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10-10 20:41
가나안 정착과 사사시대에서 예루살렘 멸망 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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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9,244  

가나안 정착과 사사시대(BC 1250-1020)


1)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과 정착(BC 1200)


모세의 후계자로 지정된 눈의 아들 여호수아(신명 31, 1-8)가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정복을 나섰다. 그리하여 요르단 강을 건너 여리고를 점령하고 가나안의 여러 땅들을 차지했다(수1-12장). 그리고 각 지파별로 땅을 나누어 각 가문별로 유산을 차지하였다(수13-19장).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도록 다짐하는 뜻으로 열두 부족의 대표들이 세겜에 모여 큰돌을 세우고 야훼의 성소 앞에서 맹세하였다. 여호수아는 110세에 죽었으며, 그의 생전에 이스라엘 백성은 줄곧 야훼를 섬겼다(수24:29-31).

 2) 사사 시대

그러나 여호수아가 죽고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살던 이스라엘 백성은 그곳의 발달된 농경문화와 그 주민들이 섬기던 바알(Baal)신과 토속신, 풍요의 신(아스다롯신, 아세라신 등)들의 유혹에 끊임없는 신앙적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이 야훼 신앙을 버리고 가나안의 바알신과 토속 신앙에 빠지거나 외세의 위협에 직면했을 때, 사사들이 나타나 이스라엘을 구하고 야훼 신앙으로 되돌려 놓곤 하였다.

사사들(BC 1200-1020)은 이스라엘이 아직 나라의 형태를 갖추지 않은 과도기에 일정한 기간 동안만 통치했던 정치적 민족적 지도자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사 형태의 통치 시기는 200년 간 지속되었다. 오드니엘, 에훗, 삼갈, 드보라, 기드온, 돌라, 입다, 입산, 엘론, 야이르, 압돈, 삼손 등 12명의 사사가 있었다.

이스라엘의 왕정 시대 (BC 1020-586)

1.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 사울(BC 1020-1000)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된 사울은 주변의 이민족들을 무찌르고 왕위를 굳혔다. 그러나 전리품을 처리하는데 있어서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아 하나님의 눈 밖에 났으며, 하느님의 영이 그에게서 떠나자 사울은 길보아 전투에서 죽는다(삼상15:1-35, 31:1-13).

2. 다윗 왕(BC 1000-961)

다윗은 사무엘 예언자로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하나님의 영을 받아 날로 지혜와 용기가 커졌다. 청년 다윗은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돌팔매질로 쳐부수고 이스라엘 사람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그래서 사울은 다윗의 인기를 시기하여 그를 죽이려고 했으며 다윗은 망명 생활을 했으나 그는 점차적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사울이 죽은 뒤 유다의 왕이 되었다.

다윗은 기원전 천 년경 여부스인 들의 성읍인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그곳에 도읍을 정하고 주변의 이방 민족들을 제압하여 이스라엘 왕국을 강력하게 발전시켰다.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나단을 시켜 다윗에게 왕권을 든든하게 해주시겠다는 말씀을 전했다(삼하7:11-13:16). 다윗은 계약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고(삼하6:1-23)남쪽과 북쪽의 이스라엘 부족들을 통일시켜 하나의 강력한 왕국을 형성했다.

그러나 다윗은 어느 날 밧세바 라는 여인이 목욕하는 모습을 보고 반하여 그녀를 궁전으로 데려와 잠자리를 같이 했다. 그리고 그의 남편 우리야를 전쟁이 치열한 곳으로 보내어 죽게 하였다(삼하11:1-27).이 일이 예언자 나단에게 알려지자 나단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윗을 꾸짖었다. 다윗은 참회하여 용서를 받았으나, 이 죄로 인해 다윗의 집안에는 칼부림이 가실 날이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 죄로 태어난 아이는 중병에 걸려 죽게 되고 그 아들 대 이후에 왕국이 분열되리라는 예언을 받는다. 나단 예언자의 말대로 밧세바와의 첫 아들은 중병에 걸려 죽었으며(삼하12:16-23), 다윗 집안 당대에도 왕자들 간에 칼부림(압살롬의 반란, 아도니야의 음모 등)이 그치질 않았다.

3. 솔로몬 왕(BC 961-922)

다윗은 다시 바쎄바와 잠자리를 같이하여 둘째 아들을 얻었는데 그가 다윗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왕국을 굳건히 하고 발전시킨 솔로몬 왕이다(왕상 1:28-40).

