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9-02-05 07:34
[1]로마서 14:17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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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3,536  

로마서 14:17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성격

 

사람들은 매우 행복한 순간을 맞을 때 흔히 “여기가 천국이네”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이것은 천국을 가장 행복한 곳으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바울 사도는 행복과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연관시켜 생각할까? 
 
하나님의 나라 또는 천국은 공관복음서에서 흔하게 등장하는 술어인 반면, 바울서신에서 덜 빈번하게 나타난다. 바울서신에서 하나님 나라는 주로 종말론적인 문맥에서나 윤리적인 문맥에서 나타나지만, 행복이란 술어는 바울서신에서 등장하지 않는 통속적인 개념이다. 

따라서 두 개념을 직접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행복을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따라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간접적이나마 행복 개념과 비교할 수도 있다. 본 논문의 목적은 로마서 14:17에 초점을 두고 행복의 나라로서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밝히는 데 있다. 

행복은 어떤 개념인가?

네이버 국어사전이나 표준국어대사전은 행복을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로 정의한다. 그것을 좀 달리 표현한다면 행복이란 생활 속에서 자신을 복되다고 느끼고 만족과 기쁨을 누리는 상태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면 사람들은 언제 자신을 복되다고 느끼고 만족과 기쁨을 경험하는가? 일반적으로 만족과 기쁨은 주로 외적인 환경이나 조건에 많이 의존한다. 건강, 외모, 의식주, 재산, 승진, 사회적 지위, 결혼 등과 같이 자신에게 만족스러운 환경이나 조건이 조성되었을 때 사람들은 흔히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행복의 조건으로 거론되는 이런 환경이나 조건들은 언제나 변할 수 있고 쉽사리 사라지는 속성을 지닌다. 행복도 일종의 인간 감정이기 때문에 행복을 위한 동일한 조건이 지속되는데도 사람들은 더 이상 만족과 기쁨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인간의 쾌감은 흔히 더 큰 쾌감을 요구하는 속성이 있어서 쾌감이 일정 기간 지속되면 그것은 더 이상 쾌감이 되지 못하곤 한다. 과장으로 승진한 사람은 한동안 기쁘겠지만, 그는 얼마 안있어 더 큰 지위를 구하게 되거나 동료가 더 높은 자리로 승진하면 기존의 과장 지위는 불만족과 불행으로 여겨지고 만다. 신혼부부가 15평 아파트를 장만할 때 뛸듯이 흡족하고 기쁘겠지만 그들은 조만간 더 넓은 평수를 원하게 되고 자신이 사는 아파트를 비좁고 답답하다고 느끼게 된다. 어쨌든 행복도 기쁨의 감정으로서 오래 지속되지 않고 더 강한 자극이 주어지지 않으면 이전의 행복감은 곧바로 권태로 바뀌기 십상이다.

때문에 고등종교일수록 행복과 만족의 기준을 외적인 조건에 두지 않고 마음의 내적 상태에 두려고 한다. 말하자면 진정한 행복은 집의 평수를 넓히는데 있다기보다 마음의 평수를 넓히는 데 있다. 외적인 환경이나 조건에 휘둘리지 않고 어떤 환경에서도 자신의 마음의 만족과 평온을 유지하는 데 초점을 두는 것, 그것이 고등종교가 보통 지향하는 행복의 목표이다.

성경이 말하는 참된 행복은 본질적으로 신중심적 개념이다. 불교는 초월적 존재로서 신의 도움이나 은혜를 바라보는 종교가 아니라 철저하게 인간중심적 종교이다. 불교의 경전인 ‘행선’(行善)에서 행복은 본래 삼복(三福)의 하나로서 “대승의 행법을 지키며, 도심을 일으키어 인과의 도리를 믿으며, 대승 경전을 읽어서 이해하고, 다시 남에게도 권함으로써 얻는 복을 이른다”(행선03[2])고 정의되었다. 말하자면 인간이 스스로 도를 닦아 마음을 다스릴 때 얻어지는 것이 행복인 셈이다. 
 
이와 달리 성경은 진정한 행복이 타락한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고 인간 창조자요, 구속자인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의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참되게 행복할 수 없고 죄의 노예가 되어 슬픔과 비애와 자기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행복은 창조자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고 그의 의로운 통치를 받아들이는 데서 발견되는 것이다.

