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9-28 16:44
[11]예배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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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11,164  

1. 성경봉독(scripture Lessons)

 "말씀 듣는 예배"에서 잘 준비되어 봉독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들이나 성경 본문들이 다시 봉독되는 것을 들을 때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이 기뻐할 수 있다. 성경이 잘 봉독될 때 각 단어는 다양한 강조, 고저, 그리고 속도를 가진 음악처럼 분명하고 특별하게 들린다. 우리가 귀기울일 때 그 단어들은 살아나게 된다. 하나님이 과거에 말씀하시기 위해 사용하셨던 사건들을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경험하게 된다. 이런 사건들에 대한 증언들을 통해 하나님은 오늘날 계속 우리에게 새롭게 말씀하신다. 그 증언의 말씀들은 귀하게 여겨져 후대의 우리들에게 전달되었다. 우리는 스스로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이 자라는 사람들 즉, 성경의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이런 이유에서 강단용 성경은 대체로 크며 예배의 중심에 위치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 예배 공동체의 책이다. 그래서 예배에서 성경은 극적인 제스쳐를 쓰지 않고, 암기되거나 극적으로 표현할 필요 없이 봉독된다. 성경을 봉독하고 그것을 직접 듣는 것은 우리의 예배에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러므로 성경봉독 순서는 예배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우리는 보통 성경을 3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한다: 구약성경(율법과 예언자들의 기록), 복음서(예수의 삶, 사역, 가르침에 관한 기록), 서신(바울과 다른 사도들의 편지). 한 예배에서 이 세 가지 본문을 읽는 것은 고대 기독교와 현대의 에큐메니칼 예배 모두를 나타낸다. 전통적인 성경봉독의 순서는 복음서에 비중을 두어 구약, 서신, 복음서의 순서이다. 때때로 우리는 이 전통적인 성경봉독의 순서에 담겨있는 의미를 잊어버리고 그 순서를 바꾸려고 시도한다. 복음서가 설교에 제일 가깝게 봉독된 이유는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시편은 원래 노래로 이해되어 보통은 성경봉독의 순서에 포함되지 않고 오히려 구약봉독에 대한 응답으로 사용되었다. 오늘날 예배 갱신의 하나로 성서일과로부터 3가지 성경(구약, 서신, 그리고 복음서)을 봉독하거나 2가지 성경(구약과 신약)을 봉독하는 것은 고대 기독교(6세기의 서구 교회)의 전통을 회복하려는 노력이다. 봉독된 성경들을 설교의 본문으로 삼을 필요는 없다. 예배자들이 단순히 봉독되는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몇 개의 성경 본문들을 읽는 것은 지나치게 하나의 단순한 본문으로부터 오늘날의 문제들에 대한 성서적인 해답을 찾으려는 위험을 막는 안전장치가 될 수 있다.

 성경봉독은 교회 목회의 하나이다. 성경봉독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된다. 설교가 잘 준비되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성경봉독도 잘 읽혀지고 들려지기 위해 잘 준비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성경봉독자는 성경을 읽는 기술이 있어야 하며 준비를 위해 시간을 드려야 한다. 교회(예배위원회)는 교인들 모두에게 균등하게 기회를 주는 것보다는 정기적으로 평신도 가운데서 성경봉독에 은사가 있는 몇 명을 선택할 수도 있다. 어린이와 청소년도 성경봉독 순서를 담당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남녀노소의 다양한 목소리로 읽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교회의 다양한 회중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큰 교회는 특별히 성경봉독을 위해 성도들을 훈련시키고 또한 그들에게 다른 사람들을 훈련시키는 책임을 맡긴다. 이 훈련에서 중요한 부분은 정기적인 성경공부 그룹을 통해 다가오는 주일 예배에 읽을 성경본문을 다루는 것이다. 성경봉독 훈련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훌륭한 자료는 성서일과이다. 현재 세계 교회들은 예배 갱신운동의 산물인 성서일과를 사용하고 있다. 이 성서일과는 교회력에 맞추어 성경 전체를 3년 주기로 구약, 시편, 서신, 복음서의 4부분으로 나누어 매 주일 예배에서 읽도록 만든 것이다. 한국의 주요 교단들은 예식서를 통해 성서일과를 소개하고 있다. 예배 안내위원들과 봉사위원들을 위한 목회처럼, 성경봉독자들을 위한 목회도 교회 안에서 중요한 목회로 생각하고 예배에서 표현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시각 중심의 사회에서 구두로 표현된 말에 대한 관심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그러므로 회중이 인쇄된 글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노력하는 것 보다 그들의 듣기 능력을 증대시킬 수 있는 성경봉독자들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예배는 여러 감각들과 관계가 있는데 성경봉독은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 가를 보고 듣는 감각에 의존한다. 바람직한 성경봉독을 위하여 좋은 장비가 필수적이기 때문에 마이크 장치가 방해가 되지 않는 가를 확인해야 한다. 청각 장애자를 위한 준비도 갖추어야 할 필요도 있다.