솔로몬은 지혜로운 판단과 슬기로 명성이 세상에 알려졌으며(왕상 5:9-14),하나님께 성전을 지어 바쳤고(왕상 5: 15-6, 38), 그의 재산과 위용은 대단하였다. 하지만 솔로몬은 외국 여인들을 후궁으로 두고 그들의 신당을 지었다. 그리고 시돈의 여신 아스도렛과 모압의 신 그노스, 암몬의 신 밀 곰에게 분향 제물을 올려 하나님의 분노를 샀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솔로몬 이후 왕국을 둘로 쪼개어 그중 한 지파를 통해 다윗 왕가가 예루살렘에서 다스리게 하였다(왕상 11:11-13). 솔로몬은 예루살렘에서 40년 간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4. 왕국의 분열(BC 922)과 남북 왕국 시대(BC 922-586)

 솔로몬이 죽자 이스라엘 왕국은 남북으로 분열하게 된다(BC 922).

  1) 북이스라엘 왕국(BC 922-722)

북 왕국은 솔로몬의 신하였던 에브라임 지파 출신의 여로보암이 열 지파를 규합하고 세켐을 임시 수도로 하여 북이스라엘 왕국을 세웠다. 북이스라엘의 수도는 세켐, 브누엘, 디르사, 사마리아의 순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종교적으로도 분리하여 단(Dan)과 베델(Bethel)에 성소를 세워서 예루살렘에 가지 않고 예배를 보게 하였다.

 

북이스라엘은 그 후 200년 간 지속되다가 주변 강대국으로 부상한 앗시리아의 침공을 받아 멸망하게 되었다(BC 722). 호세아 왕 때 앗시리아에 매년 바치던 조공을 바치지 않고 이집트 왕에게 사절단을 보냈다. 이렇게 호세아가 반역하는 것을 보고 앗시리아 왕은 사마리아를 포위하고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다(BC 722, 왕상17:1-23).

 

북이스라엘에서 예언자로 활동한 이는 엘리야와 그의 제자 엘리사가 유명하다. 엘리야는 아합 왕 때 활동하였으며, 엘리사는 여호람 왕 때 활약하였다.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가 함락 당하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앗시리아 사람과 결혼하였는데, 그래서 생긴 후손은 사마리아인이라고 불렸다(왕상17:24-41). 이들은 야훼 하느님을 공경하면서도 각자 자기 선조들의 풍습을 지키는 혼합 종교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2) 남유다 왕국(BC 922-586)

왕국 분열 후 남유다 왕국은 솔로몬의 뒤를 이어 르호보암이 왕위에 올라 다윗 가문의 유다 왕국의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리고 북이스라엘보다 136년이나 오래 지속되어 그 후 총 336년 동안 왕권이 계승되었다. 요시아 왕 때 야훼의 법전이 성전에서 발견되었는데, 그것을 계기로 종교 개혁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바알, 아세라, 하늘의 별신 숭배를 척결하고 그 사제들을 추방시켰으며, 또한 아스다롯 여신상, 모압인의 그모스 신상, 암몸인의 밀곰 신상을 철거하였다.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키야 때 신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이 침공하여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왕족과 귀족, 사제들이 처참하게 바빌론으로 유배되었고 그리하여 남유다 왕국도 멸망하고 말았다(BC 586).

남유다 왕국에서 활약한 예언자는 히스키야 왕 때의 예레미야, 이사야 등이 있다.

이민족 지배하의 이스라엘 (BC 586-AD 70)

1. 바빌론의 유배 생활(BC 586-538)

 신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 왕의 침공으로 남유다왕국이 멸망하고(BC 586),유다인들은 정복자의 땅 바빌론에서 60년 간의 유배 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바빌론 유배 생활을 통해 그들이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이러한 재앙이 초래되었음을 뼈져리게 반성하였다.

2. 페르시아 치하의 이스라엘(BC 538-333): 유다이즘의 형성

그 후 새롭게 중동의 강국으로 등장한 페르시아가 바빌로니아를 무너뜨렸다.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중동의 패권을 잡자 이스라엘은 페르시아 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고레스 왕은 종교 정책에 개방적이었으며 기원전 538년에 이스라엘 포로들을 고국으로 돌아가도록 칙령을 내렸다(스1:1-11).그리고 그곳에서 성전을 짓고 살도록 허락했다. 그러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스룹바벨 하에 기원전 520년부터 515년에 걸쳐 예루살렘 성전을 완공하였다.

 

그러나 율법을 준수하는 일에 게을러지고 신앙의 유혹에 자주 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유다 총독으로 있던 느헤미아는 기원전 430년경 유다인 들에게 율법과 안식일을 지키도록 명하고 외국인과의 결혼을 금했다(느13:1-22).그리고 선비이며 사제인 에스라도 사람들 앞에서 모세의 법전을 읽어주고 해설해 주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율법을 공부하도록 깨우쳐 주었다(느8:1-18).

