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4-17 20:34
신은 존재냐 비존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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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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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존재냐 비존재냐?

 

하나님을 존재론적으로 한 마디로 잘 설명해주는 성경 구절이 있다.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딤전 1:17). 썩지 아니하다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영원하다는 것이며, 보이지 아니하다는 것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영이라는 것이며, 홀로 하나라는 것은 그 존재가 존재하게 되는 근원이 외부에 있지 않고 스스로에게 있어, 자신의 뜻이 아니고는 그 어느 것에도 구속을 받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우주의 모든 사물과는 절대적으로 다르다. 세상의 어떠한 존재도 썩으며, 보이며, 외부와의 관계에서만 그 존재가 존재다워지지만 하나님만은 말 그대로 홀로 하나인 절대자이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을 이해하면 하나님을 존재인가 비존재인가 논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 아무 의미가 없다. 시공을 초월하는가, 아니면 시공간 안에 내재하는가, 물질인가 아닌가, 영원한가 일시적인가 등은 하나님을 물리적으로 분석한 외형적 이해일 뿐이지 하나님의 품성까지 포함한 전존재론적 해석이 아니다. 외형적 분석만으로 하나님을 보면 모든 존재(being)란 어쩔 수 없이 시공의 범주에 의해 제약되지만, 시공을 초월하는 절대자는 모든 존재와 절대적으로 다르다는 의미에서 비존재(non-being), 혹은 일반 사물(thing)과 다르다는 의미에서 no-thing, Nothing으로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이 문제를 좀더 따지기 위해선 존재(being)와 사물(thing)의 구분부터 해보자. 사물은 일차적으로 생명이 없어 스스로 생장 활동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식물이나 동물은 생명이 있어 자라긴 하지만 존재라고 말하지 않는다. 최소한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결정한 것을 행동에 옮기는 인간이나 그를 넘어서는 어떤 인격체를 존재라고 한다. 따라서 존재와 사물을 나누는 기준은 과학적인 분자구조와 질량과 시공간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인격성이 있는가 없는가이다. 이런 측면에서 신은 무조건 존재이지 비존재 또는 존재조차 초월한 어떤 것이 아니다. 절대자에게서 인격성을 제외해버리면 기독교 변증학자 오스 기니스(Os Guiness)가 말한 대로 '동양적 신앙 집단인 힌두교·불교·뉴에이지들이 공유하는 궁극적 실체에 대한 공통적 견해는 '미분화된 비인격성(undifferentiated impersonal)' 또는 존재에 대한 비인격적 입장'이 되어버린다.

계를 갖지 못하며, 따라서 하나님에 대해 온전한 이해를 못한다. 인격적 관계를 무시하고 하나님만 따로 떼어서 내린 인간의 평가와 교설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대신 창 1:1에 드러난 절대자 하나님과 인격적 사랑의 관계에 바탕을 둔 교설은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기독교 신앙은 절대자에 대한 앎이나 체험으로만 그 신앙이 신앙으로서 의미를 가진다. 또 설사 그 앎과 체험이 우리의 이해나 기대를 뛰어 넘는다고 해서 그 관계가 결코 무의미해지지 않는다. 신자는 성령의 거듭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깨닫고 절대적으로 선하신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게 되며, 그래서 그분과 항상 동행하는 삶을 살기 때문에 신자가 된 이후의 모든 체험은 유용하다. 그 체험 중에서 내가 유용한 체험인가 아닌가 따져서 고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간혹 우리의 이해나 인식을 초월하는

미분화된 비인격성의 대표적인 것으로 동양의 음양 이론을 들 수 있다. 분명히 지구에 음극과 양극을 뛴 자성이 있고 그것이 인간의 생존과 감정에 영향을 끼치기는 하지만 그 자체는 절대로 궁극적 실체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지구의 자전과 공전 현상을 통해 생겨나는 자연 현상이다. 하나님이 지구 위에 인간을 두고 살아가는 생존 환경으로 만든 한 사물 내지 현상이지 그 자체가 인격성을 소유한 존재가 아니다. 또 최근 우주를 감싸고 있는 눈에 안 보이는 암흑에너지 내지 기(N¨)를 절대자라고까지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 역시 공기·이온·빛·미립자 등이 상호 교차·충돌·연합하는 활동에 의해 생기는 현상이거나, 하나님이 우주를 존재케 하기 위해 만드신 비물질적 사물이지 그 자체가 절대 신이 될 수 없다.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인격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어떤 존재가 존재로 성립되기 위해선 인격을 갖추어야 할 뿐 아니라 그 인격이 반드시 존재와 존재끼리의 상호 관계성에서 파악되어져야 한다. 존재끼리의 상호 관계성이 없다면 존재로서의 아무 의미가 없다. 상식적으로 나라는 존재가 어떤 존재인가 나 스스로 제대로 알 수도 없지만, 설사 알았다고 한들 만약에 이 땅에 정말 자기 혼자만 존재한다면 그 존재의 인격성은 아무 의미와 가치가 없다. 인간이란 존재는 항상 나는 저 사람에게 어떤 존재인가 또는 저 사람은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라고 말할 때만 그 존재가 제대로 의미를 갖는 존재가 되며 그 인격성이 파악된다.