 또한 각 성경본문을 봉독한 후에 들은 말씀에 대해 묵상을 하도록 간단한 침묵의 시간을 가지는 것도 도움이 된다.

 성경을 봉독할 때 나타나는 모든 면들은 어떤 나이의 사람들에게도 말할 수 있다: 봉독자의 태도와 몸짓, 봉독대 또는 설교단 위에 놓인 성경의 가시적 상징, 하나님의 말씀이 빛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가능한 성경을 빛(촛불)이 비취는 곳에 두는 것, 품위 있게 읽는 것, 그리고 침묵의 시간 등.

 만일 성경의 본문 외에 추가로 성경 본문을 읽을 필요가 있다면, 다음의 3가지 방법으로 가능하다: 1) 말씀과 직접 관련이 있는 찬송과 유사하게 성경 본문에 대한 한 반응으로, 2) 설교 본문의 부분으로, 또는 3) 설교에 대한 반응의 부분으로. 그러나 추가로 읽는 성경이 원래의 본문을 대신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므로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성경봉독의 주된 목적은 성경을 읽고 듣는 것이지만, 특별한 경우에는 본문이 암기되거나 연출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변화는 한 사람이, 다같이 한 목소리로, 읽는 부분을 분담해서, 또는 어떤 부분을 회중에게 할당하는 등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이런 방법이 본문에 대한 해석으로 구성된다면 본문을 대신한 것보다 더 좋은 성경봉독이 될 것이다. 또한 성경봉독은 경우에 따라 영화, 슬라이드, 춤, 무언극, 또는 노래 등을 동반할 수 있다.

 성경봉독은 강단용 성경이 위치한 곳 즉, 설교단으로부터 또는 봉독대와 설교단이 있는 경우에는 봉독대로부터 진행된다.

 

2. 성가대 찬양(Canticle 또는 Anthem)

 이 성가대의 찬양은 서신과 복음서 봉독 사이에 위치하는 응답송이다. 짧은 예배를 위해서는 응답송을 생략하고 직접 서신봉독에서 복음서봉독으로 진행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다른 두 성경본문을 읽는 것을 나타내도록 봉독자도 다른 두 사람으로 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어떤 교회는 찬양대신 춤을 추기도 한다. 춤이 예배의 한 표현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찬송이나 봉독과 함께 진행하거나 그 춤이 봉독에 대한 응답이 될 수 있다.

 만일 회중의 찬송으로 응답송을 대신한다면 반드시 성경본문의 주제와 관계가 있어야 한다. 이럴 경우 회중 찬송은 성가대의 찬양과 같이 우리가 성경 말씀을 듣도록 도울 수 있다. 그 주일의 찬송이 있다면 성경 본문의 주제에 맞는 새로운 찬송을 부를 수도 있다. 회중은 그 주일의 찬송을 성경공부 시간이나 집에서 준비할 수 있으며 예배 준비시간에 소개받을 수도 있다. 복음서를 봉독하기 전에 찬송을 부르는 것의 선례를 3세기에 시편을 노래로 부른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교회력에서 대림절과 사순절을 제외한 모든 계절에 할렐루야를 후렴으로 부를 수도 있다.

 기도서 송가(canticle) 또는 "작은 노래"는 시편이 아닌 성경 구절을 음악에 맞춘 것이다. 이것은 성가대나 회중에 의해 불려질 수 있다. 이런 노래들 중에는 마리아 송가(Magnificat; 눅 1:39-56)와 시므온 송가(Nunc Dimittis; 눅 2:29-32)가 있다. 아직 한국 교회의 찬송가에는 기도서 송가가 소개되어 있지 않다. 전통적으로 기도서 송가는 성만찬 예배에서 불려지지 않고 아침이나 저녁 기도회를 위해 사용되었다.

 잘 준비된 성가대 찬양(anthem; 성가)은 성경본문이나 교회력에 직접 연결된다. 그러므로 성가대 찬양은 음악적인 우수함 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예배의 주제와 관련이 있도록 선택되어야 한다. 성가(anthem)는 "대답하는(sounding or answering back)" 의미를 지닌 그래서 응답하는 교창(antiphon)에서 온 말이다.

3. 설교

 개신교의 예배는 성경을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그 성경 본문은 해석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의 "사건" "일어난 일" 또는 "행위"로 잘 이해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에 쓰여 있는 말들과는 다르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도움으로 회중이 그것을 들을 때 그들의 삶 속에 살아 움직이는 말들을 말한다. 그래서 각 예배는 그 말씀이 육신이 된 것, 성육신을 축하하는 것이다. 좋은 설교는 자신의 사명을 위해 기도하고 연구하고 시간을 투자하는 설교자와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청중들 모두에게 달려있다. 본훼퍼(Dietrich Bonhoeffer)는 자신의 학생들에게 설교를 들을 때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만날 것을 기대하며 들어야 한다고 충고하였다.

