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9-01-22 09:55
신앙의 본질과 정의
인쇄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3,713  

신앙의 본질과 정의


칼빈도 신앙은 단순한 동의(assensus)가 아니라 지식(cognitio)과 신뢰(fiducia)를 포함한다고 말한다. 칼빈은 지식과 신뢰는 관념적인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신앙생활의 핵심 영역이라고 주장한다. 칼빈에게 신앙은, 그의 일부 계승자들이 가르친 것처림, 역사적 지식에 구원에 대한 동의를 덧붙인 것이 아니라, 구원에 이르게 하는 확실한 지식과 확신에 찬 신뢰가 결합되어 있는 것이었다.

칼빈은 지식이 신앙에 근본이라고 주장했다.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에 달려 있는데,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은 본질적으로 복음 및 복음 선포와 함께 성경을 포함하는 것이다.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시작한다.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확고하게 의지한다. 신앙은 항상 성경에 대해 아멘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확신은 말씀에서 발견되고, 말씀에서 흘러나와야 한다.

신앙은 성경적 지식에 의존하되, 특히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그리스도중심인 약속에 의존한다. 참된 신앙은 그리스도를 복음 속에 표현되어 있는 분으로 그리고 성부께서 은혜로 보내신 분으로 믿는다.

따라서 참된 신앙은 일반적으로는 성경, 특별하게는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약속에 초점을 맞춘다. 

하나님은 비참한 죄인에게 자비를 약속하기 때문에, 신앙은 이 약속에 의존한다. 이 약속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다.

바르게 이해하면, 신앙은 성경을 통해 알려진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에 대한 약속에 의존하고 적용된다. 신앙은 그것이 의존하는 약속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참된 말씀의 무오한 인 치심이 있다. 결과적으로 신앙은 본질상 확신을 가지고 있다. 확신, 확실성, 신뢰. 이것이 신앙의 본질이다.

이처럼 확신을 주고 확신하게 하는 신앙은 성령께서 택함 받은자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택함 받은 죄인은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 약속의 신실함을 확신하고, 신앙으로 그 말씀을 받아들이게 된다.

요약하면, 칼빈에게는 확신을 주는 신앙은 필수적으로 구원에 대한지식, 성경,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약속, 성령의 역사, 선택 등을 포함한다. 확신은 당연히 하나님께 근거를 둔다.

결론적으로, 칼빈의 신앙에 대한 형식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만일 우리가 믿음을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신 약속의 진리에 근거하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지성에 계시되고 우리의 마음에 인 쳐져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견고하고 확실한 지식으로 부른다면, 우리는 믿음에 대한 올바른 정의를 갖게 될 것이다."

칼빈은 본질상 신앙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이라고 강조하고, 신앙 속에 전인격의 작용 곧 지성의 사용과 마음(감정)의 적용과 의지의 복종을 포함시키다.

신앙의 본질에 대한 확신

신앙은 인격적, 주관적 확신을 포함하고 있다.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 참된 신자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특히 은혜롭고 자비로우시다는 것을 인정하고 감사한다. 신앙은 "우리의 지성에 계시되고, 우리의 마음에 날인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확실한 지식이다.

신앙은 인격적 확신과 분리될 수 없다.

칼빈은 계속해서 신앙을 "확실성, 견고한 신념, 확신, 굳은 확신,충분한 확신' 등으로 묘사한다. 신앙은 지식으로 구성되지만, 또한 마음으로 느끼는 확신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확실하고 안전하게 소유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칼빈은 또 자신의 주석 전체에 걸쳐 확신을 신앙의 핵심 요소로 강조한다. 칼빈은 하나님께 구원받은 사실을 믿기는 하지만 그에 대해 확신치 없는 사람은 결국 참된 신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간단히 말해, 참된 신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은혜롭고 자비하신 아버지라는 견고한 확신을 갖고 하나님의 풍성한 인자하심을 기초로 모든 것을 자실에게 약속하는 사람이요, 또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의 약속을 의지함으로써 아무런 의심 없이 구원을 바라보는 사람이다‥‥‥자신의 구원에 대한 회신을 의지하여 마귀와 사망을 확실하게 이기는 사람이 아니면 어느 누구도 신자가 아니다.”

