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9-03-19 23:58
[2]요한복음의 영성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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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2,655  

III. ‘파라클레토스’, ‘성령’ 그리고 ‘진리의 영’

  
1. 말의 뜻
 
요한이 특이하게 선택한 또 하나의 중요한 용어는 ‘파라클레토스’(보혜사)이다. ‘파라클레토스’는 ‘로고스’와 마찬가지로 요한 만이 특별하게 사용하는 용어 중의 하나이다. 파라클레토스는 초대 교회 전승에는 낯선 표현이었다. 초대 교회는 성령의 체험이나 성령의 활동에 관한 이야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성령을 요한은 초대 교회가 흔히 사용하지도 않는 생소한 용어를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다. 파라클레토스는 요한이 초대 교회가 전하는 성령을 토착화의 과정을 거쳐서 새롭게 해석한 것이 아니었는가 하는 것이다. 성령이라는 표현이 이색적이고 피부에 와 닿기가 더딘 풍토에서는 친절하게 더 알기 쉽고 더 육감적이며 토착적인 표현을 요한이 발견하여 그것으로 전승이 믿어 내려오던 성령을 풍토에 맞게 다시 해석한 것이 아닐까 하였다는 것이다.
  
‘파라클레토스’의 의미가 무엇인지 또한 요한이 파라클레토스를 통하여 무엇을 의도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참으로 많은 연구가 있어 왔다. 현대에 이르러서 요한의 시대에 알아들을 수 있었던 파라클레토스라는 말이 아직도 그 많은 연구에도 불구하고 분명하게 확인해 놓을 수 없는 실정이다. 이 말은 순수한 헬라 말이다. 유대교를 배경한 초대 기독교의 많은 용어들은 히브리어나 아람어에서 기원한 것들이었고 근원을 구약이나 유대 문헌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그러나 파라클레토스의 경우에 있어서는 유대적인 근원을 언어학적으로 찾아내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고 그것을 시도해 보아 왔던 학자들의 견해도 매우 복잡하게 다양하다. 종교사학파의 학자들은 파라클레토스의 사상적 또는 문학적 배경에 대한 많은 연구를 제시하여 파라클레토스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지만 완전히 통일된 이론에 도달하고 있는 상태가 아니다.
  
요한이 어느 정도 초대 교회의 전승에 충실하였으며 어느 정도 자신의 새로운 해석을 첨가하였는지를 알아보려는 것이다. 얼마나 전승이 물려준 성령관을 요한이 충실하게 보존하고 있는지 또 얼마나 그것을 수정하고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며 새롭게 전하려고 하고 있는지를 면밀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 최근까지의 연구들이 상당한 도움이 된다. 그 연구들을 바탕으로 하여 이 문제를 취급해 보는 것이 좋겠지만 결정적인 해답은 요한복음 자체의 문맥 속에서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2. 파라클레토스와 성령
 
파라클레토스는 신약성서 가운데서 오직 요한의 문서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표현이다. 요한복음에 4번 나타난다(14:16,26, 15:26, 16:7). 또한 요한 일서에서는 1번 등장한다(2:1). 신약성서의 어느 곳에서도 같은 말이 발견되지 않는다. 이 말은 헬라 말이다. 구약의 히브리어의 번역일 가능성도 학자들은 연구해 보았다. 그러나 칠십인 역(LXX) 어느 곳에서도 파라클레토스는 발견되지 않는다. 랍비 문학에 사용된 히브리어 가운데는 헬라어의 파라클레토스의 음을 빌어온 듯한 낱말들이 있다. ‘프르클리트’란 자음으로 구성된 낱말은 파라클레토스의 헬라어 발음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발견된 랍비 문학은 미슈나로서(아보트 4:11) 요한복음이 기록되기보다 아주 후대의 문헌이며 요한복음의 배경 연구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문헌이다. 그러므로 파라클레토스라는 낱말을 요한이 사용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요한의 독자적인 선택에 의한 것이며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경향을 따른 것이 아니라고 본다.
  
