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9-28 16:46
[12]예배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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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7,806  

9 예배와 음악

 

제 1 절 예배에서 음악은 왜 필요한가?

성경에서 음악에 관한 기록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창세기 4장 21절이다. 거기에 보면 아담의 7대 자손인 유발이라는 사람이 "수금과 피리를 만들어 사용한 국내 최초의 음악가"(현대인의 성경)라고 기록 되어 있다. 고대의 음악은 오늘날의 음악과는 그 개념이 다르다. 그 때의 음악은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들의 삶에서 절대로 분리될 수 없는 생활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그들은 음악과 함께 일 했고, 음악과 함께 살았다. 그러므로 일 할 때와 축제 뿐 아니라 야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에도 음악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예배에서 음악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인류의 시작과 같이 했으리라고 본다. 그러나 직업적인 전문 음악가가 등장하게 된 것은 다윗왕 때 부터이다. 그 때 이후 교회는 예배 때 마다 찬양대가 반드시 있어 왔고, 언제나 어디서나 모이기만 하면 교회에서는 찬양대가 부르는 아름다운 음악이 있었다. 우리는 왜 예배에서 노래를 불러야만 하나? 예배에는 왜 음악이 필요한가? 예배에는 왜 찬양대가 반드시 있어야만 하나?

1. 찬양은 하나님의 명령

위의 몇가지 질문에 대한 그 첫 해답은 예배에서 음악을 사용하라고 하나님께서 명령 하셨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구약을 통해서, 특별히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찬양이었던 시편을 통하여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러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명령을 많이 볼 수 있다. 시편 81편을 보면 "우리 힘이 되시는 하나님께 기쁨으로 노래하고 야곱의 하나님께 소리 높여 찬양하라! 북을 치고 수금과 비파로 아름답게 연주하며 노래하라. 초하루와 보름과 명절에 나팔을 불어라. 이것은 이스라엘의 법이요 야곱의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또 시편 98편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기쁨으로 노래하라. 노래와 즐거운 소리로 그를 찬양하라. 나팔과 양각 (호각)을 불며 우리의 왕이신 여호와 앞에 즐겁게 외쳐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아, 세계와 그 안에 사는 모든 자들아, 다 소리 높여 외쳐라. 너희 강들아, 여호와 앞에 손뼉을 쳐라. 너희 산들아, 기쁨으로 함께 노래하라.

시편 100편도 "온 땅이여, 여호와께 기쁨으로 외쳐라. 즐거운 마음으로 여호와를 섬기고 노래하며 그 앞에 나아가라... 감사하며 성전에 들어가고 찬송하며 그 뜰에 들어가라. 그에게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고 한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시편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노래하라" "찬송하라" 란 명령을 무수히 나리셨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시편에 기록된 것 처럼 "법이요, 명령"이었다.

2. 음악은 기독교의 전통

교회에서 음악을 사용하는 둘째 이유는 구약과 신약을 통하여 예배에서 음악을 사용 해 온 전통 때문이다. 역대기 상 15장과 29장을 보면 다윗이 찬양대를 조직한 후 예배에서 찬양대는 "주야로 야훼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전심 전력 하였다"(대상 9:33)고 기록하고 있다. 즉 생업을 갖지 않고 다른 사제들과 꼭 같이 찬양하는 일만을 위하여 온전히 살았다는 말이다. 이러한 전통은 신약시대에 와서도 사도 바울에 의하여 강조된 것을 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19과 골로새서 3:16을 통하여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합하며 너희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라"고 우리를 권면하고 있다. 이 말씀을 공동번역으로 다시 읽어 보면, "성시와 찬송가와 영가를 모두 같이 부르십시오. 그리고 진정한 마음으로 노래 불러 주님을 찬양 하십시오"라고 하면서 노래부르는 교회의 전통을 이어 줄 것을 권면 한 것을 읽을 수 있다. 이와 같은 사도 바울의 권면의 말 속에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목적으로 음악을 사용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해석 할 수 있다.

첫째, 예배와 찬양을 위하여,

둘째, 교육과 제자훈련을 위하여,

셋째, 전도와 복음선포를 위하여 등 이다.