 설교 사역은 전통적으로 말씀과 성례전 사역을 위한 안수와 훈련을 전제로 한다. (최근에는 말씀과 성례전 뿐 아니라 목회 상담에 대한 안수를 말한다.) 사실, 미국의 대학들은 교회에 의해 말씀과 성례전 사역을 위해 목회자들을 준비시키기 위해 세워졌다. 설교의 목적은 이해를 통해 신앙을 양육하는 것(faith-seek-understanding)이다. 설교는 고대의 문화와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 성경 본문을 택하여 최초의 청중들에게 주었던 같은 생명력을 가지고 오늘에로 가져오는 것이다. 성경의 각 절들은 서로 격리된 상태로가 아니라 각 절과 연결된 맥락 안에서 그 의미를 나타낸다.

 설교의 권위는 마태복음 마지막에서 모든 나라를 제자로 만들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으로부터 온다. 우리가 설교로 전하는 것은 그리스도이다. 이런 권위를 강조하는 이유는 전통적으로 설교가 복음서를 봉독한 직후에 진행되기 때문이다. 성경봉독이 복음서에서 절정을 이룰 때 설교는 오늘날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전하려는 것으로부터 직접 흘러나온다. 복음서가 설교의 본문이 아니라도 구약, 서신 복음서로 진행되는 성경봉독의 순서는 동일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관해 이해하는 대로 우리는 성경을 해석하게 된다.

 성경이 읽혀지고 해석되는 것이 필수적이지만 봉독된 모든 성경의 본문이 해석될 필요는 없다. 단순히 성경을 듣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설교를 위해 하나의 본문만을 취급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설교는 회당에서 기원되어(눅 4:16이하; 행 13:14이하) 초대교회에 의해 채택되었다. 바울은 드로아에서 떡을 떼기 전에 설교하였다. 복음서들이 나오기 전에는 설교를 위한 자료들로 예수에 관한 이야기들이 사용되었다. 바울은 자신의 편지들이 예배에서 읽혀지기를 원했으며(고전 16: 22- 24) 그래서 설교 자료가 되었다.

 초기의 설교는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 모든 기능들이 예배에서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어떤 기능들은 기독교를 모르는 자들을 가르치려는 목적을 가진 복음전도나 선교적인 설교였다(행 10:42). 어떤 설교의 기능은 이미 그리스도에게 헌신한 자들을 양육시키기 위한 것이었다(예로, 히브리서). 그리고 어떤 기능은 기독교의 교리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설교가 항상 예배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중세기에 잘못 이용될 때까지는 정기적인 예배의 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이 중세기 동안에도 도미니칸 수도승들의 위대한 설교들에 의해 설교 회복을 위한 움직임이 있었다. 개신교 종교개혁자들도 설교의 중요성을 회복하려고 노력하였다. 많은 종교개혁자들이 예배의 의식적인 순서와 가시적인 요소들을 거부한 결과로 거의 말씀 중심의 예배를 낳았다.

 설교는 많은 기능들을 가지고 초대교회로부터 온 유산 가운데 강한 부분을 이룬다. 20세기에 와서 설교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기독교의 교리나 교훈을 전하는 교리적 설교, 성경 본문 때로는 각 절을 다루는 강해설교, 그리고 특별한 주제나 개념을 성경적 이해에 근거하여 발전시키는 주제설교 등. 부분적으로 우리의 자유로운 강단 전통은 설교자가 읽을 본문뿐 아니라 설교의 방법까지도 결정할 수 있게 만들었다. 1970년대에 개신교의 설교에 새로운 형식으로 등장한 성서일과 설교(lectionary preaching)는 설교의 본문 선택을 광범위하게 만드는 수단이 되었으며 또한 설교를 성서적으로 이끄는데 일조를 하였다.

 설교는 성경봉독과 다르다. 성경봉독 순서에서 우리는 봉독되는 성경의 단어들에 귀 기울인다. 설교(sermon/ homily)의 원래 의미는 강화나 대화이다. 설교는 책으로부터 온 것보다는 책을 읽은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다. 설교는 대화에 필요한 여러 가지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다양하고 표현력 있는 목소리,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 충분한 음량, 눈과 눈의 마주침, 몸짓. 상자형의 강단은 설교자의 몸을 가로막기 때문에 설교가 지니는 물리적인 영향을 감소시키는 경향이 있어서 최근에는 강단 앞으로 나와서 설교를 하는 설교자들도 있다.

