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9-03-19 23:57
[1]요한복음의 영성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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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2,481  

요한복음의 영성론(靈性論)

제1부 - 요한복음의 영성 이해 
I. 성령의 근거 
1. 로고스와 성령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가 요한 복음서를 영적인 복음이라고 말하였지만, 성령이라는 말이 요한 복음서에 얼마나 적게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원어 상으로 “성령”(푸뉴마 하기온)은 요한 복음서에서 단 세 번밖에 나타나지 않는다(요 1:33, 20:22). 이같은 숫자는 다른 복음서들에 비해 유별나게 적은 숫자다. 요한은 때때로 성령을 의미하는 생각으로 그저 ‘영’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으며, 그것을 번역하는 사람들은 성령으로 번역하는 때가 많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 때문에 요한이 성령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영이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아마도 성령을 다른 표현으로 대신하여 말한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요한에게는 요한 나름의 특이한 말들이 나타난다. ‘생명’이라든지 ‘영원한 생명’ 또는 ‘로고스’와 같은 표현들이다. 혹시나 그와 같은 표현들이 성령이나 성령을 따라 사는 영성 생활을 가리키는 표현들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서 서두에는 다른 복음서들과 같은 예수의 탄생 기사도 없을 뿐만 아니라 탄생에 성령이 개입한 이야기도 없다. 그 반면에 로고스가 육신으로 나타나셨다는 기록이 있다. 성령으로 태어나신 것을 부정한 것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로고스로 오셨다는 것은 곧 성령으로 오셨다는 요한의 표현일 수가 있다. 요한복음서의 주요 부분 가운데서 간접적인 표현이나마 요한은 말씀 곧 로고스가 성령이시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낌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3:34) 라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며 또한 그것이 성령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말씀 또한 영이요 생명이라고 한다(6:62). 요한은 예수가 성령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의미가 생리적인 출생의 면보다도 영적인 면을 더 무게 있게 보았던 것이다. 
  
성령으로 난 사람(원문에는 영으로 난 사람이라고 함)에 관해서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고 한다(3:8). 이 말의 뜻은 성령으로 태어난다는 것이 생리적으로 출생하는 종류의 출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일이라는 뜻이다. 성령으로 난 자라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을 뜻하는 것인데 요한복음서의 서문에서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그런 사람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인간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다”(1:13).
  
예수의 기원에 관해서 요한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셨다고 하는 점을 강조한다. 그것은 곧 성령으로 오셨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초대 교회 전반에 걸쳐서 이해되고 있는 성령의 특징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심을 받게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성령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 성령은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것이다.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분은 인자이시다(3:13). 하나님이 세상에 주신 독생자이시고 그를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이 거듭 요한 복음서에는 강조되어 있다. 요한의 기독론의 특색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내심을 받은 그분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진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3:34). 이 점에 있어서 요한의 주요 부분과 로고스 서문과의 내용이 일치한다. 
  
서문에 따르면 말씀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1:1). 그것은 로고스가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라는 로고스의 기원을 말한 것인데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내려 주신 것은 성령이라고 초대 교회 전승들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비해서, 요한은 독특하게 하늘로부터 유래한 것이 로고스라고 하는 것을 더 강하게 역설한다. 그러므로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유래하셨다고 말할 때 그것이 생리적인 출생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로고스로 세상에 오셨다는 로고스의 면을 강조한 것이며 초대 교회가 성령으로 잉태하신 것을 기적이나 초자연적인 출생으로 풀이하고 있었다는 것에 비해서, 요한은 성령의 역할을 하나님의 말씀이나 그의 뜻으로 해석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2. 예수와 성령 세례
 
요한 복음서에 있어서 성령에 대한 본격적인 기록은 세례 요한의 증언의 기사 가운데 처음으로 나타난다(1:29-34). 이 기록 가운데서 중요한 요지가 밝혀진다. 곧 성령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성령으로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그리스도는 성령을 받으신 분일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가 바로 신자들의 영성 생활의 근거가 되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해 준다. 요한의 증언의 초점은 바로 이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설명한다면 모든 신자들의 성령 체험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이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성령에 관한 기사는 분명히 초대 교회의 전승에 근거한 것이다. 요한은 그 전승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그러나 그 전승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있어서 요한복음서는 초대 전승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요한복음은 요한복음 그 나름으로 기사를 수정하여 다시 쓰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선명한 수정의 흔적은 세례 요한의 증언이다(1:29-34). 세례 요한은 다만의 증인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가 예수에게 세례를 주었다던가 또는 예수께서 그에게 세례를 받으셨다는 전승의 이야기는 완전히 삭제해 버린 것이다. 아마도 여기에 요한복음서 기자의 의도가 숨어 있는 것 같다.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이 주는 것과 같은 물의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전혀 없으신 분으로 묘사할 의도에서 그리하였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예수께서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성령의 세례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으신 분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받으신 분으로 본 것이다.
  
