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1-07-06 21:23
사차원의 영적기도(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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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6,890  

제11장 기도의 구분

 

기도에 관한 고정관념을 벗어나라.

깨뜨리라. 믿는 것과 아는 것,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서로 다르다.

진정한 크리스챤은 단지 하나님을 믿는 수준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수준에 이른 사람이다.

 

 

1. 구도(口禱)

생각, 머리, 입에서 나오는 말로 하는 기도이다.

기도문, 제목에 의한 기도, 특정한 목적을 위한 기도, 대표기도, 합심기도가 이에 해당한다.

 

2. 심도(心禱)

마음으로 하는 기도이다.

형식이나 의식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 깊은 곳에서 드리는 기도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우리가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우리의 마음을 밝히 보신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마음에 있는 것을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영에 있는 것이 마음에 전달되고, 마음에 있는 것이 생각에 전달되고, 생각에 있는 것이 다시 말로 전달되어 표현되는 과정에서 대부분이 상실되어 버린다.

최종적으로 말로 표현되는 것으로는 마음에 있는 것을 다 표현할 수 없다.

어린 아기의 마음을 읽는 엄마처럼, 엄마에게 말이 아니라도 자신을 표현하는 아기처럼 하는 것이 심도이다.

오랜 시간 하는 구도보다는 짧은 심도가 더 중요하다.

심도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간단한 말, 단순한 말로 한다.

생각을 섞지 말고 마음을 아주 간단한 말에 담아 기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태초에 흙으로 인간을 만들고 하나님의 성품인 영성을 넣어주셨다.

그런데 그것이 죄로 말미암아 잃게 되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얻은 크리스챤들은 바로 이 영이 살아난 사람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에게 영성이 충만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다시 오신 성령님을 흙으로 된 우리 몸에 충만하게 담아야 한다.

구원을 얻을 때는 성령님이 우리를 찾아 오셨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위해서는 우리가 우리 속에 오신 성령님을 찾아 나서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영성의 회복이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해야 한다.

이것은 이론으로는 되지 않는다.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에게 그동안 때가 묻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이 때를 벗기기만 하면 지금도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교회성장 프로그램같은 것으로는 이제 안 된다.

건물이나, 성도의 숫자가 중요하지 않다.

이제는 내적인 성장이 더 중요하다.

초대교회의 영성을 회복해야 한다.

초대교회의 사도같은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기도를 회복해야 한다.

마냥 달라고만 하는, 부르짖는 기도에서 영적기도로 돌아서야 한다.

성도들이 직접 하나님과 만나는 기도로 돌아가야 한다.

성도를 목회자의 종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기도는 목회사역의 생명력이다.

앞으로 기도로 영적세계에 대하여 뚫지 못하면 아무것도 안 된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마음이 너무나 굳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음을 풀어줄 영력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기도는 훈련이 있어야 한다.

머리는 기능적인 부분이다.

모든 일을 머리로만, 기능적인 부분으로만 살려고 하지 말라.

그럴수록 머리가 아파진다.

기도를 통하여 마음을 훈련시켜, 마음으로 살려고 하라.

마음을 활동시키라.

마음은 하나님과의 교제와 사귐의 장소이다.

묵상을 통하여, 침묵의 기도를 통하여 마음을 살리라.

성경은 믿음의 사람들이 묵상과 침묵을 통하여 내면을 치유한 내용으로 가득하다.

이를 훈련하라.

마음이 내 삶을 지배하게 하라.

심령이 내 삶을 지배하게 되면, 하나님이 내 삶을 지배하게 된다.

전에는 마귀가 내 삶을 지배하였지만, 이제는 하나님이 다스리게 된다.

하나님의 지혜가 솟아오르고, 능력이 넘쳐나게 된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의 단계에만 머무르지 말라.

그 다음의 화평의 단계에 이르려고 노력하라.

그리고 다시 거기서 일치의 단계에까지 이르려고 나아가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화평의 단계에서 일치가 아니라, 일의 단계로 들어간다.

