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1-01-02 15:03
고대에 나타난 성경의 무오성[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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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6,864  
6.7. 아우구스티누스 (Augustinus 354-430)

성경 무오의 방어자인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Aurelius Augustinus)는 354년 11월 13일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지방 타가스테에서 이교도인 아버지 패트릭 (Patrick)과 기독교인 어머니 모니카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384년 밀란으로 이주한 후에 밀란의 감독 암브로시우스 (Ambrose)의 설교에 감명을 받고 386년에 기독교로 귀의하고 387년 부활절에 세례를 받았다. 수년 후 아누구스티누스는 히포 교회의 장로로 선출되었고 그 뒤 395년에 같은 도시의 감독으로 선출되었다. 430년 반달족의 말 발굽소리를 들으며 임종하였다.

그의 삶과 죽음에 있어서 성경은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40,000번이나 성경을 인용한 그의 저서를 일별하여 보면, 그가 얼마나 정통적인 성경관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 밝혀질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정경적인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작성되었다.” 즉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으며 따라서 성경은 무오하다는 것이 아누구스티누스의 주장이다. 아울러 아우구스티누스는 “성경은 신적인 권위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들의 모든 저작보다 탁월하다”고 하였다. 성경이 최고의 권위를 갖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이고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이 오류가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신적인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감되었고, 신적인 최고의 권위를 갖는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이다. 예컨대 아우구스티누스는 “정경에는 최고의 권위가 있으며, 우리가 몰라서는 안될 일, 그러나 자력으로는 알 수 없는 일들에 관하여 우리는 믿는다”고 말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경 안에는 모순되거나 불명료한 어떤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주장하였다. 즉 성경은 내용은 명료하며 오류가 아무 것도 없음을 말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성경은 그 내용이 서로 모순되거나 선명치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따라서 성경은 그 의미가 명백하고 무오하다. 성경의 무오에 대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왜 냐하면 나는 정경적 성경의 책들에게만 이러한 존경을 표하는 당신의 애정을 내가 배웠음을 고백한다. 나는 오직 이런 정경적 성경의 책들에 관하여서만 그 저자들이 오류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나 있음을 가장 굳게 믿는다. 그리고 만약 이런 책들에서 진리와 반대되는 것으로 나에게 나타나는 어떤 것에 의해서 내가 난처하게 된다면, 나는 필사자가 실수했거나, 혹은 번역자들이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였거나, 혹은 나 자신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주저없이 생각할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정경적 성경의 책들에 관하여서만 그 저자들이 오류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나 있음을 가장 굳게 믿는다고 하였다. 이것은 그가 성경에 오류가 전혀 없음을 명명백백하게 밝힌 것이다. 성경의 기록자들이 오류로부터 완전히 자유했다는 것은 성경이 정확무오하다는 것을 현시한 것이다. 성경에는 아무런 오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종종 발견하는 오류는 복사자들의 실수이거나 번역자들이 성경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 대한 그 자신의 이해가 부족해서 생긴 것이라고 가장 굳게 확신했다. 그는 이러한 성경의 무오류성에 대하여 그의 다른 책에서 다시 한번 강조하였다. “만일 성경에서 분명한 모순처럼 보여지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런 말을 해서는 안된다. 성경에 오류가 있다면, 그것은 필사자의 실수이든지, 아니면 번역자의 오류이든지, 당신이 생각을 잘못한 것이다.” 그러니까 아우구스티누스는 성경의 무오함을 가장 확실하게 믿었다. 이와 같은 그의 주장에 따르면, 성경의 오류는 그에게 있어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울러 성경의 무오성은 역사적 사실이나 과학적 사실에도 해당된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 홍수가 땅에 덮이니 노아 600세 되던 해 2월 곧 그 달 27일이라" (창 7: 10-11, 70인역). 만일 1년이 짧아서 (그들의 10년이 우리의 1년과 같아서) 36일이었다면,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짧은 기간을 고대인들이 1년이라고 불렀다면, 그때는 달이 없었거나, 있었다면 한 달의 길이가 사흘뿐인 12개월 있었을 것이다. 그 때의 한 달이 지금의 한 달과 같은 길이가 아니라면, 어떻게 노아가 600세 되던 해 2월 27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겠는가? 어떻게 홍수가 2월 27일에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후에 홍수가 끝났을 때에 대해서, "7월 곧 그 달 27일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며 물이 점점 감하여 11월 곧 그 달 1일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더라"고 한다 (창 8: 4-8, 70인역). 만일 그 때의 한 달이 우리의 한 달과 같았다면, 그들의 1년도 우리의 1년과 같았을 것이다. 사흘이 한 달이었다면 물론 27일이라는 날짜가 있었을 리 없다. 만일 모든 시간 측정을 거기에 비례해서 줄였다면, 사흘의 30분의 1을 하루라고 불렀을 것이며, 40일 40야를 계속했다고 기록된 (창 7: 12) 저 대홍수는 우리의 날로 4일만에 끝났을 것이다. 누가 이런 어리석은 생각을 용인하겠는가? 이 오류는 그릇된 추측을 근거로 성경의 권위를 세우려고 하지만, 다른 점에서 우리의 믿음을 파괴하므로,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그 때에도 하루는 현재의 24시간으로 된 1주야와 같았고, 그 때의 한 달은 달이 찼다가 이즈러지는 기간으로 정하는 지금의 한 달과 같았고, 그 때의 1년은 지금의 1년과 같이 음력으로 12개월에 5일 4분의 1일을 첨가해서 태양의 운행과 조절시키는 것이었다. 이런 길이로 계산한 1년을 노아의 600세 되는 해라고 했으며, 그 해 2월 27일에 홍수가 시작되었다고 한 것이다. 그 홍수의 원인은 40일 동안 계속된 폭우였고, 그 때의 하루는 2시간 남짓이 아니라 24 시간으로 완전히 1주야를 이루었다.

