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12-23 18:27
[2]목회자의 금기사항 23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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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2,292  

 

③. 상담을 여상한 목회의 일과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즉 심방이나 기도나 설교와 같은 수준의 목회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른 상담도 목회 중의 한 부분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상담은 특별한 목회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성도 개개인의 생각과 생활과 습관과 시간에 접촉되는 사안들이기 때문이다. 많은 성도들이 동시에 한 자리에서 듣는 설교와 다르며,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하나님 말씀 공부와도 다르고 기도와도 다른 성격을 가진다. 
목사의 상담은 우리 나라의 경우에 대체적으로 심방 중에 많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지만 일반적인 형태의 심방에서는 깊이 있는 상담이 이루어질 수가 없다. 따지고 보면 우리 나라 목사의 목회 생활에서는 거의 상담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④. 상담을 성도의 약점 잡기로 생각하지 말라. 
어떤 사람들은 케도릭의 고해 성사는 사제들이 성도들의 약점을 이용해 그들을 지배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도구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상담을 하다 버면 목사의 심리에 이런 이상하고 요상한 마음이 생긴다. 이런 파렴치하고 이성을 잃고 목사의 양심을 저버린 상담에 대한 목사의 간악한 심리는 하나님 앞에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11. 가정 사에 너무 깊이 개입하지 말라. 


성도들의 가정 사에 너무 깊이 개입해서는 안된다. 가끔 어떤 목사는 자기의 사명을 지나치게 오버하여 성도들의 모든 일에 관심을 가지며 지나치게 개입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그와 같은 일에 흥미를 가지며 마치 자기가 성도의 대부가 된 양 처신하려 한다. 그러나 이런 자세는 목회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성도들은 자기들의 생활이 자기들의 세계에서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다. 즉 목사나 다른 어떤 사람들이 자기들의 생활을 알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더욱 더 팽대해져서 오늘의 도시 교회 성도들은 목사가 예고 없이 자기 가정을 심방 하는 일도 싫어하고 젊은 성도들은 심지어 봄가을의 정기적인 심방도 거부한다. 뿐만 아니라, 자기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에 대한 것도 알려지기를 거부하며 그 외의 모든 가정 사에 대하여 간섭이나 충고를 받지 아니하려는 경향이 뚜렷하다. 
그들은 목사가 설교나 성경 공부 시간에 제시하는 하나님의 말씀도 자기의 입맛에 따라 취사 선택하여 받을 것과 거부할 것을 스스로 결정하려 든다. 
목사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성도들을 잘 지도하되 그들의 생각과 생활을 바르게 변화시켜야 한다는 의무감과 책임감을 가진다. 그것은 매우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은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이나 신앙을 빌미로 자기들의 사고 방식이나 생활 습관이나 가정 사에 개입하여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거부한다. 즉 자기들의 신앙을 자기 식으로 하려 하는 것이다. 여기서 목사의 영향력은 점점 약화되고 변화되지 아니하는 성도들의 모든 것에 대해 무력감을 느끼지 아니할 수 없다. 
이런 무력감과 성도와의 거리감을 해소할 수 잇는 방법은 한가지밖에 없다. 그것은 목사가 성도들이 요구하는 생각과 생활을 철저히 감수하는 것이다. 성도들이 목사에게 요구하는 것은 자기들은 정직하지 아니해도 목사는 정직할 것이며, 자기들은 세속적이 여도 목사는 거룩할 것이며, 자기들은 돈을 좋아해도 목사는 물질에 초월하고, 자기들은 좋은 집에서 잘 살기를 바랄지라도 목사는 청빈과 가난을 친구로 하여 살 것이며, 자기들은 좋지 아니한 생활 습관에 젖어 있지만 목사는 언제나 천사와 같고 그리스도와 같아야 한다고 요구한다. 자기들은 기도하지 않아도 목사는 자기들을 위해 24시간 기도를 해 주고, 자기들은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해 생존 경쟁을 하지만 목사는 죽더라도 하늘의 이슬만 먹고살기를 바란다. 
성도들의 목사에 대한 요구는 하나님이 되라는 것이다. 그들이 생각에 자기 목사가 얼마나 하나님 비슷하게 되었느냐에 따라 목사를 존경하고 목사의 말에 순종하려 든다. 그들의 요구가 충족되지 못한다면 절대 순종하지 않을 뿐 아니라 목사 내 몰기나 목사 떠나기를 시도할 것이다. 
이제 목사들은 한가지 타협할 수 없는 취사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하나님 같은 목사가 되느냐 아니면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 같이 되느냐이다. 성도들에게 카리스마적인 지배력을 가지지 못한 목사는 언제나 "목사님"이라고 불리지 못하고 "목사"라고 불리며 어떤 경우에는 "목사 세끼"라고 불리게 된다. 우리 모두 "목사님"이 되자. 아무래도 목사가 "목사 세끼"라고 불리면 안 될 것 같다. 나도 수 없이 "목사 세끼"라는 말을 듣고 살았다. 그들의 비웃음과 조롱과 분노로 가득 찬 얼굴들과 핏빛 어린 눈들과 입에서 터져 나오는 "목사 세끼"라는 말을 등뒤로 들으며 하나님과 같이 되지 못하는 내 자신의 초라한 모습에 얼마나 좌절을 많이 했는지 모른다. 30여년의 목회 생활이 거의 이 지경이 였다. 참으로 회한의 가득 차 세월이 아니 였던가? 

