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1-10-25 20:09
새로운 성서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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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6,798  
1. 새로운 성서해석 경향

18세기의 계몽주의 시대는 그때까지의 교회 정통주의에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교회의 무비판적 성경이해와 교리나 신조의 시녀가 되버린 성경연구에 종지부를 찍게 한 것이다. 교회의 도그마(Dogma)와 독선, 그리고 전통주의의 신학적 교조주의에서 성경을 자유케 한 것은 인간 이성을 우위에 올려 놓은 계몽주의의 공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계몽주의는 교회의 신학적 교조주의에 반대해서 '역사' 혹은 '역사적' 사실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성서의 어떤 사건은 실제로 일어났었느냐?" "실제로 일어났었다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느냐?"는 사실성 추구 내지는 역사실증주의에 모든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지난 한세기 동안 교계와 학계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었다. 모든 성서의 말씀은 어떤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이나 사실을 후대에 알리려는 단순한 연대기적 기록물들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회, 역사적 정황 속에 삶의 자리를 가졌던 믿음의 공동체들이 각각 그들이 체험한 신인식을 그들이 당면한 신학적 문제와 결부시켜서 그 시대의 언어와 사상으로 고백해 놓은 것이라는 결론을 얻기까지는 실로 한세기 이상의 열띤 논쟁의 연구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순수한 성서의 역사적 추구가 실패한 이후 새로운 관심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 성서의 전승에 현재의 틀(형식, Form)을 씌운 신앙의 공동체들, 즉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의 삶의 자리들, 신약에서는 초대 그리스도 교회였다. 일찍이 GUNKEL은 본문의 '형태' 혹은 '양식(Form)'에 근거해서 그 본문의 삶의 자리를 추론하려 했었고, 세계 1차 전쟁 이후에는 SCHMIDT, DIBELIUS, 그리고 BULTMANN에 의해 발전된 이후, 다시 성서의 모든 편. 저자들은 단순히 구전 혹은 문서 전승들을 수집하여 기록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수집한 전승자료들을 자신들의 신학적 이해와 의도대로 변경하기도 하고 편집순서를 배열하기도 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우리는 편집사적 연구라고 한다. (BORNKAMM, CONGELMANN, MARXSEN) 양식사연구는 성서 전승을 배태케 했던 신앙의 공동체를, 다시 양식사적으로 분석된 것들을 연결시켜서 총체적인 의미를 물었던 편집사연구는 최종적인 편. 저자들의 신학적 입장을 각각 그 연구대상으로 삼았으나, 이런 연구들의 관심은 아직도 신앙의 공동체나 편. 저자에만 집중되어 있음으로 해서 성서 기록 당시의 전반적인 사회, 역사적 상황 연구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러한 불충분함을 보완케 해 보려는 노력으로 최근에는 성서본문 기록 당시의 사회, 역사적 상황연구에 새로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사회학적 성서연구는 성서 전승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삶의 자리 분석을 통해 본문을 보다 넓은 역사적 연관성 속에서 이해하고자 한 것이다. 양식사 연구, 편집사 연구, 그리고 사회학적 연구를 통해 성서본문을 배태케 한 신앙의 공동체와 편.저자의 신학과 의도, 더 나아가 전반적인 사회, 역사적 정황을 이해함으로써 성서본문의 의미를 보다 분명히 파악하려는 이런 일련의 시도들은 성서해석의 중요한 도구가 된다. 물론 아직도 성서 자귀를 철저히 하나님의 영감으로 씌여진 말씀으로 이해하기를 고집하는 정통.보수주의에서나, 성서본문이 역사적인 기록물들임을 부정하고 성서본문을 열렬히 신비적 종교현상으로 이해하려는 신비, 열광주의에서는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이상과 같은 새로운 성서연구의 결과들을 개체교회의 성경공부에 어떻게 적용하느냐가 문제일 것이다. 많은 목회자나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현대신학의 사조나 새로운 경향에 수긍하면서도 실제로는 구태의연한 16세기의 정신상태나 지식에 머물러 있는 것은 그들의 게으름이나 무지 보다는 새로운 방법들의 적용 문제인 것 같아 몇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첫째로, 성서본문을 오랜 동안의 구전과 문자화된 최종반적 단계의 기록물들임을 알아야 한다. 이 말은 성서본문이 그 당시의 구체적인 역사적 언어와 사상적 체계속에 하나님 계시에 대한 전승이 기록으로 전해 온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렇게 기록된 많은 전승들을 편.저자들은 책으로 만들었고, 그런 많은 책들 중에서 A.D. 397년의 종교회의(Council of Carthag)는 66권을 뽑아 기독교 경전(Canon, 성경)으로 확정지은 것이다. 그렇기에 성서본문은 철저히 역사비평적 연구대상이 되는 것이다. 저자, 연대의 사상적 배경, 기록, 장소, 사회, 역사적 삶의 자리, 목적 등등이 본문해석에 길잡이가 되는데, 이런 연구를 위해서는 할 수 있는대로 최근에 출간된 신.구약 개론서나 신학서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성서본문을 이루고 있는 전승을 전해준 신앙공동체와 그 전승은 최종적으로 저술하거나 편집한 저자의 언어, 사상체계와 목적 등을 파악하는 작업이 본문해석의 첫걸음이 되는 것이다.