사도 바울이 성시 즉 시편을 노래하라고 한 것은 예배와 찬양을 위한 것을 말하는 것이요, 찬송가를 부르라고 한 것은 기독교인들의 바른 삶을 가르치기 위하여 즉 교육과 제자훈련을 위하여 찬송가를 부르도록 권했으며, 전도와 복음선포를 위해서는 신령한 노래, 소위 오늘 우리가 말하는 복음찬송(Gospel Songs)을 부르라고 권면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에서 무슨 노래를 불러야 할 것인가는 확실 해 졌다. 오늘날 우리 개신교회의 예배에서 아직도 시편교독이 남아 있는 것은 시편은 예배와 찬양의 목적으로 노래 불려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편교독이 시편이 아닌 성경 구절의 교독으로 바뀌어 져서 마치 성경명상 내지는 성경구절의 교육목적으로 활용되는 것은 개신교 예배의 잘못된 경향임을 알수 있다. 이러한 잘못은 시편을 교창하는 방법을 잊어버려 시편을 노래로 부르지 않고 교독하기 때문에 그것이 찬양이라는 개념을 상실하게 된 데 그 원인이 있다. 시편은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으로 다윗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가장 훌륭한 찬양인 것이다. 따라서 시편은 노래로 불려 질 수 있도록 회복시켜야만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 찬송가에 시편이 노래로 되어 있어야만 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제 4장 제1절에서 보다 상세히 쓰겠다. 종교개혁 당시 Calvin은 교회의 예배에서 시편만을 부르라고 명령하고, 다른 노래는 절대로 부르지 못하게 하였다. 그는 "이 세상 어느 곳을 찾아보아도 하나님께서 은총으로 다윗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시편 이외에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노래는 찾아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찬송가가 갖는 중요한 개념은 성경에서 나온 찬양이 아니라 사람이 쓴 노래라는 데에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바탕으로 하여 찬송가를 쓰기 때문에 자신의 삶이 얼마나 진실되고 성스러우냐에 따라서 그의 찬송이 성스러울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보다 더 근본적으로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인간이 쓴 찬송가가 성스러울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저자가 사악한 생각을 갖고 성스럽지 못한 생활을 한다면 그 사악한 생각과 성스럽지 못한 내용이 노래에 스며들게 되고, 노래에 스며든 사악한 내용은 노래를 통하여 그 노래를 부르는 사람의 심령 속에 깊숙히 스며들어 그 사람을 사악하게 만들게 된다. 이와같은 잘못된 찬송을 많이 부르게 되면 교인들의 신앙도 잘못 될 수 있다. 그리하여 Calvin은 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중세 때에는 교황의 칙령에 의하여 교회에서 찬송가의 가창이 중단되기도 하였다. 교황이 교회에서 찬송가의 가창을 금지시킨 이유는 찬송가를 통하여 이단교회의 이단교리가 스며들기 때문이었다. 중세에 인간의 지혜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은 그노시스(Gnostics)의 이단운동과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아리안(Arian)의 이단 운동이 모두 찬송가를 통하여 확산 되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의 신앙이 기복적이고, 내세적이고, 신유적인 것이 모두 기복적이고, 내세적이고, 신유적인 찬송가만을 많이 부르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본다. 그렇기 때문에 무슨 찬송을 택하여 부르느냐 하는 문제는 그 교회의 신앙형태를 규정하는데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중요한 문제이다. 찬송가는 인간을 교육하고 훈련시키는 무서운 힘이 있기 때문이다.

Calvin은 시편을 운율시로 개작하여 시편가집을 출판하였고, 영국에서는 Isaac Watts(1674-1748)가 시편을 오늘날의 찬송가 형태로 개작하여 찬송가로 만드는데에 공헌 하였다. 오늘 많은 예배 찬송이 시편을 기초로 해서 쓰여진 것은 이 때 부터 되어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찬송가는 시편을 대신해서 예배찬송으로 불려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찬송가는 어떤 주제를 가지고 신도를 교육하기 위하여 또는 교화하기 위하여 쓰여진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찬송가는 예배와 찬송을 위하여, 그리고 교육과 제자훈련을 위하여 사용 될 수 있다.

복음찬송, 복음가, 영가(靈歌)도 인간에 의하여 쓰여 졌다는 것에는 찬송가와 다를 것이 없다. 찬송가와 다른 것은 그 내용에 있어서 교육적인 내용이 아니라 주로 구원의 놀라운 경험을 이웃에게 선포하는 것이고, 자신의 뜨거운 신앙을 이웃에게 고백하는 것으로 불신자들에게 전도와 복음선포의 목적으로, 그리고 자기자신의 신앙의 갱신을 위하여, 등 인간을 위해 쓰여졌고, 인간을 향해 부르는 노래이지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하여 지어진 노래는 아니다.