 

이때부터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을 연구하고 준수하는데 큰 의의를 두었으며, 모세 오경도 이때 최종적으로 집대성되었다(기원전 400년경). 국가와 통치 제도도 없이 페르시아 치하에 있었으면서도 유다인 들이 존속될 수 있었던 것은 율법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로 철저하게 결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자 유다이즘이 형성되고, 예언자들의 역할은 감소하고 차츰 사라지게 되었다.

 

3. 그리스 치하의 이스라엘(BC 333-63)

이스라엘은 기원전 333년 새로이 강대국으로 부상한 그리스 치하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BC 356-323)은 대제국을 건설하고 곳곳에 그리스 문화와 언어를 유포시켜 헬레니즘 문화를 형성시켰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젊은 나이에 열병으로 죽게 되자 왕국은 셋으로 나뉘었다. 그리스 지역은 안티오쿠스 왕조,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 왕조, 시리아는 셀쥬쿠스 왕조가 들어섰다. 이스라엘 지역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 왕조에 속하여 100여 년 동안 그 지배를 받았다. '프톨레미오 왕조는 민족의 다양성을 인정하였기에 유다인들도 이 기간 동안에는 독자적으로 종교 생활의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었다.

그 후 기원전 200년경 파네아 전투에서 안티오쿠스 3세가 프톨레메오를 무너뜨렸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199년 이후 시리아의 셀쥬쿠스 왕조의 통치를 받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차츰 종교적 박해를 받게 되었다. 특히 기원전 175년에 왕위에 오른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기원전 167년 이집트와 전쟁을 벌여 프톨레메오를 축출하고 돌아오는 길에 성전에서 금은으로 된 성물들을 약탈했다. 그리고 유다교 를 박해하며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게 하고 이교 신전을 짓게 하였으며 유다인들이 싫어하는 돼지고기를 먹게 하였다(막1:16-64). 이에 유다인들은 분개하여 저항 운동을 일으켰다.

마타디아가 죽자 마카베오라고 불리는 그의 아들 유다가 그의 아버지를 계승하여 여러 이스라엘 사람과 합세하여 그리스와 투쟁하였다. 마카베오 형제들의 독립 전쟁은 차츰 승리를 거듭하여 독자적으로 독립 체제를 유지하면서 마카비오 가문을 중심으로 한 하스몬 왕조(BC 152-63)를 수립하였다. 그리스 치하 유다인의 독립 왕조인 하스몬 왕조는 기원전 63년 로마에 의해 패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런데 하스모네 왕가는 너무 욕심을 부려 정권과 대제관직을 다 차지하여 독립 운동에 가담했던 경건자(하시딤)가 바리사이파와 에세네파로 분리하게 된다.

 

4. 로마 제국 치하의 이스라엘(BC 63-AD 132)

이스라엘은 하스모네 왕가의 지도하에 나름대로 독립된 생활을 했으나 기원전 63년 로마 폼페이우스 장군에 의해 점령당하고 로마의 식민지가 된다. 로마의 식민 정책은 그 지역의 유력한 사람을 내세워 통치하게 했는데, 팔레스타인 통치는 유다인이 아닌 이두매인 안티파터를 임명하였다. 예수께서 태어나신 때에는 이두매 출신의 헤롯대왕(BC43-4)이 다스리던 때였다.

 

헤롯대왕이 죽자 팔레스타인은 그의 세 아들에 의해 세 지역으로 분할 통치 되었다. 유다와 사마리아 지역은 헤로데 아켈라우스(Archelaos, BC 4 - AD 6)에게,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은 헤롯 안티파스(Antipas, BC 4-AD 39)에게, 그리고 팔레스타인 북부 지역은 헤로데 필립(Philippos, BC 4 - AD 34)에게 할당되었다. 헤롯 아켈라우스가 유다와 사마리아를 다스리다가 서기 6년에 죽자 그 지역은 로마에서 파견한 총독이 가이사랴에 머물며 직접 통치하게 되었다.

유다인들은 로마 제국의 식민 통치에 끊임없이 대항하였으며 특히 열심당원(셀롯당)들은 폭력으로 저항하였다. 유다인들은 조직적으로 규합하여 제1차 독립 운동(66-73)을 전개했으나 예루살렘 성전이 무참히 파괴되었고, 70년에는 제사도 폐지되고 잔인하게 진압된다. 그 후 유다인들은 서기 132-135년에 제2차 독립 전쟁을 일으켰으나 이때에도 처참하게 진압되었다.

 

그리하여 로마는 유다인 분산 정책을 써서 유다인들을 세계 곳곳으로 흩어지게 하였다.

유다인들은 나라 없이 1800년 간을 유랑 민족으로 떠돌면서 수많은 박해를 받았으며 1948년 독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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