 한국 교회에서 설교자들이 가운이나 예복을 입도록 강요받지는 않지만 가운이나 예복 착용은 점차 확대되고 있다. 설교자가 가운을 착용해야 하는 이유의 하나는 설교 시간에 초점이 되는 것은 사람으로서의 설교자가 아니라 설교자의 직무이기 때문이다. 가운이 목사 안수의 표시는 아니다. 스톨(stole)을 가운 위에 입는다. 스톨은 가운과 함께 입도록 만들어진 것임으로 거리 복장 위에 입을 수 없다.

 설교의 길이는 10분에서 30분 정도로 다양하다. 최근 예배 갱신의 한 결과는 설교 이외의 다른 순서들이 전통적으로 설교로부터 기대되는 것의 얼마를 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예로, 추수감사절의 기도). 설교 중심의 예배에서 그리고 설교가 마지막 순서로 나오는 예배에서 설교가 약하면 예배 전체가 약해질 수 있다. 그러나 예배가 설교에 의해 덜 지배받는 경우에는 다르다. 예배의 다른 순서들이 메시지를 전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간단한 설교가 약한 설교는 아니다. 사실, 간단한 설교가 잘 준비된다면 더욱 강한 설교가 될 수 있다. 긴 설교보다 좋은 짧은 설교를 준비하는 것이 더 어렵다. 그 이유는 오늘날 회중이 집중할 수 있는 평균 시간이 12분이나 13분이기 때문이다. 설교가 더욱 짧아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은 결코 설교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루터(Martin Luther)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viva vox Dei)이라고 부른 설교의 말씀은 예배에서 절대 필요한 부분이다. 설교에서 우리는 믿음으로 부름을 받아 우리의 믿음이 계속 양육되고 새로워진다.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는 것은 성만찬에서와 같이 설교에서도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임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응답하는 또는 감사하는 예배

(The Responding/Thanksgiving)

 점차 세계 교회는 성만찬을 축하하지 않는 주일 예배는 적절하지 못한, 충분하지 못한, 또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성만찬 없이 진행된 주일 예배에서 말씀에 대한 충실한 표현으로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렸다. 비예전의 전통으로 이어진 한국 교회들은 설교를 하나님의 이야기가 충분히 제시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성만찬 없이 말씀을 중심으로 드린 예배는 성만찬 이전에 행해진 예배(ante-communion)로 불려진다. 이 말은 성만찬까지 축하해야 충분한 예배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교회가 매주일 성만찬을 축하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교회들은 성만찬을 대신하여 들은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해 하나님에게 다양한 감사를 표현한다. 많은 교회들은 다음의 다섯 가지 방법으로 성만찬을 대신하여 감사를 표현한다.

 첫째, 말씀 초청에 대한 응답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초청, 세례예식, 목회자 헌신, 또는 치유집회를 진행한다.

 둘째,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기억나게 하는, 그리고 성령의 임재를 구하는 응답찬송을 여러 곡 부른다.

 셋째, 중보, 감사를 위한 응답기도나 통성기도를 진행한다.

 넷째, 말씀을 듣고 은혜 받은 것을 간증한다.

 다섯째, 선교(전도) 또는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 등의 행동으로 응답한다.

 위와 같이 예배에서 설교에 대한 응답으로 설교 바로 다음에 따라오는 적절한 순서들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일반교회에서 실천 가능한 몇 가지만 소개한다.

 사도신경, 찬송, 제자도에로의 초청, 세례, 신앙갱신, 간증, 회중의 생활과 일에 관한 광고 등이 있다.

1. 중보기도(Prayers of the People)

