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10-10 19:33
[2]신약의 역사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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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11,981  

新約聖經의 정치적 사회적 배경

예수님의 초기 추종자들은 다 파레스틴에 사는 유대인들이었다. 그의 열두 제자들은 가룟 유다만 남방 출신이었고 다른 열한 제자는 다 갈릴리 출신이었다. 심지어 新約聖經의 모든 기록자들은 누가를 제외한 모두가 유대인이었다. 이스라엘 나라는 1만 평방 마일 밖에 안되는 스위스 보다 작은 나라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는 한국의 역사만큼 복잡하게 외세와 관련되어 있었다. 그것은 그 주변에 바벨론, 페르샤, 그리고 에집트 등 많은 강대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들의 정치적 문화적 배경을 중심으로 간단히 살펴 보도록 하겠다. 그 순서는 바벨론-페르샤-그리스시대, 그 중에서도 알렉산더 대왕의 사후에 이스라엘 통치를 위하여 서고 다투었던 프톨레미 왕조와 셀루커스 왕조, 그리고 그후 100년동안 독립을 유지했던 마카비시대, 끝으로 로마시대의 정치적 사회적 측면 순으로 살펴 보도록 하겠다.

1.바벨론시대(626-539.B.C)

앗수르가 북왕국인 이스라엘을 점령(722 B.C)한 뒤 남왕국인 유다는 단순히 정치적 실제로서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여 왔다. 그러다가 바벨론이 에집트를 점령한 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유다를 정치적으로 통치하기 시작했다(605 B.C). 이 때 다니엘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왔다(단1:1-6). 성전의 기물들은 몰수되어 바벨론으로 실려갔다.

얼마후 유대왕 여호야김이 바벨론에 반항했으나 붙들려 잡혀갔고,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또 반항(597.B.C)했으나 붙잡혔기에 석 달 정권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 때 왕 뿐 아니라 그의 어머니와 아내들과 군대들의 장성들과 군인, 그리고 많은 기술자들이 끌려갔다(왕하24:6-16). 당시의 선지자인 젊은 에스겔(겔1:2)도 끌려갔다.

느부갓네살은 여호야긴의 숙부인 마타니아(Mattaniah)를 시드기야로 개명하여 왕위에 올려 놓았다(왕하24:17-20). 그러나 시드기야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충고를 어기고 애굽과 동맹을 맺어 바벨론에 대항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에 목전에서 아들들이 잡혀 죽는 것을 보았고 자신의 양눈도 뽑혀 소경이 된 후에 쇠사슬에 묶여 바벨론으로 잡혀갔다. 이 때 그 아름답던 솔로몬의 성전은 불타버리고 예루살렘 성의 벽은 파괴되었으며, 남은 국민들은 세번째 포로로 잡혀갔다 (586 B.C,왕하25:1-21). 이리하여 사울에서 시작한 유다의 500년 왕국은 종막을 고하게 된 것이다.

반 세기 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70년 동안의 포로 생활(605-535 B.C)을 하게 되었다. 당시의 주요한 사건으로는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이 무너지자 성전 예배의식은 없어지고, 회당(Synagogue)에 모여 예배드리며 구약 聖經을 연구하고 친교를 가지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이 회당 모임을 통하여 유대교가 체계화 되기 시작하여 후에 바울의 선교활동의 중심지가 된 것이다. 당시에 일어난 것 가운데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서기관(Scribe)들의 계급이 생기게 된 것이다.

제사장들이 예배를 인도할 수 없게 되자 서기관들이 구약 聖經을 베끼며(copy)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서기관들은 유대교를 연구하는 신학자들이 된 것이다. 끝으로 바벨론 포로시대의 산물로서 디아스포라(Diaspora)를 들지 않을 수 없다. 디아스포라란 해외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 즉 70년의 포로생활 후 본국 귀환이 허락된 후 바벨론에 그대로 남아서 살기를 작정한 사람들을 말한다. 그런데 이들이 후에 新約敎會의 핵심이 되었다.

2.페르샤시대(539-331 B.C)

바벨론이 페르샤의 고레스 왕에 의해 멸망되자 고레스 왕은 바벨론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본국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축할 것을 허락하는 칙령을 내렸다(스1-4장). 그리하여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은 세번에 걸쳐 귀환하게 되었는데 제1차 귀환(536 B.C.)은 스룹바벨의 인솔로, 제2차 귀환(458 B.C)은 에스라 인솔로, 제 3차 귀환(445 B.C)은 느혜미야 인솔로 이루어졌다.

해방의 기쁨을 안겨준 고레스가 죽고 캄비세스(Cambyses)가 즉위했으나 8년 안에 죽고 그후 다리오 1세가 즉위하여 35년 동안 통치하게 되었다. 그 당시 학개, 스가랴 등의 선지자들이 나타나 성전 건축을 연기한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신랄히 꾸짖었다. 마침 다리오가 법정 기록에서 고레스의 칙령을 발견하여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위해 정부의 기금으로 보조하도록 허락했다(스6:7-12). 그리하여 성전재건이 완성되니 때는 516-515 B.C.이었다. 이 성전은 후에 헤롯 1 세에 의해 확장되었으며(요2:20). A.D.70년 로마의 디도(Titus)대장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멸망하기까지 계속되었다.

