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승리의 면류관(약1:12-18)
시험에 관련한 내용이 두 번 반복되고 있다. 그 차이는 무엇인가?
시험받는 자가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인간 내부의 근본적인 죄성과 그 결과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런 죄악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인가?
1) 욕심으로 인한 시험
시험, 시련을 이겨내는 자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 고대 세계에 면류관은 왕권을 의미하고 승리와 명예를 뜻하였다. 그러므로 시련 그 자체는 불행이 될 수 없고 오히려 영광에 이르는 길이 된다. 그러나 약1:13의 시험은 자기 내부의 욕심에서 나오는 시험이다. 이 내부의 욕심에서 나오는 죄성의 특징은 핑계이다. 아담과 하와가 각각 자기 죄에 대여 핑계를 댄 것처럼 욕심에서 비롯된 죄성은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시험을 하지도 받지도 않는다. 욕심에서 비롯된 죄의 심각성은 사망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함없이 선하시고 거룩하시다(약1:17). 시험과는 관계가 없다. 이런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인 복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2) 욕심에 대한 책임
현대 자본주의 특징 중 하나는 소비자의 구매 충동을 유발하기 위해 욕심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나은 것은 아니지만 자칫 잘못하면 잘못된 이기적 욕망에 빠지기 쉽다. 이런 욕망은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채워지지 않을 때 누군가에게 그 책임을 돌리려 한다. 이럴 때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타인을 원망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지적하기를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하는 욕심의 시험에 대한 책임은 본인에게 있다고 한다. 이런 위기에 처할 때 우리는 변함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아야 한다. 인간이 시험을 피해 살아갈 수 는 없다. 다만 자신에게 닥치는 시험을 지혜롭게 극복해야 한다. 이 지혜를 하나님께 간구하여야 한다. 그러나 더욱 두려운 것은 인간 내부에서 올라오는 욕망의 유혹이다. 물질만능 시대에 살고 있는 오늘날 많은 이들이 돈, 섹스, 명예 등의 욕망을 좇아 살아가고 있다. 이 대열에 끼어들지 않으면 소외되는 느낌마저 들게 된다. 그리고 이런 욕망이 채워지지 않을 때 부모, 국가, 하나님 등을 원망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욕심이 죄를 낳고 결국에는 죄가 장성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연구2] 믿음과 행함(1:19-2:26)
믿음과 율법(행함)의 관계는 오랫동안 교회의 논쟁거리였다. 구원론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기에 더욱 논쟁이 치열하였고 결국 종교개혁의 원인이 되었다. 그렇다면 성경이 모순된 책인가?바울과 야고보가 서로 모순된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야고보의 신학은 오히려 바울과 보완적으로 조화를 이룬다.
1. 도를 행하는 자(약1:19-27)
야고보는 율법을 지키라고 명하고 있다. 이는 루터의 이신득의 사상과 대치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조화시키고 행해야 하는가?
특히 말하고 듣는 행동을 어떻게 하며, 행함이 있는 경건이란 무엇인가?
1) 온전한 경건
이 부분은 루터가 거부한 부분 중의 한 부분이다. 루터가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부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바클레이(Barclay)는 그리스도교 안에도 윤리적인 요구가 있다고 밝힌다. 이러한 윤리적인 요구를 강조하는 야고보서를 통해 참된 자유를 발견케 한다. 종교개혁을 한 위대한 신학자의 견해라고 해서 모두 옳지만은 않다. 야고보서를 평가절하한 루터의 견해는 정당화될 수 없다. 이후의 종교개혁자들 모두 야고보서의 정경성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 부분에서 야고보는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와 성내기는 더디하라고 명한다. 이는 잠13:31에서 뿐만 아니라 동서고금의 삶의 교훈이다. 그리고 외적 경건과 더불어 내적 경건에 힘써야 한다(약1:27)
2) 경건의 삶
현대를 PR 시대라고 부른다. 자기 주장을 소리 높여 외치지 않으면 손해보는 시대며, 법정에서도 말 잘하는 변호사가 이기게 되어 있다. 그리고 종교를 장식물로 생각하는 자들과 이신득의 사상을 잘못 받아들여 죄짓는 것에 두려움이 없는 자들도 많다. 이러한 때 야고보는 현대에 사는 우리들에게 율법을 온전히 지켜 외적 경건과 내적 경건을 지키라고 명하고 있다.