칼빈은 참된 신자들은 다음과 같이 자신을 알고 있어야하고, 또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로 불릴 수 없다는 것, 이 진리를 굳게 고수해야 한다. 마귀, 사망, 죄 그리고 지옥문을 담대하게 물리칠 수 있다는 이 중대한 확신은 경건한 모든 자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것이라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자비로우시다는 것을 확신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고린도후서 13장5절을 주석하면서, 칼빈은 심지어 자신이 그리스도와 연합한 것을 모르는 자는 버림받은 자들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자기들이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자인지,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인지 의심하는 자들은 누구든 버림받은 자들이라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생각과 견고하고 굳건한 확신을 갖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안전하게 안식하도록 이끄는 믿음만을 온전한 믿음으로 간주해야한다."

신앙 및 확신 대 불신앙


"모든 사람에게 불신앙은 항상 믿음과 뒤섞여 있다. 우리 마음속에 불신앙이 너무 깊이 뿌리박혀 있고 우리는 불신앙에 늘 끌려가기 때문에 모두가 입술로 고백하는 사실 곧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으려면 강력한 싸움이 없으면 안 된다. 특히 현실에서 이런 문제에 봉착할 때에는 누구나 감추어져 있던 연약함이 드러난다."

칼빈에 따르면, 신앙은 확신하는 신앙이 되어야 하지만, 현세에서는 완전한 확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신자는 죽을 때까지 불신앙을 완전히 치유하지 못할 것이다. 신앙자체는 의심할 수 없지만, 신앙은 계속 의심의 시험으로 애를 먹기 마련이다. 그리스도인은 확신을 위해 싸우지만 전혀 방해받지 않는 확신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칼빈은 신앙에 다양한 단계가 있음을 인정한다.

칼빈은 "믿음의 유아상태" , "믿음의 초보" , "약한 믿음'과 같은 개념을 루터보다 훨씬 빈번하게 사용한다. 모든 신앙은 유아상태에서 시작한다고 칼빈은 말한다. 또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자들을 믿음이 아주 작은 자들로 간주할 때 그리스도의 인내는 아주 크다. 그리고 진실로 이 가르침은 일반적으로 우리 모두에게 적용된다. 왜냐하면 지금 충분히 성장한 믿음도 처음에는 유아상태가 있었고, 어느 누구든 더는 믿음의 발전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전한 상태의 믿음을 가진 자는 없기 때문이다."

신앙의 은밀한 출발과정이나 최후의 실현 상태보다 성장과정에 대해 더 상세히 기술한 칼빈은 확신이 신앙의 성장에 비례한다고 주장한다. 더 구체적으로, 칼빈은 성령을 신앙의 창시자일 뿐만 아니라 신앙 성장의 원인이자 유지자로 제시한다. 신앙, 회개, 성화 그리고 확신은 모두자라는 것이다.

확신은 의심에서 자유로운 것이지만 자유롭지 않다. 신앙은 주저하는 것이 아니지만 주저할 수 있다. 신앙은 안심을 포함하지만 걱정에 사로잡힐 수 있다. 신실한자는 확신이 있지만 흔들리고 두려워 떤다.

모순을 밝힘

칼빈은 경험이 신앙을 확증한다고 말한다. 신앙은 "사람들이 경험하고 중명된 사실에서 당연히 갖는 충분하고 고정된 확실성을 필요로한다. 신앙의 대상과, 경험을 통한 신앙의 확증은 모두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을 통해 자신의 은혜로운 속성을 확증하는 선물이다.

따라서 단순한 경험이 아니라 말씀을 지킬 때 흘러나오는 말씀에 근거한 경험이 칼빈의 목표다. 말씀에 대한 경험적 지식이 본질이다. 칼빈에게는 두 종류의 지식이 요구된다. "아직은 충분히 계시되지 않았지만' 말씀에서 얻는 신앙에 의한 지식과 "말씀을 지킬 때 흘러나오는" 경험에 의한 지식.