그 후 켈케스(Xerxes)가 뒤를 잇게 되니 그가 에스더의 남편인 아하수에로 왕이다. 그는 헬라인들에게는 적개심을 가졌으나,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노력에 힘입어 모든 유대인을 없애려는 하만의 음모에서 유대인들을 구한 구원자가 되었다. 그의 후계자인 아닥사스다(Artaxerxes) 1세가 서기관 에스라에게 팔레스틴에 돌아가 율법을 가르치도록 허락했다(스7장-10장).

에스라가 귀국한 후(485 B.C.)얼마 안있어 느헤미야가 돌아와(445 B.C).예루살렘성을 재건함으로써 새로운 종교적 붐이 일어났다. 이와 같은 모세 오경에 의한 종교개혁은 제사(祭司)이며 학자인 에스라와 평신도이면서 총독인 느혜미야에 의해 성취되었다.

그들은 죄의 회개와 이방인들과 결혼한 사람들은 헤어지도록 했고, 안식일과 안식년의 엄수, 성전의 재정적 후원(스8장-10장)을 하도록 했다. 이 일이 완성되자 느혜미야는 폐르샤로 돌아갔으나, 두번째 돌아왔을 때 국민의 해이한 신앙을 보고 재훈련을 명하니(느13장) 이것이 구약에 기록된 역사의 마지막이다. 그뿐 아니라 예언자의 시대도 종말을 고하게 되어 세례요한이 나타나기까지 400여년 동안은 예언자가 없는 침묵의 시대가 된다.

3.그리이스시대(331-63 B.C.)

마게돈의 빌립(Philip)이 헬라제국의 기초를 놓았다. 본래 헬라는 도시국가였는데 그의 이전에는 아무도 이 도시국가들을 통합하지 못했다. 빌립이 죽자 그의 아들 알렉산더는 짧은 시일 내에 지중해를 줌심으로 모든 나라를 차례로 점령했다. 팔레스틴과 에집트도 점령했다. 그러나 예루살렘만은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당시의 대제사장인 자두아(Jaddua)가 다니엘 8장의 예언을 통하여 알렉산더가 폐르샤를 점령할 것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 사실성 여부는 알기가 어렵다.

정복 왕 알렉산더가 그리이스로 돌아오는 도중 323 B.C.여름 말라리아와 과음으로 쓰러지자 온 천하는 그의 부하 장성들의 놀음판이 되었다. 알렉산더는 일찍 죽었지만 그의 공헌은 대단히 컸다. 무엇보다도 헬라 문화의 보급과 언어의 보급은 헬라 문명을 동방으로 소개함으로써 글자 그대로 세계 문화를 형성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헬라 문화는 무려 600여년 동안(300 B.C-A.D.300)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당시의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으며, 헬라어는 당시의 세계어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新約聖經이 당시의 세계어인 헬라어로 그것도 코이네(Koine)헬라어로 기록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마침내 헬라 왕국은 네 장군들이 나누어 가지게 되었다. 프톨레미(Ptolemy)는 에집트를, 안티파테(Antipater)는 마케도니아와 그리스를, 리시마쿠스(Lysimachus)는 동북부에 있는 트리키아를, 셀루커스(Seleucus)는 수리아를 각기 차지하게 되었다. 팔레스틴은 처음에 프톨레미와 셀루커스 사이의 경합지였으나 마침내 프톨레미의 통치 하에 들어갔다(285 B.C).

그러나 80년 뒤 자칭 헬라문화의 사도라고 부르는 셀루커스 왕조에 의하여 통치받게 되었다. 당시 가장 유명한 왕은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Antiochus 1V Epiphanes)였다. 그는 로마에 볼모로 12년간 잡혔다 온 모세 율법에 충실한 자들을 다 개종시키거나 다 없애려 했다(168 B.C.). 그래서 안식일을 지키는 자나 할례를 행하는 자, 히브리어로 기록된 聖經을 가진 자들을 사형에 처하였다. 그리고는 곳곳에 이방의 신상을 세웠다.

더우기 예루살렘 성전 가운데 신상을 세우고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돼지의 피로 제단을 적시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를 (나타난 신)이란 뜻을 가지는 (에피파네스)란 이름 대신 (미친 놈)이란 뜻의 (에피마네스 Epimmanes)라고 부를 정도였다. 이런 불경한 행동은 그 후에도 게속되었다.

