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9-28 16:34
[2]예배학
인쇄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7,455  

포로기 이후시대의 예배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행하여지던 예배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후로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성전에서 드리는 희생의 예배를 대신하여 등장한 것이 바로 회당에서 드리는 예배였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회당에 모여서 나라를 잃은 슬픔을 함께 하며 성전 예배를 대체한 회당예배를 갖게 되었다. 이 예배의 중심은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일이었다. 이 말씀 전에 모두가 일어서서 지극한 경외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이 예배에서는 회생 물을 제단에 바치는 의식이 점차 약화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은 집전자의 점유물이 아니라 모든 예배 자들의 참여 속에 경청되어 이해를 가져오는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되었다. 이외에도 성전의 제사 대신에 새벽, 아침, 정오로 드리는 기도가 만연하게 되었고 가정까지도 예배 드리는 성서로 바뀌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전 444년 느헤미야의 인솔로 마지막으로 포로에서 귀환하였고,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기 시작하여 다시금 성정예배가 복원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느헤미야는 에스라와 더불어 제사법전의 발견과 함께 예언의 전승과 제사예식을 새롭게 다듬고 거룩한 공동체의 새출발을 주도해 나갔다. 이에 따라 포로지에서 행하여지던 회당예배의 새로운 변화가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러나 회당예배는 폐지가 된 것이 아니라 성전 예배와 더불어 함께 존속하게 되었다. 회당에서는 안식일마다 예배가 집례 되었고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행 15장 21절). 이 회당에서 진행된 안식일 예배의 순서를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⑴ 쉐마 낭독 ⑵ 기도 ⑶ 율법의 낭독 ⑷ 예언서의 낭독 ⑸ 강해와 권면 ⑹ 제사(祭司)가 있을 때는 축도, 축도 후에는 아멘.

 

정장복교수는 구약의 예배를 다룸에 있어서 위의 사항들 외에 시편에의 강조를 하고 있다. "시편은 집단적인 예배에서 부른 것보다도 개별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역경을 그분께 직접 호소한 것이 많은 기록이다. 여기서 우리는 절망과 운명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감사하고 호소하는 깊은 신앙의 자세를 볼 수 있으며 예배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의 찬송을 찾을 수 있다." 계속해서 그는 시편을 하나님을 향한 노래와 예배공동체를 형성하는 찬송과 기도로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현대한국교회에 있어서의 시편 사용을 신중히 재고해야할 시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신약시대

 

예수의 사역과 예배

 

예수 당시의 시대에는 회당예배와 동시에 성전예배가 공존하고 있었음을 우리는 신약성서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예수는 그의 지상생애 동안에 자신의 새로운 형식의 예배를 만들어 사용하시겠다고 생각하시지는 않았다. 예수의 관심은 어떤 특정한 의식적인 제도보다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하는데 있어 심령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는 회개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래서 예수는 백성들의 내면적 각성과 실천을 추구하는 가운데서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함"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것은 예수께서 회당예배라든가 성전예배를 부정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고 또한 회당에도 들르셔서 예배에 참예하셨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또한 예수는 성전 예배를 부패시키는 무리들을 향해 노하셨고 채찍을 드신 사건을 비롯해서 여러 절기를 지내시기 위해서 성전에 들리셨던 일들과 그의 생애의 절정을 의미하는 수난주간을 대부분 성전에서 보내신 기록 등은 예수께서 성전예배를 얼마나 중요시하였는가를 알려주는 것이다. 우리는 성서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예수는 예배의 단절자가 아니라 완성 자이시라는 것이다. 그는 율법과 선지자들의 주제였던 "하나님을 사랑하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요약된 계명으로 예배중심의 종교성과 실천 중심의 윤리성을 계속 가르쳤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예배와 관련되어서 빠져서는 안되는 것이 바로 예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에 함께 하셨던 식탁에서 시작되는 성찬예전과 세례가 바로 그것이다. 이 두 가지의 성례전은 구약의 성전예배나 회당예배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의미와 내용을 지닌 예배 의식이다. 이 예전은 기독교 예배의 역사에 변함없는 예전이 되었고 예배의 구심점으로 지금까지 지켜져 내려오고 있다.