파라클레토스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든지 간에 이것이 요한이 독자적으로 택하여 사용한 용어이며 요한의 특이한 의도를 나타내 주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요한의 의도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를 읽는 독자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표현이라는 확신 아래서 이 말을 마음놓고 사용한 것이 아닌가 본다. 요한에게만 특이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이 특이한 표현을 가지고 요한은 기존의 초대 교회 전승이 전해 주고 있는 성령을 가리켜 말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요한은 파라클레토스가 성령을 가리켜 말한 것임을 직접 밝힌다. 요한은 말한다. “보혜사(파라클레토스)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파라클레토스 토 푸뉴마 토 하기온’)이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겠??”(14:26)다고 하며 파라클레토스는 성령을 가리키고 있음을 분명하게 드러내 보인다. 사실 한국 교회에서는 파라클레토스와 성령을 연결 지어 “보혜사 성신”이라는 하나의 고유명사로 부르는 것은 정당한 일이며 원문에 충실한 번역에 근거한 것이 되기도 하다.
  
파라클레토스란 표현을 사용한 곳은 14장에서부터 17장까지의 특별한 구간에서 뿐이다. 그러나 그 말을 사용하지 않고 있는 다른 부분에서 요한은 성령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나를 믿는 사람은??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같이 흘러나올 것이다”라고 예수는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라는 것이다(7:39). 
  
그 구절을 14-17장의 보혜사에 관한 설명에 비추어 볼 때 보혜사는 바로 요한이 말하고 있는 성령과 동일한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7장에서 요한은 믿는 사람들이 받게 될 성령을 말하고 있으나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으시지 않았기 때문에 성령이 사람들에게 임하시지 않았다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14장 아래의 보혜사의 경우도 그렇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며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낼 것이다”(16:7). 
  
두 구절을 나란히 비교해 볼 때 7장의 성령과 16장의 보혜사는 근본적인 공통점이 나타난다. 곧 보혜사나 성령이나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난 다음에 하나님으로부터 믿는 신자들에게 보내심을 받게 될 성령을 가리킨 것이다. 성령에 관해서 요한은 어김없이 초대 교회의 전승을 계승한 것이다.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신 다음 초대 교회는 곧 성령을 받게 된 것이다(행 1:5, 요 20:22, 1:32-33, 마 28:19, 눅 24:49).
  
전승을 따르면 부활하신 후의 예수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게 될 것을 예고하시고 또 그들이 성령을 받게 되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고 그리스도는 세상 끝날 까지 제자들과 함께 계시리라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 있어서 요한의 파라클레토스는 전승의 성령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요한 역시 보혜사가??오시면 그가 예수를 증거 하실 것이며 제자들도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된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공관 복음서의 전승에서와 같이 요한의 파라클레토스에 관한 기사 속에는 그리스도께서 세상 끝날 까지 언제나 제자들과 함께 계시리라는 것이 보장되어 있다. 파라클레토스 기사 속에는 파라클레토스를 제자들에게로 보내신다는 말씀과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로 다시 오시겠다는 말씀도 함께 들어 있다(14:28, 16:16, 15장 참조).
  
요한의 파라클레토스와 공관 복음서의 성령의 또하나의 공통점이 나타난다. 박해와 탄압 속에서 심문을 받게 될 제자들을 위한 성령의 도움의 역할에 관한 것이다. 전승의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잡혀 끌려갈지라도 너희가 무슨 말을 할까 하고 미리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말할 것을 지시하여 주시는 대로 말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성령이시다” 라는 것이다(막 13:11). 요한의 보혜사 성령도 그와 같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14:27). 보혜사 성령이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겠”다는 것이다(14:26).
  
요한이 성령에 관해서 전승을 따르고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축자적으로 전승과 동일한 표현을 반복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파라클레토스라고 하는 자기 특유의 표현을 가지고 성령을 말하고 있다는데 는 무엇인가 요한의 심정에는 성령 강림에 대하여 새로운 이해와 특별한 의미를 첨가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요한은 파라클레토스를 성령이라고 말하지만 성령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진리의 영”이라고 부르는 것을 선호한다(14:17, 15:26, 16:13). 파라클레토스를 성령으로 표현한 것이 한번뿐이라는 사실에 비해서 전리의 영으로 표현한 것은 무려 세 번이나 된다. 파라클레토스를 성령이라고 하기보다 차라리 진리의 영이라고 부르고 싶어하는 것이 요한의 심정이다. 그렇게 부르는 것이 오히려 보혜사 성령에 대한 더 적절한 표현이라고 본 것이 아닌가 한다.
  