12. 목사의 속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같다고 착각하지 말라. 


목사가 생각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생각이다라는 사고 방식을 경계하라. 목사가 성도들이나 신앙 생활에 가장 어려운 점이 있다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생각하고 처신하기'일 것이다. 하물며 다른 사람인 성도들에 대하여 어찌 목사의 생각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런데 목사들은 기도하는 가운데 어떤 성도에 대한 특별한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그 목사의 생각이 곧 그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즉 목사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지 못하는 성도들을 대신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다는 식의 사고 방식이다. 그런 생각은 하나님의 뜻의 계시라기 보다는 평소에 그 성도에 대한 목사의 생각일 수가 많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성도들이 목사의 말에 따르지 아니하면 불순종했다고 하여 그를 멀리 대하는 경우가 생기고, 목사의 말에 따르면 순종 잘하는 자기 사람쯤으로 생각하여 가깝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도의 순종심은 목사의 지시에 응하고 안하고 에서 찾아서는 안될 것이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서 찾아야 한다. 
한가지 어처구니없는 실례를 들어보겠다. 
어느 날 친구 목사에게 어느 기도원에서 한국 교회를 위해 평생 기도만 한다는 권사가 한 사람 찾아 왔다. 그 권사는 
[목사님, 제가 기도하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목사님에 대한 계시를 해 주셔서 받아 왔습니다.] 
친구는 어안이 벙벙해서 
[아니 무슨 기도를 받아 왔는데요] 
[하나님께서 목사님을 크게 쓰시려고 40일 금식 기도를 하라고 하십니다.] 
목사가 40일 금식 기도를 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일이다. 그래서 친구는 
[그래요. 40일 금식 기도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왜 권사 님에게 말씀하셨지요. 나도 매일 기도를 하고 있으니 내게 말씀하셨으면 좋았을텐데요.] 
[글쎄요. 아마 목사님의 기도가 부족해서가 아닐까요?] 
[고맙군요. 앞으로 그런 일이 있거든, 박목사에게 직접 말씀하시라고 부탁 좀 드려 주세요] 
하나님께서 목사가 아닌 성도 본인에게 직접 무엇인가 말씀하시고 지시하시는 일이 있지 아니할까? 그것이 목사가 성도들에게 요구하는 것과 같지 아니할 때 어떤 결과가 생길 것인가? 

13. 교회를 떠난 성도들에 대한 미련을 속히 떨치라. 


