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2-06-02 22:37
(11)유태인의 자녀를 낳고 기르는 53가지 지혜(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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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6,871  

27.아이들끼리 친구라고 해서 그 부모들까지 친구일 수는 없다
아이들끼리의 우정은 부모와는 무관하다
동양, 그중에서도 특히 일본에서는 아이가 없을 때는 이웃과 서로 내왕이
없다가도 아이가 태어나면 차츰 그 아이들로 인해 이웃과 친하게 지내는 부부가
많다고 한다.
일본에 사는 내 친구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그녀의 딸이 두어 살 정도가 되어 집밖에서 놀면서부터 이웃집 아이들과
친해지게 되었는데, 그러던 중 딸아이의 가장 친한 여자 친구가 매일 아침
현관으로 딸아이를 데리러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까지는 괜찮았으나, 어느
날인가부터는 아이를 따랄 그 아이의 어머니가 함께 놀러오는 것이었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아직 인사를 나눈 적이 없는데도 마치 친한 사이처럼 말을
걸어오더니, 마침내는 집안에까지 들어와서는 한 시간 이상이나 수다를 떨다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런 일이 자꾸 반복되자 그 친구는, '정말 곤란해. 나는 친구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데, 그녀는 마치 나와 오랜 친구나 되는 것처럼 시장이나
하이킹을 가자는 것 아니겠어'라면 내게 하소연을 했다.
우리 유태인 사회에서는 이와 같은 교제란 절대 있을 수 없다. 더구나
자녀들을 통해 부모들이 가까워지는 일은 없다. 부모들은 서로 얼굴만 알고
지낼 뿐, 그 한계를 넘어선 '친구'관계로 발전시키지는 않는다.

친구가 채소를 가지고 있으면 고기를 주어라
유태인의 격언 중에 '남의 백 마디 중상보다 친구의 무분별한 한마디의 말에
큰 상처를 입게 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친구는 중요한 존재이며, 또한 마치
자기 자신의 일부분과도 같다는 뜻이다. 자녀들끼리 친하다고 해서 부모들까지
쉽사리 친구가 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일단 친구로
생각하면 '친구가 채소를 가지고 있으면 고기를 줄 정도로' 친하게 지낸다.
한편, 부모들끼리 친구 사이라고 해서 자녀들끼리 친구가 되라는 법 또한
없다.
나의 경우, 친한 친구를 집으로 초대한다고 해도 대개 저녁식사 후에 하므로
아이들은 이미 잠자리에 들어간 다음이다. 혹시 아이들이 나와 친구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방에 들어오는 일이 있어도 '안녕하세요'라고 가볍게
인사만 할 뿐, 어른들의 대화에 끼어들거나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내가
아이들 친구의 부모에게 대하듯이, 우리 아이들도 나의 친구를 대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녀들은 자녀끼리, 부모는 부모끼리 각각 우정을 나누는 것이 우리
유태인들의 '교제방법'의 기본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우리 아이들이 내 친구와 친해진다고 해서 무슨 지장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요는 서로가 인격적으로 신뢰하며 교제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지, '자녀들이 친구라서' 또는 '부모들이 친구라서'라는 조건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이것이 포인트!
아이들끼리의 우정 때문에 그 부모가 서로 친구가 될 필요는 없다.
부모들끼리 친구 사이라고 해서 자녀들끼리 친구가 되라는 법 또한 없다.

