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10-10 20:14
[2]오늘의 한국교회 설교 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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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8,330  
이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위임받는 설교자들은 설교를 새롭게 하려는 노력을 
계속해 왔으며, 보다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설교 사역을 재구성하려는(re-forming) 노력을 경주
하였다. 여기에서 한국 교회 설교 현장을 위기로 치닫게 하는 문제의 근원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지하고, 이것을 새롭게 하려는 노력이 경주되지 않는 한 우리의 설교 사역에 깊은 어두움이 깔
리고 말 것이다. 한국교회 설교 현장에서 발견되는 문제는 무엇인가?

1) 설교의 횟수와 관련하여
  기윤실에서 한국 교회 설교 도용 문제에 관한 포럼을 준비하면서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한 최
근의 설문에 의하면 전체 응답자의 67%가 1주일에 3번 이상 설교를 하며 특히 담임교역자 중 
58%는 10번 이상 설교한다고 응답했다. 물론 10번 이상이라는 횟수는 새벽기도회를 포함한 것이
리라. 서구의 교회에 비해 집회의 횟수가 많은 한국교회 설교자들은 자연히 설교의 횟수가 많아 
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다가 심방이나 행정, 성경공부, 상담 등의 설교 외의 목회 사역의 일이 너
무 많기 때문에 설교 준비가 채 끝나기도 전에 강단에 올라가는 경우도 생긴다. 깊은 묵상이나 연
구가 없이 여기 저기에서 자료를 수집하고 설교 준비하기가 바쁘다. 여기에서 설교 준비가 철저하
게 되지 못하기 때문에 깊이 있고 영감 있는 메시지보다는 늘 표면적인 내용의 설교가 될 수 있
고, 자연히 다른 사람의 설교집이나 인터넷으로 달려가고 싶은 유혹 앞에 서 있는 실정이다. 목회
자가 살고, 설교가 살기 위해서는 설교의 횟수를 줄여야 한다. 가만히 앉아서 설교준비만 해서 설
교하는 것도 아닌데 일년에 180여 편의 설교를 하는 설교자에게 어떻게 늘 신선한 메시지를 요구
할 수 있겠는가? "적은 것이 많은 것"(Less is more)이라는 경구처럼 설교 횟수를 줄여야 목회자
가 살 수 있다. 영감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창의력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고, 그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감당해야하는 설교 사역의 짐은 늘 역기능을 가져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렇다고 있는 집회를 없앨 수는 없기에 과감하게 나름대로의 가능한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부
교역자들과 나누어서 하는 방법이나, 주일 오전의 예배를 제외하고는 나름대로의 특성을 따라 진
행하는 것도 한가지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즉 새벽 기도회는 묵상이나 QT를 중심으로, 수요
기도회는 성경공부나 강해의 형식을 따라, 주일 찬양예배는 찬양중심으로 드리는 것이다. 모든 예
배와 집회를 언제나 설교중심으로 드리지 않고 그 특성을 따라 다양화하는 것도 좋겠다.  

2) 설교의 형태와 관련하여
  설교의 형태는 설교의 흐름과 방향을 결정해주는 중요한 요소이며, 설교에 있어 틀을 가져다
주고, 또한 활력을 갖다주는 요소이다. 그 동안 한국교회 설교자들은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논
리 중심적이고 명제 중심적인 설교 형태를 유지해 왔다. 전개방식은 주로 연역적인 방법을 널리 
사용했으며, 형식적인 면에서도 단일 설교의 형식에 집착해 왔다. 1980년대 이후 강해설교 흐름이 
등장했고, 1990년대에 들어서는 서사설교 혹은 이야기체 설교라는 형태가 소개되었지만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아직도 대지설교 혹은 주제 설교의 형태를 견지해 온 것이 사실이다. 설교자가 선정한 
주제에 맞추어서 성경본문을 선정하거나, 혹은 본문에서 설교자가 전하려는 주제를 선정하여 그 
주제와 관련한 대지를 뽑고 그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해 가는 형태를 견지하였다. 즉 어떤 명제를 
중심으로 대지를 정하고, 그 명제를 전달하기 위해 한 두 가지 예화를 엮어서 그 명제를 증명하고 
논증해 보이는 틀을 유지해 왔다. 흔히 현대 설교학에서 "3대지와 한편의 예화"(three points and 
a poem)로 통하는 방법에 오랫동안 매여 있었다. 서구 교회도 계몽주의 영향을 받은 이래 거의 
300여 년 동안 이 설교의 틀에 안주해 왔음이 사실인데, 선교사들이 전수해 준 이러한 설교의 형
태를 따라 한국 교회 설교도 지난 한 세기 동안 이러한 방법론적인 틀에 묶여 있었다. 