 성경봉독과 설교는 회중 속에 있는 우리 각자에게 다르게 영향을 준다. 우리는 거의 들을 수 없을지 모르는 한마디의 말이 암으로 고생하는 자에게 새로운 희망을 준다는 것을 알 수 없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한 이웃에게는 들어보지도 못한 것일 수 있다. 중보기도는 말씀 선포를 통해 그리스도를 만난 것에 대한 우리의 응답으로 이해될 수 있다. 중보기도는 성경봉독과 설교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기 때문에 설교자나 사회자보다는 심방이나 선교 목회를 대표하여 성도들의 생활을 잘 아는 평신도 대표나 평신도 목회자에 의해 인도되는 것이 좋다. 이 점에서 중보기도는 목회자에 의해 인도되는 목회기도와 다르다. 중보기도는 교회밖에 대한 관심으로 성도들이 목회상담이나 세계선교에 관한 훈련을 시작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어떤 교회들은 중보기도 대신 목회자가 인도하는 목회기도(pastoral prayer)를 순서로 넣었다. 목회기도는 묵상을 인도하는 형식과 영적 향상을 위한 시간으로 진행되었다. 목회기도는 종종 매우 깊은 목회적 관심을 나타내어 목회자가 성도들의 모든 생활에 깊이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성도들은 종종 자신들의 관심이 목회기도 속에 표현되는 대로 알려진다고 느낀다. 목회기도는 아름답고 거룩한, 그리고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시간일 수 있다. 이 기도의 성공은 종종 목회자 개인의 능력에 달려있다. 목회기도의 위험은 그 기도가 성도들의 관심을 사로잡는 기도라기보다는 또 하나의 설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설교 후에 들은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기도를 하는 것은 2세기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기도는 점차 중보기도의 형식을 갖추어 성도들의 응답으로 끼리에(Kyrie)와 함께 장로에 의해 인도되었다. 나중에 중보가 사라지고 끼리에만 남았다. 종교개혁자들은 예배 속에 중보기도를 회복하려고 하였다. 장로교 예배의 뿌리를 형성한 1664년의 웨스트민스터 교리(Westminster Directory)는 이 기도를 설교 앞에 위치하였다. 이 기도가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5쪽을 할애하였다(예, "우리의 어두운 생각, 굳은 마음, 불신앙, 완고함, 안일함, 무미건조함, 초라함을 애통합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고백으로부터 고상하고 잘 선택된 언어로 모든 것을 위한 간구와 중보로 움직인다(예, "우리의 기도에 은혜가 넘치도록 응답하심으로 용기를 주시어 은혜의 보좌에로 가까이 이끄소서"). 이 기도는 종종 성경 구절로 가득 차 있다. 목회기도의 길이는 다양하지만 3분에서 5분 정도가 이상적이다.

 중보기도의 내용으로 간단한 죄 고백과 용서를 위한 기도(설교가 특별한 어떤 것을 제시하였다면) 그리고 특수한 축복에 대한 감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감사의 내용은 다음에 나오는 성만찬 예배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중보기도의 주요 내용은 중보(intercession)이다. 중보기도는 특별히 다음의 영역들에 주목하면서 관심과 감사를 표현한다: 세계, 하나의 교회, 지역 공동체, 도움이 필요한 자들과 죽은 자들(이런 영역들은 설교를 위해서도 중요한 주제가 될 수 있다). 회중의 생활과 일에 관하여 다양한 면들이 다루어질 수 있다. 회중은 직접 기도제목을 제시할 수 있고 기도를 준비하고 진행할 때 소개될 수 있다. 짧은 기도나 간구로 이루어지는 기도(litany)는 교독문(versicle)과 다음과 같은 응답들과 함께 사용될 수 있다: "하나님, 우리의 기도를 들으소서", "당신의 사랑으로 응답하소서", 또는 "우리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이런 응답들은 말이나 노래로 이루어질 수 있다.

 중보기도는 회중이 참여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이고 자발적인 순서가 될 수 있다. 중보기도에는 각 개인의 관심들이 침묵이나 큰 소리로 표현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이런 관심들이 매우 특수한 것일 수 있으나 간단해야 한다. 그 관심들은 하나님께서 해야 하시는 것을 가리키지 않고도 단순히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큰 교회에서는 이런 관심들을 기도요청 카드에 적어 성전 입구에 비치된 기도함에 넣도록 하거나 광고 시간에 적어 내도록 할 수도 있다. 이렇게 모여진 기도요청 카드들의 일부를 크게 읽을 수도 있다. 작은 교회에서는 성도들이 자신들의 관심을 침묵이나 소리를 내어 제시할 수 있다(각자가 자신의 기도 제목을 "하나님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와 같은 교독문 끝에 이어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각자가 자신의 기도를 표현할 때까지 기다릴 때 침묵이 필요한데 그 길이는 성도들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해야 한다(최소한 1분). 기도는 인도자가 마지막으로 모든 기도 제목들을 하나님에게 위탁하고 성도들이 "아멘"을 말할 때 끝난다. 이런 기도의 종류는 교회의 모임에서 진행된다면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서로가 기도를 나눔으로 친근하게 된다.

 이 중보기도를 인도하는 자는 봉독대나 세례탕을 바라보며 복도 중앙에 서거나 머리를 숙일 수 있다. 그것은 기도가 성도들의 생활과 필요로부터 나온 자신들의 것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특별한 경우에는 우리 기도의 관심들을 가시화하는 묵상적인 방법을 제공하기 위해 영상자료들을 사용할 수도 있다.

2. 침묵기도

 각 성경봉독 후에 진행하는 것처럼 설교 바로 다음에 나오는 간단한 침묵은 들은 말씀에 대한 묵상을 가능하게 한다. 침묵이 우리의 예배에서 매우 자주 무시되어 왔지만 침묵의 중요성은 하박국에 의해 언급되었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 지니라(합 2:2)." 우리가 말로 표현하는 것이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응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그림 표시로 응답할 수도 있다. 침묵의 시간은 성령으로 하여금 비언어 또는 언어가 사용되기 이전의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씀하도록 만든다. 위대한 곡이 소리와 침묵의 혼합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예배도 그 두 가지가 함께 짜여짐으로 이루어진다.