둘째로, 성서본문이 비록 특정 역사속에서 기록된 역사적 기록물들이기에 역사적 연구를 해야 한다 할지라도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은 성서본문은 어느 공동체나 개인의 신앙을 표현한 신앙의 책이라는 사실이다. 성서본문은 성서본문 속의 어떤 사건이나 이적기사들은 우리의 이성이나 과학적 논리나 역사적 자료에서 확증을 얻을 수 없다고 해서 쉽게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다고 성서의 어느 부분을 제외시키거나 묵과해서는 안된다. 성서는 그의 역사성 만큼이나 중요한 신학적 목적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서본문에서 객관적이고 역사적 사실 추구 못지않게 그 공동체나 저자가 전해준 본문(Text)에 신학적 질문을 가해야 하는 것이다. 본문의 기원, 내용, 형태 등이 역사적 연구에 의해 밝혀진다면 그 본문의 신학적 입장, 의미, 기능 등은 신학적 질문에 의해 밝혀질 수 있는 것이다. 어느 특정한 역사 속에서 하나님, 예수를 만나고 체험한 사람끼리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고,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그 역사적 사건들을 구점으로 다음 세대에 전하게 되다가 어느 세대에서는 오는 세대를 위해서 선조들이 혹은, 자신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체험했으며, 어떻게 그들의 삶이 철저히 바뀌었는가를 밝혀, 다음 세대 또한 그들의 경험을 재경험함으로써 자신들과 같은 신앙을 고백케 하기 위해 책으로 남긴 것이다. "이 책을 쓴 목적은 다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어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요한20:31)" 우리가 어느 특정한 계시의 체험을 인식하게 되는 것은 그 계시의 역사성이나 그 사건을 체험한 사람들의 실존의 구조를 분석연구하여 알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증언을 통하여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똑같은 것을 계시하신다고 믿기 때문에 오늘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성경은 그러므로 학문의 대상이기 보다는 신앙의 책이요, 교회의 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로는 본문(Text)과 컨텍스트(Context) 문제이다. 본문은 반드시 컨텍스트와 함께 이해해야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컨텍스트는 다시 본문이 놓여 있는 문맥, 구조, 혹은 그 책 전체와 독자들의 사회, 역사적 삶의 자리로 나눠 생각해 볼 수 있다. 성서본문은 원칙적으로 서너귀절 혹은 한두귀절을 읽으라는 것이 아니라 책 전체를 통한 역사적 증언인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을 이루고 있는 직접적인 컨텍스트, 곧 역사성을 무시할 때 그 본문말씀은 공허한 것이라 되고 진부한 종교적, 도덕적 교훈집으로 퇴색하는 것이다(예, 주제설교). 엄격한 의미에서 본문의 의미는 그 본문 자체에 의해서 보다는 그 본문이 놓인 컨텍스트(문맥)에 의해 그 의미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독자들의 역사적 컨텍스트는 현시대, 현재의 역사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성서를 읽어야 지금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지금 이시대에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쉽게 말해 독자의 역사의식이라 할 수 있다. 죤 칼빈(JOHN CALVIN)이 성경과 신문을 중요시 했다는 일화를 기억하면 될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규명해줘야 한다. 성경공부는 그러므로 성서 속의 사건들이나 사람, 지명 이름들을 암기하거나 어떤 성서의 인물을 절대화해서 본받으려는 의지나 결단도 아니다. 성서 속에 표현된 사건들과 인물들의 특수한 체험이나 그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패턴화하여 어느 시대에나 적용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설명될 수 있도록 규명되어져야 한다.

