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10-10 20:15
[3]오늘의 한국교회 설교 진단
인쇄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7,922  
6) 설교자 교육과 관련하여 
  한국교회는 목회에 있어서 설교사역이 그 중심을 차지하고 있지만 설교자 교육에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그 동안 설교학 연구에 전문성이 빈약했던 것이 사실이다. 장로회 신학대학교의 
전신인 평양신학교는 "실천신학 전문신학교"라고 할만큼 실천신학적인 훈련이 강했던 전통이 있었
다. 실천신학자 곽안련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의 남다른 사역 현장에 대한 열정 때문으로 평가
된다. 그러나 그가 귀국 이후, 이 분야에는 전문적인 학자가 나오지 못했고, 나름대로 목회에 성
공(?)했다는 목회자들이 자신의 경험담 일변도로 채워지는 설교학 교실은 한국 교회에 왜곡된 설
교 현장을 예견케 하는 일이었다. 그러한 신학적인 훈련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교회와 
말씀을 사랑하는 목회자들의 열심, 그리고 구령열은 그러한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왔으나 설교 사
역에 있어서 비본질적이고 비신학적인 요소들이 넘쳐나게 했던 요인이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각 
교단 신학교마다에 이제는 전문적인 연구를 하고 온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어 그들의 학문적인 연
구와 목회 현장과의 연계를 통해 설교자를 훈련시키는 교육을 감당해 갈 수 있는 토대가 형성되
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지적해야 할 또 한가지는 한국교회 설교자들을 위한 재교육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비평문화
가 온전히 자리잡지 못한 우리 실정에서는 목회자의 설교를 평가하고, 평가받는다는 것은 쉽지 않
은 실정이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나의 설교를 과감하게 평가받고 싶은 용기도 없고 자존심을 접을 
마음도 없기에 설교의 진보를 위한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다. 일전 장로회신학대학교 교회
와 커뮤니케이션 연구원에서 주관한 "설교 클리닉 웍샵"에 참석한 50대 중반의 한 목회자의 고백
을 잊을 수가 없다. "왜 이런 웍샵이 진즉 생기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신학교 다닐 때는 
실제로 설교도 한번 못해보고 끝났어요. 10년만 빨리 이런 기회를 가졌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이런 것은 연구원에서 할 것이 아니라 총회 차원에서 목사 재교육 프로그램으로 해야겠어요. 사실 
이 나이에 설교 웍샵에 온다는 것이 너무 쑥스러워서 무척 많이 망설였어요. 자존심 다 접고 왔지
요. 여기에 안 왔다면 얼마나 주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러웠을까 생각하니 아찔해 지네요." 그 동안 
신학교육의 차원에서도 그렇고, 총회 차원에서도 그렇고 설교자 재교육을 소홀히 했음을 지적하는 
말이라 설교학 교수로서 따끔한 충고로 받았던 기억이 난다. 사실 클리닉이라는 용어가 익숙지 않
았던 것이 사실이었지만 용기를 내어 참석한 목회자들은 같은 내용이지만 다음에도 참석하겠다는 
고백과 이것으로 끝나고 싶지 않고 매달 한번만이라도 다시 시간을 내서 지속적인 모임을 통해 
재교육을 받고 싶다고 해서 3월부터 재교육 웍샵이 다시 진행되게 된다. 웍샵 기간 동안 합숙하면
서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소그룹으로 나누어서 설교하고, 또 함께 평가하고, 그것을 녹화하여 
다시 시청하면서 한가지 한가지를 점검하고, 미진한 부분은 다시 실연(實演)하도록 하고, 그래도 
안 되는 부분은 몇 번이라도 반복하고... 그리고 두 번째 설교에서는 그 지적 받은 내용들이 어떻
게 수정하려고 했는지를 고백하게 하고, 함께 또 평가하고... 설교를 새롭게 하려는 사흘동안 설교
자들의 열기를 보면서 한국교회 목회자들에게 이런 설교자의 재교육이 필요함을 실감하게 되었다. 
설교가 영혼을 세우는 막중하고 "황공스럽기만 한 사역"이기에 설교자의 교육과 재교육은 공고하
게 진행되어야 할 과제이다. 