그러니까 아우구스티누스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확신함에 있어서 역사적 사실이나 과학적 사실에도 해당된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위의 인용문에서 그가 주장하듯이 노아의 600세라는 표현이 지금의 24시간의 600세와 전혀 다를 바 없다고 믿었다. 홍수가 40일 동안 내린 것도 지금의 24시간의 40일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노아 시대의 한 달이나 지금의 한 달이나 똑같고 그 때의 1년이나 지금의 1년이 똑같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들의 10년이 우리의 1년과 같은 것이 아니라 그 때의 10년이나 지금의 10년이 똑같이 하루 24 시간의 10년임을 그는 주장했다. 즉 성경의 날짜나 연대의 기록이 오류가 없고 정확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성경은 역사적으로나 과학적으로 무오하다는 것이 그의 굳은 확신이었다. 이와 같이 성경의 무오성을 믿는 그의 입장은 명백하고도 견고하였다.

따라서 로저스 (J. B. Rogers)와 맥킴 (D. K. McKim)이, 아우구스티누스적인 신학 전통이란 성경이 과학적으로도 오류가 없도록 기록되었다는 견해를 거부하고, 과학적으로 오류가 없다는 견해는 구프린스톤에 의해 발전된 산물인 것으로 간주된다는 주장은 정당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해서 매우 흥미있는 말을 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경 기록자들처럼, 문자적 의사소통에서 완전한 기술적 정확성의 시대 이전에 살았던 것이 컴퓨터로 다시 불러서 출력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다행이라는 것이다. “구술 (dictation)”이나 “오류 (error)”와 같은 단어들은 그 당시에 지금처럼 강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성경 기록자들이 항상 사건들의 문자적 기술적 기계적 재생산을 기대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그들은 “적응 (Accomodation)”과 “오류의 개념 (Concept of Error)”을 주장하였으나, 실제로 아우구스티누스가 성경의 오류를 말했다는 것에 대한 증거를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적응과 관련해서 성경에 오류가 있다는 그들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다양하게 묘사하였다. 그는 성경에 대해서 “성경” (scripture), “하나님의 신탁” (Divine Oracles), “거룩한 성경” (Sacred scripture), “신성하고 무오한 성경” (the sacred and infallible scripture), “신적인 성경” (the divine scripture), “하나님의 성경” (God's scripture), “하나님의 말씀” (God's Word), “성경” (Holy scripture), “하나님의 말씀” (Oracles of God), “하나님의 말씀” (the oracle of God), “성령의 말씀 (the oracles of the Holy Ghost)”, “하나님의 말씀” (Words of God), “하나님의 말씀” (the word of God), “거룩한 책들” (the holy Books), “신성한 책들” (the sacred books), “정경적인 성경책” (the canonical books of scripture) 등이라고 표현하였다. 그가 이와 같은 표현을 한 것은 성경이 사실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고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되어서 신성하고 거룩한 정경적인 책들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대한 이러한 모든 표현은 성경이 무오하다는 것을 증거해 준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성령으로 영감되었기 때문에 성경은 거룩하고 무오하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굳은 확신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경이 성령의 말씀이며, 성령의 기록이라고 주장한다.