2. 외모로 취하지 말라(약2:1-13)
오늘날에도 실제적으로 교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야고보는 지적하고 있다. 가난한 자와 부한 자를 교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왜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게 되는가? 이런 일은 어떻게 율법에 어긋나는가? 율법을 온전히 지킨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1) 동등한 인격
초대교회의 교인들의 대부분은 비천한 자들과 노예들이었다. 그래서 어쩌다가 부자나 고위층의 사람이 회개하고 교회에 나오게 되면 이는 귀한 전리품을 다루듯이 하여 자연적으로 교회 내에서도 신분에 따른 차별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이는 구약과 예수님의 가르침에 명백히 어긋나는 일이었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바리새인들이 흠을 잡을 수 없었던 부분은 예수님은 사람을 차별을 하지 않은데 있다.
또 예수님도 온전한 율법을 이웃 사랑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 이에 대해서는 심판이 있게 된다(약2:13). 그러므로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인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신앙인은 좇아가야 한다. 즉 온전한 율법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2) 교회 안에서의 평등
최근의 한 여론 조사에 의하면 사람들이 교회를 선택하는 가장 큰 기준은 그 교회의 구성원의 사회적 지위라 하였다. 그러므로 교회의 구성원 중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 있게 되면 이는 교회의 자랑이 되고 부흥의 원인이 된다. 즉 교회가 사회의 계층화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는 이때에 일부 교회에서 건축등의 이유로 경제력이 어려울 때일수록 어느 부자든 교회에 등록하여 헌금을 많이 내기를 목회자들은 은근히 바라고 있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우리에게 교회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3. 행함이 없는 믿음(약2:14-26)
바울이 이신득의 교리를 가르칠 때 사용한 구약의 인용(아브라함)을 야고보도 인용하면서 다른 각도에서 해석하고 있다. 야고보와 바울의 가르침이 서로 다른 것인가?
아니면 서로 조화할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 행함의 중요성
독일의 가톨릭 신학자인 프란쯔 무쓰너(Franz Musner)는 바울과 야고보가 서로 대립적인 관계에서 서로의 주장을 논박하고 있다고 보았다. 유대 정통에 있는 야고보와 헬라 정통의 문화권에 있는 바울이 서로를 공박한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주석 학자인 영국의 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두 서신은 모순된 것이 아니라 조화를 지녔다고 하였다. 즉 바울은 모세의 율법에 대한 맹목적인 순종을 공격한 것이나 야고보는 복음에 대한 순종을 강조한 것이므로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행함으로 인한 의를 부르짖었으나 야고보는 사람 앞에서 행함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약2:18). 바울과 야고보 모두 복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고 서로 접근 방법이 다를 뿐이라는 것이다. 요한 웨슬리(John Wesley)도 바울의 교리가 야고보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남용하고 있는 이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고 하였다. 즉 행함없는 믿음이란 이신득의와 모순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갖춘 자가 당연히 행해야 할 바를 행치 않을 때 그것은 믿음이 아님을 지적하고 있다.
2) 온전한 그리스도인
오늘날 믿음이 남용되고 있음을 누구나 인식한다. 죄를 지어도 '회개하면 된다'는 생각을 은혜를 남용하고 있다. 이를 두고 본 회퍼(Bon hoeffer)는 '값싼 은혜'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다워야 한다. 그리스도의 피가 싸구려로 취급당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은 복음에의 순종과 행함의 믿음이 필요하다.