목사에게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이 사랑하는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는 일일 것이다. 멀리 이사를 가서 떠나는 일도 속이 상한데 바로 옆에 있는 교회로 교회를 옮겨 다니면서 목사를 비방하고 허위 사실을 유포하여 자기의 교회 떠남을 정당화하는 성도들을 대할 때 목사는 정말 견딜 수 없는 좌절감과 비애를 함께 느끼게 되고 당장에 목회를 그만 두고 싶은 마음이 불 같이 일어난다. 그런 몹시 속 상하는 일을 당하면 목사는 자제력을 잃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떠난 그가 남긴 목사에 대한 허위 사실을 해명하고 변명하기 위해 설교 시간에 그에 대하여 공격적인 말을 하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이건 정말 목사가 스스로 함정을 파고 그 속으로 뛰어 드는 것과 같은 실수가 된다는 것을 알라. 
나는 지금까지 자연스럽지 못한 방법으로 교회를 떠난 성도들에게 왜 교회를 떠나야 하는지의 이유를 속 시원하게 들어 본 적이 없다. 그가 교회를 떠난 이유를 혼자 갖은 고민을 하며 추측을 할뿐이다. 그런데 이런 내 나름대로의 추측을 강단에서나 사석에서 말하므로 써 말한 나나 떠난 성도나, 그 말을 듣고 있는 성도들에게 덕이 되지 못한 일들을 수없이 경험했다. 
이런 어리석은 짓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실수가 된다. 

①. 그런 사람을 생각하고 설교를 하면 남은 성도들이 은혜를 받지 못하고 상처만 받는다. 들어야 할 사람은 여기 없다는 것을 알라. 

②. 떠난 성도가 목사를 비방한 사실을 모르던 사람들이 목사의 해명성 발언으로 인해 그 사실을 알게 되고 더 큰 호기심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목사에 대하여 충분히 이해하고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말을 한 사람에게도 일리가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목사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목사에 대한 순수한 생각이 오염되는 것이다. 그렇게 성도의 목사에 대한 생각을 오염시키는 것은 목사가 비방하고 떠난 성도들의 말에 대하여 해명을 했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았으면 목사를 사랑하는 성도들은 아무 것도 모른다. 혹 알더라도 목사가 해명하는 것보다 더 목사를 이해하고 동정할 것이다. 

③. 교회를 떠날 마음을 먹은 성도들은 어느 땐가 반드시 교회를 떠나게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둘 것이다. 교회를 떠난다고 발하고 다니는 성도를 목사가 설득하고 회유하여 떠나지 못하게 했다고 해도 그가 평생 교회를 잘 섬길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는 그가 교회를 떠난다는 말에 대하여 목사와 성도들이 자기를 어떻게 잘 대해 주었으며 어떤 반응을 했는가를 알기 때문에 조그마한 불만이나 어려움이 있을 때면 다시 그 일을 반복하는 경우가 많다. 성도들은 교회 생활에서 목사와 다른 성도들에게서 받은 은혜는 오래 동안 기억하지 못하고 섭섭했던 일들이나 시험을 당해 고통스러웠던 일들은 절대 잊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그렇게 잊어버릴 수 없는 일들이 세월이 감에 따라 자꾸 누적되고 폭발하는 때가 있다. 사실 교회 생활에서 받은 은혜와 격려와 위로가 훨씬 큰 것인데도 그것과 이것을 상쇄한다 던지 은혜를 더욱 강조해 기억하는 경우에는 교회를 떠나지 않지만 불평이 쌓인 경우에는 교회를 떠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은혜를 망각한 버릇을 고치지 못하는 것이다. 

④. 떠난 성도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라. 와도 못쓴다. 다시 시험에 든다. 
교회와 목사를 근심하게 하고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여기 저기 다녀 보다가 다시 교회를 찾아오는 일이 있다. 목사는 그를 반기며 기회도 그를 반겨 그의 원래의 위치를 회복시켜 주고 한 가족으로 대한다. 그러나 대게의 경우 다시 돌아 온 그는 회개하고 돌아 온 탕자가 아니라, 불평과 불만을 마음속에 지우지 못하고 물위에 겉도는 기름 꼴을 하고 교회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리고 기회가 다시 주어지면 전에 했던 그 반역적인 일을 다시 해서 교회를 어지럽히고 목회에 지장을 주는 반역을 한다. 이런 대체적인 경향을 간파하고 있는 목회에 노련한 목사는 그런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⑤. 자기가 섬기던 교회를 떠난 성도들을 자기 교회 교인을 만들어 사역하게 한 아주 훌륭한 목사님이 계셨다. 그 분은 이미 작고하신 분인데 한남 동의 산 위에 있는 모 교회를 담임하셨다. 원래 그 목사님은 대구 지방에서 목회를 하셨지만 70년대에 서울로 올라 오셔서 그 때 당시에는 아주 약한 작은 교회인 그 교회를 담당하셨다. 
그런데 그 목사님에게는 아주 특별한 달란트가 있었다. 서울 시내에 있는 교회에서 무슨 무슨 일로 목사와 교회를 버리고 떠나 방황하는 장로들이나 집사들을 자기 교회로 대려 와 정말 모범적인 성도들이 되게 해서 교회를 섬기게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 목사님은 그들과 함께 지금의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고 상전을 건축했으며 그 옆에 교육관까지 잘 건축해서 성경 학교를 유치하기도 하고 아주 유명한 부흥 목사를 배출하기도 했는데 그 분이 한얼 산의 이천석 목사님이셨다. 
나는 그 목사님이 어떤 달란트로 그런 버린 자들을 거두어 좋은 하나님의 일군 되게 했는지 잘 모른다. 오로지 신비하고 놀라울 뿐이다. 이는 마치 다윗이 악한 자들과 비류들을 모아 다윗 왕국을 세운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삼상30:22) 그 목사님은 성씨 임씨 셨다 