논리중심의 설교는 교리를 전달하거나 교육적인 설교에는 유용한 패턴이다. 그러나 어떤 "정보
의 전달"이라는 체계는 그에 대한 깊은 관심이 동반되지 않으면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우며, 지식
의 전달이나 어떤 정보의 전달은 삶의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또한 이러한 설교 형식은 하나님
의 말씀의 선포라는 측면보다는 설교자의 생각이나 사상이 전수되는 비성서적인 설교가 범람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 또한 설교자의 생각이 설교를 지배하면서 본문이 도외시되고 보조화
(proof-text)되는 경향들이 강하게 나타난다. 본문의 의도와 정확한 메시지를 찾아 나서는 순례는 
약하고, 표면적인 메시지에 예화 중심의 설교로 나아가는 경향이 강했다. 이러한 점에서 북미의 
설교학계에서는 논리 중심적이고 명제 중심적인 구조보다는 이야기의 구조를 따르는 설교가 지난 
30여년 동안 중심적인 관심사가 되었다. 대지를 중심으로 엮어 가는 명제 중심적인 설교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한계를 가지나 특별히 커뮤니케이션의 측면에서 말씀의 경험(experience)이 이루어
지게 하는데는 뚜렷한 한계를 갖고 있다. 현대 설교학에서는 전통적인 방법의 한계를 인식하면서 
새로운 방법론적인 틀을 제시하고 있는데, 귀납적 설교, 이야기 설교, 현상학적 전개식 설교 등은 
방법론에 대한 현대 설교학계가 내놓은 결실들이다. 설교자는 어떠한 설교의 형태를 사용하며, 
본문의 특성과 회중들에 따라 어떻게 다양한 형태를 사용해야 할 지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3) 설교 준비와 목회자의 연구생활과 관련하여
설교는 인간의 말재주나 잔머리로 단순간에 만들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또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며, 기도 많이 하고 강단에 서기만 하면 직통계시(?)로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설교는 오랜 시간 기도와 묵상, 말씀 연구를 통해 말씀을 발굴해 내는 보화와 같으며, 설교자의 
영성과 삶, 땀의 노력과 눈물의 기도를 통해 빚어지는 진주와 같다. 또한 설교자의 삶을 통해서 
배어 나오는 생수와 같다. 그러므로 설교 준비를 위한 몸부림도 없고, 묵상도 없이 어떻게 영혼을 
떨리게 하는 말씀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목회자가 해골이 되어 강단에서 춤추고 있을 때, 회중석
에서 송장이 되어 너부러진다는 사실을 안다면 어떻게 설교자가 다른 곳에 시간을 다 허비하고 
설교 준비할 시간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강단에서의 설교사역은 최고의 에너지를 필요로 하
는 최상의 시간"이다. 날 선 검을, 목표를 향해 휘두르는 긴장의 순간이다. 그러나 사용되는 도구
가 무디다면 힘은 힘대로 들고 열매는 열매대로 적을 것이다. 설교 준비를 위해서 시간을 내지 않
기 때문에 설교는 힘들고, 그 결과는 황폐하며, 회중들도 함께 메말라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
회 현장에서 연구시간을 확보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목회자의 결단이 필요하다. 혹