행복의 조건으로서 하나님의 다스림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행복이란 술어는 바울서신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행복을 구성하는 만족과 기쁨 등의 요소들은 바울서신 이곳저곳에서 자주 발견된다. 표준국어대사전이 정의한 대로, 행복이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한” 상태, 또는 달리 표현한다면 자신을 복되다고 느끼고 만족과 기쁨을 누리는 상태라고 한다면, 그러한 만족과 기쁨은 사람이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를 받아들일 때만 생겨난다는 것이 바울의 가르침이다. 사탄과 죄의 지배를 받을 때 인간이 느끼는 감정이 죄책감, 슬픔, 단절감과 고독, 절망이라고 한다면, 인간이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을 때 경험하는 것은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 5:22)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를 받은 신자의 삶을 “성령 안에서”(롬 14: 17) 또는 “은혜 아래서”(롬 6:14) 살아가는 삶과 동일시한다. 하나님은 그의 왕적통치를 오직 성령 안에서만 행사하신다. 사람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의 왕적 통치를 받을 때 바울은 비로소 그가 은혜 아래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이 통치하는 나라이며 그의 은혜가 다스리는 영역이다. 신자가 외적인 환경이나 조건에 얽매이지 않고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은총의 지배 아래 살아가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나라’란 개념은 기본적으로 영역의 개념이 아니라 통치의 개념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된 신분과 소속을 내포한 개념이다. 하나님의 백성된 신분을 얻고 그에게 속한 백성이 되어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새로운 신분과 소속을 얻은 사람은 또한 하나님의 왕적 주권 하에서 그의 백성답게 살아야 할 새로운 의무를 짊어지게 된다. 개인이든 사회이든 하나님의 왕적 지배와 통치 하에 있을 때 거기에는 이미 행복의 나라로서 천국이 임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혹자들은 천국이 사후(死後)에나 들어가는 미래의 장소로만 생각하는데, 이것은 성경의 교훈이 아니다. 성경 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말씀 또는 사역을 통해서 천국은 이미 사람들 속에 임했다고 가르친다(마 12:28). 사람들은 성령의 권능을 힘입은 예수의 기적 행위들과 가르침을 ‘보고 들을’ 때 하나님의 나라 또는 천국이 그들 가운데 임재하고 있음을 경험했다. 그래서 예수는 천국 비유를 말씀하는 과정에서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16)고 말씀하셨다. 천국은 예수의 말씀을 들을 줄 아는 믿음의 귀를 통해,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 행위들을 볼 줄 아는 믿음의 눈을 통해 경험되는 나라이다. 천국은 예수의 인격과 행위를 통해서 이미 세상에 임했지만, 아직 그것은 ‘비밀’(祕密)에 쌓인 나라이다(마 13:11). 
 
그것은 육신의 눈과 귀를 통해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나라이기 때문에, 신령한 눈과 귀를 가져야만 비밀에 쌓인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할 수 있다. 신자들의 믿음은 ‘천국의 비밀’을 들여다 볼 수 있는 특별한 인식의 창문이다. 믿음의 눈을 뜨고 믿음의 귀를 열지 않으면 천국은 결코 다가갈 수 없는 초월적 실재이다.

하나님의 왕적 통치가 사람들 속에 임할 때 흔히 동반되는 감정은 기쁨과 감격이다. 예수께서는 천국이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마 13:44)와 같다고 비유하셨다. 사람들은 그 속에 무엇이 감추어 있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냥 늘상 밟고 지나다니는 밭에 불과했지만, 그 속에 엄청난 보화가 숨겨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사람은 더 이상 예전의 사람일 수가 없었다. 그는 그것을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는” 행위를 하였다. 천국을 믿음의 눈으로 발견한 사람은 자신의 전 재산을 다 팔만큼 큰 감격과 기쁨을 갖게 되지 않았는가? 천국은 그만큼 자신의 전 생애를 걸만큼 최고의 궁극적 가치이다.

기쁨과 감격의 정서는 예수와 바리새인들 간에 벌어진 금식에 관한 논쟁 가운데서도 잘 나타난다(막 2:18-22).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정기적으로 실천하는 종교심 깊은 사람들이었지만, 예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는가”(18절)라고 질문하였을 때, 예수는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19절)고 답변하셨다. 여기서 신랑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지칭하는 것이 분명하다면, 예수는 자신의 시대를 혼인 잔치의 때로 이해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 말씀은 본래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식탁교제를 나누는 것을 좋지 않게 생각했던 바리새인들과의 논쟁 문맥에서 등장한다(막 2:13-17).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을 예수는 ‘메시아 혼인 잔치’(messianic banquet)로 이해한 것이다. 세리와 죄인들과의 식탁교제는 흔히 예수 안에서 임한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드러내주는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어울려 먹고 마시는 것은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하나님의 가족으로 환영한다는 것을 상징한다. 공관복음서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나 용서받고 하나님의 가족이 된 죄인들이 기쁨과 감격으로 맛보거나 들어가는 나라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는 자주 잔치로 비유되곤 한다. 잔치가 주는 이미지는 기쁨과 행복, 배부름과 만족이다.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되신 예수는 이렇게 그들에게 행복의 나라로서 천국을 선사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 나라의 성격