14. 스트레스 푸는 방법을 개발하라. 


"(사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요세 말로 하자면 우리 주님께서도 스트레스 때문에 세상을 떠나셨다고 해야 할 것이다. 목사의 스트레스는 아무데 서고 풀 길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 목사들이나 장로들이 만나면 많이 싸운다. 쌓인 스트레스를 풀려고 그러는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가 있다. 만날 때마다 싸울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어떤 목사들은 고스톱을 하는데 이 고스톱이라는 게 건강에도 나쁘고 또 다른 스트레스를 가져온다고 한다. 바둑을 두는 목사도 있다. 심지어 어떤 성도는 말하기를 술을 마시는 목사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목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스트레스 푸는 방법은 아마도 여행일 것이다. 목사들의 여행에는 한가지 특징이 있다. 가급적이면 부부 동반을 하지 않는다. 이것은 목사들이 가정에서도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하나의 증거가 된다. 가급적이면 목사들끼리 여행을 하려 한다. 그래야 벌거벗은 심정으로 피차의 긴장된 심정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행을 가서 하는 일들이 가관이다. 밤이 세도록 화투를 친다. 아니면 목사가 아닌 것처럼 객소리들을 지껄이면서 여행지의 이곳 저곳을 배회하면서 마치 술취한 취객의 흉내를 내 보기도 한다. 그리고 결국 가는 곳은 볼링 장에 가 내기 시합을 한다. 그리고 온천장으로 가서 발가벗고 목욕을 한다. 아침에도 하고 저녁에도 하고------ 
단독 여행을 즐기는 목사도 있다. 혼자서 하염없이, 정처 없이, 목적 없이 차를 몰아 발 가는 데로 마음가는 데로 돌아다니는 것이다. 가다가 쉬고 싶으면 아무데고 들려 먹고 쉰다. 이것도 한계가 있다. 그래서 어떤 목사는 아에 세계 여행으로 간다. 그럴 때 언제나 교회에 내 놓는 여행의 목적은 해외 집회 인도나 회의 참석이다. 
불신자들이 스트레스를 푸는 가장 손쉬운 방법 중의 하나는 노래방에 가 노래를 싫도록 부르는 것이 있는 모양이다. 술을 한잔 걸치면 거나해져서 신바람 나게 뛰고 노래를 부른다. 남녀가 어울려 부르기도 하고 혼자 부르기도 한다. 땀을 뻘뻘 흘리며 뛰고 노래를 부르고 나면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친구 목사들이나 노회 목사들과 노래방에를 가 본 일이 있다. 그런데 정말 재미가 없었다. 그것은 노래를 부를 줄 모르기 때문이다. 그 수많은 선곡들 가운데 부를 줄 아는 노래는 겨우 찬송가나, 이런 자리에서 분위기에 영 어울리지도 않는 산타루치아 같은 것들이다. 
그런데 나는 내 나름대로 스트레스라는 것을 푸는 방법을 개발했다. 그것은 글을 쓰는 일이다. 감정이 격해졌을 때 나를 격동시킨 그 엄청난 흥분을 있는 그대로 컴퓨터의 아래 아 한글에 마구 기록을 했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의 욕도 쓴다. 하나님께 말씀 드릴 수도 없고 목사의 체신 때문에 사람들에게 말하기도 어려운 일들도 14인치 컴퓨터의 모니터에서는 모두 표현할 수 있다. 그러면 화가 풀리기도 하고 나중에 써진 글들을 통해 내 자신의 잘못을 발견할 수도 있다. 나는 내가 터득한 방법이 대단히 좋다고 생각을 한다.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내 자신의 그 때 그 감정이나 스트레스를 받게 한 일들과 사건들도 다시 돌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목사는 자기 스트레스는 스스로 푸는 방법을 터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도와 함께 어울린 스트레스 푸는 방법은 절대 금물이다. 
어떤 목사는 성도와 함께 여행을 하기도 하고 목욕을 하기도 했다. 바둑도 함께 두고 고스톱도 함께 하는 목사가 있다. 인간적으로 가까워 질 수 있고 친구가 되어 속마음을 털어놓고 동무 삼아 함께 세상살이 동반자가 될까 싶어서다. 그러나 이런 목사의 생각은 정말 큰 착각이다. 전에도 말했듯이 목사와 성도는 친구가 될 수 없으며 인생의 동반자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종으로 만난 것일 뿐이다. 이런 목사의 하나님의 종 의식의 결여로 말미암아 결국 목사도 시험을 당하고 그 성도도 시험을 당한다. 
그런데 이 일에 대하여 나는 항상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을 가진다. 목사가 목사이니 만큼 목사가 받는 스트레스를 기도하고 찬송하며 예배를 드려 풀어야 하는데 나는 아직도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속물인 모양이다. 이런 신령한 방법으로 스트레스가 풀리기는 한다. 그런데도 가끔 여행을 가고 싶기도 하고 극장에 가서 신나게 두드려 부수는 영화를 보면서 쾌감을 느끼기도 하며 객쩍은 이야기들을 써서 많은 사람들이 보아주기를 바라기도 한다. 아무래도 계속 성화되어야 할 죄인을 벗지 못한 모양이다. 
하여튼 목사는 어떤 스트레스든 신속히 푸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죄가 아닌 다음에야 하나님께서 과히 나무라시지는 않을 것이다. 