‘하기온’이라는 말이 붙은 성령이라는 명칭을 요한이 빈번하게 언급하지는 않지만 하기온이 없이 그저 “영”이라는 말을 가지고 성령의 역할을 자주 이야기하고 있다. 영(프뉴마) 또는 관사를 붙인 영(토 푸뉴마)이라는 말을 도합 18번이나 요한이 사용하는 것을 보아서 요한이 성령을 가리킬 때 차라리 성령이라는 표현보다는 다만 영이라는 표현을 더 선호한 것 같이 보인다. ‘영’이라는 표현을 선호하였다는 것도 성령에 대한 요한의 숨은 의도에서 온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초대 교회에 있어서 성령에 대한 이해는 몇 단계를 거쳐온 것으로 보인다. 누가?사도행전 및 공관 복음서가 이해했던 성령의 역할은 그런 것이었다. 놀라우신 성령은 물적으로 가시화 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성령의 역사는 이적과 기사를 낳게 한다. 그것이 유대에 근거를 두었던 최초의 교회의 성령 체험이었던 것이다. 바울은 그와 같은 것을 바울 이전의 초대 교회의 교회의 양상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바울도 그와 같은 성령의 놀라운 능력의 역사를 그대로 시인하고 인정한다. 방언의 능력과 기적의 역사를 시인하였다. 그렇지만 바울은 이런 현상에 대하여 우려를 표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 같은 일보다도 더욱 중요한 성령의 은사들이 많이 있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의 능력을 성령의 기능으로 더욱 중요한 것으로 보았다. 또한 성령의 능력은 윤리적으로 선한 행실을 가져오게 하는 힘이라는 면을 바울은 더욱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다. 바울을 거쳐 온 모든 초대 교회의 전승을 따르면서도 요한은 자기 나름대로의 새로운 이해를 첨가한다. 새로운 이해란 곧 새로운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새로운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새로운 성령 이해를 촉구한 것이다. 
  
요한은 초대 교회가 높이 평가하고 있었던 황홀함의 체험과 카리스마적인 요소를 겨냥하지 않고 반면에 합리적인 말씀과 은혜와 진리 면에 근거한 영성 생활면을 더 높이 평가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의도를 나타낸다. 그와 같은 요한의 특이한 의도를 살리기 위해서 요한은 파라클레토스와 진리의 영이라는 새로운 표현을 도입한 것이다. 파라클레토스는 전승과의 많은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전승과 다른 요한의 특색을 드러내는 표현으로서 우리의 관심을 끌게 된다.
  
그러면 파라클레토스의 뜻은 무엇인가? 흔히 파라클레토스의 연구가들은 그 말의 사전 상의 의미를 밝히는 일로부터 연구를 시작하기도 한다. 사전 상의 의미로써 그 말의 어근을 추적해 보는 일이 중요하다. 파라클레토스는 동사 파라칼레인으로부터 온 것이다. 간구한다는 뜻이다. 파라클레토스는 그 동사의 수동형으로 된 명사이다. 도움이 필요하므로 간청하여 불러들인 사람이라는 뜻이다. 일찍이 그런 의미에서 카운슬러나 변호사를 뜻하는 것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파라클레토스는 능동적인 뜻을 가진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런 경우에 그 말의 뜻은 남을 위해서 간청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되며 중보자나 대변인으로 풀이된다. 또 다른 뜻도 있다. 파라클레토스는 파라클레시스와 관련된 낱말로 위로나 위안이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도 본다. 그런 경우에는 위로해 주는 자라는 의미로도 풀이된다. 이처럼 언어학적으로 보기만 하더라도 파라클레토스는 다양한 뜻을 가진 낱말이다.
  
그러나 사전 상의 의미만을 가지고 그 뜻을 헤아려 본다는 것은 충분한 방법이 되지 못한다. 요한의 시대에 그 말이 하나의 고유명사로 사용되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가리켜 사용되어 온 고유명사였는지를 알아보아야만 한다. 그것을 알아볼 만한 직접적인 문헌은 없다. 요한을 제외한 신약의 다른 곳에서나 또한 인접의 문헌 가운데서도 바로 그 말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파라클레토스가 직접 발견된 문헌이 없다 하더라도 간접으로나마 그 용어의 배경에 관한 연구를 통해서 파라클레토스의 의미를 보다 세밀하게 설명할 수가 있을 것이다. 또 다른 하나의 방법은 요한의 전체에 흐르는 문맥을 통해서 요한이 어떤 신학적인 의미를 적재시켜 이 말을 사용하고 있는가를 알아보는 방법이다. 이 두 가지의 연구를 통해서만 비로소 요한의 파라클레토스의 충분한 의미를 정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의 연구, 곧 역사적인 배경 연구와 요한복음서의 전체의 맥락에 관한 모든 연구가 마무리되었을 때만 파라클레토스의 의미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3. 파라클레토스에 관한 배경 연구
 