이 두 지식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 핵심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경험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 속에 자신을 계시하는 분임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성장과 일치되지 않는 경험은 참된 신앙의 경험이 아니다. 요약하면, 신자의 참된 신앙에 대한 경험은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 훨씬 빈약하지만, 신앙의 지각(신앙의 당위 영역)과 경험(신앙의 존재 영역) 사이에 말씀에 대한 본질적 통일성이 있다.

육체 대 영

루터와 마찬가지로 칼빈도 영, 육 간의 싸움의 배경으로 당위와 존재의 이분법을 설정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영,육 간의 긴장을 정확히 경험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령에 의해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경험적 신앙에 침투해 있는 역설(예, 전통적인 개혁파해석에 따른 롬7:14-25)은이 긴장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영]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25절). 따라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무것도 신자들을 두려움에서 막지 못하고, 동시에 가장 확실한 위로를 소유하는 것을 막는 것도 역시 없다‥‥‥두려움과 신앙이 한 마음속에 공존할 수 있다‥‥‥확실히 이것은 그렇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 자신에게서 또는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에게서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두 손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교제를 용감하고 굳게 붙들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육체의 잔재들이 남아 있는 한, "날마다 양심의 갈등'에 사로잡힌다. 신자의 '현재 상태"는 하나님 자녀의 영광이 결여되어 있다고 칼빈은 말한다. 

"육체적으로 우리는 먼지와 그림자에 지나지 않고 죽음이 우리 눈앞에 항상 놓여 있다. 우리는 무수한 비참에 노출되어 있다‥‥‥따라서 우리는 항상 우리 안에서 지옥을 발견한다." 

육체 안에 거하는 동안 신자는 복음 전체를 의심하는 유혹에 빠질 수도 있다.

유기된 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죄를 미워하거나 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갈등이 없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자신의 욕망을 탐닉한다고 칼빈은 말한다.

그러나 신자는 "하나님께 더 열심히 헌신할수록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인식으로 그만큼 더 심각하게 불안해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확신과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인식은 반대로 나타난다. 실제로 두려움과 전율을 느끼는 겸손한 영은 신앙을 세우고 무감각을 예방하는 데 도움을 준다. 왜냐하면 두려움은 무가치성에 대한 적절한 의식에서 나오지만, 신뢰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 영,육의 긴장 관계로 인해 신자는 육체에 대한 만족과 절망에 대한 굴복을 피하게 된다. 신자의 영은 절대로 완전히 절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앙은 절망의 위기 속에서 자란다. 갈등은 신앙을 강하게 한다. 신자는 갈등 속에 있을 때 절망적으로가 아니라 신중하게 인생을 살게 된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온갖 갈등을 극복하고 거룩한 신앙을 갖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에 신실하신 분임을 신뢰하게 된다. 심지어 육적인 의심으로 고통당할 때에도, 신자의 영은 기도로 하나님께 호소함으로써 그리고 성례를 통해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비를 신뢰한다.

이 수단을 통해 신앙은 불신앙과 싸울 때에도 하나님의 손을 붙잡는다. “믿음은 궁극적으로 신앙을 에워싸고‥‥‥위태롭게하는 어려움을 물리치고 승리한다. 믿음은 온갖 무게를 이기고 위로 뻗어나가는 종려나무와 같다.”

요약하면

칼빈은 신자의 영에서는 소망과 기쁨과 확신이 나오고, 육체에서는 두려움과 의심과 환멸이 나온다고 가르친다. 영과 육체는 동시에 작용하지만, 불완전함과 의심은 신앙이 아니라 완전히 육체에 속한 것이다. 육체의 행위가 종종 신앙을 수반하지만 신앙과 섞이지는 않는다. 신자는 삶에서 영적 싸움에 패배할 수 있지만 육체와의 궁극적 싸움에서는 패하지 않을 것이다. 기도와 성례는 신앙의 영이 궁극적으로 승리하는 데 도움을 준다.