넷째로 최근의 성서해석학은 제 민족 문화와 그리스도교 복음과 관계를 중요시하는 토착화의 문제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스도교 복음을 우리 문화속에 받아 들일 때 그리스도교의 문화로 아무런 비판이나 여과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받아 들임으로써 우리 문화와의 갈등과 긴장을 고조시켜왔던 것도 사실이다. 사실은 그리스도교의 틀이 되었던 유대교와 헬라. 로마 세계의 문화를 벗겨내고 우리 문화의 새로운 틀을 입혔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각성과 우리의 새로운 역사의식은 지난 1960년대부터 그리스도교 복음을 헬라. 로마 문화에서 분리시켜 한국인의 마음밭에 뿌리를 내리게 하고, 또한 우리 문화 속에 꽃을 피우게 하기 위해서도 우리 문화의 틀 속에 그리스도교 복음을 재수용 해야 한다는 토착화의 시도가 주장되어 왔던 것이다. 토착화의 당위성은 성서해석 이전에 먼저 성서에 나타난 복음의 빛을 찾아볼 수 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가 다 똑같은 은혜를 통한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녀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바울의 주장을 예의 주시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할례자들인 유다인들과 동시에 무할례의 이방인들도 모두 은혜의 믿음으로 의롭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양인이나 서양인, 남자나 여자, 인종과 지역간의 차별은 곧 하나님의 의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바울은 하나님의 의 앞에서는 민족적 혹은 사회적 배경에 근거한 어떠한 형태의 자랑이나 우월감을 가질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은혜를 따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들은 이제는 더 이상 자신들의 문화적, 인종적 차이나 특수성, 심지어는 자신들이 임의로 정한 규범이나 표준까지도 내세워 자랑할 수도 없으며, 또한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거나 배척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런 동등성은 결코 민족적, 문화적 차이나 다양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여러 문화도 똑같이 중요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결코 이방인들이라고 해서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조건으로 유다인처럼 살아야 한다거나 반대로 유다인들이 이방인들처럼 살아야 한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이것은 어떠한 민족 문화적 범주도 우리에게 특권의식을 갖게 하지 못하며, 또한 어떠한 특정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이 다른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처럼 살 필요도 없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하며, 서양문화의 토양 속에서 성장해 온 그리스도교가 동양의 한국 토양에 심겨질 때도 그리스도교 복음만으로 족하지 서양문화까지 다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특정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이 다른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처럼 살아야 한다고 뭔가를 강요하고 윽박지르는 것은 곧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의롭게 된 것을 부정하는 것이요, 또한 율법을 따라 사는 것으로 의롭게 되어 보려는 부질없는 망상일 뿐이다. 만일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된다면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자신들의 민족적, 문화적 특수성을 내세워 자랑하며 서로 갈라서게 될 것이다. 유다인들은 그들의 민족적 배경, 율법 그리고 특별한 역사를 가졌다고 해서 이방인들을 차별하거나 배척하고 반대로 이방인들 역시 유다인들이 갖고 있지 않는 다른 문화와 특별한 역사를 내세워 유다인들을 무시하거나 배척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토착화의 과제는 이제 성서해석에서도 중요시될 수밖에 없다. 신약성서와 저자들은 구약을 인용해야 할 대부분의 경우 그들의 간단히 '기록된대로' 혹은 '성서에 이르기를'로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 뿐만 아니라 독자들도 모두 성서의 절대권위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 모두는 결코 구약성서 본문 자체를 복음과 동일시 하지는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다만 복음을 새로운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상황속에 이해시키기 위한 준거나 증명으로 심지어는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이나 주장을 확실시하기 위해서 구약성서를 자유롭게 인용하기도 하고 재해석 했던 것이다. 이로써 이들은 구약성서의 컨텍스트 속으로 독자들을 끌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약의 본문들을 그들이 당면한 새로운 역사적 컨텍스트에로 이끌어 내어 새롭고 적절한 의미를 부여하려 했다. 우리는 이러한 신약성서 저자들의 구약성서 본문에 대한 태도가 지금껏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고 절대시 해왔던 성서의 권위와 그 적용문제에 무엇인가 새롭고 다른 접근 태도를 시사해 주고 있다고 믿는다.

2. 결 론

지금까지 논의했던 것들을 종합해 보면 성서의 중요한 문제는 역사성이라기 보다는 관계성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성서 안에서 말씀하셨고 활동하셨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자신을 계시하셨고, 또한 바로 그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특정 역사현장에서도 우리와 말씀하시며 활동하신다는 관계를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성서의 저자들 모두도 그들의 역사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이 관계를 증언한 것이지, 어느 세대 어느 경우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일반적인 교훈들을 남기려는 것이 아니었다. 성서 안의 여러 전승들과 이들 전승들에 대한 거듭된 해석들에도 시대를 달리하는 저자들 자신들의 사회, 역사적 정황이 반영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우리도 성서본문이 오늘 우리의 역사현장에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물을 뿐만 아니라 그 성서본문을 통해서 현재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도록 본문을 우리 자신의 역사현장으로 이끌어 낼 필요가 있다. 유다인이나 이방인, 어느 민족 누구나 그들의 역사현장에서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성서본문은 거듭거듭 새롭게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성서의 저자들이 그들의 역사현실의 경험을 반영한 여러 층의 해석들, 혹은 시대시대에 다른 계속적인 성서전승들의 구체화 내지는 역사화 작업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성서는 오래전에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관심을 갖고 있으며, 창조적인 사고와 삶을 촉구한다. 이런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초기의 전승들이 후대의 사회, 역사적 현실과 필요 때문에 재해석 되었다는 보다 발전적 성서해석학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만일 신약의 저자들이 구약의 전승들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 전승들을 해석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이제 우리는 그들의 해석들이 다시 오늘 그리고 내일을 위해 적절하도록 우리 문화 속에서 다시 해석해야 되지 않겠는가?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오늘의 교회는 여러민족과 여러 문화권의 사람들에게도 자유롭게 하나님의 활동을 계속해서 선포할 수가 있으며,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역사 현장속에서 현재, 그리고 점차 나타날 하나님의 구원 활동을 주목하여 보게 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박 익수(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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