이십세기에 들어서면서 파라클레토스 사상의 기원에 대한 역사적 연구가 널리 시도되어 왔다. 주로 종교사학파의 학자들이 위주가 되어 배경의 연구를 한 것이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파라클레토스라는 헬라어가 직접 사용된 문헌은 없었다. 다만 간접적인 방법으로 유사한 다른 용어와의 비교를 통해서 배경 연구를 하여보는 것이다. 그같은 연구들을 크게 다음의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만다교의 야와르(Yawar) 사상
한동안 종교사학파의 거장들은 요한 복음서의 역사적 배경을 헬라적이고 노스틱적인 세계에 가까운 것으로 보아 왔었다. 요한의 사상이 노스틱주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고 보았던 것이다. 요한의 파라클레토스도 노스틱 종교였던 만다교의 표현에서 빌어온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만다교의 문헌에는 야와르란 존재가 있다. 그는 천사적인 존재로써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한다. 20세기 초반에 바우어(W. Bauer)는 바로 요한복음서가 있기 전에 만다교가 있었고 만다교의 영향이 요한의 파라클레토스 사상에까지 미친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보다 앞서 루돌프 불트만(R. Bultmann)은 만다교 등의 노스틱 문서와 요한복음의 유사한 증거를 더 많이 제시하면서 요한의 파라클레토스 사상이 만다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만다교의 도우시는 천사, 야와르에게서 요한의 파라클레토스와 같은 존재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만다교의 야와르도 요한의 파라클레토스와 같이 의인들의 있을 곳을 마련하며 계시자의 역할을 하며 박해를 직면한 신자들을 돕는다.
  
요한의 파라클레토스가 만다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견해는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첫째의 이유로 위에 언급한 학자들이 비교의 도구로 사용한 만다교의 문헌들은 요한과 동 시대의 문헌도 아닐 뿐만 아니라 요한 보다 몇 세기 후대의 문헌이라는 점이다. 후대의 만다교로부터 이전의 요한 복음서가 영향을 받을 수는 없는 일이다. 다드(C.H. Dodd)는 만다교의 문헌들이 신약 시대의 기독교보다 아주 후대의 문헌이라는 것을 매우 설득력 있게 결론짓는다. 그 뿐만이 아니다. 보른캄과 레이몬드 브라운을 위시한 많은 학자들은 여러 가지 면에 있어서 만다교의 야와르는 요한의 파라클레토스와 다르다는 점들을 지적하고 있다. 드로우어(E.S. Drower)의 비교 연구에 의하면 만다교의 야와르가 도우시는 신화적 존재를 뜻하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있을 뿐만 아니라 브라운에 따르면 요한에 나타난 파라클레토스라는 헬라어가 도우시는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는 것이다. 보른캄은 만다교의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가능성에 반대되는 점들을 지적하였다.
  
노스틱 사상이 아니더라도 헬라의 영향을 받은 유대 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아심을 가져 볼 수도 있다. 예를 들어서 필로의 글이나 헬마스 문학 가운데서 파라클레토스와 비교해 볼만한 것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필로의 경우 로고스는 세상을 하나님 앞에서 변호해 줄 대제사장의 역할을 하며 요한의 경우에도 하나님의 아들은 사람들의 기도를 하나님께 상달케 하는 다리의 역할을 함으로써 본질적인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보혜사를 그리스도에게 적용하여 그리스도가 하나님 앞에서의 중보자 역할을 가진 것으로 표현하는 요한복음은 필로의 보혜사 사상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다드는 말한다. 그러나 다드는 한번도 파라클레토스가 직접으로 필로의 문헌에 나타났다던가 또는 필로의 중보자 사상이 요한의 그것과 비교될 만한 증거를 제시해 주지 못한 채로 그와 같은 추측을 한 것이다.
  
