가) 명제는 모든 종교가 각기 그 자체의 구원관이 있다는 것으로, 정교수의 말대로 분석명제이며 지극히 당연한 주장이다. 즉 오늘 날 세계에서는 여러 가지 종교가 있으며, 그 종교들은 각기 그 종교가 인식하는 구원관과, 구원에 이르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런 주장을 했다 해서 누가 그를 제재하거나 비판한다면, 이는 우스꽝스러운 일일 것이고, 심지어 그런 비판이나 제재가 한 특정한 종교 안에서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이해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나) 명제는 좀 복잡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첫 째, 종교인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모두 동일하게' 인정하는 '구원'이 있으며, 두 째, 모든 종교는 각각 그 구원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물론 그 길이 같을 수는 없다. 만약 구원이라고 간주하는 상태가 같고 거기다가 그런 구원에 이르는 길까지 같다면, 그들은 서로 다른 종교로 남아 있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이런 입장을 정교수는 종교적 다원주의가 아니라 일종의 종교통합이라 해야 하며, 그런 유의 통합은 과거에 시도되었으나 실패하였고 사실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히크 (John Hick)도 "세계의 고등종교들은 하나의 궁극적이며 신비한 신적인 실체에 대해 제각기의 서로 다른 개념과 체험과 반응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이론" 이라고 정의한다. 즉 모든 종교가 비록 서로 다른 개념과 체험 및 반응을 가지고 있지만, 모두 "하나의 궁극적이며 신비한 신적인 실체"를 전제로 한다고 주장하면 그것은 종교 다원주의란 것이다. 모든 사람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山頂은 하나 뿐이나, 그 山頂으로 올라가는 길은 여러 가지란 입장이다.

그런데, 여러 종교들이 공동으로 추구하는 '하나의 구원'이 전제되는데, 그것이 왜 '다원주의'가 되는지 알 수 없다. 특히 현대 포스트모더니즘이 강조하는 다원주의는 어떤 공통점을 전제로 하는 다원주의가 아니라 서로 다른 것의 독특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갑', '을', '병' 이 각각 독특하여 그 사이에 아무 공통점이 없을 때, 진정한 다원주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히크가 제시하는 것은 엄격하게 말해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다원주의가 아니라, 이미 구시대적인 것이 되고 만 일종의 종교통합이다.

그런 통합은 특정한 종교바깥에서 모든 종교에 공통되는 요소를 뽑아 하나의 보편적인 종교를 만들자는 시도다. 히크에 의하면 세계의 모든 고등 종교들은 "궁극적인 것"(the Ultimate) 또는 "참된 것"(the Real)에 대해 서로 다른 역사적 체험과 문화적 개념을 가지고 있으나, 그 종교에 귀의한 사람들이 "자아 중심적인 것" (self-centeredness)에서 "철저하게 신 중심적인 재조정" (a radical recentering in the divine)을 거침으로 "궁극적 실재 중심성"으로 되며, 이것이 종교 다원주의가 말하는 바 모든 종교가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구원"의 내용이라고 주장한다 (위에 인용한 기독교 사상, 135쪽). 그래서 만약 어떤 사람이 열반이나 천국을 바라보지 않고, "궁극적 실재 중심적"이 되기를 원한다면, 그는 불교인이나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 새로운 종교의 신자가 될 것이며, 그런 종교는 사실 소수의 지식인들만이 수용할 수 있는 매우 귀족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종교일 것이다.