그러나 예배를 통하여 이 세가지의 노래는 균형있게 불려져야 한다. 왜냐하면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과 동시에 교인들을 교육하기도 하고, 또 처음으로 예배에 참석한 불신자들을 향하여 전도와 복음선포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과거에 섬기던 새문안 교회와 현재 섬기고 있는 충현교회에서는 예배를 통하여 시편을 교독하는것 외에 이상의 세가지 찬송이 모두 불려지고 있다. 예배를 위한 찬송은 예배가 시작 되자마자 예배의 도입부에서 부르고, 성경봉독 전에 교육적인 두번째 목적을 위한 찬송이 불려지고, 헌금시간에 찬양대에 의하여 혹은 설교 후의 찬송을 통하여 전도와 복음선포를 위한 복음찬송이 불려진다.

3. 음악은 찬미의 제사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주님께 드리는 것"(시 29:2)이라고 했고, Raymond Abba는 그의 저서 {기독교 예배의 원리와 실제}에서 예배란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돌리는 것"이라고 했다. 구약시대의 예배에서 히브리인들이 바친 "하나님께 드리는 최상의 가치"는 헌물(offering)을 통하여 표현되었다. 시편 96편 8절에 "예물을 가지고 그의 전에 들어 갈 지어다"라고 한 시편 기자의 기록을 보아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서 헌물이 얼마나 중요했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헌물의 값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사람은 값진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었다. 다윗은 하나님의 징벌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7만명이나 죽게되었을 때에 이 백성에게 나린 재앙을 그치게 하기 위하여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서 하나님께 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다. 그때 아라우나가 말하기를 "왕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사용하십시오. 여기에 불로 태워 바치는 번제물로 소가 있고, 또 제물을 태울 땔감으로 타작하는 기구와 소의 멍에가 있읍니다. 제가 이 모든 것을 왕에게 드리겠읍니다. 아무쪼록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의 제사를 기쁘게 받으시기를 원합니다"(삼하 24:22-23)라고 했다. 그러나 왕은 아라우나에게 "아니다. 내가 그것을 거저 갖지 않고 돈을 주고 사겠다. 나는 아무 댓가도 치르지 않은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무상의 제물을 드리기를 거절하였다. 그리고는 은 570 그람을 그에게 주고 그것들을 사서 여호와께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다. 그때 여호와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셨으므로 그제서야 그 땅에 내리던 재앙이 그쳤다.(삼하24:15-25) 이처럼 예배는 값없이 드리는 것이 아니라 비싼 값을 치르는 행위, 즉 최상의 가치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약시대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오심으로 인해 크게 달라졌다. 구약 시대에는 백성들의 죄를 대속받기 위하여 1년에 한번씩 대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속죄양을 잡아 하나님께 바쳤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매번 반복해서 속죄양을 잡아야 했고, 대제사장이 나이가 들어 죽게되면 또 다른 대제사장이 이 일을 행해야만 했다. 어부였던 요한이 쓴 편지에 이런 말이 있다. "만일 누가 죄를 짓더라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 죄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해 화해의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요한1서: 2:1-2) 우리의 죄를 속죄 받기 위하여 매번 제물을 바쳐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만 아니라 온세상의 죄를 위하여 화해의 제물"이 되셔서 스스로를 완전 무결한 제물로 바치셨기 때문에 그것으로 우리와 하나님과의 화해는 완성 된 것이다. 대제사장이 늙으면 새로운 대 제사장이 화해의 제사를 드렸으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우리중에 살아 계시기 때문에 새로운 대제사장이 필요치 않게 되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으므로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다시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분을 위해 살도록 하기 위해서였읍니다. ...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사람은 없어지고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 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자기와 화해시키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직책을 주셨읍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해시키시고 사람들의 죄를 그들에에 돌리지 않으셨으며 화해의 말씀을 우리에게 맡기셨읍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리스도에게 우리 죄를 대신 지우신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게 의롭다는 인정을 받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라고 쓰고 있다.

헌물로 드렸던 모든 희생 제물을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더 없이 값진 자기 자신을 십자기 위에서 희생 제물로 드림으로 인하여 이미 충분하고 완전하고 흠이 없는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셨으므로 우리는 그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서 드리는 "최상의 가치있는 제사"는 헌물의 제사가 아니다. 구약시대의 "헌물의 제사"는 그리스도가 오셔서 자신을 직접 산제물로, 즉 헌물로 바쳤기 때문에 우리가 드릴 제사는 헌물의 제사 아닌 "찬미의 제사"인 것이다. 다시말해 구약시대의 "헌물의 제사"는 신약시대에 와서 "찬미의 제사"로 바뀐 것이다.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그러므로 구약시대의 제사가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 제물"이 그 중심이었듯이, 그리스도가 희생 제물이되어 완전한 산 제사를 드린 이후의 오늘날 우리의 제사는 "찬미"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4. 음악의 본질적인 가치