위에서 알아본 결과로서는 요한의 파라클레토스는 헬라 세계나 헬라화된 노스틱 종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증명할 만한 확실한 증거를 제시할 수는 없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요한은 성령을 파라클레토스라는 용어로 표현하였을 때 굳이 성령의 활동을 헬라인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그런 용어를 택한 것이라고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구약의 고별문
헬라 종교와의 관련이 거의 없는 것이라고 판단됨에 따라서 다른 가능성의 모색이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다. 요한의 파라클레토스의 배경을 구약과 유대교의 문헌에서 찾아보는 것이다. 요한복음서의 파라클레토스라는 표현은 예수의 고별 담화문인 14장으로부터 17장 사이에만 나타난다. 문헌의 양식을 분석하는 연구는 요한에 나타난 고별 담화문이 일정한 문학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또 그 일정한 형식이 구약에 나타난 선생이 세상을 떠날 때의 후계자를 약속하는 고별문의 문학 형식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지적한다. 
  
뮬러(Muller)는 유대교의 문헌 가운데서 요한의 고별 담화와 비교가 될 만한 고별 담화 문학 형식을 지적하였다. 유대 문학에는 세상을 떠나가는 스승과 지도자들이 그들의 죽음에 실망하는 제자들과 추종자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떠나는 스승이 남기는 담화를 수록한 기록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요한의 보혜사 성령에 관한 기사는 고별 담화문 가운데서 발견된다. 요한복음서의 고별 담화는 13장으로부터 시작하여 17장에 이르는데 이 담화문은 고별 담화의 양식으로 되어 있다. 이 양식을 살펴보면 거기에는 몇 가지의 주요한 내용이 담겨져 있다. 첫째는 스승이신 예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게 되리라는 것을 예고하며 제자들을 위로하는 말씀이 있고, 그 다음에는 후계자가 되는 위로자 보혜사를 선생의 대신으로 보내 주실 것이라는 약속이 따르며, 끝으로 그 후계자가 될 보혜사는 영이시라는 것과 영의 역할이 무엇이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전체를 놓고 볼 때 그 후계자는 세상에 남아 있게 될 제자들을 위로해 주는 위로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리고 보혜사라고 하는 낱말은 위로해 주시는 이라는 뜻이 있다.
  
구약을 중심한 유대의 문헌에도 이것과 비교해 볼 수 있는 고별 담화의 문헌들이 있다. 민족의 지도자가 되는 모세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의 일을 기록한 고별의 기록이 있다. 모세는 죽기 전에 자기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신 32:44 이하). 그 기록에서 모세의 죽음이 예고된다. 모세는 세상에 남아 있게 될 그의 백성들에게 축복의 노래를 남긴다(신 33:1 이하).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하나 하나를 위한 축복과 기원이었다. 축복 가운데서 분명한 것은 주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보호하시며 위로해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도우시려고 하늘에서 구름을 타시고 위엄 있게 오신다는 것이다(신 33:3,26). 백성들에 대한 간곡한 부탁은 모세가 전하여 준 율법을 지키라는 것이다. 율법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곧 그들의 생명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떠나는 모세와 같은 후계자를 하나님은 보내 주시리라는 것이다. 모세는 자기의 후계자로 여호수아를 안수하니 여호수아는 지혜의 영을 받게 된다. 이것은 모세라는 지도자가 세상을 떠날 때의 고별 담화의 내용이다.
  
열왕기 하서에는 엘리아의 고별에 대한 기사가 있다. 고별 담화가 요한의 그것과는 꼭 같은 문학의 형식은 아니지만 세상을 떠나는 엘리야는 세상에 남아 있게 될 제자, 엘리사에게 떠나게 될 것을 확실하게 밝혀 주고 난 다음 제자 엘리사에게 “내가 무엇을 네게 해 주었으면 좋겠느냐?”고 묻는다. 그때에 엘리사는 “스승님의 능력을 두배나 내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대답한다. 이 기록은 담화로만 이어지지 않고 있다. 엘리사는 스승이 하였던 것과 같은 기적을 행하는데 처음에는 실패하였으나 그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난 다음에는 능력을 받을 수가 있게 되었다(왕하 2:1-15). 스승이 세상을 떠날 때 스승이 가졌던 영적인 능력을 그의 제자에게 물려주었던 것이다.
  