 우리의 예배는 우리가 침묵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텔리비젼과 함께 사는 우리들은 종종 침묵을 죽은 시간으로 말한다. 예배에서 우리는 침묵의 시간이 될 수 있는 것을 음악으로 채우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시골에서 도시로 올 때는 얼마나 소리에 압도당하는지, 반대로 도시에서 시골로 갈 때는 어떻게 듣는 방법을 다시 배워야 하는지를 경험한다. 침묵이 효과를 나타내도록 회중은 교육을 통해 잘 준비할 필요가 있다.

3. 신앙고백(사도신경)

 설교가 공동체를 대표하는 해석이 되도록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부분적으로는 개인의 해석이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위험을 가지고 있다. 그런 설교에 신앙고백은 공동체성을 주어 회중과 연관시킨다.

 1세기의 교회에서 매주 행하는 성만찬 전에 드리는 긴 기도(성찬기도 또는 대감사기도로 알려진)가 신경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신경의 내용은 그리스도에 관한 필수적 신앙을 요약하여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위대한 행위에 대해 감사하는 유대인의 감사 형식을 따랐다. 별도의 신앙고백이 없었다. 신경 특별히 니케아신경(Nicene Creed)을 암송하는 것은 4세기의 이단에 대처하기 위한 주요 교리적 논쟁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신경은 기도가 아니라 성도들을 바로잡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신경을 암송하는 것이 11세기까지는 유럽에서 일반적인 예배 순서가 되지 않았다. 사도신경은 세례에 관한 신앙선언으로, 세례 예식에서 말하는 "예수는 주이시다"와 같은 초기의 고백적 선언으로부터 나왔다. 여하튼 사도신경은 특별히 세례 예식과 갱신을 다짐하는 예배에서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적절하다.

 가장 충분하게 동시대의 신앙을 표현한 것은 성찬기도들에서 나타난다. 각 성찬기도는 새 신자들을 위한 성경공부를 위한 기초를 제공하였다. 신경을 암송하는 순서의 위치는 성만찬이 집행되지 않는 예배나 다양한 교회 그룹들이 활동하는 예배에서 가장 적절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앙이 표현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혹은 다른 나라에서 나온 과거의 신앙 표현이라는 이유로 사도신경을 주일 예배순서에서 생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예배에서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이유는 이단을 바로 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동의 신앙고백 행위 즉, 우리를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연결시키는 공식적인 신앙 선언으로 사용되는 "고백"을 하기 위함이다. 루터가 한 것처럼 신앙고백을 곡으로 부를 수도 있다.

4. 찬송

 설교와 그 다음에 부르는 찬송과의 밀접한 관계는 오랜 전통이 되었다. 설교 전에 부르는 찬송과는 달리 이 찬송은 설교의 주제와 관련하여 헌신에 초점을 두게 된다. 이 때 예배를 준비하는 순서가 있다면 새로운 찬송이나 익숙하지 않은 찬송을 부를 수 있다.

5. 제자도에로의 초청/ 세례와 신앙갱신

 제자도에로의 초청은 세례와 신앙갱신(신앙의 확증, 고백, 재확인)과 같은 의식을 포함할 수 있다. 세례는 후보자의 나이에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기독교 공동체의 성만찬을 받는 회원으로 가입하는 유일한 의식이다. 세례 의식은 유아와 성인 세례뿐만 아니라 견신(confirmation)과 신앙고백(profess-ion of faith)을 통해 각 개인과 회중의 세례 신앙을 갱신하도록 한다. 그러므로 이 때의 예배는 기독교의 입회의식(initiation)들--세례, 견신, 첫 성만찬--을 재결합한다.

 물론 세례는 유일회의 의식이지만 세례신앙의 갱신은 여러 번 일어날 수 있다. 견신(confirmation)을 일생에 한 번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한국 교회에는 자주 갖는 신앙갱신을 위한 의식이 비교적 생소하다. 신앙을 갱신하는 의식은 여러가지 경우에 이루어질 수 있다. 다양한 이유로 개인들은 세례서약을 갱신하고 축복을 받을 기회를 환영한다: 성인식, 졸업, 장기간의 출타(군입대, 유학, 외국근무 등), 교회 이적, 결혼, 출산, 은퇴 등. 모든 회중은 기념식에서 자신들의 세례신앙을 갱신할 수 있으며 그 때 자신들의 사명선언(mission statement)을 채택하거나 공동체 계약을 갱신할 수도 있다.

6. 간증

 예배의 첫 부분은 객관적인 경향이 있다. 그러나 말씀으로 은혜를 받은 후에는 예배가 더욱 주관적인 분위기를 띤다. 이런 이유로 간증은 설교 후에 진행하는 것이 적절하다.