기존의 고등종교가 이 통합종교에 합류하는 것이 과연 실제로 가능한가? 히크가 주장하는대로 모든 종교가 공통으로 추구하는 "구원"이란 것이 과연 수용될 수 있으며, "궁극적이며 신비한 신적인 실체"가 과연 모든 종교의 신앙적 대상으로 작용할 수 있는가? 물론 대부분의 종교는 "구원"을 추구하고 대부분의 종교는 "궁극적이며 신비한 신적인 실체"를 믿는다. 그것은 대부분의 남자는 "여자"와 결혼하려 한다는 것과 같이 자명한 주장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남자가 어떤 특정한 "김양"과 결혼하려 하는 것과는 다르다. "구원", "신적인 실체"는 "여자"와 같이 보편 개념들이요, 특정한 종교집단이 추구하고 예배하는 구체적인 대상은 아니다. 구체적인 남자로서의 이씨는 구체적인 김양과 결혼하지, 보편적인 여자와 결혼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사실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과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서로 너무 다른 상태이기 때문에 양자를 모두 "구원"이라고 표현한다면, 그것은 내용이 거의 없는 형식적인 공통성만 표현할 뿐이다. 그리고 기독교가 믿는 인격적인 하나님은 불교의 불성과 어떤 점에 있어서 동일한지 말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혼합종교와 상대주의


어떤 종교가 다른 종교와 장기간 접촉하거나, 다른 종교를 배경으로 한 문화권 안에 들어가게 되면, 어느 정도의 변질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 종교의 가장 핵심적인 교리와 성격은 유지하면서 부분적으로 변질될 때는, 우리는 그것을 토착화 혹은 적응이라고 부를 수는 있어도 종교 혼합이라 하지는 않는다. 기독교가 헬레니즘과 접촉함으로 어느 정도 그 영향을 받고, 우리 나라에 도입됨으로 무속신앙의 영향을 받은 것은 그런 종류의 변질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변질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

그러나, 그 종교의 핵심적인 요소까지 변질될만큼 다른 종교의 영향을 받는다면 이는 하나의 종교혼합이며, 그 정도가 심하면, 여기서도 종교통합에 있어서와 같이 하나의 새로운 종교가 태어난다. 그래서 예를 들어 기독교가 불교, 이슬람 등의 가르침과 타협하여 기독교의 핵심적인 교리까지 상대화시키면, 그것은 기독교, 불교, 이슬람 등 서로 다른 종교들의 공존이 아니라, 그들 종교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하나의 혼합종교가 태어나는 것이다. 문선명의 통일교는 비록 처음에는 기독교에서 시작했으나, 다른 종교적 요소의 도입이 기독교가 수용하기에는 그 정도가 너무 심각해서 혼합종교가 되고 말았으며, 최근에 생겨난 혼합종교의 대표적인 예가 되고 있다. 거기에는 기독교, 유교, 도교, 원시종교들의 요소들이 모두 발견된다.

그런 혼합종교는 사실 종교간의 관용 혹은 종교간의 상호존중과 아무 관계가 없다. 기존의 종교들이 자체의 독특한 가르침을 모두 양보하고, 그들 종교들에 공통되는 요소만 인정한다면 몰라도, 그렇게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래서 종교통합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요소들을 차용한 종교들도 그대로 남아 있는 상황에서 또 하나의 종교를 만들어내는 결과만 가져 올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혼합은 그 자체로 구태여 종교다원주의를 전제하거나 지지한다고 할 수도 없다.