요한 복음서에 의하면 세례 요한은 이렇게 증언한다. “나는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에서 내려와 이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때가 언제였는지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보았다(테데아마이)라는 동사의 시상은 분명히 깨달음에 이를 만한 시간을 포함한 과거의 일로 이야기한 것이다. 전에도 세례 요한은 말했다는 것이다. “내가 전에 내 뒤에 한 분이 오실 터인데 그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기 때문이다” 하고 말한 일이 있다는 것이다(1:30). 요한복음서는 시종 일관 이 점을 역설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1:1-2). 
  
복음서의 중도에서도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내가 있었다”(8:58). 분명히 요한복음서는 예수가 처음부터 하늘로부터 성령을 받으신 분으로 확신하고 있다. 또한 성령은 일회적인 체험이 아니다. 하늘에서 내려와 이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았다는 말 가운데 머무르다(카이 에메이넨)(1:32)라는 동사와 33절의 “머무르는 것을 보거든”의 머무르다(메논)라는 동사에 대해서 학자들의 의견은 매우 무게 있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곧 예수의 성령 체험은 그가 세례를 받으셨을 때에만 있을 수 있었던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포함한 연속적인 일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는 것이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왔다는 기사에 관해서 요한복음서는 공관 복음서의 기사와 근본적인 차이점을 나타내 보인다. 이 기사는 전승에서 온 것은 분명하지만 각각 복음서 기자들의 이해하는 방법에는 큰 차이가 있어 보인다. 공관 복음서의 마태나 누가는 성령이 강림하는 것을 가시적인 현상이나 육안으로 체험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사건으로 묘사하고 있다. 
  
마태에 의하면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 같이 자기 위에 내려오시는(‘에르코메논’이라는 동사를 덧붙여 행동적인 면을 더 강조한다) 것을 보셨습니다”(마 3:16) 라고 말함으로써 육체적인 동작으로 묘사하였다. 누가복음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소마티코)” 내려왔다고 함으로써 그 나타난 모양이 완전하게 육체적 형태로 나타난 현상으로 묘사하였다(눅 3:22). 공관 복음의 그와 같은 면과 요한 복음서의 기사를 비교해 볼 때 확실하게 요한 복음서의 성령 강림의 모습은 영적인 현상이다. 요한은 그와 같은 육체적인 동작을 나타내는 어떤 보조적인 표현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에게 있어서 성령의 강림은 오로지 영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영적인 의미의 성령 체험은 그리스도를 근거로 하여 크리스천들이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위에 성령이 강림하였다는 이야기를 보도하는 일에 있어서 요한복음서가 공관 복음서와 다른 점은 바로 이 점이다. 요한복음만이 다음의 설명을 보충하고 있다. “성령이 내려와서 어떤 사람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거든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인 줄 알라”는 것이다(1:33). 그리스도는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신자들이 성령을 체험할 수 있고 영성 생활을 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는 그리스도를 통하는 길이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신자들은 성령을 받게 될 것이다. 세례 요한의 증언 가운데 이것이 밝혀져 있다. 그의 증언을 수록하고 있는 요한복음서의 의도는 올바른 영성 생활은 그리스도에게서 근원 된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요한복음서는 시종 이런 입장을 지키고 있다. 복음서의 주요 부분에서 이것을 시사하고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한 바와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 같이 흘러나올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라는 것이다(7:38-39). 또 요한복음서의 후반부인 고별 담화문 속에서도 이것을 또 다시 다짐해 보인다(14:26).
 
요한 복음서에 있어서 성령 체험과 영성 생활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를 체험한다는 일이 초월적 신비에 빠지거나 비합리적인 황홀경(엑스타시) 체험이 아니다. 하나님의 로고스를 따르는 것과 로고스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사는 생활 속에서 성령의 체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 멋대로의 성령 체험을 요한은 배격한 것이다. 
  