오 내가 말했던 너 반대자들이여. 너희는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하지만 모세가 하나님의 거룩한 종임과 그의 책이 성령의 말씀 (the oracles of the Holy Ghost)임을 믿는 것은 누구인가?

성경이 성령의 말씀이라는 것은 성경이 성령으로 영감되었음을 말한다. 모세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받았다. 모세 오경이라고 일컬어지는 율법서는 성령의 말씀이다. 이것은 모세 오경이 성령으로 영감되었음을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장한 것이다.

그 리하여 나는 당신의 영이 기록한 책, 특히 사도 바울의 서신을 탐독하기에 열중하였습니다. 그 결과 사도 바울은 자기 모순을 범하고 있으며 율법과 선지자들의 증거는 서로 상충되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 여겨지던 지난 날의 어려운 문제들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바울이 기록한 사도 바울의 서신들도 하나님의 영인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되었음을 주장하였다. 그가 바울 서신과 율법서와 선지서들을 탐독한 결과 서로 충돌한다고 여겨지던 어려운 문제들이 사라지게 되었다고 고백하였다. 즉 신약 성경이나 구약 성경 모두 한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모순이나 충돌되는 부분이 없다는 그의 주장이다. 신구약 성경에 서로 모순이 없다는 것은 신구약 성경 전체가 무오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와 관련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성경이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왔다고 주장한다.

“주 의 입의 모든 규례를 나의 입술로 선포하였으며.”(13절) 이것은 주께서 행하신 것들 중에서 주의 입을 통하여 나에게 알게 하신 규례 이외에는 말하지 않았으나, 알게 하여 주신 것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나의 입술로 말했다는 뜻이다. 이 구절이 나에게 의미있게 보여지는 것은, “주의 모든 규례”라 하지 않고 “주의 입의 모든 규례,” 즉 주께서 나에게 계시하신 규례라고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께서 주의 입으로 말미암아서 많은 성도들에게 주셨던 계시나 신구약 성경 안에서 우리에게 밝혀 주신 것들을 알게 된다. 교회는 이 모든 규례를 쉬지 않고 그 입술로 전파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시편 119편 13절을 강해하면서 주의 규례가 주의 입의 규례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 구절이 그에게 의미있게 보여지는 것은 주의 입의 모든 규례라고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은 주께서 주의 입으로 말미암아 많은 성도들에게 주신 계시라고 하였다. 신구약 성경 안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밝혀 주신 것들을 우리는 알게 된다고 하였다. 이것은 성경이 주님의 입의 말씀이고 성경이 하나님에게서 직접 유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님의 규례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그 말씀 그대로 행하여야 됨을 말한다. 따라서 사람들의 행위의 표준인 성경은 무오하다는 것이 틀림없다. “교회는 이 모든 규례를 쉬지 않고 그 입술로 전파하고 있다”고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장했는데 이 말은 성경이 주님의 입의 규례로서 무오하다는 것을 교회가 과거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증거했다는 것을 주장한 말이다. 그러니까 성경의 무오는 최근에 보수적 복음주의 학자들이 처음으로 주장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시작과 함께 전파되어 온 것임을 증거한다. 성경의 무오 주장은 아우구스티누스 이전부터 주장되어 온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성경의 기록자들이 영감을 받은 도구라고 보았다.