15. 성도나 부 교역자에게 폐를 끼치거나 무료 봉사를 시키지 말라. 


"(딤전5:18)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고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목사는 가급적이면 누구에게 도움을 받지 않고 사는 것이 좋다. 그것은 목사의 직책이 남에게 도움을 받기보다는 도와주는 직분이기 때문이다. 교회 무료 봉사를 강요하거나 유도해서는 안된다. 
나는 컴퓨터를 오랫동안 가지고 있지만 컴퓨터의 기계적 내용은 잘 모른다. 그런데 우리 전도사 가운데 한 사람이 상당히 컴퓨터를 잘 다루는 사람이 였다. 그래서 자연히 그에게 교회나 내 소유의 컴퓨터를 만지게 했고 나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런데 그는 내 컴퓨터를 손보아 주면서 나와 아주 각별한 친구가 된 양 착각을 하기 시작을 했다. 이 일로 그는 목사에 대한 어떤 존경심을 잃어 버렸으며 내가 컴퓨터를 잘 모르는 것이 목회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것으로 확대 해석이 되어 교회의 모든 일을 자기와 의논해야 되는 것으로 착각하게 되었다. 그는 이런 착각 속에서 내가 하고자 하는 교회 사역에 대하여 성도들을 상대로 비판하는 일이 있었으며 나중에는 자기 의견을 수렴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노골적인 반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리고 자기가 무능해서 성장하지 못하는 학생 부에 대한 책임도 교회의 책임으로 돌려 원망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결국 나에 대한 책임 전가이며 원망이 였던 것이다. 결국 나는 그를 교회에서 내 보낼 수밖에 없었고 그런데 인해 나도 상처를 받고 그도 상처를 받아야 했다. 
이런 일도 있다. 여름 수련회를 위해 학생들을 수송해야 하는데 차가 없어 성도의 차를 빌렸다. 차를 빌려 학생들을 수송해 준 집사는 기꺼이 그 일을 잘 감당했지만 이 일로 인해 그는 자기가 학생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데 대단히 큰 일을 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즉 그가 학생들이나 성도들에게 어떤 특별한 일을 했음으로 그만한 대우와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일이 잇고 난 후부터 제직회의 발언권이 강해지고 결국 걷잡을 수 없는 지경까지 가 교회에 시험을 주는 사람이 되었다. 물른 거르지 않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목회를 하다 보면 이런 사소한 일로 인해 자기의 섬김을 과대 평가해서 교회에 큰 누를 끼치고 목회에 큰 지장을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 것이다. 
거의 모든 친구 목사들은 교회 차를 운행하는 집사들이나 성도들에 의해 피해를 당했다고 말한다. 그들은 처음에 기꺼이 봉사하겠다고 나서지만 어찌된 일인지 한결같이 그 봉사의 결과가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한다. 