 

 

 

사도시대와 그 이후의 예배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실 때 좌절과 공포에 휩싸여있던 사도들은 예수가 부활 승천하신 후 다시금 확고한 신앙을 소유하게 된 후 이들은 예수의 명령대로 예루살렘을 중심 하여서 예배 속에서 새로운 사역을 준비하였다. 또한 이들은 오순절 성령강림사건과 함께 새로운 형태의 교회 예배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들은 처음에 계승되어 온 성전과 회당에서 행하여지는 예배에 참석을 예수께서 허셨듯이 행하였다. 그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의 행위를 지속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오순절 사건 이후에도 성전을 중심 하여 모이기에 힘쓰고 하나님을 향하여 찬미와 기도를 하면서 성전을 교회와 예배활동의 근거지로 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외에 사도행전과 서신서 계시록을 통해서 볼 때에 사도시대의 예배를 추론할 수 있는데 윌리암 맥스웰(William D. Maxwell)은 다음과 같은 것을 지적한다. 첫째로 초대교인들은 한동안 회당이나 성전예배에 참석을 했으며 둘째로 이들은 모임을 자주 가지면서 애찬이라 불리는 공동식사를 하였다. 셋째로 그들은 이식사의 마지막부분에서 주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에 부탁했던 명령을 받아 성찬예전을 행하였고, 넷째로 이 예전이 끝날 무렵에는 예언이나 방언을 비롯한 특별은사를 나타냈으나 상당한 조심 속에서 이러한 것들이 행하여졌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에 의해서 완전히 파괴됨으로써 성전예배는 막을 내리게 되었고 회당예배 역시 로마의 박해로 인해 지하의 교회로 숨어들게 되었고 성도들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생명을 걸고 예배를 드리는 시기가 있게되었다. 이러므로 이 당시의 예배내용을 아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로 남아있는 몇 개의 자료를 통해서 초대교회의 예배 내용을 우리들은 어렴풋이 알 수 있다.

 

첫째로, 이 당시의 예배에서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 찬양으로 먼저 예배 자들의 마음을 주님께 드렸다.

 

둘째로, 구약과 사도들의 가르침을 읽고 그 말씀에 대한 강해가 있었다.

 

셋째로, 기도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주님의 기도를 비롯하여 감사, 간구, 타인을 위한 기도, 축도 등과 주님의 다시 오심을 소원하는 기도를 드렸고 아멘으로 응답하였다.

 

넷째로, 예물의 봉헌으로 감사와 헌신의 표현을 하였고, 이것은 주님 이름으로 가난한 이웃을 돕는 성도들의 지극한 관심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다섯째로, 이들은 죄인임을 표현하는 고백과 신앙고백을 개인적 또는 공동적으로 행하였고 용서를 구하는 시간을 가졌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성찬예전과 세례를 행함으로 예수의 구속 사건에 대한 재다짐과 은총의 경험적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이 당시에서부터 서서히 교회의 조직과 예배의 형태가 차츰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고, 이런 가운데 예배를 인도하는 집례자가 탄생하게 되었다.

 

 

 

중세교회의 예배

 

기독교 역사에 커다란 전환점을 가져온 것은 바로 313년에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일이다. 이 기독교 공인은 그간 각 개인 가정이나 지하교회(Catacombs)에 숨어 분산되어 모이던 기독교인들을 공개적으로 한곳에 모일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상황이 급전하게 됨으로서 모여드는 성도들을 수용하기 위한 교회의 건물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콘스탄틴 대제가 당시의 중요도시인 예루살렘, 베들레헴,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에 대성전을 건축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많은 성도들이 모여 드리는 예배의 집전을 위해서 예전이 점점 더 체계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위한 성직자의 수와 그 위치와 권위가 점점 더 커졌다.

 