28.남의 집을 방문할 때는 젖먹이를 데리고 가지 않는다
젖먹이를 바깥세상과 접촉시키는 것은 좋지 않다
우리 유태인들은 생후 1년 전후의 젖먹이는 바깥세상과의 접촉을 피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젖먹이를 데리고 외출하는 일이란 거의
없다. 더구나 남의 집을 방문할 때는 더 더욱 그렇다. 그것은 아기에게도
어른에게도 괴로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따금 친구로부터 '오늘 놀러오지 않으래?'라는 청을 받는 경우가 있지만,
돌이 안 된 아기가 딸려 있는 동안에는 '아기와 함께 있어만 돼'라고 정중하게
거절한다.
때로는 아기와 함께 와도 좋다는 조건으로 초대를 받더라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데리고 가는 일이 거의 없다. 설사 데리고 가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수다를 떨며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야말로 간단히 커피 한 잔 정도 들고
돌아오는 것이 보통이다.
철없는 아기들은 대개 의자를 쓰러뜨리기도 하고, 귀중품이나 깨질 염려가
있는 물건에도 손을 대는 것이 다반사이기 때문에 초대를 한 쪽은 물론 아기의
부모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아기 쪽에서 보더라도 자신이 취하는 행동 모두를 엄마로부터 제지당하는
꼴이 되니, 이것은 엄마나 아기, 또 초대한 주인에게 신경만 쓰일 뿐 아무런
이득도 없는 것이다.
그래도 낮에는 간혹 데리고 가는 수가 있지만, 밤에 아기를 데리고 외출하는
일은 결코 없다. 어릴 때부터 일정한 시간에 잠자는 습관을 들이기 위해서는
아기를 데리고 외출하는 것만은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피해야 한다.

어중간한 교제는 아기나 부모 모두에게 이롭지 못하다
나는 동양의 어머니들이 흔히 젖먹이를 등에 업고, 혹은 안고서 남의 집을
방문하는 것을 본다. 그럴 때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다.
내 친구 집에서 그런 어머니를 본 적이 있는데, 그녀는 아기 시중을 드는
것이 목적인지 친구와 환담을 하는 것이 목적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아기에게만 신경 쓰다가, 친구와는 제대로 나누지 못한 채 돌아가고 말았다.
이런 방문은 아기 엄마에게 있어서 불유쾌한 일임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모처럼 즐거워야 할 만남인데 아기 시중드는 데 정신이 팔리다 보면, 초대한
쪽이나 방문한 쪽이나 시간만 허비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즐길 때는 마음껏 즐겨야 한다. 어중간한 즐거움은 차라리 즐기지 않느니만
도 못하다는 것이 유태인의 사고방식이다.
젖먹이를 양육하는 일에 전념해야 할 시기에 아기만을 위해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아기에게도 엄마에게도 행복한 일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동양에서는 엄마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하더라도 주위 사람들이 그대로
놔두지 않는 것 같다. 친척이나 아는 사람들은 아기들을 몹시 보고 싶어하며
오히려 엄마들이 아기를 데리고 오는 것을 환영한다.
커가는 아기의 재롱을 보고 어르는 것이 그들에게는 즐거움이 될지 모르지만,
아기나 엄마에게는 즐거움은커녕 괴로움을 안겨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기는
아기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쓸데없는 신경을 써서 피로에 빠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는 곧 아기에게 정서적으로 불안감을 줄 염려가 있다는 말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유태인들은 한 살 전후의 아기와 그 엄마는 편하게 지내도록 신경을
써주며, 되도록 외출은 삼가도록 한다.

이것이 포인트!
젖먹이를 데리고 외출하는 것은 자칫 정서적으로 불안감을 줄 염려가 있다.
왜냐하면 아기는 아기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쓸데없는 신경을 써서 피로에
빠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29.친절을 통해 아이를 지혜로운 인간으로 키운다
친절을 부정하다 불타 죽은 소돔 사람들
친절은 유태인에게 있어, 단지 도덕이나 공공심이라는 교훈적인 행위로만
해석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사람이란 나름대로 지혜 있는 인간으로 성장해 가는 것이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만큼 자녀들이 무엇인가 남을 위해 친절을 베풀었다고 해서
부모가 칭찬을 한다거나, 자녀들 자신이 칭찬 받을 것을 바라는 마음에서
남에게 친절을 베푼다는 것은 권장할 일이 못 된다.
친절이란 자녀들 개개인의, 특히 마음의 성장을 나타내는 행위이므로 부모나
어른들이 자녀들에게 분별없이 강요하거나 칭찬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유태인들이 소중히 여기고 있는 구약성서에는 친절에 관한 이야기가 몇 군데
나온다. 이중 '소돔과 고모라'는 친절이라는 지혜를 망각한 인간들의 죄를 잘
표현한 얘기인데, 여기서 잠시 소개할까 한다.