그 러나, 다른 종교적 요소를 도입하는 정도가 종교혼합이라 할 수 있을 수준에까지 이르지 않아서 아직도 母宗敎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종교 다원주의가 의도하는 것과 같이 종교간의 관용과 평화로운 공존을 가져오지도 못할 뿐 아니라, 母宗敎의 생존을 위협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카톨릭에서는 제2 바티칸 공회 이후, 다른 종교에 대한 전통적 배타적인 태도를 다소 완화하여, 독일의 카톨릭 신학자 라너 (Karl Rahner)는 다른 종교 속에서도 신실하게 "하느님"을 찾는 소위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있을 수 있음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종교들이 그렇게 감사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주장도 아니고, 기독교 안에서도 많은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예를 들어, 기독교 신학자가 "불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가 말하는 구원은 어떤 것이겠는가? 만약 그것이 불교가 말하는 구원이라면 그 주장은 자명한 것을 말하므로 그것은 별로 흥미로운 것이 못된다. 오히려 만약 기독교에도 (불교에서 말하는)구원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관심을 끌만한 중요한 발언이 될 것이다. 그가 뜻하는 것이 "불교를 믿어도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이 있다"는 것이라면, 그것은 불교에 대한 커다란 실례가 될 것으로, 불교인에게 결코 기분좋은 주장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입장은 진정한 종교 다원주의보다 오히려 더 독단적이란 비판을 받음직하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심각한 것은 그런 입장이 모종교를 치명적으로 상대화시킨다는 사실이다. 종교적 다원주의도 물론 종교적 상대주의를 함축한다. 그러나, 그것은 부득불 취하는 소극적 태도이므로, 다른 종교에 대한 관용적 태도와 자신의 종교에 대한 확신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게 한다. 독특한 종교들의 다원성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 내적 상대주의는 그와는 전혀 다르다. 모든 사람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山頂은 하나 뿐이나, 그 山頂으로 올라가는 길은 여러 가지고, 자신의 종교도 그 여러 길들 가운데 하나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엄격하게 말하자면, 이번 문제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다른 종교가 제시하는 구원의 길을 인정하는가 하지 않는가의 문제이지, 종교외적인 관점에서의 일반적인 종교다원주의를 인정하는가 않는가의 문제는 아니다.

피상적으로 생각하면 종교적 상대주의는 20세기 지성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종교적 태도인 것 같고,기독교 신앙의 절대성은 지극히 고루하고 구시대적일 뿐 아니라, 일종의 전제주의적 오만의 표현처럼 보인다. 사실, 많은 비종교인이나 타종교인들, 특히 비교적 포용적인 불교나 힌두교인들, 심지어 진보적인 기독교 신학자들조차도 보수적인 기독교의 그런 입장을 독선적이고 전제주의적이라고 비판해 왔다.

그러나, 좀 더 따져 보면 종교적 상대주의가 그렇게 쉽게 정당화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바람직한 것도 아님을 알 수 있다. 교리 자체가 매우 포용적인 힌두교나 불교에서조차도, 완전한 상대주의가 수용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다른 종교를 믿어도, 힌두교나 불교에서 말하는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상대주의이지, 불교를 믿어도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을 믿을 수 있다고 할 정도의 상대주의는 결코 수용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특히 나사렛 사람 예수가 곧 그리스도요, 그 그리스도가 구원의 유일한 통로란 배타적인 교리를 근 이천년간 지켜 온 기독교에게는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예를 들어 불교에서 가르치는 것과 같이 수도를 통한 해탈로 하나님 나라에 이를 수 있다는 상대주의는 자체부정을 의미한다.

종교 내적 상대주의가 그 종교에 미치는 영향은 종교에 따라 다를 것이다. 교리 자체가 비교적 포용적인 불교나 힌두교에게는 그렇게 심각하게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지 모르나, 교리가 상당할 정도로 배타적인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에게는 상대주의는 곧 신앙의 약화 및 소멸이란 심각한 결과를 가져온다. 오늘 날, 유럽의 기독교가 거의 죽어가고 있는 반면에, 또 다른 배타적인 종교인 이슬람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다는 현상은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그리고 극단적으로 배타적인 종교의 약화는 사회적으로 긍정적일 수도 있으나, 모든 가치가 상대화되고 있는 오늘날에서는 오히려 부정적일 수도 있다. 종교적 확신에 기초한 사회봉사와 자기 희생 등 종교가 사회에 할 수 있는 중요한 공헌들이 줄어들 것이며, 고등종교들의 받힘을 받고 있는 도덕적 가치가 상대화되어 사회가 더욱 더 무질서하게 되고 그만큼 법률에 의한 질서유지가 더 필요하게 되어 인간관계가 기계적이 되고 말 것이다. 적어도 현대사회에서는 다른 종교의 존재를 소극적으로 인정하는 종교다원주의는 바람직하고 수용될 수 있어도, 종교 내적 상대주의는 결코 바람직한 것이라 할 수 없다.