5세기부터 종교개혁까지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사항은 미사의 발전이다. 이 미사는 일정한 시간에 드려지는 예배의 형식에 따라 많은 예전들이 첨가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 미사를 쉽게 표현하자면 우리 개신교의 성찬예전이라 할 수 있겠으나 내용상으로는 많은 차이가 있다. 예를 들자면 한국 개신교에서는 성찬예전에 대한 그 중요성이 현대에 많이 강조되고 있기는 하나 아직까지 미약한 것이 사실이다. 이에 반해서 카톨릭의 예배에서 미사는 매 예배 때마다 행하여지고 있다. 곧 카톨릭에 있어서는 예배가 곧 미사 그자체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개신교에서는 예배보러갑시다 혹은 예배(당)에 갑시다등의 표현을 아직도 많이 사용하지만 카톨릭 신자들은 성당에 갑시다라는 표현보다는 미사에 참예하십시다를 많이 하는 것을 우리는 주위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중세시대에 이 미사예전에는 수많은 성경봉독, 교독과 교창과 더불어 그 출처도 불분명한 많은 기도문이 포함되었고 찬송 및 성자들을 기념하는 축제가 포함되었다. 또한 우리가 이 시대에서 주시해야 할 것은 미수 횟수의 엄청난 증가이다. 마치 미사를 얼마나 많이 행하여졌는가 하는 횟수가 경건의 깊이를 재는 기준처럼 되어서, 가능한 한 최대의 미사 집례가 요구되었다. 심지어는 여행을 떠나는 자들이 여행의 안전과 여행목적의 달성을 위해서 사제들에게 미사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많은 수의 미사를 하기 위해서 많은 책들이 만들어졌다. 시편, 교송성가, 찬송가, 성서, 특별 기도문책, 행렬성가, 그리고 집례자를 위해서 집례서, 서품정식서, 성무 안내서 등의 많은 책들이 만들어졌다.

 

6세기가 지나가면서 다른 지역에서 조금씩 달리 거행되던 예전은 점차적으로 로마 카톨릭의 미사예전이 서방예배를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Robert Baker는 이 발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① 이들의 예배는 그리스도의 피 없는 제사로서 간주되는 미사의 집례에 다시 집중되었다. 포도주는 아직 일반 성도에게는 허락되지를 않았다. ② 중보적인 성도의 제도가 폭넓게 발전되었다. ③ 성모마리아의 숭배 사상이 널리 퍼졌다. ④ 성자의 유물(遺物)은 종교생활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⑤ 구체적으로 성례전의 수는 고정되지 않고 있었다. ⑥ 성례전과 외적행위에 대한 강조로 공적사상(功績思想)이 널리 유행하였다. 이런 예배의 발전은 16세기에 와서는 로마에서 행하여지는 미사예전이 일정 불변하게 되었고, 화체설이 확정이 되었다. 이 중세시대의 예배에서 지적될 수 있는 가장 큰 단점은 바로 예배에서 사용되는 언어일 것이다. 예배가 진행되는 동안에 회중들이 듣는 언어는 자신들이 사는 곳의 언어가 아닌 라틴어이었다. 이러하기에 신자들은 예배에 직접 참여한다기 보다는 하나의 구경꾼으로밖에는 여기지지를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기에 더불어 종교개혁에의 큰 영향을 준 것은 바로 면죄부의 판매이었다. 이러므로 서서히 종교개혁의 불꽃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중세기 예배예전의 발전은 흔히 종교와 예술의 투쟁이라고 평하여지고 있다. 영적인 것이 예술적인 것에 예속되어졌다는 의미이다. 권위의 자리로서 보여지는 교회와 그 건물, 예배의 일정한 시간 및 규격화된 예배의 형태, 그리고 점차적으로 외형적인 의식을 높이려는 경향이 강조되었다. 인간의 감성에 호소하는 예술적인 형식에는 사제들의 화려한 제복(祭服), 여러 가지 사용되는 기구들 -예를 들면 종, 향, 십자가 등- 또한 집례 하는 사제들의 상징적인 행동, 자세의 빈번한 변동 등이 포함되었다.

 

 

 

종교개혁시대의 예배

 