기독교가 이방 세계로 선교를 확장해 나갈 때 흔히 있을 수 있는 현상은 선교지의 토착 신앙의 영성 체험을 본 따기 쉬운 것이다. 또한 신비적인 경험에 의지하여 그리스도의 가르치심과 상관없이 자기 식으로의 영성 체험을 내세우기도 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카리스마적 운동 가운데는 일찍이 그리스도께서 한 번도 본보여 주신 일이 없는 방법의 성령 체험으로 자기의 영적인 능력을 과시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리라고 본다. 그와 같은 그릇된 영성 체험을 견제하는 의미에서 요한은 특별히 건전한 영성 생활의 길을 제시한 것이다. 건전한 영성 생활이란 그리스도에게 근거를 둔 영성 생활이다. 그리스도에게 근거를 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토대를 둔 영성 생활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근거를 둔 영성 생활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처음부터 분명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 요한복음서의 성령 이해의 특징이다.
  
3. 은혜와 진리
 
공관 복음서 전승에 의하면 세례를 받으신 다음의 예수는 성령이 충만하여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이기신 기사가 나타난다(마 4:1-11, 막 1:12-13, 눅 4:1-13). 마태와 마가에는 없지만 누가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성령이 충만하여 요단강에서 올라오셨다”고 한다(눅 4:1). 그러나 요한 복음서에는 그와 같이 성령이 충만하셨다는 이야기는 없다. 그와는 달리 요한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다고 하는 기록이 나타난다. 공관 복음서의 성령이 충만하셨다는 기사와 비교가 된다. 공관 복음서에서와 같은 초대 교회의 전승을 요한의 이해 방식으로 해석한 것이 아닌가 추측이 된다. 
 
충만하다는 표현의 원어(플레에레스)는 누가와 요한이 일치한다. 성령에 관련해서 사용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요한은 성령에 관한 말이 기대되는 자리에 성령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그 자리에 은혜와 진리라는 말을 쓴 것이다. 예수께서 성령이 충만하셨다는 것이 요한에게 있어서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셨던 것으로 이해된 것이다. 여기에 요한의 의도가 있다. 요한에게 있어서 성령의 은사라는 것은 초자연적인 능력의 충만이 아니라 은혜와 진리로 충만한 것이며 성령 체험은 은혜와 진리를 따르는 생활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사실 언어상으로 볼 때 은혜와 성령 사이에는 그다지 거리가 먼 것은 아니다. 성령의 은사를 말할 때 헬라어로는 ‘카리스마’라고 한다. 은혜의 원어도 ‘카리스’로써 ‘카리스마’와 같은 말에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도 성령의 은사 중의 하나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은혜라는 ‘카리스’가 진리라고 하는 말과 함께 사용될 때에는 히브리어의 사랑과 진리(“헤세드와 오메드”)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가능성도 매우 크다. ‘헤세드’는 사랑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 사랑은 성령의 은사에 속한다. 실제로 바울은 성령의 은사의 여러 가지를 이야기할 때 사랑을 성령의 은사 중의 가장 큰 은사로 들었던 것이다(고전 12:31이하). 그리고 그것을 은혜의 선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이 예수를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으로 말할 때에는 성령이 충만하신 분이라는 것을 뜻한 것으로 보아 마땅하다.
  
요한복음서는 예수가 은혜와 함께 진리도 충만하신 분이라고 말한다(1:14). 진리도 성령을 의미한다. 요한은 보혜사 성령을 말할 때에 진리의 영이라고 불렀다(14:17, 15:26, 16:13). 성령의 주요한 성격을 진리로 표현한 것이다. 요한 복음서에 있어서 진리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이론이 구구하다. 한때는 영지주의나 헬라 사상적인 배경이 있는 것으로도 해석했었다.
  
그러나 구약성서에 나타난 진리 개념이라든지 또는 구약의 경?외전이나 사해 사본을 참작해 볼 때 요한복음서가 말하는 진리의 뜻은 유대인들의 사고방식과 매우 거리가 가까운 것이다. 잠언에 의하면 진리는 지혜를 뜻하고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이다(잠 23:23). 사해 종파의 글에 있어서나 경?외전에 있어서 진리는 신도들이 행하여야 할 윤리적인 선을 의미한다. 그리고 진리의 영은 선한 일로 인도하는 영적인 힘이다(유다의 유언 20:1, 5, IQS 3:6 etc).
  