그 러므로 영감을 받은 저자가 하나님께서 쉬셨다고 한 말은 하나님 안에서 쉬는 자와 하나님 때문에 쉬는 자의 쉼을 의미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한 해석이다. 또 예언은 예언을 듣는 자와 읽는 자에게 약속하기를, 살아 있을 동안에 가능한 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서 또는 그들을 통해서 행하시는 선한 역사를 이룬 후에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성경이 영감되어진 기록물이라고 주장한다. 즉 성경의 기록자는 성령의 영감을 받아서 성령께서 감동하시는대로 기록했다. 그러니까 성경은 성령의 영감을 받아서 기록할 때부터 오류가 없이 된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의 저자가 영감을 받아서 기록했기 때문이다. 성령의 영감으로 성경이 기록되었기 때문에 무오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음의 글에서 이 사실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그 러므로 그 제자들은 주님께서 선포하시거나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기록할 때에, 주님께서 친히 기록하시지 않은 것은 결코 말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사실 주님의 지체들은 그 머리가 말씀한 것을 반복하는 것으로 알 때에만이 기록을 했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의 행적과 말씀에 관한 기록을 주의깊게 읽도록 하시기 위해서 주시려고 했던 모든 것을 제자들에게 기록하라고 명하셨다. 그러므로 주님은 제자들을 마치 자신의 손처럼 사용하신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그 제자들은 주님께서 선포하시거나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기록할 때에 주님께서 친히 기록하시지 않은 것은 결코 말할 수가 없었다고 주장한 것은 제자들로 말미암은 성경의 기록이 오류가 없게 기록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기록하시지 않은 것은 결코 말하지 않았다는 것은 성경을 무오하게 기록했음을 표현한 것이다. “사실 주님의 지체들은 그 머리되신 주님이 말씀한 것을 반복하는 것으로 알 때에만이 기록을 했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은 성경이 얼마나 정확하고 오류없이 기록되었는가를 보여준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만을 기록했기 때문에 성경은 무오하다. 주님은 제자들을 마치 자신의 손처럼 사용하셔서 성경을 기록하도록 하셨기 때문에 성경은 근본적으로 무오하다.

그러므로 우리도 역시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모든 것들을 생각해 본다..... 말하자면 성령은 구속 진리의 모든 씨앗을 가능한 한 모든 글자들 속에 심어 넣으셨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 분명하다.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령이 구속 진리의 모든 씨앗을 가능한 한 모든 글자들 속에 심어 넣으셨다고 하였기 때문에 성경에 오류가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에는 성경의 무오함이 기본적으로 전제되어 있다. 성령이 모든 글자들 속에 구속의 진리들을 심어 넣으셨으니 성경은 근본적으로 무오한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성경이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 중보자께서는 자기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들을 계시하시되, 처음에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셨고, 그 다음에는 자기 자신의 입술로 하셨고, 그 다음에는 사도들을 통해서 하셨다. 또 성경을 영감하여 그것으로 정경과 최고의 권위를 삼아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함에도 우리 스스로는 배울 수가 없는 모든 진리들에 이르도록 하셨다.

성경은 영감된 것이 분명하다. 주님은 성경을 영감하여 최고의 권위를 갖게 하셨다. 이와 관련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시 한번 반복해서 성경에 오류가 전혀 없음을 주장하였다.