일반적으로 우리는 종교개혁의 시작을 1517년 독일에 있는 도시인 비텐베르그(Wittenberg)의 교회 문에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그 유명한 95개조 논제(95 Thesen)를 부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루터에 의해서 개혁의 불꽃이 활활 타오른 종교개혁은 단순히 예전(Liturgy)에 대한 불만과 그 시정을 위한 것은 아니었고, 종교 개혁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에 인간적인 교황이 자리하여서 믿음보다는 만들어진 제도 속에서 인간의 공적(功績)을 더 중요하게 취급하는 비성서적(非聖書的)인 사항에 대해 개혁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이들은 공통적으로 중세교회의 예배예전에 대한 시정의 필요성을 함께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간결하게 위에서 중세시대의 서방교회 예배의 단점들에 대해서 살펴보았었다. 당시의 예배, 특히 미사는 하나의 극적 인 구경거리로 변모하였고, 그 절정을 영성체 시간 자체에 두기보다는 화체의 신비적인 사건에 두었고, 거양성체에 있어서도 미신적인 요소가 첨가되어 숭배하게 되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일반 성도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인 라틴어로 의식이 진행이 되었고, 지나치게 화려하고 장엄하게 장식된 예전, 그리고 수준 높은 음악 등은 일반 성도들이 예배에 자발적으로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극히 제한하였던 것이다. 일반 성도들에게는 성찬이 일년 1회에 한에 참여하게 함으로서 미사 자체가 성도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부 선택되어진 사제직을 위한 것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또한 설교는 그 위치를 상실하였고 많은 수의 사제가 필요한 상황에서 이들의 지적수준이 이를 따라주지 못함으로서 일부 교구의 사제들은 설교를 하기에는 상당히 그 수준이 부족하였다. 성경봉독 부분이 정작은 성자들의 생활 담이나 전설로 대신하였고, 성경도 물론 모국어로 전달되지 않았다. 따라서 예배예전에 있어서의 개혁 또한 이 시기에는 당연한 것이었다. 이 시기에 예배의 개혁에 기여한 모든 개혁자들과 그들의 예배에 관해서 서술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여기서는 커다란 3大 흐름인 루터, 쯔빙글리 그리고 칼빈의 예배에 관한 입장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루터와 그의 계열에서 행한 개혁은 가장 보수적이다. 루터는 로마 카톨릭교회의 예배예전을 전면 부정하거나 과격한 변화를 원한 것은 아니었고, 그는 부분적으로 수정하기를 원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카톨릭의 예배예전의 많은 부분을 그대로 남겨두고 있다. 루터의 예배에 있어서의 공헌은 자국어로 미사예전을 진행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완전히 예배의 집례시 라틴어를 완전히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신학적으로 카톨릭과의 차이점이 있는 것은 성만찬에서 화체설을 반대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적 임재를 주장하였다는 점이다. 즉 미사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반복이 아니라는 것이다. 루터가 카톨릭에서 사용하는 여러 기구들, 예를 들면 예배시 사용하는 등불과 향 등을 계속 사용함으로서 그의 개혁이 성공하지 못하였다는 해석도 있기는 하나, 그가 회중에게 예배를 더욱 알기 쉽게 하여주었다는 것은 우리가 인정하여야 할 점이다.

 