그러므로 문제가 생긴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일의 관계가 아니라, 사랑의 관계, 교제의 관계가 되기를 원하신다.

마르다는 주님과 일을 통하여 관계를 맺으려고 하지만, 주님께서는 사랑의 관계를 가지려는 마리아를 더 사랑하시고, 기뻐하신다.

이것이 또한 바리새인들의 문제였다.

이들은 하나님과 일의 관계, 행위의 관계를 가지려고 하였지, 사랑의 관계를 가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상은 이런 사랑의 관계가 되어야 마지막에 주님을 위하여 생명까지도 깨뜨릴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일을 맡기시고, 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신다.

주님을 깊이 알기 전에 일하려고 하지 말라.

주님과의 관계를 일의 관계로 맺으려고 하지 말라.

사랑의 관계, 주님이 없으면 못사는 관계, 주님이 나를 믿는 관계, 이런 관계를 맺으라.

잘못된 관계에 머무르지 말라.

적당한 수준의 관계에 머물러 있지 말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관계, 하나님과 사랑으로 손잡고 일하는 관계로 나아가라.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손잡으신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깊은 교제가 우선이다.

이를 위하여 기다리라.

관계를 위하여 먼저 시간을 보내고, 노력하라. 하나님을 알려고 하라.

이를 위하여 기다릴 줄을 알라.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의 일은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해야만 한다.

그래야 인간의 범위를 초월하는 것을 할 수가 있다.

그래야 하나님의 생명력이 넘치는 일을 할 수가 있다.

이것이 바로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것이다.

그래야 참 열매가 열리는 것이다.

포도나무에서 흘러나오는 것으로 열매를 맺어야 참 열매가 된다.

외부적인 환경과 분리되고, 평안을 느끼고, 그 중에 짧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깊은 은혜를 느끼게 된다.

그 말씀이 내 안에서 살아 움직이게 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말씀을 듣는 차원은 너무 낮다.

귀로 듣고, 이성으로 듣는다.

그리고 머리로 분석, 판단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영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영은 눌려 있고, 잠자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영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우리의 영을 깨우는가?

입술의 기도, 말의 기도가 아니라, 영적기도로 깨운다.

영이 잠든 상태로 드리는 예배는 아무 소용도 없다.

이러한 예배는 굳은 신앙, 죽은 신앙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신앙과 삶을 분리시키는 것이다.

영이 질식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심도를 통해서 영을 활성화시켜야 한다.

영을 활성화시켜야 성령님이 역사하실 수 있다.

우리 영이 잠자고 있으면 성령님도 잠잘 수밖에 없다.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

성령이 활동하지 않으면 마귀가 이성을 통해서, 본능을 통해서 우리를 우겨싸고 덤벼든다.

 

 

1) 일반적 심도: 묵상(Q.T) - 명상 - 침묵기도를 말한다.

이 단계를 넘어가면 깊은 영적 기도인 신비적 심도의 단계로(수도원에서 7-8년의 수련으로 가능한 수준) 들어간다.

 

2) 신비적 심도: 능동적 관상기도와 수동적 관상기도를 말한다.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 대하고 하는 기도이다.

 

(1) 능동적 관상기도: 하나님을 독대하는 심도로서 내가 주님을 찾아가는 기도를 말한다.

이 단계를 넘어가면 수동적 심도의 단계로 들어간다.

 

(2) 수동적 관상기도: 주님이라고 부르기만 하면 언제든지 예수님을 느낄 수 있고, 주님이 나를 찾아오시는 수준의 심도이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주 가까움으로 주님이 나를 찾아오시는 것이다.

기도가 나의 한 부분이 되고, 호흡처럼 나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기도의 완성이다.

이 땅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수준의 기도이다.