소돔은 인근에 있는 도시인 고모라와 함께 사해의 남쪽 해안에 접해 있는
곳이었다. 어느 날 소돔으로 한 나그네가 찾아와서는 이 도시의 금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었다. 그런데 그의 집에 도둑이 들어 그가 지키는 파수꾼이 되었다.
그런데 그의 집에 도둑이 들어 그가 지키고 있는 금화 50닢을 훔쳐가 버렸다.
이 나그네는 도둑맞은 금화를 변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두 딸과 함께 노예로
팔려갔다.
그런데 이 소돔의 백성들은 사실 죄 많은 인간들로, 오랫동안 다른 지방에서
온 사람들을 곤경에 빠뜨리는 잔악한 일들을 저질러 왔다. 이 나그네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소돔의 시민 중 한 사람이 그 금화를
훔쳤던 것이다.
그런데 노예로 팔려간 딸 중 하나가 옛 친구를 만나 먹을 것이 없다고
애걸하자 친절한 친구는 그녀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그러자 이 사실을 알게 된
소돔 시민들은 친구에게 먹을 것을 준 친절한 친구를 사형에 처하고 말았다. 그
처형 방법도 잔인해서, 발가벗긴 온 몸에다 꿀을 바른 다음 벌집 아래 매달아
수많은 벌들이 쏘아 죽이게 하는 잔인한 방법을 썼던 것이다.
그 결과 친절한 인간을 죽인 도시는 다음과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여호와께서 유황과 불을 비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그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창세기 제19장)

이와 같이 친절은 최고의 지혜인 한편, 친절을 부정하는 행위는 마땅히
최고의 형벌을 받아 마땅한 것이다.

손님이 헛기침을 하면 스푼을 주라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친절에 보답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가장 아름다운
행위이다. 이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유태의 격언에 '손님이 헛기침을 하면 스푼을 주라'는 말이 있다. '스푼을
주십시오'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헛기침을 하는 손님의 마음을 재빨리 눈치채고
스푼을 챙겨주는 친절을 베풀라는 뜻이다. 그만큼 남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세심한 배려를 잊지 말라는, 지극히 유태인다운 격언이다.
친절이란 꼭 남의 칭찬을 받을 만한 가치 있는 행위만이 아니라, 오히려 일상
생활의 사소한 배려에서 나오는 행위를 뜻한다. 말을 바꾸면, 친절이란 그것이
도덕이니 공공심에 부합되기 때문이 아니라 평소 상대방에 대한 마음씀씀이를
나타내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포인트!
친절이란 자녀들 개개인의, 특히 마음의 성장을 나타내는 행위이므로 부모나
어른들이 자녀들에게 분별없이 강요하거나 칭찬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30.자선행위를 통해 사회를 배운다
'선행'은 사후에까지 남는다
언젠가 일본의 한 거리에서 '사랑의 열매'라든가, 신체장애자를 위한
모금활동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동양인들이 이런 '자선활동'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모르겠으나 유태인들은
자선행위 등 남을 위한, 특히 불우한 환경에 처해 있는 사람이나 신체장애자에
대한 선행에 대해서는 대단히 높이 평가하고 있다.
예로부터 유태인들 사이에는 그런 행위에 대한 확실한 가치 기준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 예를 한 번 들어보자. <탈무드>에 대한 다음과 같은 우화가 나온다.
옛날 어느 왕이 한 남자에게 사신을 보내어 곧 입궁하라고 명령했다. 그
남자에게는 세 명의 친구가 있었는데, 그중 한 친구와는 매우 적절한 사이였다.
두 번째 친구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좋아하는 친구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 친구는 친구이기는 했으나 그다지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겁에 질린 그는 무엇인가 문책을 당할 것이 틀림없으리라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러나 왕의 명령인지라 아니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세
친구를 불러 동행해 주기를 간청했다.
먼저 가장 친한 친구에게 부탁을 했다. 그러자 그 친구는 냉정하게 한마다로
거절하고 말았다. 그리고 두 번째 친구는 '왕궁의 대문 앞까지만 동행하겠다'고
대답했다.
"당연히 같이 가야지. 자네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으니 함께
임금님을 만나도록 하세."
이렇게 쾌히 승낙한 친구는 그다지 친한 사이가 아닌 세 번째 친구였다.