신앙의 씨앗 대 신앙의 의식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믿음은 경건한자의 가슴 속 가장 깊은 곳에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찢겨져 나가는 법이 없다. 믿음이 흔들리거나 우왕좌왕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믿음의 빛은 잿더미 속에서처럼 절대로 소멸되거나 꺼지는 일이 없이 최소한 그 광채를 숨겨 두고 있다.“

따라서 칼빈은 "믿음과 확신 사이의 연계성이 약화되지 않는 한, 믿음이 약해지면 확신도 약해진다."고 설명한다. 확신은 통상적으로 존재하지만, 확신에 대한 신자의 의식은 그 정도와 일관성에 있어서 차이가 다양하다. 그러므로 약한 확신을 가진 신자를 대할 때 목사는 신앙과 확신 사이의 유기적 연계성을 부인하지 말고 성령을 통한 은혜의 수단들을 사용하여 신앙을 강화시키는 일을 추진해야 한다.

삼위일체 구조

성부의 선택이 사탄의 역사를 능가하고, 성자의 공의가 신자의 죄악성을 능가하며, 성령외 확신하게 하는 증언이 영혼의 결함을 능가하는 것이 확실한 것만큼 신앙도 확실히 불신앙을 정복하고 또 정복할 것이다. 칼빈의 『기독교강요』 3권의 내용 배치는 신앙의 은혜가 하나님에게서 인간에게, 인간에게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움직임을 보여 준다. 신앙의 은혜는 성부로부터 성자 안에서 그리고 성령을 통해 주어지고, 이에 맞추어 신자는 성령을 통해 성자와 교제 속에 들어가고, 이 결과 신자는 성부와 화목하게 된다.

칼빈에 의하면, 확신은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소로 말미암아 일어나고, 이 가운데 성분의 선택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보호하심이 포함되어있다. 따라서 칼빈은 특히 부르심의 맥락에서 볼 때, “적절히 고려된 예정은 믿음을 흔들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에 대한 최고의 확신을 제공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확고한 선택은 우리의 부르심과 연결되어 있고, 우리의 확신을 세우는 또 하나의 수단이다. 그리스도가 받아들이는 모든 자들을 성부는 그리스도에게 맡기고 위탁하셔서 영생을 얻도록 지키셨다고 말해진다.“

성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칼빈에게도 선택은 구원의 확실성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오하려 뒷받침하는 것이다.

이런 가초는 단지 그리스도 중심의 배경에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칼빈은 그리스도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선택을 기대하고 또 자기를 속이지 않고 그 선탁을 기대할 수 있는“선택의 거울로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다. 선택으로 말미암아 신자의 눈은 구원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데 전적으로 무력한 소망 없는 자신을 바라보는 것에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외 보증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초점을 바꾼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구원에 대한 확신은 선택에 대한 확신으로 말미암아 실제적이고 효과적이게 된다.“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속하고 부활시키기로 한 하나님의 결정을 성취하실 때 우리의 것이 된다.

결국 우리는 그리스도를 "멀리 떨어져 있고 우리 안에 거하지 않는 분"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기 때문에 진실로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것은 우리 안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주기를 원하는 것, 무엇보다 그분 자신의 형상을 보는 것이다.

칼빈은 우리가 우리의 양심을 진정시킬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그리스도를 기대하고 그분께 피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작은 하나님"은로 만드셨다고 진술한다. 신앙은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고 유지되고 멈추어야 한다. 참된 신앙은 그리스도 안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를 벗어나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또 알기를 원하지도 않는다."고 칼빈은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 자신과 또는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와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객관적 확신과 주관적 확신이 융합되어 있다. 확신을 위해 오직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은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자신을 그분의 몸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월리스 왓킨스가 지적하는 것처럼, "신앙이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우리 자신에 초점을 두는 것은 완전히 억설이고, 또 신앙이 그분의 몸과 상관없이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두는 것도 완전히 억설이다 ‥‥구원에 대한 확신은 파생적인 자기 지식으로, 그의 몸 곧 우리가 지체인 교회에 연합된 존재로서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두고 있다."

이와 같은 기독론적 관점에 따라, 칼빈은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객관적 작정과 자신이 택함을 받았다는 것에 대한 신자의 주관적 확신의 결여 사이의 거리를 줄인다. 칼빈의 입장에서는 선택이 확신에 대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에 대한 대답을 제공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는 자신의 택함을 본다. 복음 안에서 신자는 자신의 택함에 대한 사실을 듣는다.