교회에서 음악을 사용해야하는 네번째의 이유는 음악 자체의 음악만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가치관 때문이다. 곧 "음악은 영적인 언어"라는 것이다. 음악이 어찌하여 영적인 언어란 말인가? 우리가 크리스마스 아침 예배 때, 부활절 아침 대 예배 때, 또는 귀한 손님을 모시고 교회창립 기념 예배라든가, 신축된 교회의 헌당식을 가질 때, 왜 찬양대는 대곡을 특별히 준비하여 연주 하는가? 이러한 예배에 찬양대가 없다면 그 예배가 어떻게 되겠는가? 찬양대의 음악이 없는 예배는 대 예배가 아니라 왜소한 예배, 축제의 예배가 아니라 활기가 없는 조용한 예배가 되 버릴 것이다. 축제의 대예배로 만드는 것은 찬양대의 음악 때문이다. 찬양대가 거대한 음악을 울릴 때 예배는 거대해지고, 조그마한 음악을 연주 할 때 예배는 왜소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축제예배 때 마다 찬양대는 특별한 음악, 아주 장엄하고 아주 거대한 음악을 택하여 연주하게 된다. 장엄한 음악과 거대한 음악이 그 예배를 장엄하게, 그리고 거대하게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대한 음악이 교인들의 마음을 거대하게 만들고, 장엄한 음악이 교인들의 마음을 장엄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음악이 사람의 심령에 말하는 영적 호소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음악을 영적 언어라고 말 한다.

음악이 영적 언어라고 하는 것은 고대 희랍에서 부터 알려진 사실이다. 고대 희랍에서는 인간의 병은 곧 그 사람의 영혼에 병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 하였다. 따라서 병을 낫게 하기 위하여는 그 사람의 영혼의 병을 먼저 고쳐야 한다고 보았다. 영혼의 병을 고칠수 있는 것이 바로 음악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음악이 영적 언어이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미국에서는 음악으로 병을 치료하는 음악료법(music therapy)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학교와 병원이 많이 있고 우리 나라에서도 최근에 시행하고 있는 줄로 알고있다.

"영이신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요 4:24)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우리는 다 잘 안다. "신령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말은 참 마음을 가지고 영이신 하나님께 영적인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말이다. 예배가 영적인 예배가 되기 위하여 영적인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예배가 진정(truth)한 예배, 즉 진리의 예배가 되느냐 안되느냐 하는 것은 목사님의 진리 선포에 책임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예배가 신령 (spirit)하냐 못하냐 하는 것은 바로 찬양대에 그 책임이 있다. 인간의 심령을 들어 올리는 (고양시키는) 것은 음악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교회에서 음악이 담당하는 책임은 막중하다.

우리는 모일 때 마다 찬송가를 부른다. 어떤 때는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가 아무런 감응을 일으키지 않을 때도 있으나 어떤 경우에는 우리의 마음에 절실하게 느껴져서 특별한 감동을 갖게 되고 눈물을 흘리게도 한다. 찬송가를 부르면서 눈물을 흘린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이 때 그 찬송은 우리의 잠자는 영혼을 일 깨워 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심령을 뜨겁게 만들어 준다. 필자가 예수를 처음 믿게 된 동기도 부흥회에서 찬양대가 부르는 찬양이 필자의 영혼에 깊은 위로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음악은 인간의 영혼을 위로 할 뿐만 아니라 잠자는 영혼을 일 깨워 예배자들의 영혼을 고양시켜 주기도 한다. 필자가 미국에 있을 때 어느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시편을 영창하기 전에 모든 교인들이 일어나자 목사가 먼저 "Lift up your hearts"(여러분의 심령을 들어 올리십시요) 하면, 교인들이 "We lift them up to the Lord"(우리가 우리의 심령을 주님을 향하여 들어 올립니다) 라고 응답을 하였다. 다시 목사는 "Let us give thanks to the Lord our God." (우리 주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하니까 교인들은 답하기를 "It is right to give Him thanks and praise."(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 마땅 합니다)하고 난 다음에 찬송을 부르는 것을 보았다. 찬양을 드리고 예배를 드릴려면 우리의 심령을 들어 올리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지 않고는 신령한 예배가 되지 않겠기 때문이다. 우리의 심령을 들어 올리려면 그것은 영적인 언어인 음악을 통해서만 가능 하다.