나 는 이미 말한 것처럼 오직 성경에만 철저하게 복종하려고 한다. 나는 그들의 가르침을 따른다. 그리고 그들의 가르침 안에는 잘못이나 잘못에 나아가게 하기 위한 의도를 가진 말이 전혀 발견되지 않음을 조금도 의심없이 인정해마지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성경의 무오를 말한 것은 한 두 번이 아니다. 그가 오직 성경에만 철저하게 복종하려고 한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는 정경적 성경 책들에게만 이러한 존경과 영예를 돌리는 것을 배웠음을 고백했다. 성경의 모든 가르침 안에는 잘못이 전혀 없다. 오류에로 나아가게 하는 말도 전혀 없다는 것을 그는 조금도 의심없이 인정하고 주장하였다. 그는 정경적 성경 책들에 관하여서만 그 저자들이 오류로부터 완전히 자유했다는 것을 가장 굳게 믿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성경의 무오를 의심하지 않았다. 성경에는 잘못과 오류가 전혀 없다는 것이 그의 확고부동한 확신이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성경이 모든 신자들을 위한 기본적인 표준이라고 말했다.

당 면 문제에 대한 가장 적절한 자세는 이렇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보편적이고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진리임을 확증해 주는 것은 이름 없는 사람이 아니라 사도들에 의해서 우리의 믿음을 위해 주어진 말씀이므로, 이 때문에 권위를 가진 정경의 표준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 대한 적절한 자세는 성경이 보편적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다는 자세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는 진리이다. 성경인 하나님의 말씀에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다는 것은 성경에 전혀 오류가 없다는 성경의 무오성을 웅변적으로 발표한 것이다. 성경은 사도들에 의해서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리로서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최고의 권위를 가진 정경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는 거듭해서 성경에는 모순이 없고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되었으니 만큼 오류도 없음을 주장한다.

분 명하지 않다면 경외함으로 깨닫기를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영광을 돌리라. 헛되이 불분명함이나 모순처럼 보이는 구절에 비난을 가하려 하지 말라. 성경에는 모순이 없다. 분명치 않은 것이 있는 것은 우리더러 부정하라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받아들이도록 훈련을 시키기 위함이다.

성경에는 불분명함이나 모순이 없다. 성경에 분명하지 않는 부분은 불분명하게 보일 뿐이다. 오류도 없음을 주장한다. 성경에 분명치 않은 것이 있는 것은 우리에게 그 성경을 부정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나중에 받아들이도록 훈련을 시키기 위함이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권면은 그가 얼마나 성경의 무오성과 권위를 확신하고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또한 성경 내용 중에 분명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 말씀을 깨닫기를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영광을 돌리라는 그의 권면을 보면, 그가 성경의 무오성에 대해서 결코 의심하지 않고, 성경의 무오성을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성 령께서는 놀라운 지혜와 보살피심으로 우리를 유익되게 하사 성경을 기록하시되, 보다 분명한 구절들로는 우리의 배고픔을 채워주시고 보다 불분명한 구절들로는 우리의 식욕을 자극하신다. 왜냐하면 불분명하여 밝혀지지 않던 구절이 다른 곳에서는 가장 분명한 용어로 밝혀지기 때문이다.

성경은 성령의 기록이다. 성령께서 놀라운 지혜와 보살피심으로 성경을 기록하셨다. 그 결과로 성경은 우리를 유익하게 한다. 성령의 놀라운 지혜와 보살피심으로 성경이 기록되었기 때문에 성경에 오류가 없다. 이미 아우구스티누스는 성경을 성령의 말씀이라고 표현한 바가 있는데, 성령께서 성경을 기록하셨다고 보다 직접적으로 성경이 성령의 기록임을 명시하였다.

이 성경이 천지의 창조주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우주의 체계를 연구하는 자가 부딪히는 모든 난제들이 성경에서 풀려질 것을 기대해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경이 성령으로 영감되었음을 여러번 강조했는데, 더 나아가서 성경은 천지의 창조주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에 의하여 영감되었기 때문에, 우주의 문제에 대해 해답을 줄 수 있다. 우주의 체계를 연구하는 자가 우주를 연구하면서 부딪치는 모든 난제들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을 통해서 풀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야 한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주장하였다. 그러니까 그는 성경이 창조주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따라서 오류가 전혀 없음을 명백히 증거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정경 목록을 말했다.