이정도 수준이면 영-심리-현실적인 모든 부분에서 윤택해지고, 자유해지고, 풍성하게 된다.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풍성하게 채워지기 때문이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바로 이러한 심도를 함으로 순교까지도 기쁘게 할 수 있었다.

이들에게 이 땅과 천국은 바로 문 하나 건너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비록 이들에게는 조직도 없었고, 목회자도 없었지만, 강한 능력으로 신앙을 지킬 수가 있었다.

계속 마음으로 주님을 찾으면 어느 순간에 묵상-능동적 관상-수동적 관상 순으로 단계를 하나씩 넘어가게 된다.

이 단계가 되면 하나님과 뒹구는 기분으로 밤을 새우더라도 모른다.

그러면서 자신이 치유를 받는 것이다. 주님이라고 부르면 바로 이 단계로 들어간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이다.

이 수준이 되면 사랑하는 분과 함께 뒹구는 시간이므로 기도하는 시간이 즐겁다.

이러한 시간이 있어야 풍성하게 받게 된다.

하나님과 독대하라. 이것이 진짜 기도이고, 이것이 진짜 보화이다.

그 속에서 많은 영적 체험을 하게 된다.

내가 어디 있는지,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게 되며, 내가 주님 품에 푹 안기게 됨으로 세상과 내가 간곳이 없게 되고,

그 기쁨이 터질 것 같으며, 시간을 초월하는 기쁨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 점점 신앙이 바로 서게 된다.

이렇게 하나님을 만나면서 점점 하나님의 것이 내게로 들어온다.

하나님의 능력이 내게로 흘러들어오고, 이것이 다시 내게서 사람들에게로 흘러 나가게 된다.

사도바울의 3년 공백이 바로 이 기간이었다.

이 기도는 진정 귀한 보배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러한 관상기도를 했기 때문에 생명을 ! 던질 수 있었던 것이다.

 

 

3. 묵상기도

 

1) 단순묵상: 언어나 다른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 단순한 마음으로

하나님에게 집중하는 기도로서 묵상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다.

세상은 육체의 본능과 이성을 자극함으로 자연히 이 부분이 활성화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쪽이 활성화 되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기도로 이 벽을 넘어야 한다.

묵상기도는 절대로 시간낭비가 아니다.

묵상기도는 비록 제목기도가 아니라도 절대로 시간낭비가 아니다.

잠자는 것이 시간낭비가 아니듯, 묵상기도에서 제목기도를 아니했더라도 오히려 우리의 영을 강하게 하는 매우 유익한 것이다.

묵상기도, 영적기도, 관상기도, 이 모든 것이 매우 유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어머니 품안의 갓난아이들은 잠을 많이 자면서 순진하고, 맑게 자란다.

주님은 우리에게 어린 아이가 되라고 하신다.

순수해지고, 단순해지며,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것이다.

세상에 영향을 받지 말고, 복잡해지지 말며, 혼잡해지지 말라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이런 상태의 훈련을 받아야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을 수는 있으나,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기는 어렵다.

단순 묵상 기도속에서 하는 대부분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이다.

우리의 이성은 사랑의 기능이 없다.

사랑은 심령이 하는 것이다.

굳어진 심령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내면이 깨어나야만 한다.

사랑하는 하나님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할까?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이 많은데, 그것을 어떻게 받을까?

전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냥 수박 겉핥기 식의 관계였는데,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면, 그 동안의 많은 스트레스, 고정관념들, 불안들이 치유가 된다.

전에는 내 차원에서 다 해결하려고 함으로 힘이 들었지만, 이제는 더 깊은 차원에서 해결함으로 자연스럽게 된다.

 

2) 추리묵상: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상상을 통해서 머리 속에서 영상화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차츰 상상한대로 좋은 상황이 일어난다.

나의 변화된 모습을 상상하라.

정결해져 있는 모습,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포용해주는 모습, 하나님께 헌신하는 모습,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의 모습을 상상하라.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읽으면서 그 모습을 영상화하라.

그 모습에서 하나님을 만나라.