4.하스모니안 독립시대(167-163 B.C)

처음에는 잔인한 행동에 대하여 소극적으로 대하고 처형을 받았으나 점차 여기에 대항하여 싸우려는 각오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모딘(Modin)이란 마을에 (마티디아스)란 늙은 제사장이 그의 다섯 아들 유다,요나단, 시몬 등과 함께 일어나 수리아의 관원을 죽이고 마카비 혁명을 일으켜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가지게 되었다. 처음엔 계속해서 실패했으나, 차츰 인원도 늘고 전술도 밝아져 수리아의 군대를 물리치게 되고 예루살렘을 해방시켰다. 이때부터 소위 하스 모니안 의 통치가 시작된 것이다. 이 승리를 기념한 것이 (하누카:Hanukkah) 절기로서 빛의 절기라고 부른다.

그러나 셋째 아들인 시몬이 죽자 그의 아들인 요한 힐카너스(Hyrcanus)가 대제사장 겸 왕의 자리에 앉게 됨으로서 63년 B.C.에 로마의 손에 통치권을 넘겨주기까지 질투와 의심과 욕심으로 멍든 정치를 하게 되었다.

당시 두 개의 종교적 정치적 당파가 생기게 되었다. 하나는 하시딤(Hasidim)이라고 불리우는 보수파(保守派)로서 그들은 유대의 종교적 국가적 자유를 유지하면서 헬라문화에 대하여 저항하는 자들로서 이 분리주의자들이 후일에 바리새인들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반면 두번째 당은 헬라주의적 경향을 가진 사두개인들이었다. 이 두 당의 특징에 대하여는 종교적 배경을 말할 때 하기로 한다.

5.로마의 통치시대(63 B.C.부터)

힐카너스 2세가 그의 동생인 아리스토뷰로스(Aristobulus) 2세에 의하여 불의로 축출되자 아라비아로 망명하였다. 이때 헤롯 1세의 아버지요, 이두메 사람인 안티파터와 알게 되었다. 안티파터의 충고로 아라비아의 군대를 이용하여 자기를 축출했던 동생 아리스토뷰로스 2세를 물리치려 했다. 눈치를 챈 로마가 힐카너스 2세를 도왔고, 그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왕이요 대제사장이 되었다. 이로 인해 아티파터의 가문은 팔레스틴의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때 축출된 아리스토뷰로스 2세의 아들인 안티고너스(Antigonus)가 팔티안들과 공모하여 예루살렘을 되찾게 되자 젊은 헤롯 1세는 로마로 도망가서 당시 로마의 통치자 중에 하나인 안토니(Antony)의 환심을 사게 되어 유대인의 왕이란 칭호를 받게 되었다. 그는 로마의 힘을 빌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니, 명맥만 유지하던 하스모니안 (즉 마카비) 가문의 통치에 종막을 고하게 되었고, 유대는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

헤롯은 유능한 정치인이었으나 잔인하여 열 아내 중 둘을 죽였고 처남 하나, 세 아들, 그리고 장모를 죽인 사람이다. 더우기 베들레헴에 있는 두 살 이하의 사내 아이들을 죽인 자이다(마2;16). 그는 죽을 때(4 B.C) 국민들이 울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많은 유능한 지도자들을 가두어 두었으며, 그가 죽은 뒤 다 죽여서 국민들이 울도록 하려 했으나 갑자기 죽었기 때문에 실패하기도 했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증축하고(막13:1) 경제적 번영을 누리기도 했다.

헤롯 1세가 죽자 그의 유언에 따라 그의 영토는 세 아들에게 나누어 주어졌다. 아켈라오(Archelaus)는 팔레스틴의 남쪽 부분, 빌립(Philip)은 북동쪽,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는 갈릴리와 베뢰아 지방을 다스리게 되었다. 이 헤롯 안디바는 헤로디아 문제로 세례 요한을 처형했고(막6:17-29), 예수님을 다시 살아난 세례 요한으로 생각한 그는(마14:1-2) 예수님을 죽이려고 여러번 시도했다(눅13:31). 예수님은 그를 (여우)(눅13:32)라고 부를만큼 간교한 자였 다. A.D.39년 안디바는 헤로디아의 말을 듣고 로마에 가서 현 분봉왕의 직위에서 보다 높아지기 위하여 간청하려고 간 사이에 헤롯 아그립바 1세가 황제에게 고발하여 분봉왕직에서 추방했다. 아그립바는 야고보를 죽였고(행12:1-3), 베드로를 체포했으며 여러 초대敎會의 지도자들을 괴롭힌 자이다. 그는 A.D.44에 죽었고 그 후 17세 밖에 안된 헤롯 아그립바 2세(행25:)가 즉위하였다.

A.D.53년까지 유다는 로마의 영토나 다름없이 통치를 받다가, 그 후부터 A.D.66년까지 왕에게 통치를 받았다. A.D.66년에 반란이 일어나 로마와 전쟁을 하게 되었다. 네로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70년까지 정권을 유지하게 되었으나 70년 봄에 마침내 디도(Titus)장군에 의해서 예루살렘성은 무너지고, 지금까지 성전 중심의 유대교는 종막을 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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