야고보는 바울의 신학(이신득의)을 남용하고 있는 이들에게 행함의 중요성을 보완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 행함은 복음에 대한 순종적인 행함이다. 이신득의를 남용하여 행함이 없는 이들에게 야고보는 실천적인 신앙을 가질 것을 가르친다. 참된 믿음이란 자연적으로 행함이 뒤따르게 된다고 루터(Luther)도 언급하였다.
[연구3] 신앙의 적용(3장-5장)
행함이 있는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야고보는 가르치고 있다. 즉 입에 대하여, 세상과의 관계에 대하여, 욕심에 대하여, 산상수훈의 실천에 대하여, 잠언의 가르침에 대하여, 부에 대하여 그리고 교회 생활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다. 즉 실천적인 믿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1.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약3장)
교사는 지혜있고 총명해야 하는데 우선적인 첫째 조건으로는 입을 잘다스려야 한다. 이런 자가 행함을 갖춘 믿음 있는 자가 될 것이다. 그러면 교사는 입을 잘 다스려야 하나?
입이 가진 힘은 무엇인가? 그리고 교사의 참된 지혜와 악한 지혜는 어떻게 다른가?
1) 지혜의 열매
초대 기독교는 아직 유대교 전통에 있었고 유대교 전통에서 교사(랍비)는 매우 특권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불충직한 목자에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경고하였다(렘23:2). 예수님도 자기가 한 말에 대해 심판날에 심문을 받을 것이라 하였다(마12:36). 그러므로 지도자는 입을 조심해야 한다. 입의 능력은 배의 키와 큰 불을 일으키는 작은 불씨와 같다.한 입에서 악독과 경건이 나오지 않도록 야고보는 경고하고 있다(약3:9-12). 또 참된 지혜에는 선행, 온유, 성결, 화평, 관용, 양순 등의 선한 열매가 있으며, 화평으로 의의 열매가 있고, 편벽과 거짓이 없으나 악한 지혜에는 시기와 다툼이 있어 이를 세상적이고 마귀적이라 한다. 선한 지혜와 악한 지혜는 서로 섞이지 않기 때문에 그 입의 열매로 구별할 수 있다.
2) 경건의 지혜
거리에서 표시를 한 차가 자주 눈에 뜨인다. 그러나 교통 사고가 났을 경우 또는 교통 혼잡시에 표시차 운전차에게서 거침없이 상소리가 나오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한 입에서 경건과 악독이 동시에 나오는 경우이다. 이외에도 상소리로 남의 인격을 파괴시키는 말을 거침없이 하는 기독교인들이 있다. 이런 때 입을 조심하라고 가르치며 경건의 참된 지혜를 가질 것을 명하는 야고보의 가르침을 음미해야 할 것이다.
2. 행치 아니하는 죄(악4장)
이 부분은 산상수훈과 잠언을 읽은 듯한 느낌을 준다. 어떤 부분이 산상수훈과 잠언과 맥을 같이 하는가?
행하는 믿음이란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한다는 의미인가? 약4:5에 "성령이 시기하기까지"라는 구절은 구약에 없다.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1) 행함이 없는 믿음
다툼의 원인은 욕심이라 하였다. 즉 욕심은 세상 것과 연결되어 있다. 잘못된 기도를 하나님이 응답해 주실리 없다(약4:3). 이런 믿음이 행함이 없는 믿음이다. 예수님은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하였다(마6:24). 약4:4에 간음하는 여인들은 약4:5과 연결해 볼 때 세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는 자라는 의미이다. 성령님은 우리를 시기하기까지 사랑하신다. 이에 대한 문자적 구절이 구약에는 없지만 약4:5이 구약 전체의 내용을 함축한 구절이라 할 수 있다. 구약을 읽다 보면 우리에 대한 사랑의 질투로 가득함을 알 수 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란 마음을 슬퍼하며 남을 비판하지 않고 내일 일을 주께 맡기는 등의 가르침을 지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