루터가 예배에 크게 공헌한 부분은 바로 예배에 사용되는 음악이다. "음악은 하나님의 귀한 선물이며 나로 하여금 설교를 즐거운 마음으로 하게 하였고 깨우쳐 주었다. ...음악은 마귀를 물리치고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며, 분노와 불결과 거만 등 모든 것을 물리친다. 나는 신학 다음 음악을 손꼽으며 최고의 존경을 돌린다. 비록 내가 가진 음악에 대한 상식이 보잘 것 없이 적은 것이기는 하나 나는 세상의 무엇하고도 바꾸지 않으려고 한다...". 이같은 표현은 음악에 대한 루터의 열정적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음악이 하나님 말씀 다음 갈 수 있는 귀한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슬픈 자를 즐겁게 하고 낙망한자를 일으키며, 흥분한자를 조절시키는 데 음악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진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하버드 대학 음악교수를 지냈던 John K. Paine(페인)은 "우리는 현대의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자유에 있어서만 종교개혁이 가져온 결실을 거두는 것이 아니라 음악의 예술에 있어서도 적지 않은 고상한 즐거움을 가지게 된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명한 헨델은 그가 퍽 많은 것을 루터의 작곡을 통해서 배웠다고 말하고 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작사 작곡한 찬송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내 주는 강한 성이요 (Ein feste Burg ist Unser Gott)」란 찬송일 것이다. 암흑과 마귀의 세력을 힘차게 물리치는 이 종교개혁의 군가는 종교와 자유를 침해하는 불의의 원수들의 세력이 아직도 우는 사자처럼 몰려오는 해인 1527년 여름에 만들어졌다고 알려지고 있다. 시편 46편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와 힘이시니"에 근거하여 그 가운데 나타난 사상을 반영시킨 이 찬양은 현재 많은 교파들의 찬송가 가운데 수록되어 있으며 170여 언어와 방언으로 번역되어 있다. 이 찬송은 그 가사의 곡에 있어서 루터의 인격과 성품을 잘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自身)의 말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전적 신뢰, 죽음과 사탄을 공격하여 무찌르는 그 용기, 그리스도의 진리의 최종 승리에 대한 불변의 신뢰 등이 이 찬송 가운데 나타나고 있다. 바로 루터 자신이 이와 같은 사람이었다. 마틴 루터는 기존의 예배형식에서 찬송에 관한 부분도 수정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특히 세 부분에 대하여 그러하였다. 즉 사제가 단조로운 목소리로 읊는 성가, 성가대의 찬양, 회중이 부르는 찬송 부분이다. 루터가 이 모든 것을 다 수정하려고 착수하였다. 첫 번째인 사제가 단조로운 목소리로 읊는 부분으로서 여기에는 서신과 복음도 포함되었다. 루터가 성서의 단어 하나 하나를 분명히 들리게 하고 이해시키는 데 있어서 그처럼 열성적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가 왜 음악을 완전히 중단시키고 자연스러운 목소리만을 남겨두지 않았는가 하는 궁금증이 일어나기도 한다. 여기에 관해서는 건축학적인 구조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당시 건물의 구조는 입으로 말하는 말보다 노래하는 말에 더 어울리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루터는 여러 가지 대안을 제시함으로서 그 의미를 전달하려하였다. 한 음절에는 오직 하나의 음만을 사용해야 했으며 오르간 반주로 말소리가 흐려져서는 안 되었다. 예배 전체를 통해서 오르간은 오로지 화성 음으로만 사용되었다. 서신과 복음서에 대한 그레고리안 성가는 단조 음이었으며 끝에 가서만 음성이 낮아졌다. 루터는 복음서 기자의 설명, 그리스도의 말씀, 사도들의 말에 각각 다른 음역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하나의 제안을 제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집례자에 따라서 자신의 전례음역에 맞는 악보를 발견하고 그것을 채택해야 하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이에 따라 음계도 달라져야함을 말하고 있다. 예를 들면 그리스더께서는 명랑하셨기에 복음서 낭송에서는 제 6음계를 사용하여야 하고, 바울은 좀 우울한 사람이었기에 제 8음계를 사용할 것을 제안하였다. 둘째 부분인 성가대의 합창부분에 루터는 네덜란드의 대위법적인 종교음악을 도입하였다. 이를 위해서 합창단이 필하게 되었고, 루터는 잘 훈련받은 합창대에 관한 강조는 아주 억척스러웠다. 게오르그 공작의 선창자이자 라이프찌히 논쟁 때 12파트로 부른 노래의 지휘자인 게오르그 라우를 Wittenberg로 데려와 궁중합창단의 선창자와 교회의 지휘자로 일하게 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합창단이 여러 도시에서 생겨났으며 무엇보다도 어린이들은 학교에서 철저한 훈련을 받았다. 맨 마지막의 그리고 가장 큰 개혁은 회중의 찬송이었다. 중세의 예배는 거의 전부가 집례자와 성가대에게 국한되어있었다. 회중이 자국어로 찬송, 응답하는 부분은 참으로 적었다. 루터는 회중 찬송의 아버지로 불릴 정도로 이 부분을 발전 시켜놓았다. 예배의식의 부분 부분이 찬송으로 대치되었다.

 

이에 비해 쯔빙글리는 예배의 개혁에 상당히 급진적이었다. 그는 미사를 예배의 규범으로 간주하지를 않았다. 또한 쯔빙글리는 성만찬의 횟수를 일년에 4회로 제안하였는데 이것이 후대에는 마치 장로교의 전통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되었다. 그가 루터와는 대조적으로 예배를 과격하게 개혁한 것은 바로 음악에 있다. 그는 공중 예배에서 모든 음악을 철폐하였고 오르간 사용을 금지할 정도로 급진적이었던 것이다.

 

루터와 쯔빙글리의 중간에 서있는 개혁자가 바로 칼빈이었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는 예배예전의 개혁에는 루터보다는 과감하였으나 쯔빙글리만큼은 아니었다. 그는 특히 성찬예전이 자주 행하여져야함을 강조하였고, 회중의 시편 찬송이 교회 공중예배의 일부가 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찬송의 훈련에 그는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칼빈의 이러한 예배에 대한 개혁은 특히 마틴 부처로부터 큰 영향을 받아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부처는 예배의 용어를 크게 바꾸었다. 예를 들면 미사대신에 주님의 만찬, 그리고 사제(司祭) 대신에 교역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고, 제단(Altar) 대신에 상(床)이란 용어를 제시하였다. 이러한 영향아래서 칼빈은 거룩함과 질서를 보존하였고, 조직화된 예배 예전 및 쯔빙글리의 극단적인 예배 형태에 결여되어 있는 통일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그는 장식에 불필요한 장식 골동품을 매우 싫어하였기에, 단순성은 바로 그의 목표였던 것이다. 즉 칼빈이 예배에 있어서 원했던 것은 중세 예배예전에 포함되어있는 많은 예식주의(Ceremonialism)를 배격하는 데 있었다.