절대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반드시 절대자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비절대적 존재가 있어야만 절대자가 비절대자에게 절대적인 존재가 된다. 어떤 존재가 절대자냐 아니냐는 인간이 그 신의 존재의 모습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거나, 논리적으로 절대주의 입장 혹은 상대주의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절대자와 비절대자 간에 인격적인 관계가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창조주로서 절대자란 존재와 피조물로서 인간이란 존재가 올바른 인격적 관계를 맺는 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성에 관해 외형적·물리적·논리적 전개와 설명은 일체 없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1:1)라는 선포로 시작한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그래서 인간을 사랑하는 하나님, 그 인간과 상호 사랑의 인격적 관계를 맺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 이제 당신께서 인간에게 어떤 존재이며, 인간은 또한 자신에게 어떤 존재인가를 그 이후부터 설명하겠다는 것이 성경이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끈다는 의미가 바로 이 인격적 관계가 선행이 되어야 신앙이 성숙될 수 있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과 인간 간의 인격적 관계는 인간과 인간끼리의 관계와는 다르다는 말이다. 인간끼리의 관계에서는 반드시 상호 인정하고 원해야만 인격적 관계가 형성된다. 한쪽에서 철저하게 상대를 무시하면 아무 그 관계란 무의미하다. 즉 인간관계란 항상 상대적일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절대적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없던 절대자가 새로 생기고 상대적인 하나님이 절대적 하나님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또 인간이 그를 안 믿는다고 절대적인 하나님이 없어지거나 상대적인 신으로 바뀌는 것도 아니다.

그분은 오직 홀로 하나이시다. 이를 인정하고 그분 앞에 나와 겸손히 항복하며 참된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사람에게만 하나님이 하나님으로서 진정한 의미가 생길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절대자에 대한 인간 나름대로의 이해와 인식은 사람에 따라 굴절되고 왜곡될 수 있으며 그래서 절대자에 대한 인간의 교설 또한 상대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격적인 관계가 아직 맺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연 그대로의 인간의 상태가 상대적·비절대적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격적 관

체험마저도 오직 신자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나아가 신자도 간혹 사탄의 시험에 빠지는 경우도 있지만, 욥의 예에서 보듯이 그것 또한 하나님의 광대한 섭리 안에서 이뤄지는 일이며 결국은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신다. 자기가 깨닫고 판단하여 자기에게 유용한 체험만 신앙으로 인정하겠다고 덤비면 그야말로 자기가 절대자의 위치에 올라서는 것이다. 기독교는 깨달음이나 배움의 종교가 절대 아니다. 오직 절대자에 대한 인간의 올바른 반응만을 요구하는 종교다. 인간의 뜻이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전부다.

절대자에 대한 한 가지 절대적 교설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 관계 안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고백이자 그런 관계를 갈망한다는 투정에 불과하다. 절대적인 것은 이 세상에 없다고 단정지어 버리면, 그 단정지은 것 자체도 이미 절대적인 명제가 되어버린다. 상대적인 인간이 취할 입장이 못 되며 그런 단정으로 기독교의 입장을 비난할 수 없다. 진정한 상대주의란 다음 세 가지 입장을 다 수용해야 한다. 1) 진리가 있다면 예수만이 구원의 진리가 된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 진리일 수 있다. 2) 역으로 기독교의 그것만이 진리이기에 나머지 모두는 진리가 아닐 수 있다. 3) 진리가 없다면 모든 것이 진리가 아니다.

지금 어떤 구원의 길이 진리인가 아닌가를 논쟁하자는 뜻이 아니다. 기독교에서 예수가 유일한 길이라고 할 때의 그 의미는, 절대적인 사랑의 하나님과 절대적인 인격적 관계를 갖고자 할 때에 한해 십자가만이 그 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의 모든 종교와 인간은 세 가지로 나뉠 수밖에 없다. 우선 절대적 하나님과 절대적 관계를 맺는가, 상대적 하나님과 상대적 관계를 맺는가로 둘로 나뉜다. 전자는 기독교이고 나머지는 다른 일반적인 종교다. 셋째는 그 중간 입장으로 절대적 하나님은 인정하지만 절대적 관계를 맺지 못하는 종교도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이슬람은 숙명적 관계를, 유대교는 선민적 관계를 맺는다.

절대적인 하나님과 절대적 사랑에 바탕을 둔 인격적 관계를 가진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관계를 가지라고 권유하는 것은 유치한 신앙이 될 수 없다. 인류가 정신사적으로 장년기에 왔으니 그에 맞게 상대적으로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유치한 수준이다. 정신사적으로 봐도 현대의 모든 철학과 사상이 기실 헬라·로마 시대 이후로 별로 발전한 것이 없다. 이미 선현들이 말한 것을 재탕 삼탕, 그 표현만 조금 바꾸어 고상한 용어를 썼다 뿐이지 그게 그것이다. 그래서 한 일이라고는 일반인들이 그 사상을 제대로 못 알아차리게 만들었거나 이 세상에 절대적 진리는 없다고 주장해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절대적 사랑의 하나님, 우주의 궁극적 실체로부터 멀어지게 한 일말고는 없다. 정말 인간이 비절대적인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려면, 100% 순수한 상대주의 입장에서 절대자를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100% 부인(완전무신론)하거나 100% 시인(절대적 신앙)하거나 둘 중 하나뿐이지, 그 중간의 회색 지대는 없다는 것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라면 쉽게 알 수 있고 핑계치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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