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9-28 16:21
[5]한국 기독교 전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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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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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권서인들의 활동

외국의 선교 과정을 보면 선교사가 피선교국에 들어가서 그 나라 글과 말을 배워가지고 성경을 번역했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선교 개시 이후 여러 해가 지나서야 비로소 그 나라 성경을 갖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복음이 전래되기 이전에 이미 우리나라 청년들이 외국에 가서 복음을 받고 선교사와 합작하여 성경을 번역하였으며, 외국 선교사가 정식으로 한국에 입국하기 전에 이미 성경이 한국에 반입되었으며, 선교 이전에 한국인에 의해 교회가 먼저 세워지는, 기독교 역사상에 보기 드문 선례를 갖고 있다.

귀하게 만들어진 우리말 성경은 권서사업을 통해 한국에 반입되어 널리 보급되었다.

 

일반적으로 성서공회의 권서사업(성경 반포)의 목적은 사람에게 단순히 성경을 배달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올바로 사용하여 성경의 지식을 얻도록 하는데 있다. 이를 위해 이용한 부속기관은 성경 보급소, 권서인, 성경 교사 등이었다. 성경 보급소는 성경의 보관 창고, 판매 서점 및 설치된 지방의 전도 중심지 역할을 했다. 권서인(매서인)은 성경 반포의 주역이자, 전도인들이 들어가지 못하는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던 전도의 선구자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성경 교사 제도는 채용되지 않았던 것 같다.

 

라. 한문서적의 도입

1879년 말, 2명의 개종자와 십여 명의 구도자가 의주에 거하게 되자, 맥킨타이어는 기독교서적을 요구하는 그들의 굶주린 상태를 외면할 수 없어 서적 운반을 자청하는 한 한국상인을 통해 과학서적을 포함한 한문 성경과 전도책자 한 꾸러미를 보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짐은 국경에서 압수되었고, 편지가 개봉되어 의주의 백홍준은 3개월간 투옥되었다. 천주교 신자가 아닌 까닭에 풀려나기는 했으나 거의 모든 재산을 잃은 백홍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위해 돌아가신 주를 위해서 핍박받는 것을 즐거워한다.”는 신앙고백을 맥킨타이어에게 하였다.

이 최초의 박해 사건으로 인해 그 후 2년간 수세 청원자가 없었지만,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 초기 개종자들의 신앙은 더욱 견고해 갔으며, 1880년에는 30여 명이, 이듬해에는 100여 명의 한국인들이 우장의 맥킨타이어를 찾아가서 성경공부반에 참석, 일주일까지 머물다가 돌아갔다.

 

마. 김청송의 서간도 한인촌 전도

1882년 3월, 로스는 일단 한글성경의 반포가 가능한 만주 한인촌을 대상으로 전도하기로 하고, 김청송을 ‘최초로 완성된 복음서를 가진 전도자’겸 최초의 권서인으로 삼았다.그는 자신의 고향인 즙안현 이양자를 중심으로 수천 권의 복음서와 소책자를 팔았다. 그의 전도로 많은 세례 지원자가 한인 계곡에 생기게 되었다. 많은 결신자를 얻게 된 김청송은 심양(瀋陽: 봉천)으로 돌아와 로스 목사에게 즙안 전도 결과를 보고하고, 즙안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어주는 것이 좋겠다고 간청했다. 1884년 여름 어느 날, 김청송으로부터 성경을 받아 읽고 은혜를 받은 청년들이 기독교의 진리를 더욱 더 잘 알기 위해 봉천까지 떼를 지어 왔다. 이들 중의 더러는 본국에서 임오군란 때 변경으로 좌천된 고급 군인들이 즙안현으로 망명해 온 이들이었다. 그해 가을에 로스 목사는 웹스터(Webster) 목사와 함께 즙안에 가서 75인에게 세례를 주었고, 다음해 다시 25인에게 세례를 주어 100여 명의 세례 교인이 생긴 큰 교회로 발전되었다.

 

바. 미제본(未製本) 복음서 밀반입

만주에서는 성경을 반포하는 것이 가능하였으나, 당시에 조선은 외국종교 서적의 유입을 엄금하는지라, 어떻게 이 신간된 복음을 조선에 수입할까 하는 것이 큰 문제가 되었다. 당시 의주 사람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성경 번역이 진행되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한글)성경에 대한 강렬한 요구가 있었고, 또한 백홍준 등의 전도 활동이 잘 수용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개종자들과 그의 친구들이 무보수로 성경을 전달하는 일을 자청하였고, 별 사고 없이 수백 권의 복음서가 의주로 흘러들어갔다.

 

그러나 로스로부터 몇 십 권의 복음서와 기독교 서적을 가져가던 한 개종자가 사고를 당해 투옥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성경 반입에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었고, 한 가지 묘안을 찾아내게 되었는데, 그것이 미 제본 된 복음서 낱장을 밀반입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미 제본 된 복음서 낱장이 ‘편견과 두려움이 세워 놓은 장벽’을 넘어, 창문 창호지로 장식됨으로써 집을 드나드는 자들에게 읽히게 되었는데, 성경 종이가 한지였기에 구멍 난 곳의 문종이로 적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실 그 복음서 낱장은 공허한 조선인의 가슴에 풀칠되어 붙여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 백홍준, 이성하의 의주 전도

백홍준은 1879년 수세 후 의주에 거주하면서 최초의 전도인으로서 복음을 은밀히 전파하였으며, 이듬해의 투옥사건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믿음을 지켰다. 그는 자신과 친구들이 우장과 봉천에서 가져온 한문 및 한글 복음서, 소책자들을 의주는 물론 구성ㆍ삭주ㆍ강계 등지에 반포함으로써 예수 믿는 사람들이 곳곳에 생기게 하였다.