 

 

 

예배의 요소들

 

우리는 예배에서 지켜져야 할 그 내용들에 관해서는 예배를 전공하는 학자들에 따라 다양하다. 그 이유는 속해있는 교단과 이와 아울러 신학적 배경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장로교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예배 속에 가지고 있는 요소는 다음과 같은 것들일 것이다. 즉 오르간 혹은 피아노 전주, 예배의 부름, 기원, 성가대의 찬양과 성도들이 부르는 찬송, 기도, 성경말씀 봉독, 설교, 봉헌, 성례전, 축복기도 등을 들 수 있다. 이모든 것들을 여기서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초대교회에서부터 그 중요성을 가지고 있으나 한국교회에서는 그 의미를 크게 가지고 있지 못하는 성만찬에 대한 설명을 중점적으로 하고자 한다.

 

 

 

 

 

성만찬

 

성만찬 -혹은 주의 만찬- 은 초대교회 교인의 삶에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마지막 만찬에 대한 기억(Erinnerung)으로의 떡과 잔의 먹고 마심은 영적인 그리스도의 현존의 실재의 상황적인 再임재인 것이었다. 바로 이것을 성만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은 믿는 것이었으며, 이것을 고백하는 것이었다. 성만찬은 세례와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 속에서 영속되도록 교회에 주신 성례 중의 하나이다. 특히 성만찬은 초대 교회로부터 예배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말씀의 예전은 다락방 예전이라고 부르는 성만찬 예전에서 그 절정을 이루게 되었다. 이 성만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공동체인 교회는 지금까지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눈으로 보고 직접 참여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다시 한번 경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도 이 성만찬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성만찬이 자주 거행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성만찬은 한국의 장로교-소위 칼빈을 따른다고 하는-에서 그 의미를 크게 잃어버렸고 등한시되어져 왔던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여기서는 성만찬의 성서적 고찰과 종교개혁 시대의 성만찬 이해를 간략히 기술하고자한다.

 

 

 

유월절?

 

성만찬에 대한 성서적 고찰에 있어서 신학적으로 가장 문제시되고 연구되어 오고 있는 것은 예수께서 제정하신 이 성례전(Sakrament)이 유월절 식사이었느냐 아니었느냐이다. 마가를 비롯하여 복음서의 기자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식사는 바로 유월절 식사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성서기술과 함께 지속되어 온 성만찬의 전통은 일반적으로 유월절식사를 성만찬의 근원으로 이의 없이 받아들여 왔었다. 성만찬이 유월절식사이었음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신학자가 Joachim Jeremias이다. 그는 저서 Die Abendmahlsworte Jesu 제1장에서 이를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J. Jeremias는 유월절 전통을 다음과 같은 이유로서 주장하고 있다.

 

a. 예수는 그의 최후의 만찬을 관습에 따라 사람들이 가득한 예루살렘 시내에서 행하셨다. 그리고 평소와는 다르게 예수는 베다니로 다시 가시지를 않으셨다.

 

b. 공관 복음(마가 14:17, 14:30, 마태 26:20)과 요한복음(요한 13:30) 그리고 바울의 기사(고전 11:23)에 따르면 예수의 최후의 만찬은 밤에 거행되었다. 이것은 보통의 식사 습관과는 다른 것이었다. 예외로 유월절 식사는 밤에 행하여졌다.

 