매 주일 아침 교회에서 필자는 먼저 내 자신의 영혼을 고양시키고 난 다음, 찬양대원들의 잠자는 영혼을 일깨워서 심령으로 노래 할 수 있게 만들고, 심령으로 노래하는 찬양대의 찬양을 통하여 온 교인들의 영혼을 고양(고취)시켜 예배가 신령한 예배가 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내 자신의 영혼을 고양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기도로 준비하고, 그리고 난 다음, 가슴을 펴고 허리를 곧게 바로 세운 다음, 호흡(숨)을 깊게 들여 마시고 뱉음으로 내 속의 심령을 일깨운다. 그리고 깊히 들어간 호흡(숨)을 내 뱉으면서 노래를 부른다. 필자는 찬양대원에게도 똑같은 것을 요구한다. 이렇게 해서 나오는 노래는 영적인 노래가 된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 하시면서 인간에게 영혼을 주실 때에도 호흡을 불어 넣어 주셨다. 우리의 심령은 호흡을 통해서 운반된다. 에스겔서(37:9)에서도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 넣을 때 이를 "숨"(breath)이라고 했다. 호흡(숨)과 심령은 항상 함께 있는 것이다.

필자는 찬양대의 합창을 지도하면서 늘 에스겔서 37:1-14을 생각한다. 여호와께서는 에스겔 선지자에게 말라빠진 뼈들을 보여 주면서 "이 뼈들이 살 수 있겠느냐?" 고 물으셨다. 그러나 에스겔은 그 뼈들이 다시 살수 있으리라고 생각 못했다. 그는 "주께서만 아십니다"고 대답 했다. 하나님은 그에게 할 말을 가르쳐 주셨다.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을 들어라. 뼈들에게 주 여호와가 말 한다. 내가 너희 속에 생기(숨)를 불어 넣어 너희를 살리리라. 너희에게 힘줄을 이어 놓고 살을 붙이고 가죽을 씌우고 생기(숨)를 불어 넣어 너희를 살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여호와임을 알게 되리라."(공동번역) 에스겔이 여호와가 가르쳐 주신 대로 말을 하자마자 "갑자기 뼈가 움직이는 소리가 나더니 이뼈 저뼈가 서로 붙어 연결되기 시작 하였다. 에스겔이 보니 뼈들에게 힘줄이 이어 졌고 살이 붙었으며 가죽이 씌워졌다. 그러나 아직 숨쉬는 기척(생기)은 없었다. 이때 여호와께서 에스겔에게 또 다음과 같이 외치라고 명령 하셨다. "생기야, 사방에서 와서 이 죽어 있는 몸에 들어가서 이들을 살게 하라." 에스겔은 명령대로 하였다. 그러자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 그들이 살아서 일어나 굉장히 큰 군대가 되었다(현대인의 성경)고 한다. 음악의 악보 그 자체는 마른 뼈다귀에 불과하다. 악보란 작곡자의 영적 사상(idea)이 악보라는 기보법에 결빙(frozen)된 것이다. 결빙된 음악에 영혼의 생기를 불어 넣어 얼어 붙은 것을 녹여야 한다. 그리고 다시 살아 움직이게 하여야 한다.

주일 아침 필자가 찬양대를 연습시키는 것은 대원들의 해이해진 영혼(잠자는 영혼)에 생기를 불어넣어 살아 움직이게 하는 작업이라고 생각 한다. 즉 말라빠진 마른 뼈와 같은 심령에 살을 붙이고 힘줄을 세우고, 가죽을 씌운 다음 생기(혼)를 불어 넣어 영혼이 살아 움직이게 하는 작업이라고 생각 한다. 그러면 찬양대는 또 입례송과 화답송을 통하여 주일 아침 예배당에 앉아 있는 말라빠진 뼈다귀와 같은 많은 심령을 일깨우고, 그들의 말라빠진 뼈다귀와 같은 영혼속에 살과 힘줄을 붙이고 가죽을 씌운 다음 생기를 불어 넣어 죽었던 영혼을 되 살려주는 일을 한다. 이것이 바로 찬양대의 역할이다. 교회에 따라서는 찬송가를 부를 때 1,2,3,절은 원조(原調)로 부르나 오르가니스트가 반주를 하면서 매 절이 바뀔 때 마다 오르간의 소리를 증폭 시키고 그리고 3절 다음에 간주를 통해서 반음 위나 또는 한음 위로 전조하여 마지막 절을 노래하게 하면 교인들의 심령이 한껏 높아지게(고양)된다. 이 때 찬양대의 소프라노가 떼스칸트(descant)를 부르게 되면 교인들의 심령은 더욱 고조 된다. 이와 같이 교인들의 심령이 고양되고 고취되었을 때 예배는 신령한 예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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