이러한 기도는 진실로 보물창고이다.

이러한 묵상기도의 바다는 깊고 넓다.

들어갈수록 더욱 풍성하고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고 꺼낼 수가 있다.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할 경우:

(1) 가야바의 집으로 끌려가시는 예수님.

(2) 수모 당하시는 예수님.

(3) 베드로의 나타남과 3번 부인.

(4) 빌라도의 궁전 - 채찍 맞아 괴로워하시는 예수님.

(5)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하시는 예수님.

(6) 힘에 부쳐서 쓰러지는 예수님.

(7) 골고다 언덕에서 못 박히시는 예수님.

(8) 인간들을 보면서 죄 용서를 구하시는 예수님.

(9) 군중들로부터 비웃음을 당하시는 예수님.

단순히 사건만을 묵상하지 말고, 나와의 관계, 이유, 삶의 적용, 사건이 나에게 주는 메시지를 찾아야 한다.

 

3) 대화묵상: 부부나 친구가 마주 앉아서 대화하는 것처럼 묵상 중에 주님과 대화하는 기도이다.

진실하고 순수한 믿음으로 하나님이 지금 나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계심을 믿고

진실하게 고백, 회개하며, 마음으로 그분의 반응, 응답을 받는 것이다.

실제적인 일을 가지고, 말씀을 가지고 묵상하라.

하나님의 결정, 하나님의 의견, 하나님의 뜻을 받게 된다.

그 일과 나를 분리시키라. 3자의 위치에 서게 하라. 그리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뜻을 받게 된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결정은 감정으로 처리하지 않고, 깊은 묵상 중에 하나님의 뜻을 받은 후에 내린 것이다.

깊은 묵상은 하나님의 지혜를 받게 해준다.

4) 복음묵상: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말씀에 깊이 잠기어서 말씀의 참뜻과 하나님의 뜻을 찾는 기도이다.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깊이 음미할 때, 같은 단어를 여러 가지 다른 단어를 사용하여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함으로 그 내용을 나의 마음에 자꾸 더 확실하게 심어주고 새겨주는 것이다.

 

 

제12장 침묵과 고독의 훈련

 

한국기독교의 치유는 우리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무속적이고 기복적인 부분을 깨뜨려야 한다.

기도로부터 시작하여야한다.

이러한 기도는 지속적으로 훈련을 받아야 한다.

모여서 하는 기도보다 개인적으로 하는 기도, 말은 많지 않아도 중심으로 하는 기도의 훈련을 받아야 한다.

문제가 없어도, 습관적으로, 생활의 일부분으로 개인적인 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한다.

 

 

1) 말을 많이 하고, 기도에 시간을 많이 써야 기도를 잘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잘못된 고정관념을 깨라.

침묵은 말을 하지 않고, 주님을 계속 찾는 것이다.

기도할 때,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된다.

말로 기도하려고 하지 말라.

말이 기도를 끌고 나가지 않게 해주어야 한다.

침묵과 고독의 훈련은 이 소란하고 바쁘고 혼탁한 시대속에서 우리의 정체감을 회복함에 필수적이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을 찾아야 만이 우리의 정체감을 찾을 수 있다.

 

2) 현대교회는 말을 너무 잘하고 많이 한다.

그래서 교회에 문제가 생기고 교인사이에 적지 않은 문제가 생긴다.

우리는 너무 말을 많이 하고 살며, 말을 많이 하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혼잡함과 시끄러움, 소음, 기계에 둘러싸여서 생활을 하고 집에 와서도 가족의 문제, TV의 포로가 되어서 진정한 의미의 휴식을 누리지 못한다.

현대를 살고 있는 어느 누구도 이 영향권을 벗어날 수 없다.

이로 말미암아 혼탁, 혼잡, 시끄러움, 복잡함. 짜증, 분노, 혼돈, 무질서가 우리 사회의 성격이 되었고, 이것이 다시 인간의 성품에 젖어들게 되었다.