자는 전쟁을 해서라도 그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한다. 목회자들이 설교와 기도 등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기 위하여 다른 목회 활동을 분담하거나 평신도 그룹을 훈련하여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 설교자의 준비와 연구 생활이 없이 힘만 쓴다고 되는 것이 아니며, 폭넓은 독서와 
말씀 연구는 도끼 날을 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4) 본문연구와 성경해석과 관련하여
  앞서 언급한대로 설교 준비가 철저하지 못하고 늘 시간에 쫓기는 설교자는 언제나 본문연구
가 약해진다. 깊은 연구와 묵상이 없이 설교 준비를 하기 때문에 깊고 심오한 말씀의 신비는 놓치
고 늘 상투적인 내용이나 야단치는 내용으로 채우게 된다. 가슴에 감격과 눈물이 솟구치게 하는 
말씀의 꿀은 없고 늘 허공을 치는 메아리만 있으며, 또는 비성경적인 부패한 음식으로 가득찬 도
시락이 된다. 또한 성도들을 야단치고 윽박지르는, 비수만 들이대는 현상도 발생하게 된다. 설교자
에게 있어서 본문 연구는 필수적인 것이지만 준비에 쫓기는 설교자는 이 단계를 피상적으로 거치
게 된다. 일반적으로 한국교회 설교는 석의가 약하다. 그래서 수박의 파란 겉껍질 부분만 들이대
면서 이것이 수박이라고 말하는 사람과 같다. 그는 수박의 달고 시원한 맛은 알지도 못하고 보여
주지도 못한 채 성도들에게 아무런 맛도 없는 파란 껍질만 들이대는 설교자이다. 본문의 깊은 메
시지를 드러내지 못하는 것은 주석과 묵상의 단계가 미흡하기 때문이다. 설교에 있어서 주석은 본
문을 이해하는데 필요충분 요건이요, 묵상은 말씀의 깊이를 찾아내고 맛보게 하는데 포기할 수 없
는 요소이다. 주석은 성경의 저자가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가를 정확하게 찾아내는 작업이라면, 묵
상은 그 현장(context)에 동참하면서 오늘의 회중과 연관성을 가지고 오늘의 현장의 주시는 의미
를 발굴하는 것이다. 전자가 본문을 탐구하는(explore) 단계라면 후자는 본문과 씨름하고 노는
(play)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성경해석과 관련한 문제점으로는 먼저 알레고리칼한 해석이나 영해(靈解), 혹은 자구적, 자의적
인 해석이 많다는 점이다. 본문을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지엽적으로 보거나 설교자의 취향을 따
라 본문을 짜 맞추는 식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설교자의 주장이나 주제에 따라 추출식 
해석방법(distillation hermeneutics)을 따르는 것도 커다란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즉 본문을 전체
적으로 보면서 본문이 말하게 하지 않고 설교자가 말하려는 명제에 필요한 부분만 가져오는 형태
이다. 여기에서 설교자가 주인이 되고, 본문은 자료가 되거나 보조 자료(proof text)가 되고 만다
는 점이다. 이때 본문이 말씀하고 본문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가 본문을 지배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이러한 성경해석은 아무리 성경구절을 많이 인용하고 언급한다고 하더라도 비성서적
인 설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설교자들을 가리켜서 하나님께서는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다"(렘 14:14)라고 말씀하신다. 두려운 일이 아닌가?