 

한편 이성하 역시 의주 전도인으로 활동하였다. 서상륜ㆍ서경조의 글에 의하면 이성하는 초기 번역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그는 번역보다는 전도인으로 활약했다. 그는 다량의 한글 복음서를 책문을 거쳐 압록강 연안의 구련성까지는 가져왔으나 삼엄한 국경 경비 때문에 그곳 중국인 여관에 쌓아두었다. 그가 외출을 한 후에 의심을 품은 여관집 주인이 그의 짐을 풀어보고는 금서인 것을 알고 이를 압록강에 던져 떠내려 보냈고, 일부는 소각해 버리고 만 사건이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로스는

 

“성경이 던져진 물은 한국인들에게 생명의 물이 될 것이고, (성경이 탄)재는 한국교회가 크게 성장할 밑거름이 될 것이다.”

 

라고 술회한 바 있는데, 뒷날 그의 예언이 이루어져 압록강 일대에 많은 교회가 세워졌다.

이성하가 성경반입에 실패한 후에 백홍준이 재차 시도하였다. 그는 변경에 도착하여 정세를 살펴보니, 성경을 반입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한 가지 아이디어를 내었다. 그는 곧 시장에 나가 별 것 아닌 책들을 여러 권 샀다. 그리고 성경을 한 장씩 뜯어내어 돌돌 말아 긴 끝을 만들어 시장에서 사온 책을 묶었다. 그리고는 이 책을 짊어지고 강을 건넜다. 관리는 책만 조사하고 별 것 아니므로 통과시켜 주었다. 집에 돌아온 백홍준은 책은 버리고, 책을 묶었던 끈을 풀어 다시 성경을 만들어 전도를 하였다.

 

고향에 돌아온 의주 청년들이 이곳에서 열심히 전도하여 신자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백홍준이 요리문답반을 운영하면서 더욱 신자들이 증가하여, 1885년에는 약 18명의 신자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예배처가 생겨났다.

 

백홍준은 맥킨타이어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로스 목사의 권서인으로 본국에 들어와 전도하다가 언더우드 목사에게 전도사로 임명을 받아 사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역을 하던 중 백홍준은 2년간 봉천 감옥에 수감되었는데, 그 이유는 만주에 있는 선교사와 내통한다는 죄명이었다. 백홍준이 내통했다는 선교사는 로스 목사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는 1894년 봉천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백홍준의 옥사를 두고 차재명은 그가 편찬한「조선예수교 장로회사기」에서 자연사한 것이라 기술하고 있으며, 김해연은「한국기독교회사」에서 백홍준의 죽음을 개신교 최초의 순교자가 된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아. 서상륜의 서울 권서 활동

서상륜은 1882년 4월에 로스로부터 세례를 받고 6개월간 봉천에서 성경 사업을 돕다가 10월 6일 권서인으로 의주를 향해 출발하였다.

 

서상륜의 성경 밀반입 행로에 대해 여러 책은 그가 국경에서 검거 투옥되었다가 친척 관리의 도움으로 밤에 탈출하여 의주에 도착, 전도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사실과 다른 듯하다. 서상륜은 국경 검문소에서 성경을 압수당했지만, 첫 밀반입이라 아무 일 없이 의주로 돌아왔는데, 며칠 후 검사관이 서상륜을 찾아와서 그 책들을 읽어본 결과 좋은 것들이므로 사람들에게 나눠주라고 하면서 여러 권의 책을 옷속에서 꺼내놓았던 것이다. 서상륜은 이 우호적인 검사관으로부터 전해받은 성경과 소책자로 의주에서 전도하다가 경성(京城)에 잠도(潛到)하여 [복음전포(福音傳布)]란 책방을 경영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이 없어 곤란을 겪게 되었고, 이에 로스는 1883년 봄에 김청송을 통하여 수백 권의 성경을 전달했다.

 

서상륜이 백홍준과 함께 장로 안수 받은 새문안교회의 처음 모습

 

서상륜은 김청송으로부터 전해받은 복음서를 서울에서 장사하고 있는 친구들에게 나눠주면서 은밀히 전도하였다. 그리고 김청송도 평양 권서 활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후 봉천으로 돌아갔는데, 이는 뒷날 평양교회의 밑거름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로스는 이보다 앞선 1883년 봄에 봉천을 지나가는 조선 북경 사절단에게 성경을 전달하려고 복음서 200권을 따로 준비해 두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1883년 8월에는 6천 권의 복음서가 거의 배포될 수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실에 고무된 존 로스는 이듬해 1884년 봄 묄렌도르프 부인의 주선으로 인천 해관(海關)을 통해 6천여 권의 성경을 서상륜에게 전달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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