현대인과 사회에서 정서와 낭만, 평안함이 사라지게 되었다.

마귀는 이처럼 인간과 사회를 파괴하고 있다.

 

3) 그러면 그 대책은 무엇인가?

현대사회로부터 밀려오는 이러한 부정적인 영향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킴으로 이 영향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 자신을 분리시킬 것인가?

장소가 아니라, 내면이다.

영혼을 쉬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잠자는 것으로는 불가능하다.

잠을 자더라도 육신은 쉴지 몰라도 마음은 쉬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무거운 것은 아무리 잠을 자도 소용이 없다.

이것은 오직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의 것으로 채움으로만 가능하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명상이며, 영적기도이다.

 

4) 동방의 명상은 마음을 비우는데 있으나, 기독교의 명상은 마음을 비우고 그리스도로 채우는 것이다.

즉 기독교의 명상은 채우기 위해서 비우는 것이다.

이러한 묵상, 명상을 통하여 믿음의 선진들, 족장들, 다윗은 생명력을 얻고, 마음의 평온함과 마음의 치유를 얻었다.

 

5) 우리의 삶에서 슬쩍 지나가면서 보는 것, 듣는 것까지도 우리의 영혼을 더럽히고, 상처를 준다.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을 매일매일 처리하지 못하고 마음에 쌓아놓으며 살고 있으므로 성품, 건강,

영적상태에 영향을 커다란 피해를 입고 있는 것이다.

성령은 이러한 것들을 치우고 씻어내고 치료하시는 분이며, 기독교의 명상은 이러한 것들을 씻어내고, 치유하는 절차이다.

 

6) 이러한 명상은 단지 육체적 활동만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정신활동을 쉬고,

그 대신 아직까지 쉬고 있던 마음을 활동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명상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가장 실제적이며 효과적인 휴식이 됨과 동시에 또 가장 실제적이고 효과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며,

또 가장 효과적으로 성숙에 이르게 하는 훈련이되는 것이다.

명상은 하나님에 대한 다른 어떤 배움보다 더 하나님을 알게 배우게 해준다.

 

7) 눈을 뜨고 무엇을 보고 있으면 자동적으로 생각이 흐르게 된다.

눈을 감으면 이러한 활동으로부터 해방된다.

눈을 감고 하나님을 묵상하라.

성령님께 의지하라.

뇌의 활동을 죽이고 마음의 활동, 영의 활동을 활성화시키라.

이때 얻는 평안함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함이다.

가슴에 손을 얹고 자꾸 이런 시간을 가지라.

 

8) 우리는 말을 너무 많이 하기 때문에 정작 해야 할 말, 마음의 말을 하지 못하며, 말을 많이 하기 때문에 중요한 말,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

너무 많은 사물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가 보이지 않으며, 많은 것을 보기 때문에 정작 중요한 자신, 자신의 영적상태를 보지 못하고 산다.

군중속의 나, 사물속의 나, 환경속의 나를 보지 말고, 하나님 앞의 나를 보라.

느끼라.

나님을 발견함으로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라.

이사람, 저사람 따라가다가 헤메고 살지 말라.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군중속의 나, 사람들 뒤를 따라가는 어리석은 길로 가지 말라.

깊은 기도로 하나님을 따라가는 삶을 살라.

 

9) 조용히 있거나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곧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우리가 진정한 휴식을 취하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다.

휴식의 개념을 오락, 잠자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휴식은 어지럽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복잡하게 살아가면서 잃어버린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나아감으로 새롭게 발견하는 행위이다.

 

10) 침묵과 묵상으로 볼 수 있는 것과 들을 수 있는 것:

침묵과 묵상은 눈을 감는 것이다.

눈을 뜨고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

눈을 감고 나를 보고, 하나님을 보라. 나의 본질을 보라.

나를 발견하고 하나님을 발견하라.

눈을 뜨면 길을 잃고, 눈을 감으면 길을 발견한다.