우리 교회에서도 주일마다 교회 차를 운행하는 집사들이 여러 명 있었는데 한결같이 그 결과가 좋지 아니했다. 한 사람은 나를 이단이라고 욕하며 교회를 떠났고, 한 사람은 나를 쫓아내기 위한 주동자로 변신했으며, 한 사람은 다른 차 운전하는 집사와 크게 싸워 교회를 상처 냈다. 
이와 같은 현상이 생기는 것은 그들의 교회 섬김의 동기가 순수하지 못한 때문이다. 자기들의 봉사가 교회에 대단한 유익을 준다고 생각하고 그에 따른 대접이나 인사를 기대하고 그 기대가 목사에게 집중되는 것이다. 그런데 목사가 그들의 섬김에 대하여 과대 칭찬을 할 수 없는지라 그저 고맙다는 인사 정도로 끝이 나는데 이에 대한 반감이 점진적으로 누적되어 터부니 없는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비단 차 운행뿐이 아니다. 목사에 대한 개인적인 어떤 봉사나 섬김, 또는 교회의 섬김에 대해 대체적으로 이런 현상이 벌어진다. 
그러므로 차를 운행할 경우에 그에 따른 적절한 금전적 보상을 하는 것이 좋다. 한 때 나는 교회 차를 주일만 와서 운전해 주는 대리 운전을 시킨 일이 있었다. 그 사람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이 였는데 주일이 되면 아주 정확한 시간에 와서 대기하고 있다가 정확하고 친절하게 성도들을 수송했으며 나에 대해서도 각별한 예우를 해 주었다. 그것은 그에게 수고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사가 차를 무료 봉사로 운행하면 목사가 상당히 그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사태가 생긴다. 아무래도 세상에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구속력은 하나님을 사랑하여 죽도록 충성하는 것보다도 얼마의 수고 비를 지불하는 것이 더 힘이 있는 것 같다. 
목사들은 성도들에게 이름도 없고 빛도 없고, 값도 없는 봉사를 강요하거나 유도하지 말라. 처음에는 잘할지 모르나 사람이 언제나 한결같지 않는지라 결국 그 무료 봉사로 인해 시험에 들어 사람을 잃게 되고 말 것이다. 정말 무료 봉사를 시킨 양이면 한 달이던 두 달이던 시한을 두고 적당한 때에 명예롭게 다른 사람에게 그 일을 넘길 수 있도록 장치를 해 놓아야 한다. 그리고 수고에 대한 영광된 명예를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주님의 교회를 위해 봉사를 하고 그런 영광을 받아도 되는 것인가? 과도한 칭찬을 사람을 교만하게 하여 못 쓸 사람이 되게 한다. 그래서 아에 무료 봉사를 유료 봉사로 바꾸는 것이 나중에 뒷 탈을 없에는 좋은 방법이다. 
교회 차 운행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차를 타고 다니는 성도들의 입에서 온갖 이야기들이 나오며 교회의 파고를 조절하는 장치가 차를 운전하는 집사의 입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주차장 관리, 교회 청소, 성도들과 교역자들의 식사 대접하기등 모든 봉사에 지혜롭고 슬기로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일을 오래 시켜서는 안된다. 

16. 성도들의 이윤 추구를 존경하라. 