보통 ‘하나님의 나라’라는 술어는 바울서신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다”는 표현 중에서 나타난다(고전 6:9-10; 15:50; 갈 5:21; 엡 5:5). 

 

바울의 하나님 나라 사상은 몇 가지 특징들을 지녔다.

우선 하나님 나라 사상의 기독론적 특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보통 “그리스도의 나라”(엡 5:5)이며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골 1:13)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아들 그리스도의 나라로 동일시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가 지금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 실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그의 아들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상에 대한 그의 왕적 주권을 집행하고 계신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맛볼 수도 없다. 그리스도는 그의 구속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을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게”(골 1:13) 되는데, 바울은 그것을 “속량 곧 죄 사함”을 얻는 것으로 정의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나라를 결정적으로 실현하는 중심 구원사건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올리심이다. 예수 안에서 그리고 예수를 통해 실현되는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오르실 때 최종적으로 완성된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지금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오르셔서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서 세상 만물을 다스리고 계신다(행 2:33).

둘째로, 우리는 또한 하나님 나라 사상의 성령론적 특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나라 개념은 공관복음서나 바울서신에서 성령의 사역과 자주 연관되곤 한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늘 보좌에 오르셨을 때 그는 하나님의 모든 우주권 통치권을 넘겨받으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제 그의 아들의 나라가 되었고, 하나님의 통치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되셨다.

하늘 보좌에 오르신 예수께서 이렇게 우주권 통치권을 행사하실 때 그는 그것을 항상 성령을 통해서 행사하신다(행 2:33; 5:31-32). 성령은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왕적 통치의 집행능력이시다. 하나님 우편 보좌에 오르신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넘겨받은 우주적 통치권을 성령을 통해서 행사하신다. 때문에 바울에게 있어서 성령은 “주의 영”(고후 3:17) 또는 “그리스도의 영”(롬 8:9)으로 불린다. 성령은 신자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 또는 예수의 왕적 통치를 실현시키는 능력이시며, 그들의 인격과 성품 속에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재현하도록 만드는 능력이시다. 

신자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경험하고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 자신의 인격적 임재를 경험하게 된다(롬 8:9-10). 하나님의 현재적 통치,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성은 성령 안에서 현재화된다. 성령이 신자들에게 충만히 부어지고 역사한다는 것은 그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능력으로 임하고 있다는 중요한 징표이다.

셋째로, 하나님 나라 사상은 또한 종말론적인 특징을 지닌다

신약성경에서 천국은 종종 마지막 때에 가서 최종적으로 완성될 미래의 나라이기도 하지만 좀 더 자주 그것은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임재와 능력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아갈 때 지금 여기서 맛보고 경험하는 현재적 실재이기도 하다. 바울서신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또는 천국은 현재적이면서도(고전 4:20; 골 1:13; 롬 14:17) 동시에 미래적 실재(갈 5:21; 엡 5:5; 고전 15:24)이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의 종말론적 긴장 속에 놓여 있는 나라이다. 신자가 현재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할 때만 그는 장차 완성된 형태로 임하게 될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도 참여할 권한을 얻게 된다. 현재 천국을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은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 한국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사후에 들어갈 미래의 나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데, 삶의 현장이나 목회현장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지금 맛보고 경험할 수 있는지를 강조하는 것이 성경의 균형잡힌 이해를 회복하는 것이다.

넷째로, 하나님의 나라 사상은 또한 윤리적 성격을 지녔다. 

바울의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공관복음서의 개념보다 상대적으로 윤리적인 성격이 강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역사적인 기독교인들을 윤리적으로 경고하거나 권면하는 문맥에서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고전 6:9-10; 엡 5: 3-5; 갈 5:19-23). 아마도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수의 강조점을 넘겨받되 그것을 ‘의’와 ‘성령’에 대한 자신의 강조점으로 대체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바울에게 특징적인 것은 그의 독자들에게 성령을 좇아 살 것을 권면할 때 그들이 만일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거나 유업으로 얻지 못한다고 경고한다는 사실이다. 누구보다도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구원을 강조하는 바울이 범죄하는 역사적 그리스도인들을 경고할 때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은 놀랍다. 이것은 성령을 좇아 행하는 신자들의 현재적 순종의 삶이 미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함축하는 것이리라.