요한은 행한다는 말과 함께 진리라는 말을 사용한다.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간다”고 한다(3:21). 요한에게 있어서 진리라는 것은 사람이 행하여야 하는 윤리적인 선을 의미하는 것이다. 요한의 진리 개념은 구약의 ‘오메드’에 가깝다. ‘오메드’는 지성적인 의미의 범주에 속한 것이 아니라 도덕적 범주에 속한 것이다. 요한의 진리가 얼마나 오메드의 뜻을 충실하게 따를 것일까에 대해서 다드(Dodd)는 어느 정도 의심을 갖기는 하지만 은혜와 진리라는 두 말의 합성은 히브리어 구약의 표현의 영향일 것으로 본다. 그것은 실천적인 것이다. “예수께서 자기를 믿는 후대 사람들에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대로 살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될 것이다.” 요한은 진리가 행하여야 하는 행동적 윤리에 속한 것임을 분명하게 한다(8:31-32). 제자들이 행하여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라고 불렀다(17:17). 그리고 그 말씀은 진리의 영이 가르쳐 주는 것이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들으신 말씀으로서 장차 제자들이 마땅히 행하여야 하는 일에 관한 것이라고 보았다(16:13). 크리스천들이 행할 바 도덕적인 선에 속한 것이다. 그리고 진리는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말씀을 가리킨다(8:45).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라고 하신다. 요한이 본 진리다. 진리가 곧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그리스도 자신이 진리이신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이다(1:17,18).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는 것과 하나님을 나타내 보이셨던 분은 바로 그분이시라는 것이다(1:17,18). 그리스도가 되시는 진리를 알게 하는 것은 곧 진리의 영이시라는 것이다(16:13).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요한의 성령에 대한 이해를 정리해 보자. 요한은 서두부터 성령의 역할을 기록해야 할 부분에서 성령을 대신하여 로고스와 로고스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통해서 사람들이 충만하게 체험할 수 있는 은혜와 진리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함으로써 요한은 성령을 통해 일어나는 일들이 초자연적이거나 기적적인 카리스마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와 같은 면을 더욱 중요시하고 있다. 또한 그 말씀을 믿고 행함으로써 체험할 수 있는 윤리적 생활면을 영성 생활의 더욱 중요한 열매로 본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요한복음서가 뜻하고 있는 점은 영성에 속한 모든 체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하는 점이다. 성령 체험의 원천은 그리스도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초대 교회는 성령 체험을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기는 집단이었다.
교회가 시작되고 발전해 나가는 데 있어서 성령의 도우심이 결정적이었다고 확신하였던 만큼 신자들은 성령의 은사를 받는 것을 가장 큰 자랑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고린도전서에 바울은 성령 체험이라고 할 때 아마도 신비적인 방법으로나 자기도취에서 얻어질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었던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기독교가 유대를 떠나 안디옥으로, 또는 아라비아, 소아시아나 마게도니아 그리고 로마와 이집트로 확장되어 나가는 과정에서 그와 같은 여러 이교도들의 지역으로부터 토착적인 영성 체험의 방법을 본받았었을 가능성의 위험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어느 모로 보거나 건전한 성령 체험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으리라고 본다. 광신적이고 흥분된 상태의 모든 영성 체험이 과연 모두 올바르고 바람직한 성령의 체험일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하며 반성과 재고의 필요를 느끼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와 같은 가정 아래서 요한 복음서를 볼 때 요한복음서는 공관 복음서 전승과의 현저한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II. 영원한 생명과 영성 생활
  
1. 거듭남과 성령
 
앞에서 이미 우리는 요한복음서가 성령이라는 표현을 조심스럽게 유보하며 로고스나 진리나 은혜와 같은 표현으로 대체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요한복음서는 또 다른 하나의 독특한 표현을 즐겨 사용하고 있다. ‘생명’ 또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표현이다. 요한은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을 다음의 짧은 글로 요약하여 말하였다. “여기에 기록한 것은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당신들로 믿게 하고 또 믿고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요 20:31). 
  