눈을 뜨면 걸어온 길을 못 보나, 감으면 본다.

눈을 감고 마음의 귀로 들으라.

 

 

(1)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로 들어가는 것이다.

밖으로 가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다. 지성소로, 안으로 들어가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2) 침묵 속에서, 어제와 내일 사이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영적인 사람이 되면 시간의 개념이 없어지게 된다.

과거를 새롭게 할 수 있고, 미래도 새롭게 건설하는 사람이 된다.

시간 속에서의 자기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영적존재가 되는 것은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며, 내일을 착실하게 준비하고, 잘못된 과거를 바로잡는 것이다.

 

(3) 높은 하늘과 땅 사이에의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현실에서는 사람사이에서의 나밖에 볼 수 없다.

시간 속, 하늘과 땅 사이에서의 나, 역사 속에서의 나, 하나님의 사명,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의 뜻 안에서의 나 자신을 보지 못하고 영적으로 소경이 되어 헤메고 살고 있는 것이다.

 

(4) 하나님과 독대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말도 필요없는 시간, 그냥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그 시간에 자신을 성찰하고,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다.

 

(5) 귀로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들으며,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말을 하며,

사물을 통해서 깨닫지 못하는 진리를 깨달으며, 거울로 볼 수 없는 자신의 참모습을 보게 된다.

 

(6) 침묵은 하나님께 접근하는 첫걸음이다.

 

(7) 침묵은 자신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다.

 

(8) 침묵 그 자체가 하나의 세계이다.

영적 공간, 무한한 공간, 무한한 에너지로 가득한 공간이다.

이것이 바로 천국에 가장 가까운 영적공간, 에너지공간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 영이 활동하는 공간, 이것이 바로 4차원의 공간이다.

눈에 보이는 공간, 현실만이 전부가 아니다,

우리 안에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공간, 무한한 에너지공간이 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라. 은혜의 공간이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그 공간에서 누리라.

 

(9) 침묵에서 새로운 말을 배운다.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다.

 

(10) 침묵은 기도이며, 평화이며, 자유함이다.

 

(11) 침묵은 가장 효과적인 휴식이다.

 

(12) 침묵은 우리를 온전케 하는 오솔길로 인도한다.

세상은 피곤케 하나, 침묵은 휴식케 한다.

 

(13) 침묵은 인간의 시야를 넓혀준다.

즉 하나님의 시야를 가지게 해준다.

하나님을 가지게 해준다.

세상은 보이는 것만 봄으로 시야를 좁혀준다.

나이가 들수록 생각은 더욱 자기중심적, 고집스러워진다.

새로운 것을 아이들은 수용하나 어른들은 수용하지 못한다.

눈에 보이는 것만 전부로 여기기 때문이다.

눈을 감으면 새로운 세계를 봄으로 시야가 넓어진다.

영적인 세계는 무한히 넓다.

하나님과 통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 다음으로 좋은 특권인 이 영적 은혜를 훈련으로 풍성하게 누리라.

 

(14) 침묵할 때, 마음의 소리가 떠오른다.

 

(15) 침묵은 침묵으로만 이해된다.

영적인 일은 영적인 기도로만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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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49 정령 숭배자들을 위한 복음전략 웹섬김이 03-27 6903
2548 예배와 생활 웹섬김이 02-19 6901
2547 자살한 기독교인도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웹섬김이 09-18 6901
2546 선교와 문화인류학(폴 히버트)[11] 웹섬김이 03-16 6899
2545 성경적인 목사의 자질 웹섬김이 03-01 6897
2544 [2]성경이 말하는 창조연대기 웹섬김이 01-27 6895
2543 성경과 목축문화 웹섬김이 08-13 6894
2542 예수님의 비유모음 웹섬김이 11-22 6893
2541 사차원의 영적기도(7) 웹섬김이 07-06 6891
2540 골방기도훈련에 관하여(1) 웹섬김이 07-06 6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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