"(롬13:7)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목사들은 성도들을 거의 천사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성도들도 목사를 그렇게 생각하며 존경한다는 큰 착각을 한다. 그리고 성도들을 목사인 자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한다고 스스로 단정한다. 그래서 성도들 가운데 상인이 있으면 몇 가지 생각들이 종합되어 성도의 가게에 가 물건을 사고자 한다. 또 우리 교회를 나오지 않더라도 소개를 받아 신앙 생활을 아주 잘한다는 성도의 가게에 가 필요한 것을 구입하는 경우가 있다. 
우선 상인인 성도는 적어도 목사를 속이지 않을 것이며, 좋은 물건을 다른 곳보다 더 값싸게 팔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리고 물건을 속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왕이면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을 돕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목사의 생각에 맞도록 잘해 주는 성도들이 많이 있을 것이며 어떤 경우에는 정말 기대한 것보다 더 목사를 사랑하고 존경해서 잘 해 주는 성도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고 대 다수의 성도들은 성도이지만 상인이기 때문에 그런지 목사인 나의 생각에 훨씬 못 미치는 상술을 목사에게도 적용했다. 
에어컨을 한 대 사서 방에 설치를 했다. 친구 목사가 자기 교회 성도의 대리점을 소개해 주어 두 말하지 않고 그 집사가 소개하는 물건은 달라는 값을 다 주고 샀다. 아주 잘 해 주는 것이라고 해서 매우 만족하게 생각을 하고 구입을 했다. 그 집사는 목사님 댁이기 때문에 설치비는 받지 않을 것이고 하면서 친절하게 설치도 해 주었다. 나는 그 집사를 친구에게 치하하고 그런 좋은 집사를 소개해 준 것에 감사해서 점심을 샀다. 그런데 우연히 용산에 가 같은 물건을 알아보았더니 적어도 20만원은 더 비싸게 구입했다는 것을 알았고 에어컨을 구입할 때에는 으레 설치해 준다는 사실도 알았다. 정말 입이 씁씁했다. 
친구들과 아울러 남쪽으로 여행을 했다. 고추장이 유명하다는 순창에 들려 친구가 잘 아는 집사인 사람에게 고추장을 샀다. 아주 싼값으로 가장 좋은 것을 구입했다고 모두 좋아했다. 그런데 서울의 이 농수산물 센터에서 똑같은 고추장이 우리가 산값보다 적어도 몇천원 이상 싼값으로 팔리고 있음을 알고 농수산물 센터에 가 고추장 값을 본 것을 후회했다. 
이런 경험들은 목사들에게 얼마든지 있는 일이다. 상인은 어디까지나 상인이다. 그 분들은 이익을 남기는 것을 원칙으로 세상을 산다. 그런데 목사들은 자기가 목사이기 때문에 상인인 성도들이 자기에게는 이익을 붙이지 않을 것이라고 미리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이익을 붙였다는 것을 알면 서운해하고 그 성도를 나쁘게 생각한다. 그것은 목사의 잘못된 생각이다. 성도의 장사에 이익을 남겨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그런 상도의를 존경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목사가 성도들의 가게를 이용할 때는 물건을 선택할 때 그들이 추천하는 것을 사게 되고 물건값을 흥정할 수 없어 부르는 대로 지불할 수밖에 없고 나중에 바가지를 썼는지 안 썼는지를 저울질하게 된다. 다른 목사님들은 어쩐지 몰라도 나는 그런 일을 몇 번 당하고 나서 그런 못된 버릇이 생겨 버렸다. 그래서 나나 아내는 목사들이 소개해 주는 성도의 가게를 찾지 않는다. 모르는 상인을 찾아가서 물건값도 흥정하고 흥정해 놓고도 이리 저리 다니면서 더 싼 물건을 찾아다니면서 가장 좋은 물건을 가장 싼값으로 구입한다. 그랬더니 아주 마음이 편안했다. 시험받을 일이 없는 것이다. 
목사가 아직 덜되어 그렇다. 정말 주님의 마음을 가진 목사라면 성도가 운영하는 가게에 가 그가 그 물건을 팔아 가장 적절한 이윤을 가지도록 도와주면서 거래를 하고 그가 적절한 이윤을 남긴 것에 대하여 그와 같은 마음으로 기뻐해야 할 것이다. 그런 거룩한 마음이 생기지 않거든 성도인지 아닌지를 모르는 사람의 가게에 가 물건을 사라는 말이다. 그래야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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