위와 같이 구약 성경 안에서도 스승의 이별을 주제로 하는 담화와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다. 그 담화 속에는 한결같이 후계자를 세워 주게 될 것이 약속된다. 후계자는 스승이 가지고 있던 것과 같은 영을 받게 된다. 담화나 이야기의 양식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요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고별 담화는 구약 성경의 고별 담화와 구조적으로나 성격적으로 서로 상통하는 것이 있다. 구약의 경우에서와 같이 요한의 담화문 속에서도 떠나는 스승을 계승하는 보혜사를 보내 주실 것과 또한 성령을 제자들에게 보내 주시리라는 약속을 남겨 놓으신다. 비교를 통해 볼 때 구약적인 배경은 요한의 고별문을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4. 요한의 문맥 상으로 본 파라클레토스
 
파라클레토스는 성령이다. 성령 강림에 대한 요한의 표현이다. 파라클레토스는 예수가 세상을 떠나신 다음 제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보내 주실 성령이다(14:16,26, 16:7). 예수를 계승해서 보내심을 받게 될 보혜사 성령에 대한 요한의 기록은 주로 기능 면이 강조되어 있다. 인격적 존재로서라기보다 그가 하시는 역할에 관한 것이 비중이 크다. 첫 번째의 기능은 예수의 말씀을 다시 회상하게 하는 일이다. 파라클레토스로서의 성령의 일차적인 역할은 예수의 떠나심으로 말미암아 실망에 차 있는 제자들의 마음 속에 스승이 살아 계셨을 때에 가르치셨던 모든 교훈들을 다시 기억하게 하시는 역할이다(14:26). 예수로부터 받은 것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신다(16:15). 파라클레토스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서(14:17, 16:13) 제자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한다(16:13). 그것은 제자들에게 진리를 알게 하신다는 말이다. 진리는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신 일이 있다.
  
그리스도가 진리라고 말한 것은 주로 그의 가르치심을 포함해서 말한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말한다면 하나님의 진리이다(요 17:17). 파라클레토스는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들은 것만 일러주실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 가운데는 미래에 관한 예언적인 말씀도 포함되어 있었다. 보혜사는 또한 앞으로 올 일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신다.
  
파라클레토스의 또다른 중요한 역할은 예수의 부재 시에 예수를 대신하여 제자들 가운데 임재하시는 존재로서의 기능이다. 세상을 떠나신 예수는 사후에도 파라클레토스의 존재로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 하신다. 물론 파라클레토스는 인격적 존재로서의 예수와 동일한 존재라는 말은 아니다. ‘다른 보혜사’(요 14:15)라고 한다. 그는 영적인 면에서 생전의 예수와 동일한 분으로 제자들 가운데 영원히 계실 것이다(요 14:15). 직선적인 표현으로 말한 곳은 없다. 그러나 여러 가지 면을 살펴 볼 때 파라클레토스는 살아생전의 예수와 같으신 존재라는 것을 암시해 준다. 병행되는 점들을 브라운은 열거해 보았다. 그 중의 몇 가지만을 예로 들어본다. 파라클레토스는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아서 오신 분이다. 예수도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세상에 오신 분이다. 예수의 요청을 받아서 아버지는 성령을 주신다. 마찬가지로 아버지는 아들을 주셨다. 아버지는 파라클레토스를 보내신다. 그와 같이 아들도 파라클레토스를 보내신다. 파라클레토스는 예수의 이름으로 보냄을 받았다. 예수도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냄을 받으신 분이다. 
  
비교를 통해서 브라운은 이렇게 결론짓는다. 실제로 모든 면에 있어서 파라클레토스에 관한 이야기는 예수에 관한 이야기와 일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다른 보혜사는 또 한 분의 예수라는 것이다(??“another Paraclete is another Jesus”). 보혜사의 역할은 부재 중의 그리스도가 신비로운 영성적 체험을 통하여 믿는 사람들 가운데 항상 같이하신다는 것이다. 예수의 기도 가운데서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 날에 너희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요 14:20).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모두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신다는 말씀이다(요 17:20). 영성 체험은 그리스도 체험이다. 성령의 체험은 그리스도의 동참이다. 요한의 성령은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이다.
  
다음의 기능은 위로자의 역할이다. 박해를 직면하여 공포에 떨고 있는 신도들을 도우며 그들에게 위안과 용기를 주신다. 그것이 파라클레토스의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이다. 고별 담화는 위로로 시작된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요 14:1).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세상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했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예수는 말씀하신다(요 15:18 이하).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은 신자들이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요 16:1). 보혜사 곧 진리의 영이 오시면 신자들에게 기쁨을 안겨 줄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너희는 울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슬픔에 싸여도 그 슬픔이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16:20). “내가 다시 너희를 보게 될 때에는 너희의 마음이 기쁠 것이며 그 기쁨을 빼앗을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하신다”(요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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