<탈무드>에 의하면, 첫 번째 친구는 다름 아닌 '재산'을 말하는 것으로,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죽을 때는 가지고 갈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두
번째 친구는 '친척'을 뜻하는 것으로, 겨우 화장터까지만 동행한다는 의미이고,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가주겠다는 세 번째 친구는 '선행'을 뜻하는 것으로,
평소에는 눈에 띄지 않지만, 사후에까지 남는 것은 이것뿐이라고 <탈무드>는
가르치고 있다.
가난한 사람, 비참한 사람들을 위해 베푸는 '선행'은 <탈무드>가 집대성된
옛날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유태인들에게 있어서는 재산이나 친척보다도 훨씬
소중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공공관념이 매우 부족한 것 같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시대의 지성이라 할 대학생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공연히 시비를 걸고 폭행을 가하는 행위에 대해 나 나름대로 냉정히 생각해
보았다.
물론 모두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전철이나 버스 등에서 젊은이들이 노약자가 서 있는 것을 보고도 눈을
감아버리거나 차창 밖을 내다보면서 모르는 체하는 광경을 더러 볼 수 있다.
자리를 양보하는 사람도 있지만, 거의 나이가 많은 분들이다.
공공관념의 결여는 대개 어렸을 때 형성된다. 그런 까닭에 사회 윤리를 바로
보는 눈이 트이지 않는 것이다. 즉,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일류 대학에 들어가고
또 일류 회사에 입사하기만을 바라는 부모들이, 어떻게 해야 남과 원만하게
사회생활을 해나갈 수 있는지에 대한 지혜를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은 배움과 일과 자선 위에서 성립된다
유태의 속담에 '세상은 배우는 것과, 일하는 것과, 자선행위 위에서
성립된다'는 말이 있다. 즉 인간이란 제아무리 많이 배우고, 제아무리 일을
잘한다고 하더라도 '자선행위'를 할 줄 모른다면 이 세상을 올바르게 살았다고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자선'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체다카'는 정의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영어로
'자선'에 해당하는 '채리타'가 라틴어의 '베풀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과는
달리, 유태인에게 있어 '자선행위'는 '정의' 바로 그것으로 통한다.
유태인 가정에서는 자녀들이 어렸을 때부터 조그만 저금통을 사주고 '자선'을
위해 저축하도록 가르치는데, 아이들은 교회당(시나고그)에 갈 때마다 저축했던
돈을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바친다. 그런 행위를 통해 자신과 이 사회가
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성장하는 것이다.
전철이나 버스 안에서 노인이나 신체장애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쯤은 아무
일도 아닌 듯 자연스럽게 행하며, 어떤 저항감도 느끼지 않고 사회윤리에
동화되어 가는 것도 바로 이 '자선행위'를 당연한 의무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유태인들은 남에게 선물하기를 좋아하는데, 이런 행위 역시 선심을 쓴다는
의식에서 베푸는 것이 아니라 사회생활을 하려면 당연히 취해야 할 행위라는
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사회생활에 적응시키기 위해서 지능개발에 신경을 쓰는 것도 좋겠지만,
일찍부터 사회의 그늘진 곳에 눈을 돌리는 지혜를 가르쳐줌으로써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으로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이것이 포인트!
제아무리 많이 배우고, 제아무리 일을 잘한다고 하더라도 '자선행위'를 할 줄
모른다면 이 세상을 올바르게 살았다고 할 수 없다. 아이의 지능개발에 신경
쓰는 것도 좋겠지만, 일찍부터 사회의 그늘진 곳에 눈을 돌리는 지혜를
가르쳐줌으로써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으로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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