구 약 정경에는 다음 책들이 포함된다. 모세오경으로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가 있고, 역사서로 여호수아, 사사기, 열왕기의 첫 부분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이는 짧은 책인 룻기, 네 권의 열왕기, 역대상하-역대기는 열왕기와 연속되는 것은 아니지만 평행 즉 동일한 근거에서 출발한다고 말할 수 있다-가 있다. 이 역사서들은 그 시대와 관련된 내용들로서 사건의 순서대로 서술되어 있다. 규칙적인 순서를 따르지 않기 때문에 앞의 책들과 연관도 없고 서로 간에도 연관이 없는 책으로 욥기, 토비트, 에스더, 유딧, 마카비 상하, 에스라 상하가 있다. 그러나 에스라서는 열왕기나 역대기를 이어 계속되는 역사를 적은 것처럼 보여진다. 다음은 선지서이다. 여기에는 시편과 솔로몬의 세 책, 즉 잠언, 아가, 전도서가 있다. 지혜서나 집회서는 문체의 유사성으로 보아 솔로몬의 글로 보는 경우도 있으나, 시락의 아들 예수의 글로 보는 것이 가장 좋은 견해이다. 이 책들은 선지서로 취급되고 있기 때문에 그 권위가 인정을 받고 있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선지서로 불리울 수 있는 책은 다음 열두 권인데 서로가 연관되어 연결을 이루고 있어서 한 책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즉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다,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이다. 또 네 대선지서로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 에스겔이 있다. 구약성경의 권위는 이 44권 이내에서만 인정된다.

신 약의 (정경)에는 다음의 것들이 있다. 네 복음서 즉,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14권의 바울서신 즉, 로마서, 고린도 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 전후서, 골로새서, 디모데 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히브리서, 그리고 베드로 전후서, 요한 1,2,3서, 유다서, 야고보서, 사도행전, 요한계시록이 있다.

위의 인용문들을 보면 아우구스티누스는 구약과 신약의 모든 성경을 다 알고 있었다. 그는 현재 인정되고 있는 66권의 신구약 성경을 다 수용하고 있었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약 성경의 정경 결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는 393년의 아프리카의 히포 회의 (the African Synod of Hippo regius)와 397년의 제3차 칼타고 대교구회의 (the third provincial Council of Carthage)에 참석하여 신약과 구약의 정경의 완전한 목록을 결정하는데 기여했다. 이 회의들에서 결정된 신약 성경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즉 “4권의 복음서, 1권의 사도행전, 13권의 바울 서신들, 1권의 히브리서, 2권의 베드로 서신, 3권의 요한 서신, 1권의 야고보서, 1권의 유다서, 1권의 요한계시록”이었다. 그리고 그는 라틴교회의 정경 확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경 자체의 증언대로 성경이 성령으로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어서 성경의 가장 작은 글자까지도 틀린 점이 없으며, 역사적 과학적으로도 무오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상의 몇 가지 증거를 종합해 볼 때, 아우구스티누스가 성경이 말하는 바와 같이 성경의 무오성을 믿었다는 점에 대해서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다.

6.8. 평가

우리는 지금까지 1세기 말에서부터 5세기 초에 이르는 고대에 나타난 성경 무오 교리를 탐구하였다. 이 연구를 통해서 성경 무오 교리는 고대 교부들의 기본 신앙이었음이 증명되었다. 따라서 성경 무오 교리는 중간기의 유대교 문헌들이 증거하는 구약 교회의 신앙임과 동시에 신약교회의 기본 신앙임이 드러났다. 성경 무오 교리는 구약 교회와 신약 교회 성도들에게 기본적인 신앙으로 이미 전제되어 있었다. 우리가 로마의 클레멘트와 순교자 저스틴과 이레니우스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오리게네스와 아다나시우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의 글들을 추적해본 결과, 이들이 정경으로 인정한 성경에 한해서는 한결같이 성경 자체가 주장하는 대로 성경의 신적인 영감과 무오성을 주장하였음이 드러났다.