칼빈은 구원에 대한 거짓 확신에 빠져 있는 자신의 양들을 위로하는 설교를 절대로 하지 않았다. 많은 학자들이 칼빈이 자신의 회중을 구원받은 청자로 간주하는 칼빈의 습관을 언급함으로써, 칼빈이 신앙과 선택에 대한 주관적, 경험적 자각의 필요성을 강조한 사실을 축소시킨다. 그들은 오해한 것이다. 칼빈은 자신이 "사랑의 판단'으로 부른 것을 실천했지만(즉 칭찬할만한 외형적 삶의 양식을 유지하는 교인을 구원받은 자로 간주했지만), 또한 자주 소수만이 구원에 이르는 신앙으로 선포된 말씀을 받아들인다고 강조했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외 없이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지만, 그 맛을 제대로 느끼는 사람은 열 명 가운데 한 명밖에 없다. 아니, 거기서 유익을 얻어 끝까지 올바른 길을 가는 사람은 백 명 가운데 한명 정도다.“

칼빈이 볼 때, 신앙처럼 보이는 많은 것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성격을 결여하고 있다. 그래서 칼빈은 "맹목적 믿음, 묵시적 믿음, 믿음의 준비, 임시적 믿음, 믿음의 환상, 거짓 믿음, 믿음의 그림자, 일시적 믿음, 위선의 외투를 걸친 믿음' 등에 대해 말한다.

칼빈은 자기 속임이 실제로 가능하다고 말한다. 유기된 자들은 종종택함 받은 자들이 갖고 있는 신앙과 아주 유사한 것을 느끼기 때문에 자기 검토가 본질적으로 요구된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자신을 검토하고 하나님이 우리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이방인과 그분의 백성을 구별하는 내적 표지 곧 경건과 신앙의 살아 있는 뿌리를 찾아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진실로 구원받은 자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적절한 검토를 통해 자기 속임에서 벗어난다.

칼빈은 "신실한 자들은 신앙의 확신을 갖는 대신, 육신의 안일함이 은근히 침투하지 않도록 두려움과 겸손함으로 자신을 검토할 것을 배운다."

심지어는 자기 검토에 대해 말할 때에도, 칼빈은 그리스도를 강조한다. 그는 우리가 오직 그리스도께 신뢰를 두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자신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성경적 경험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앤서니 레인은 칼빈에게 자기 검토는 "내가 그리스도를 신뢰 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있는가?'에 중점이 있다고 말한다. 자기 검토는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약속을 가리켜야 한다. 그러나 자기 검토는 신자의 영혼 속에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대한 빛을 던져 줄 수 있는 유일한 장본인인 성령의 도움이 없으면 결코 행해질 수 없다. 그리스도, 말씀 그리고 성령이 없이, "만일 여러분이 자신을 검토한다면, 확실히 정죄밖에 없을 것이다. "라고 칼빈은 말한다.

따라서 칼빈의 추론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1) 선택의 목적은 구원을 포함한다.
(2) 택함 받은 자들은 그들 속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 때문에 선택 받은 것이다.
(3) 택함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들의 선택과 구원에 대한 확신은 그들 자신 속에서나 그리스도가 없는 성부 하나님 속에서 발견될 수 없다.
(4) 대신 그들의 확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고, 따라서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필수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질문이 여전히 남아 있다. 곧 택함 받은 자들이 그리스도와 어떻게 교제하고, 그것이 어떻게 확신을 낳느냐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칼빈의 대답은 성령론에 의거한다. 즉 성령은 그리스도와 그라스도의 유익을 죄책이 있으나 택함 받은 죄인들의 마음과 삶에 적용하고, 그럼으로써 그들이 구원에 이르는 신앙을 통해 그리스도가 자신에 속해 있고 또 자신은 그분에게 속해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하신다는 것이다. 성령은 특히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 약속의 확실성을 그들 속에 확증하신다. 따라서 개인적 확신은 성부의 선택과 성자의 구속, 성령의 적용 그리고 구원에 이르는 신앙의 도구적 수단들과 절대로 분리되지 않는다.