본 논문과 관련하여 우리가 특별히 주목할 본문은 로마서 14:17이다. 바울은 이 본문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신자의 내면생활에 직접 연관시킨다. 공관복음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의 귀신축출 사역과(마 12:28; 눅 11:20) 식탁교제(눅 14:12-24; 마 22:1-10) 가운데서 현현되고 있다고 가르치는 것과 달리,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나라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나타난다고 가르친다. 공관복음서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때로 ‘잔치’(banquet)로 묘사되지만, 바울서신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고 부정한 것은 대조적이다. 하지만 공관복음서에서도 잔치는 하나님 나라의 은유로 사용된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바리새인들은 식탁교제의 대상에서 제외시켰던 세리와 죄인들을 예수께서는 환영하셨고 그들은 기쁨으로 그를 식사자리에 영접하셨다(눅 19:1-10; 막 2:16). 예수의 잔치비유는 바리새인들이 식탁교제를 위해 부과한 종교적 제한들에 대한 항거로 이해될 수 있다(눅 14:13,21). 이런 맥락에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누구나 아무런 제약 없이 회개함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쁨의 잔치로 비유한 셈이다(마 22:2; 25:10; 26:29). 바울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나라는 음식법 규정들로 제한될 수 있는 그런 나라가 아니었다.

바울은 본문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먹은 것과 마시는 것”과 관련하여 이해되는 것을 강하게 부정한다. ‘브로시스’와 ‘포시스’는 각각 음식과 음료를 지칭하지 않고 ‘먹는’ 것과 ‘마시는’ 행위를 지칭한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행위에 있지 않다. 

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배경은 로마교회에서 음식 먹는 문제와 날짜 준수 문제를 두고 소위 믿음이 강한 자들로 대변되는 이방 기독교인들과 믿음이 약한 자들로 대변되는 유대 기독교인들 사이에 불거진 갈등 위에 놓여 있다. 믿음이 강한 기독교인들은 공동체 식사 때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을 과시함으로 율법의 음식법 규정들을 삼가 준수하는 믿음이 약한 유대 기독교 형제들을 무시하고 배척했으며, 믿음이 약한 유대 기독교인들은 아무 음식이나 먹는 강한 이방 기독교 형제들의 자유분방한 행동에 대해 정죄 판단을 내리고 함께 식사하는 것을 거부했을 것이다. 하지만 로마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본질적 성격을 오해하였다.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어울려 식탁교제를 나누신 것처럼, 로마의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공동체 식사에 누구나 –강한 자이든 약한 자이든 상관없이 –제한 없이 환영할 수 있어야 한다. 옛 언약 시대에는 율법이 규정하는 음식법이나 의식법 규정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들이었으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언약 시대가 도래하였다. 

새 언약 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은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들의 삶을 규정하는 요소들은 더 이상 율법의 옛 음식법 규정들이 아니고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 옛 언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의 음식법이나 의식법 규정들을 준수하지 않는 사람들을 죄인 취급을 하고 배척했지만, 그런 옛 언약시대의 낡은 규정들에 붙들려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근본 성격을 오해한 것이다.

어떤 인종적, 성적, 사회적, 종교적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든 간에 하나님의 나라는 누구나 성령 안에서 경험할 수 있는 현재적 실재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교훈이 바울의 가르침에 영향을 미친 것을 분명하게 감지할 수 있지만 형식적인 차원에서보다 그의 사상을 형성하는 심층적 차원의 영향이라고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히려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에 있다. 바울서신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과 자주 연결된다. 신자가 현재적으로 경험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경험하는 초자연적인 실재이다. 로마의 기독교인들은 음식 규정과 같은 비본질적인 문제에 얽매어 서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동안에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는 데 실패하였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할 때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바울은 무엇보다도 ‘의’(義)가 하나님 나라의 삶에 중심 요소가 된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로마서의 중심 주제를 나타내지만, 본문에서 그것은 몇 가지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롭다 하시는’(justifying) 행동을 가리킬 수 있다

또는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기독교인들이 향유하게 된 ‘의의 신분’을 가리킬 수 있다. 또는 그것은 기독교인이 공동체 안에서 나타내는 ‘옳은 행동’을 가리킬 수 있다. 주변문맥은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관계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바울은 본문에서 신자들의 의로운 행위를 염두에 두고 있을 가능성이 제일 높다.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의로운 삶을 영위하는 모습으로 현현된다. 참된 의는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 아래 살아가는 삶, 또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일치하는 삶을 가리킨다. 신자가 성령 안에서 천국을 경험할 때 반드시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변화된 삶이 동반된다. 참된 행복은 변화된 의로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천국을 맛볼 때 경험된다.