포교와 개종의 문제


오 늘날은 다행하게도 과거에처럼 어떤 한 종교가 정치적, 경제적 혹은 사회적 특권과 연관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리고 고등종교는 결코 돈이나 권력처럼 한 사람이 많이 가지면 다른 사람은 그만큼 적게 가질 수밖에 없는 배타적 가치를 추구하고 지지하지는 않는다. 다만, 사랑이나 지혜처럼 한 사람이 많이 가지면 다른 사람에게도 덕이 되는 포괄적 가치에만 모든 관심을 기울이고 원칙적으로 그런 가치를 생산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게 하는 한 종교는 결코 사회갈등의 원인이 될 수 없다.

그 러나, 여기에 하나의 역설이 있다. 종교가 그런 포괄적 가치를 많이 생산하려면 그만큼 신앙이 강해야 하고, 종교적 확신이 강하면 강할수록 타 종교인이나 비종교인에 대해서 배타적이 되기가 쉽다는 것이다. 그 배타성은 주로 포교 (전도), 개종의 문제에서 표면화된다. 보수적인 기독교가 제국주의적이란 비판을 받는 것도 주로 전도, 선교, 개종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다른 종교에도 구원의 길이 있음을 인정한다면 구태여 포교, 개종을 그렇게 강조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상대주의적 태도를 취할 때, 신앙적 확신은 약해지고, 사회에 대한 공헌은 그만큼 감소될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이념적, 종교적 확신에 대한 존중과 자신의 이념적, 종교적 확신사이의 갈등은 거의 불가피한 것이 아닌가 한다. 자신의 확신을 다른 사람에게 억지로 옮겨 놓으려 하는 것이 옳지 않은 것 못지 않게, 자기에게 꼭 필요하고 좋다고 확신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않는 것도 이기주의적이다. 사람의 개인적 확신이란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니고, 밖으로부터 오는 정보, 창조적인 사유, 새로운 깨달음으로 계속해서 바꿔지고 고쳐지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확신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함으로 다른 사람의 노여움을 사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개종한 사람이 자신에게 새 신앙을 갖게 해 준 사람에 대해서 감사하고 감격해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므 로, 포교와 개종의 노력을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다른 사람의 정당한 권리를 무시하고 개종을 강요하지 않는 한, 정직하고 솔직한 정보제공과 사랑에 찬 설득은 허용되어야 한다. 그것은 전달자의 권리일 뿐 아니라, 전달을 받는 사람의 권리이기도 하다. 정치, 예술, 사상 등 여러 영역에서도 이런 정보제공과 설득은 계속 일어나고 있는데, 구태여 종교라고 하여 금지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다만 다른 영역에서와 같이 그것은 다른 사람의 인격과 권리를 철저히 존중하는데서 이루어져야 하며, 다른 종교에 대해서 정중한 예의를 지키는데서 이루어져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종교통합, 종교혼합 및 상대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주장은 결코 실재의 종교 다원주의를 부정하려 한다든가, 일부 열광적인 기독교인들의 전투적인 독단주의나 독선주의를 정당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런 독선은 우리 나라와 같은 다종교 사회에서는 매우 위험한 태도며, 기독교 자체를 위해서도 결코 유리하게 작용하지 않을 것이다.

종교는 그 힘이 커질수록 겸손해져야 하며, 봉사와 희생에 그 힘을 사용할 수 있어야 진정한 고등종교일 것이다. 그런 희생과 봉사는 비록 그 종교자체의 가르침에 의하여 이루어지더라도 다른 종교인들과 비종교인들에게 거슬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고등종교는 그 자체의 전통과 가르침에 철저히 충실할 때 오히려 사회에 더 큰 유익을 끼칠 수 있을 것이며,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그런 종교를 고등종교라 부른다.

비록 모든 종교가 공동으로 추구하는 구원은 있을 수 없어도, 사랑, 자비, 희생, 봉사, 정의, 인내, 절제 등의 가치는 공유할 수 있고, 이런 가치들은 각 종교가 각기 추구하는 구원을 위한 과정에서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는 요소들이다. 여러 고등종교들이 서로 협력할 수 있다면, 바로 이런 공동가치들을 통해서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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