그러므로 뉴욕 유니온 신학교 구약학 교수였던 찰스 아우구스투스 브릭스(Charles Augustus Briggs)가 “성경의 무오성 교리는 역사적인 기독교 신앙과 충돌된다”고 주장한 것은 정당한 것이 아니다. 성경 무오성 교리가 역사적 기독교 신앙과 충돌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 신앙과 완전히 일치한다. 성경의 유오설이 오히려 역사적 기독교 신앙과 충돌되고 있다. “성경이 무오하다는 이론은 진실로 어린 아이들을 놀라게 하기 위한 현대 복음주의의 환영 (幻影)입니다”는 찰스 브릭스 교수의 발언이야말로 어린 아이들을 놀라게 하기 위한 그의 환영 (幻影)일 뿐이다. 그는 1891년 1월 20일 미국 뉴욕 유니온 신학교 취임 강연에서 “성경은 종이에 글씨를 써서 인쇄해서 제본한 책이며 그 이상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고 하여 성경의 신적 영감을 부인하였고, 성경이 무오하다는 것은 거짓 관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역사적 기독교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서 일관성 있게 성경의 영감과 무오를 믿고 주장해왔음이 위의 연구를 통해서 밝혀졌다. 그가 또한 “성경의 무오성 문제는 신앙고백과는 다른 차원이며, 진리와 사실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무오성은 그것들에 의지하는 사람들을 확실히 넘어지게 할 부러진 갈대이며, 그러므로 목사와 평신도들의 신앙에 확실히 위험스러운 것임을 말해야 한다”고 말한 것도 전혀 터무니 없는 주장임이 밝혀졌다. 성경 무오 교리는 역사적 기독교 신앙과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이 위의 연구를 통해서 명백히 드러났다. 로마의 클레멘트와 순교자 저스틴과 이레니우스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오리게네스와 아다나시우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의 글들은 찰스 브릭스와 같은 학자들의 주장을 무력하게 한다.

로마의 클레멘트는 성경이 성령에 의해 축자적으로 영감되었다고 확신하여 성경의 신적 기원과 영감과 그것의 절대성과 무오성을 주장하였다. 순교자 저스틴은 선지자들을 성령이 영감하여 말씀을 기록하였기 때문에 모순의 오류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이레니우스는 성경은 영감되어서 그 단어들까지 정확하여 가감불가하고 완전한 신적인 말씀이라고 확신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오류없는 성경의 확실성을 믿고 있었으며, 성경이 성령의 무오한 말씀인 것과 하나님의 입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목소리인 것과 신적인 권위가 있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진리의 표준이라고 확신하였다. 오리게네스도 성경을 성령으로 완전하게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했고 성경의 절대적 권위와 무오성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아다나시우스는 성경이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구원의 샘물로서 신적으로 영감된 절대 진리의 하나님의 신성하고 살아 있는 말씀이었으며, 첨가나 생략이 불가한 정확무오한 최고의 권위를 가진 법칙이라고 주장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경이 성령으로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어서 성경의 가장 작은 글자까지도 틀린 점이 없으며, 역사적 과학적으로도 무오하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성경 무오는 고대 교회의 확실한 신앙이었으며, 성경 무오에 대해서 부정한 것은 근세의 비평적 작업 이후의 일이다. 성경 무오 교리는 중간기의 유대 문헌들에 나타난 것과 마찬가지로 처음 고대 교회의 기본적인 신앙으로 자리잡고 있었음이 위의 연구를 통해서 밝혀졌다. 따라서 성경 무오 교리는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의 최근 19세기와 20세기 초엽에 새롭게 창작한 것이 아니라 성경 자체의 성경 무오 주장을 받아들인 구약 교회의 신앙이며 또한 이러한 구약 교회의 성경 무오 신앙을 고대 교회가 이미 기본 신앙으로 받아들였던 신앙임이 위의 연구를 통하여 밝혀졌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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