바울은 또한 ‘평강과 희락’이 하나님 나라의 삶에 중심 요소가 된다고 교훈한다. 그것들 역시 하나님의 행위를 지칭하거나 신자의 신분을 가리키지 않는다. 주변 문맥을 고려할 때 평강과 희락은 모두 일차적으로 수평적인 의미를 지닌다. 한역성경은 첫 번째 단어를 ‘평강’으로 번역함으로써 기독교인이 마음으로 누리는 내적 평안의 상태를 염두에 둔 것 같다. 신약성경에는 이런 의미로 쓰인 용례들이 없지 않다(요 14:27). 하지만 19절이 시사해주듯이 그것은 일차적으로 공동체 구성원들끼리 서로 화목하고 협력하는 덕목을 지칭한다. 만일 바울이 이 술어의 히브리적 개념인 ‘샬롬’(shalom)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 백성의 안녕, 복지, 온전함 등의 의미를 내포할 수 있겠지만 바울이 본문에서 그런 히브리적 개념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평강과 희락’이 순서만 바뀌어서 나타나는 곳은 갈라디아서 5:22이다. 이 본문에서 한글 번역자는 ‘희락과 화평’이란 말로 번역함으로써 ‘에이레네’는 신자의 내적 평안보다는 성도들 간의 화목과 일치란 뜻을 염두에 둔 것 같다. 이점을 고려한다면 바울은 로마서 14:17에서 신자의 내적 마음의 평안보다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화목과 일치를 더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단어는 단순한 즐거움의 느낌이 아니라 환란 중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하는데서 솟아나는 기쁨을 가리킨다(롬 5:3-5; 고후 7:4; 살전 1:6). 

바울서신에서 기쁨은 자주 적극적인 의미를 띤다. 자신의 신분이나 존재가 외적 환경에 의해 지배를 받지 않고 하나님의 신실한 손에 의해 지탱되고 있음을 알기에 신자는 주변 환경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과 섭리를 의지하여 환란 중에서도 기뻐할 수 있다. 어떤 학자들은 “성령 안에서”란 문구를 오직 ‘희락’에만 연결시키려고 하지만, 그것을 “의와 평강과 희락” 모두를 수식하는 문구로 간주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신자가 생활 속에서 의로운 행동, 이웃과의 화목, 적극적인 기쁨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경험하는 현재적 실재이며, 그러한 삶은 오직 성령의 능력 안에서만 경험될 수 있다. ‘엔’ 전치사는 장소적이고 수단적인 의미를 다 함축한다. 그리스도인은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오직 성령의 능력 안에서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경험할 수 있다. 

“의와 평강과 희락”은 하나님 나라의 중심되는 요소이기 때문에,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존경을 받는다(18절). 18절 초두의 ‘이로써’란 문구는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그것은 17절에서 묘사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삶의 방식을 지칭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이다. ‘섬기다’ 동사는 신자가 주되신 그리스도의 명을 따라 섬기는 종이라는 것을 함축한다. 주인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종만이 그의 주인을 기쁘시기 할 수 있다. 특히 종의 언어는 신자의 자유가 어떤 외적 간섭도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임의적 자율”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바울에게 있어서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관계없이 모든 사람은 의존적 존재이다(1:23,25; 6:16). 그들은 사탄과 죄를 주인으로 섬기든지 아니면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존재들이다. 특별히 본문은 신자가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섬기는 종이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방식으로 또는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둔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섬길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고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권면할 때 세상 사람들도 인정하고 용납하는 것을 신자의 행동 규범으로 삼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자유를 희생하는 행동을 높이 평가하는 반면, 자신의 이기적인 자유를 확대하려고 남들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을 비방한다. 만일 외부인이 공동체 예배에 참석해서 “먹고 마시는” 행위로 서로 정죄하고 업신여기는 신자들의 행위를 보았을 때 그들의 행위는 외부인들에게도 비방을 받게 될 것이다(16절). 따라서 신자들은 공동체 안과 밖 어디서나 남들에게 칭찬을 받을만한 행동을 해야 한다. 그러한 삶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그들의 영적 신분에도 부합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행복을 위한 토대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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