 복음주의 계통의 교회들은 개인의 신앙을 간증하는 순서를 진행해 왔다. 특별히 작은 교회의 예배에서는 즉흥적이거나 계획에 의해 간증할 수 있는 기회가 가능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예배가 계획되고 형식을 갖추는 대형교회에서는 간증이 잘 준비될 필요가 있다. 간증이 설교에 포함될 수도 있다. 주일 오전에 신앙간증을 위한 특별 예배를 계획할 수도 있다. 이런 특별예배는 주로 찬송, 간증, 기도로 이어지는 형식을 취하여 일반 예배의 구조와 다르게 진행될 수 있다.

7. 회중의 생활과 일에 관한 광고

 광고가 들은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설교 후에 위치할 때는 회중의 생활과 일을 드리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순서는 회중(광고위원)에게 맡겨 공동체의 생활 속에 회중 모두가 참여할 수 있도록 진행한다. 이 때 다음 순서인 중보기도(prayers of the people)를 위하여 개인적 관심을 모을 수도 있다.

 그러나 광고가 설교 후에 진행되면 예배의 흐름을 깰 수도 있다. 한편으로 우리는 예배가 자유로우며 자발적인 분위기를 유지하기를 원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예배의 흐름과 통일성(말씀과 성만찬 예배)을 깨뜨리며 여러 가지 도움을 요구하는 광고 순서를 원하지 않는다. 광고를 지루하지 않게 진행한다면 회중의 생활과 일을 대표하는 순서가 될 수 있다.

 성만찬이 없는 예배에서는 응답하는 예배 순서들로 위와 같은 순서들 다음에 평화의 인사, 봉헌, 광고가 진행될 수 있다.

파송하는 예배(The Sending-forth)

 최근에 주일 예배에 나타난 새로운 경향은 예배의 마지막 부분을 통하여 예배 공동체의 선교적인 기능을 강조하는 것이다. 한 교회의 주보는 이 마지막 부분을 "말씀을 따라 열매를 맺기 위해 세상으로"라는 표제를 붙였으며 또 다른 교회의 주보는 교회의 직원(staffs) 명단을 소개하는 부분에서 제일 먼저 "목회자: 모든 교인들"로 시작하고 그 밑에 담임목사, 목사, 장로, 고용인 등의 이름을 소개하였다. 어떤 교회는 교회 출구나 주차장 출구에 "당신은 지금 선교 현장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라는 글을 붙여 교회를 떠나는 교인들에게 파송되고 있음을 기억나게 한다. 이런 노력들은 교회와 예배의 현장에 대한 이해가 선교적으로 변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예배자들에게 세상은 선교의 현장이다.

 예배의 마지막 부분인 "파송하는 교회"는 간단하고 목적이 분명하다. 이 부분의 순서들은 예배 전체를 결론짓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예배의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과 주를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 세상으로 가도록 위임하는 성경 말씀을 기억한다. 이런 순서들을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세상의 고통을 알고 믿음을 실천함으로 우리의 예배가 계속된다는 것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파송하는 예배의 성격은 롬 12:1에 잘 나타난다. 바울은 로마의 교인들에게 예배로부터 위임받은 것의 본질을 말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바울의 이해에 의하면 예배는 생활이다. 예배가 교회의 문을 나오기 전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생활 여러 곳(가정, 직장, 여행)에서 계속된다.

 만일 파송의 예배가 예배자들에게 더욱 의미를 부여하기를 원한다면 먼저 다음의 간단한 질문을 할 필요가 있다: 파송 순서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주로 파송은 하나의 축복이다. 우리가 예배에서 하나님에게 찬양과 경배를 드릴 때 이것은 실제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송축(축복)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송축(축복)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지닌 능력과 역사를 선포하며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찬양과 경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송축할 때는 우리가 하나님에게 어떤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하나님을 인정하고 섬기는 것)을 행함으로 하나님을 송축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실 때는 그 분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움과 거룩함에로 부르신 것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시는 것은 하나의 선물 즉, 실제적으로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이다. 우리에게 축복을 부어주신다는 의미가 민 6:24-26에 잘 나타난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이 말씀과 성경의 다른 모든 축복 말씀들의 핵심은 27절에 있다: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축복을 하실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분의 이름을 부여하신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만일 매일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서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인정한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달라질까?

 파송의 예배는 공예배를 끝내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들의 생활 속에서 예배를 계속하도록 파송하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 이 파송의 내용을 완성시키는 3가지 예배행위가 있다: 축복, 찬송, 파송. 파송의 예배는 축복기도(하나님의 축복), 파송의 찬송(사명을 주어 하나님의 백성들을 파송하는 찬송이나 복음송), 그리고 파송의 말씀의 순서로 진행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찬송, 파송, 축복의 순서로 진행하는 교회들이 있지만, 각 순서의 의미를 고려한다면 파송이 마지막으로 예배 장소를 떠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가장 마지막 순서로 적절하다. 회중이 세상에서 교회로 부름을 받았음을 먼저 알리기 위해 파송(위임) 순서를 축복 앞에 둘 수도 있다.