c. 마가 14:26과 마태 26:30에 나타나는 찬양 Passahallel의 후반부로서 식사가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또한 Jeremias는 누가복음에만 나타나는 두 개의 잔을 유월절 식사에서 사용되는 4개의 잔 중 2개로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관습과 성만찬의 비교연구를 통하여서 새로운 이론들이 대두하였다. 이중의 하나가 키두시 식사라 불리는 유대인들이 매 안식일이나 축제날에 전통적으로 가졌던 식탁에 관한 것이다. 이외에도 Dome G. Dix, H. Lietzmann K. G. Goetz 등은 유대교의 우정의 식사였던 Habhuramahl로 보고 있으며 K. G. Kuhn 등은 엣센 공동체에서 해하여지던 식사로 보고 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전통적 견해로서 성만찬의 기원은 유월절 식사이고 예수께서 최후로 지켰으며 여기서 새로운 성만찬으로 제정되었다는 것이다. 공관 복음 기자와 요한 복음 기자는 예수께서 안식일 전날에 즉 금요일에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데에 일치하고 있다. 공관 복음 기자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그의 최후의 만찬을 목요일 저녁에 즉 유월절 식사에 행하셨다. 유대교의 전통에 따르면 이 유월절 식사는 Nisan월 14일 저녁부터 15일까지 행하여졌다. 이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유월절 축제의 첫날인 15일에 돌아가셨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그러나 요한 복음에 따르면 이것은 불가능하게 된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않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서(요한 18:28)" 관청에 들어가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곧 요한 복음에 의하면 이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 요한 복음 기자의 계산법을 따르게 되면 예수의 마지막 만찬은 Nisan월 13일에 거행되어진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예수의 마지막 만찬은 유월절 잔치와는 관계가 먼 것이 되게 된다. 이러한 날짜의 상이함을 조정하기 위하여서 많은 연구들이 있어 왔다. 아래에서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해 본다.

 

a. D. Chwolson: 예수께서 죽던 해의 Nisan월 15일은 안식일이었다. 해서 유월절 양을 잡는 것과 안식일과의 겹침을 방지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그 해에는 유월절 양을 목요일인 13일에 잡아야 만했었다. 이렇게 됨으로서 유월절 잔치는 두 가지의 서로 상이한 날에 행해지게 되었다. Chwolson의 주장에 따르면 바리새인 그리고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공관 복음에 나타나는 대로 13일 밤부터 14일까지 유월절 잔치를 행하였으며 이에 반해서 사두개인들은 요한 복음의 기록대로 전통적인 날짜인 14일 밤부터 15일까지 행하였다는 것이다.

 

b. P. Billerbeck: 당년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사이에 유월절 잔치의 날짜에 서로 일치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즉 당시의 두 계층 사이에서는 Nisan월 시작에서부터 의견의 차이가 있었다는 것. 이 결과로서 유월절이 서로 다른 날에 시작되었다는 것.

 

c. A. Jaubert: 서로 상이한 달력이 당시에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달력에 따라서 Nisan 14일이 서로 다르게 계산되어졌다는 것. 즉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쿰란-에센의 달력을 사용하였으며 이에 반해 요한 복음에 나타나는 기록은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용되던 공식의 달력인 Lunisola Kalender의 날짜를 따랐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이한 주장들은 어떠한 결론이나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계속 논의되어지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최후의 만찬에 대한 역사적 기원을 어느 한 견해로 확정되어져야만 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왜냐하면 주님이 어떤 형태의 식탁을 이용했든지 간에 분명히 새로운 성례전으로서 성만찬을 제정하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월절의 전통에서 예수의 성만찬을 이해하는 것이 그의 의미를 더하는 것이 되어질 것이다. 이상으로 성만찬에 관한 성서 해석적인 문제는 마치고 다음에서는 성만찬 제정사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고자 한다.


 
 

일반형 뉴스형 사진형 Total 3,387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2555 찬양과 치유 웹섬김이 09-02 8133
2554 예수님의 상황윤리 웹섬김이 09-02 7070
2553 구약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 받았는가 ? 웹섬김이 09-02 7887
2552 칼빈주의 정통신학자들 웹섬김이 09-02 11674
2551 목회자들의 우울·불안지수, 일반인들보다 … 웹섬김이 09-04 6958
2550 귀신추방의 원리와 방법 (눅13:31-33) 웹섬김이 09-04 7618
2549 예배순서의 의미를 아십니까? 웹섬김이 09-06 11023
2548 칠십인역과 에클레시아 웹섬김이 09-19 10479
2547 부흥하는 교회로 나가는 길 웹섬김이 09-28 7281
2546 [1]한국기독교 전래사 웹섬김이 09-28 8079
2545 [2]한국 기독교 전래사 웹섬김이 09-28 10937
2544 [3]한국 기독교 전래사 웹섬김이 09-28 8912
2543 [4]한국 기독교 전래사 웹섬김이 09-28 11916
2542 [5]한국 기독교 전래사 웹섬김이 09-28 9999
2541 [1]예배학 웹섬김이 09-28 13453
2540 [2]예배학 웹섬김이 09-28 7456
   51  52  53  54  55  56  57  58  59  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