칼빈은 성령이 구속을 적용하는 데 막강한 역할을 행한다고 말한다. 인격적인 위로자와 증인과 보증으로서 , 성령은 신자로 하여금 그의 양자됨을 확신하게 한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의 인도자와 교사가 될 때,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양자 됨을 확신하게 될 정도로 우리에게 증거를 제공하신다. 따라서 성령의 증언이 선행되지 않으면 우리의 지성이 스스로 이러한 확신을 제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성령의 역사는 그리스도와 역할을 전혀 손상시키지 않고 구원에 대한 모든 확신의 기초가 된다. 왜냐하면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유익으로 신자를 이끌고 신자 속에 이 유익을 적용시키심으로써 신자를 확신시키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성령의 연합이 확신 교리에 포괄적으로 담겨 있다. 최근학자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자에게 확신시키는 데 있어 성령의 역사의 필수성을 강조하는 칼빈의 사상을 축소시키고 있다. 당연히 확신의 근거는 그리스도 안에 그리고, 또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이지만, 확신의 원인은 마음속에 확신을 일으키는 성령이시다.

나아가 칼빈에 따르면, 확신의 핵심 근거로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자 객관적인 의존은 주관적으로 참된 확신을 위해 성령의 인 치심을 받아야 한다. 유기된 자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감정이나 의식을 경험하지 않고서도 그 약속을 주장할 수 있다. 성령은 종종 유기된 자들 속에서 역사하지만, 그 역사는 보잘 것이 없다. 칼빈은 유기된 자들의 지성은 순간적으로 신앙이 시작된 것처럼 보일 수 있을 정도로 조명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그들은 "은혜에 대한 혼동된 자각외에는 받아들이는 것이 없다. "고 말한다.

반면에, 택함 받은 자들은 썩지 아니할 씨로 거듭난다. 그들은 유기된 자들이 결코 맛보지 못하는 주관적 유익들을 받아들인다. 오직 그들만이 하나님의 약속을 내면에 진리로 받아들인다. 오직 그들만이 "성령의 조명“으로 불릴 수 있는 중거를 받아들인다. 오직 그들만이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제공하는 대로 하나님에 대한 경험적, 직관적 지식를 받아들인다.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룬다. 칼빈은 택함 받은 자들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황홀해하고 완전히 불타오르게 된다."고 말한다. 곧 그들은 "천국자체를 향해 나아가고', "하나님의 숨겨진 보화를 인정하게 된다.

"엄밀하게 말해, 

성령은 택함 받은 자들에게만 죄사함을 보증하고, 그리하여 그들이 특별한 믿음으로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도록 하신다. 택함 받은자들만이 특별한 신앙과 특별한 내적 증언을 알게 된다."

 


 
 

일반형 뉴스형 사진형 Total 3,387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2523 태신자 전도 법 웹섬김이 02-05 2693
2522 목회자들이 당장 그만 두어야 할 것 웹섬김이 02-05 2588
2521 [2]로마서 14:17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성격 웹섬김이 02-05 2469
2520 [1]로마서 14:17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성격 웹섬김이 02-05 3538
2519 지옥에 관해 어떻게 설교하는가? 웹섬김이 02-05 2522
2518 [2]메시아닉 쥬의 문제점 웹섬김이 02-05 2933
2517 [1]메시아닉 쥬의 문제점 비판 웹섬김이 02-05 3354
2516 영적 전쟁을 위한 영문 기도문 웹섬김이 02-05 2666
2515 온전한 회개에 이르는 8단계 웹섬김이 02-02 2534
2514 교회 활성화 위한 4가지 전략 웹섬김이 02-02 2398
2513 최근 설교학에서 배울 것과 버릴 것 웹섬김이 02-02 2562
2512 신앙의 본질과 정의 웹섬김이 01-22 3714
2511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기사들 웹섬김이 01-22 3525
2510 영적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5가지 원칙 웹섬김이 01-22 2364
2509 '레마, 그라페, 로고스, 케뤼그마, 디아데… 웹섬김이 01-17 2519
2508 목사님, 이 다섯 가지를 중단해야 해요 웹섬김이 01-17 2943
   51  52  53  54  55  56  57  58  59  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