생명을 얻게 한다는 것이 요한 복음서를 기록한 가장 큰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생명이라는 말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은 거의 동의어가 되다시피 하는 같은 말이다. 요한은 ‘생명’ 또는 ‘영원한 생명’을 거듭 되풀이하여 강조하고 있는데 그 생명을 누린다는 것이 혹시나 요한에게 있어서 성령 체험과 영성 생활에 해당한 표현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다”(6:63). “내가(예수가) 너희에게 한 그 말은 영이요 생명이다”(6:63). 요한은 예수로 하여금 이렇게 말씀하시도록 하면서 영과 생명을 밀접하게 연결 짓는다.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으로 요한은 말하고 있다. 그것은 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말씀 때문인 것이며 말씀은 하나님께서 성령(영)을 주시기 때문이라고 한다(3:34). 예수께서 주시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4:14). 그가 주시는 물은 마시는 그 사람의 속에서 샘물이 되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할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난 다음 곧 이어서 요한은 영과 진리로 예배드려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4:23). 생명이라는 말은 쓰지 않았지만 예수께서 주시는 물과 관련하여 요한은 말하면서 “믿는 사람은??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같이 흘러나올 것”이라고 하며 그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라고 한다(7:38-39). 이렇게 생명과 성령을 밀접하게 관련된 것으로 본다. 
  
이와는 경우가 다르기는 하지만 목숨이나 생명을 가리킬 때에도 영이라는 표현을 썼다. 예수께서 운명하실 때 “다 이루어졌다”라고 말씀하신 후 머리를 떨어뜨리고 숨을 거두셨다고 하는데 원문에는 유일하게 요한복음서만 영(프뉴마)을 거두셨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19:30). 목숨을 ‘프뉴마’(영)로 표현한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구절들을 통해 볼 때 요한이 말하는 생명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은 성령이나 영과 밀접히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생명을 갖는다는 말은 영성 생활의 목적에 도달한다는 말이기도 하며 생명을 누린다는 말이 곧 영성 생활을 의미하는 것 같이 보인다.
  
생명과 성령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잘 드러내 주는 것은 거듭나는 생활에 관한 니고데모와 예수와의 담화 가운데 잘 나타난다. 요한에게 있어서 생명은 거듭나는 체험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거듭남의 목표가 생명이라는 말을 직접으로 하지는 않는다. 거듭남의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이라고 한다(3:5). 또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것이라고도 한다(3:3)(본다는 말은 경험한다, 맛본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과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게 된다는 말이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공관 복음서의 전승을 살펴봄으로써 확인할 수가 있다. 니고데모와의 담화와 같은 전승의 배경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율법 학자와의 대화가 공관 복음서에 나타난다. 마가에 따르면 어떤 율법 학자가 가장 큰 계명에 관해서 예수께 물었다(막 12:28-34, 마 22:34-40, 눅 10:25-28). 마가에 따르면 그때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 “너는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다”(막 12:34). 
  
공관 복음서에서 니고데모와 같은 율법 학자의 질문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는지에 관한 물음이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이었지만 누가의 보도에 따르면 율법 학자는 이렇게 물었다는 것이다.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물음의 내용을 영원한 생명에 관한 것이었다고 본 것이다(눅 10:25). 공관 복음서의 저자에게도 이미 율법 학자의 하나님 나라에 관한 물음이 영원한 생명에 관한 것이라는 것이 밝혀져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공관 복음서에서 이것을 보충할 만한 기사를 찾아볼 수 있다. “누구든지 어린이의 심정으로 하나님 나라를 맞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거기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이다(막 10:15, 마 18:3, 눅 18:17). 그런데 이 경우에 있어서도 누가는 의회원 중의 한 사람의 질문과 연결 지어 놓는다. “선하신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눅 18:18). 
  
분명한 사실은 이미 공관 복음서의 기자들 사이에서도 하나님 나라에 관한 질문은 곧 영원한 생명에 관한 질문과 동일한 것이라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요한은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거듭남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는 말을 하고 난 다음에 다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는다. 반면에 영원한 생명이 이 대화의 주제로 계속 나타난다(3:15,16, 34). 거듭남으로 얻게 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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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2 암브로시우스 '나봇의 이야기' 웹섬김이 03-19 2312
2531 오순절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 웹섬김이 03-19 2080
2530 예배의 중심 웹섬김이 03-19 2837
2529 40년 목회에 대한 반성 웹섬김이 02-18 2381
2528 [2]예배 사역자에게 필요한 15가지 웹섬김이 02-18 2199
2527 [1]예배 사역자에게 필요한 15가지 웹섬김이 02-18 2053
2526 힐링설교는 무엇이 먼저인가? 웹섬김이 02-18 2232
2525 개신교와 천주교는 같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웹섬김이 02-18 2276
2524 성령님의 13가지 특성 웹섬김이 02-05 2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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