7) 설교자와 관련하여
  앞서 언급한 것들보다도 더 위험하고 치명적인 요소로 다가오는 것은 오늘 강단에 말씀을 들
고 서있는 설교자이다. 오늘 강단의 문제는 설교자의 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긴장도, 열정
도, 감격도 없는 직업적인 설교자, 반말이나 욕설도 서슴지 않는 무례한 설교자, 설교를 빙자하여 
성도를 공격하거나 비판하고 판단하는, 감정풀이 혹은 분풀이와 같은 소위 "치는 설교"를 서슴지 
않는 설교자, 그럴듯한 말과 수사적인 기교를 사용하지만 인격과 삶이 따르지 못하는 설교자, 사
람의 눈치를 보면서 비위를 맞추려는 인기에 야합하는 설교자, 성장 콤플렉스에 걸려 자신의 명예
와 성공을 위해서 교인들을 닦달하는 야망에 사로잡혀 있는 설교자, 소왕국의 군주처럼 목에 힘을 
주는 권위적인 설교자, 자신의 지식과 자랑을 늘어놓는 자랑꾼 설교자, 강단에만 올라가면 사람도 
목소리도 이상해지면서 자연스러움은 사라지고 오래도록 바라보기가 역겨운 설교자, 인위적인 제
스처와 과장과 허풍으로 들떠있는 설교자, 돈만 밝히면서 헌금만 강조하는 설교자, 최고의 설교 
시간을 잡담과 만담(漫談), 사설(私說)로 채우고 있는 설교자.... 그렇다. 설교의 개혁은 설교자 개
혁 없이는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 바로선 성결한 설교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
고 , 맡겨주신 사역 앞에 성실한 설교자가 되려고 할 때 앞서 지적한 내용들은 언제나 보완되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명확하면서도 깊이가 있고, 삶의 진액이 녹아져 그야말로 압도적인 감화력
이 있는, 가슴 설레게 하는 설교"를 소망하고 있는 설교 현장에 말씀을 들고 새롭게 나아가려는 
설교자가 있는 곳에서 우리는 한국교회 2세기의 희망을 볼 수 있다. 
독일 후기 낭만시대의 대표적인 교향곡 작곡가이자 탁월한 지휘자로 평가받고 있는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는 한때 그런 말을 했다: "나는 지휘 때문에 살고, 작곡 때문에 숨쉬고 있습
니다." 9개의 교향곡과 "대지의 노래"등과 같은 주옥같은 가곡들을 남기고 있는 그의 삶의 이유는 
지휘와 작곡이었다는 고백이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과 인생의 사명을 분명히 알았던 사람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오늘 설교자로 세움 받은 사람들이 설교 때문에 살고, 복음 때문에 숨쉬고 있다면, 
그리고 나의 사명이 무엇인지 온 가슴으로 바르게 고백할 수 있고, 그 사명을 따라서 살 수 있다
면 오늘 아무리 엄청난 도전들이 몰려온다 할지라도 설교 사역은 계속 강력해 질 수 있을 것이다. 
"설교 때문에 사는" 사람들이 나아가는 곳에는 반드시 말씀의 역사는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18
세기 산업혁명과 함께 도시화되면서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교회는 영적으로 침체되어 갈 때 영국 
전역에 강력한 말씀의 역사를 불러 일으켰던 쟌 웨슬리(John Wesley)는 1757년 7월 28일자 그의 
일기에서 그렇게 밝히고 있다: "사실 나는 설교 때문에 삽니다." 위대한 설교가 있었던 시대에 
설교자들은 이렇게 설교의 열정에 사로잡혀 살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 가히 
생명이라도 내놓을 열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진정으로 설교를 사랑했다. 오늘 세움 받은 설교자들
에게도 이런 고백이 요청된다: "나는 설교 때문에 삽니다!"

여전히 가장 좋은 시절이기를 바래면서
{익숙한 것과의 결별}이라는 책에서 구본형은 남명 조식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늘이 
울어도 울리지 않는' 지리산 천왕봉이 보이는 마을 덕산에는 '산천재'라고 불리는 아주 작은 한옥
이 보존되어 있는데, 남명 조식이 살던 곳이다. 평생 벼슬에서 멀리 있었지만 이치만 떠들고 행함
이 없던 당시의 지도자들은 감히 따를 수 없는, 마음의 실행을 중하게 여긴 사람이었다. 동주 이
용희는 남명을 그리며 그렇게 한탄했다고 한다. "정치가는 다 망해갈 때도 최상이라고 말하지만 
학자는 가장 좋은 시절에도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다." 문득 한국교회 설교의 현실에 관한 이 
글을 적으면서 자신이 설교학자여서가 아니라 정말 "학자"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가장 
좋은 시절에도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 그래서 오늘 한국 교회 설교 현실이 정말 "가장 좋은 시
절"이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들추어내는 것은 이 부분을 함께 고민하자는 
의도이다. 설교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대신할 수 없는 가슴 벅찬 사역이며, 죽은 자도 일어
나 앉는 사역이기에. 웨렌 워어스비(Warren Wiersbe)가 그의 최근의 책에 인용하고 있는 고대의 
기도문을 함께 읽으면서 그 결론을 대신한다.
오 진리의 하나님!
새로운 진리를 두려워하는 나약함으로부터
반쪽 진리에 만족하는 우리의 게으름으로부터
모든 진리를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교만함으로부터
우리들을 구원하여 주옵소서!

 
 

일반형 뉴스형 사진형 Total 3,387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2523 [3]바람직한 예배형식 웹섬김이 09-28 7973
2522 칼빈의 예정론 웹섬김이 09-30 8544
2521 칼바르트의 교회론 웹섬김이 09-30 9090
2520 교회와 종말 요약 웹섬김이 09-30 7662
2519 [1]교회와 사회개혁 웹섬김이 09-30 6902
2518 [2]교회와 사회개혁 웹섬김이 09-30 7004
2517 진화론의 허구 웹섬김이 10-06 7730
2516 베리칩 666 주장은 비성경적 웹섬김이 10-06 8416
2515 [1]신약의 역사적 배경 웹섬김이 10-10 7390
2514 [2]신약의 역사적 배경 웹섬김이 10-10 11981
2513 [3]신약의 역사적 배경 웹섬김이 10-10 7442
2512 [4]신약의 역사적 배경 웹섬김이 10-10 12726
2511 [1]오늘의 한국교회 설교 진단 웹섬김이 10-10 8212
2510 [2]오늘의 한국교회 설교 진단 웹섬김이 10-10 8331
2509 [3]오늘의 한국교회 설교 진단 웹섬김이 10-10 7923
2508 주일예배 고쳐야 할 것들 웹섬김이 10-10 8127
   51  52  53  54  55  56  57  58  59  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