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9-28 16:19
[2]한국 기독교 전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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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10,938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奏景敎流行中國碑)」

 

라. 원대(元代)의 ‘야리가온’

845년의 금교령 이후 경교는 약 4백 년 동안 자취를 감추었다가 몽골족이 세운 원(元)대(1234~1367년)에 이르러 재흥하는 현상을 보였다. 원은 몽골족이 우랄 알타이산맥을 근거로 하여 형성되었고 그들의 세력은 동으로는 만주와 한반도, 북으로는 러시아 키에프, 서로는 페르시아와 폴란드에까지 확장되었다. 이들 몽골족이 변방을 점령한 후 중국 대륙의 송(宋) 왕조를 멸망시키고 원(元)이라는 왕조를 세워 중국을 통치하게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당 말기에 박해를 피해 변방에 은둔해 있던 경교도들과 알타이산맥을 중심으로 하여 시리아문화를 흡수 해 살고 있던 돌궐 계통의 위구르ㆍ네이만ㆍ케락ㆍ온구이트 족들 가운데 네스토리우스파 신도들이 몽골족을 따라 중국에 들어오게 되었다. 바로 이들을 통해 중국에서 경교가 재흥하게 된 것이다.

 

원대에 재흥한 네스토리우스파는 경교란 명칭을 쓰지 않았다. 대신 [야리가온(也里可溫)] 혹은 [아이개온(阿爾開溫)]이란 칭호가 붙여졌는데 “복음을 섬기는 자” 또는 “복음을 받들어 섬기는 자”란 뜻을 지니고 있다. 몽골족은 변방 부족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결혼정책을 사용했는데 칭기즈 칸이 아내로 맞이한 케라르트(Kerart)족 공주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칭기즈 칸 영내에 예배당을 지었으며 케라르트 출신의 야리가온들이 몽골의 수도 카라코룸(和林)에 진출하여 상당한 권세를 누리기도 했다. 쿠빌라이도 자신은 불교도였으나 야리가온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였는데 1289년 숭복사(崇福寺)를 설립하여 야리가온에 대한 업무를 관장케 하였고 궁 안에 3만 경호대를 기독교도들인 알라인(Alains)들로 조직할 정도였다.

 

로마교황 사절이 되어 몽골을 1275년 방문한 아버지 니콜로(Nicolo)를 따라 몽골에 도착한 마르코 폴로는 쿠빌라이의 총애를 받으며 17년간 원의 조정에서 봉사하였는데 그 동안 듣고 본 바를 나중에 본국에 돌아가서 쓴 책이 바로 《동방견문록》이다.

 

이 책은 진강에서의 십자사 건립뿐 아니라 중국의 서북지방, 내몽골지역, 화북과 화남은 물론 서남지역인 운남(雲南)에 산재한 야리가온들의 행적에 관해 상세한 언급을 하고 있어 원 초기의 기독교 이해의 기초자료가 되고 있다. 원대에 적어도 47개 지방에 야리가온 사원들이 건립된 것으로 정리된다. 즉 원대에 야리가온이 지역적으로 폭넓게 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원대의 역사가 변방족인 몽골의 한족(중앙 민족) 지배의 역사였던 것과 같이 야리가온은 외래종교로 몽골족의 지원을 받으며 지배계층의 종교로 정착했다. 본토민인 한족에서 유래된 종교가 아니라 몽골족과 함께 지배자로 도래한 색목인들의 종교였기에 그만큼 중국에 토착되기도 어려웠고, 원대의 야리가온은 경전 번역에 소홀했을 뿐 아니라 예배 시에는 시리아 말을 사용하였고 시리아어로 된 기도서와 경전을 그대로 사용함으로 외래종교란 인식을 오히려 강하게 부각시켰다.

 

이처럼 야리가온이 지배계층의 외래종교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1368년 한족이 다시 일어나 명(明)을 세우고 원을 멸망시켰을 때 야리가온도 함께 소멸되었다. 명에 들어오면서 만주족을 비롯한 외래민족에 대한 견제가 강화되고 중국에 남아 있던 이방민족들도 한족화(漢族化)됨에 따라 외래종교로 인식되었던 야리가온이 자리할 위치가 사라지고 만 것이다.

 

2. 경교의 한국 전래 주장

경교의 한국 전래 가능성을 제일 먼저 언급한 학자는 영국인 여류 고고학자 고든(E.A. Gordon)이었다. 기독교의 동양전래 및 기독교․불교 교류에 대해 연구하였던 그는 한일합방 무렵에 한국에 4년간 머물면서 불교 사찰을 살펴보고 한국 불교와 경교의 연결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그는 특히 경주 불국사 석굴암의 신장(神將), 관음상(觀音像), 나한상(羅漢像). 제석천상(帝釋天像) 등에서 페르시아의 경교적 흔적을 볼 수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통일신라시대 능묘에 나타나는 십이지상(十二支像) 부조나 능 앞의 무인상(武人像)에도 경교적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자신의 이 같은 연구를 기념하기 위해 중국 장안에 건립되었던 「대진경교유행중국비」모조비를, 금강산 장안사(長安寺) 경내에 세우기도 했다.

 

이 주장을 따르는 자들은 특히 1956년에 경주 불국사에서 발견되었다는 십자가 형태의 석제물(石製物), 전남 해남 대흥사에 소장되어 있다는 동제(銅製)십자가, 그리고 마리아 상과 유사하다는 관음상(觀音像)을 예로 들며 경교의 한국 전래 가능성을 강하게 부각시켰다. 이후 경교의 한국 전래 가능성은 여러 학자․연구가들에 의해 꾸준히 지적되고 있으나 아직은 가설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객관적인 입증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불국사에서 발견된 경교 돌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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