1. 축복(Benediction/Blessing)

 하나님에게 제단을 잘 쌓았던 아브라함이 세상에서 만나는 자들에게 축복의 근원이 되었던 것처럼 모든 예배자들은 예배의 마지막 순서에서 세상에서 축복이 되기 위해 먼저 축복을 받을 필요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축복 또는 축도는 예배 공동체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선언하는 것이다. 축복하는 성직자는 회중을 바라보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두 손을 펼쳐 들고 손바닥을 약간 아래쪽을 향한다. 일반적으로 이와 같은 축복 의식이 교회에 나타난 것은 대다수의 회중이 성만찬을 받지 못하고 교회를 떠날 때이었다.

 회중이 곧 세상에서 생활하고 일할 것을 암시하는 의미로 광고 순서를 파송의 예배에 포함할 수도 있으나 어디까지나 첫 번째 파송의 예배순서는 축복이나 축복기도이다. 오늘날 예배갱신 운동은 축복기도의 참 의미를 재 이해함에 강조를 하고 있다. 축복이 선언될 때 예배자들은 그 축복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식적이고 개인적인 축복선언으로 받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도록 요청을 받는다. 어떤 목사들은 축복기도에서 생활의 특별한 부분들에 대해서도 언급함으로 예배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일상생활의 모든 면에 계신다는 것을 기억나게 한다. 축복 다음에 세상으로 파송되는 것에 관한 찬송이나 노래가 따라온다. 이 때 섬김, 선교, 또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다룬 위임에 관한 찬송을 부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복음송이나 폐회송도 어울린다.

2. 파송의 찬송(A Commissioning Hymn)

 파송의 찬송을 부르면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함께 모인 교회(하나님의 백성)로서의 회중은 세상에서 계속 교회가 되도록 위임받는 것을 확인한다. 예배가 끝난 후 특별한 축제 행사를 계속할 경우에는 파송의 찬송은 예배 후에 다시 들어올 예배 위원들과 성가대를 위한 폐회송으로 부를 수도 있다. 입례송을 부르며 입례하는 것처럼, 오순절에는 전 회중이 세상으로 나가는 교회를 상징하여 예배 후에 성전으로부터 교회 앞뜰로 나가는 폐례식(閉禮式; 폐회행진)을 가질 수 있다. 대림절이나 사순절과 같은 참회하는 절기에는 침묵이 마지막 찬송을 부르는 것보다 더욱 적절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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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파송의 말씀(Commissioning Words)

 파송(sending forth) 또는 위임(commissioning)은 집례자(성직자)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가시오" 또는 "주를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 세상으로 평안히 가시오"라는 말을 하는 순서이다. 이에 대해 회중은 "하나님께 감사를"하고 응답한다. 원하는 경우에는 파송사와 응답을 노래로 할 수도 있으며 이미 곡으로 된 위임사가 사용될 수도 있다.

 폐회송(또는 성가대의 송영)을 부르는 동안 예배 인도자들은 가능한 성전의 뒤쪽으로 나가는 것이 좋다. 전통적으로 폐장 순서는 입례 순서와 동일하다: 1) 십자가, 2) 기, 3) 성경봉독자, 4) 성가대, 5) 목사(설교자, 사회자) 이 폐장 순서가 의미하는 것은 폐회송을 부르는 동안 목사들은 성전 뒤쪽에 모여 마지막 찬송을 인도한 다음에 파송의 말씀으로 예배의 결론을 내린다. 이 파송의 말씀이 교회에서의 예배 경험을 종결하고 그 예배를 세상에서의 예배자들의 삶과 연결시킨다. 일반적인 폐회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마지막 찬송(또는 성가대의 송영) 2) 목사, 예배위원, 성가대원은 성전 뒤쪽에 선다 2) 목사가 두 손을 들고 "이제 모두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 세상으로 나가십시오"라고 외친다. 3) 그 다음 회중은 "할렐루야!" 또는 "아멘!"으로 힘있게 응답한다.

4. 후주

 최근의 예배에서 후주는 전형적인 순서가 아니다. 어떤 회중은 후주를 듣지만 다른 회중은 후주를 배경 음악으로 여기고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후주가 끝날 때까지 회중이 자리에 앉아서 듣도록 주보나 성가대를 통해 알릴 수 있다. 후주를 듣도록 하는 또 다른 방법은 성도의 교제 및 교회소식을 진행할 수도 있다. 이 때 새로운 찬송을 배우거나 간단한 연주를 진행할 수도 있다. 파송을 받는 자들로서 교회를 떠나기 전에 기도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오르간 연주를 제시하는 것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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