5) 설교의 내용과 관련하여
  본래 기독교의 설교는 복음의 선포였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전달 통로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 설교에는 마치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설교와 같이 율법적인 내용으로 채워지는 경우가 허다
하다. 설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선포여야 하며, 율법적인 내용을 담고 있더라도 결
론은 언제나 복음적이어야 한다. 8년 전 미국 콜럼비아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한국에서 
온 목회자 계속교육의 통역을 맡은 적이 있다. 그 학교의 설교학 교수였던 웨이드 휴이(Wade 
Huie) 박사가 한국교회 설교에는 복음의 측면은 약하고 율법적인 측면이 너무 강하다면서 강의 
마지막 부분에서 강조했던 말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한국 방문 때 선물로 받았다는 작은 
장고를 겨드랑이에 끼고 "둥둥..." 두들기면서 간곡히 부탁하던 노교수의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었
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초빙교수로 한국을 방문해서 한 학기를 보내는 동안 여러 교회를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남다른 열정을 가진 한국교회 설교자들에게서 저는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큰 약점을 발견했는데, 설교에 있어 복음의 측면은 약하고 율법적인 측면이 강하다는 것이
었습니다. 돌아올 때 한 분이 저에게 이 장고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저는 이것을 '복음의 북'(drum 
of gospel)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한국 목회자들을 위한 모임에 갈 때면 언제나 이 장고를 가지
고 나갑니다. (둥둥...) 이 북소리를 들으면서 한가지 사실을 놓치지 마십시오. 율법을 완성하신 그
리스도께서 여러분들을 복음의 설교자로 세우셨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
다. (둥둥...) 복음! 복음을 설교하셔야 합니다. 언제나 복음으로 설교를 마치십시오. 언제나 설교의 
가장 핵심은 복음이 되게 하십시오." 그렇다. 언제나 설교는 복음으로 끝나야 한다. 잔뜩 화난 사
람처럼 꾸중하듯 하는 설교, "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메시지로 가득찬 설교보다는 희망을 주고, 격
려하며 치유를 가져오는 설교, 율법이 아니라 복음이 분명하게 들려지는 설교여야 한다. 물론 복
음을 바탕으로 한 설교라고 해서 죄를 묵과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설교 내용과 관련하여 또 한가지 지적할 것은 전반적으로 한국교회 설교는 예언적인 차원이 약
하는 점이다. 개인적인 구원과 신앙생활에 대해서는 깊이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설교의 사
회적인 차원에 있어서 예언적 기능은 무기력할 정도로 약하다. 이러한 취약점은 목회자들과 교인
들의 이원론적인 사고 구조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성과 속, 천국과 이 세상, 교회와 죄 많은 세상
을 구분하면서 설교자들은 주로 전자에만 그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가
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는 구절은 이러한 경향들을 강하게 뒤받침 하는데 애용하는 성구이다. 
교인들은 성경적인 설교자를 좋아한다고 하는데, 그들이 말하는 성경적 설교자는 성경과 복음만을 
전하는 설교자라고 한다. 복음의 사회적 차원을 도외시한 편협한 이해 때문에 야기된 주장이다. 
설교에서 예언적 기능이 약화된 또 하나의 이유로는 물량적이고 기복적인 복음이해도 그 한 요인
으로 들 수 있다. 근대화 운동의 모체였던 새마을 운동은 가난을 벗어나려는 발버둥은 분명 숭고
한 것이 사실이었으나 바른 윤리 도덕과 가치관 형성은 도외시함으로 많은 부작용들을 초래하게 
된다. 바르게, 잘 살려는 운동보다는 수단과 방법은 부차적인 잘 살아보려는 정신구조를 형성하면
서 물량주의, 물질주의, 한탕주의 등이 사회적인 부산물로 남게 된다. 이러한 사회적인 이데올로기
와 함께 신앙구조 역시 기복주의적인 경향들이 강하게 되었다. 자연히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
가와 죄와 불의에 대해 말씀으로 조명해주는 설교보다는 "영과 육이 잘되고 범사에 형통케 되는" 
길을 제시하는 설교에 주력하게 되었다. 성장지향주의는 교인들의 경향에 맞추어 그들이 듣기 좋
아하는 설교에 주안점을 두면서 자연히 설교의 예언적이고 사회적인 특성들을 한국교회 강단에서 
환영받지 못하게 되었고, 설교자들도 기피하는 메시지가 되었다. 그로 인한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사회는 병들고, 부패공화국, 부실공화국이라는 오명을 갖게 되었다. 물질주의, 쾌락주의, 한탕주의
의 사고는 자본주의의 산물과 같이 십자가의 네온으로 채색되는 아름다운 밤은 오히려 흑암을 더 
짙게 만드는 상황을 야기한다. 교회는 사회문제를 책임질만한 능력을 상실하면서 자기유희에 빠져
있는 게토집단으로 전락할 수 있는 위험에 빠져 있다. 사회적으로도 지탄받는 "세습 공화국," "탈
사회적인 치외법권지역"과 같은 비판을 받게 되었고, 한국교회 속에 "예수는 없다"는 직격탄까지 
받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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