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9-02 21:18
율법을 주신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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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11,565  

율법을 주신 목적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율법을 오해하여 율법을 잘 지켜나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에 이르려고 애를 쓰고 있다.


그러나 율법을 잘 지켜 나가려는 노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참 마음을 발견하는 일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이 율법을 지킬 수 있는지 없는지,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분명하게 알지 못한 채,막연하게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다 실패하고, 또 율법을 지켜보려고 도전하다가 실패하는 삶을 거듭하고 있다.


 사실 십계명을 비롯한 여러 율법들은 우리가 지킬 수 있는 법이 아니며,하나님은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게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계신다.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갈3 :11)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요 7:19)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은 ‘우리가 악하고 죄가 많으니까 하나님께서 이 율법(계명)을 잘 지켜 점점 선한 사람이 되어 구원받으라고 주셨겠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율법은 악한 우리를 선한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기 위해 내려온 법이 아니라,사망 아래 있는 우리 모습을 비추어 주기 위해 내려온 법이다.

 

율법은 ‘지켜서 의롭게 되고, 행하여 구원에 이르라’고 주신 법이 아니라,
‘지켜 보고 너는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죄인이요, 연약한 인간임을 깨달으라’고 주신 법이다.


율법은 우리를 의에 도달시켜 주는 법이 아니라, 우리의 의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게 하는 법이다.
 율법은 우리를 생명에 이르게 하는 법이 아니라,사망 아래 있는 내 영혼의 상태를 가르쳐 주는 법이다.

 

이처럼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 율법을 주신 목적을 정확하게 이해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할 말이 없는 죄인이 되고,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긍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약속만을 의지하게 된다.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 중에 잡힌 여자는 마음이 그런 위치에 내려간 죄인이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의가 선물로 주어진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1~22)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는 의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주어지는 이 하나님의 의를 증거하는 것이 참된 복음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롬 1:1

 

한 마디로 율법은 죄를 깨달으라는 법이지 그것을 지키라는 법이 아니다.
사람들이 자기가 죄인인 것을 모르니까 율법을 세워서 이것을 지켜보라고 그래서 자기의 본 모습을 깨달으라고 주신 법이지 악한 나를 선한 나로 고쳐주는 법이 아니라는 말이다.
 
로마서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1. 먼저 율법이란 무엇인가?


율법이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것이다.
율법은 의미상 아래와 같이 분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만 성경에서 율법이라고 하는 용어는 아래와 같이 구체적으로 세가지의 개념을 구분하지는 않는다.

  

2. 율법으로 의인이 되거나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율법을 지킨다고 하며 의인이 되거나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즉 율법을 지키는가 안지키는가는 의의 표준이나 잣대가 될 수 없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역활을 하고 있다.


무디는 율법을 "마음의 거울"이라고 했는데, 바울같은 사람도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했지만 그는 죄인중의 괴수라고 고백을 한다.
율법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으며 하나도 없으며....." (롬3:10)


이 세상에는 율법의 요구충족에 달할수 있는 자가 없으므로 율법으로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그의 앞에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3:20)

 

즉 율법으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율법이란 왜 존재하여야만 했을까 하나님은 왜 율법을 주셨는가?


율법이란 죄를 깨달음이 그 첫째 기능인 것이다.


"죄가 율법있기 전에도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롬5:13)

아직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다는 그 뜻을 우리는 잘 새겨보아야 한다. 율법의 기능이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인데, 죄가 있었기에 율법이 필요한 것이다.


즉 율법이란, 죄가 있었기에 그 죄를 죄로 알리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죄가 넘쳐났으므로 "이것을 어기면 죄가 된다" 혹은 "이것을 하면 죄가 된다"라는 것을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알려 줄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이란 "범법함을 인하여 더 한 것이라" (갈3:19) 라고 바울은 이야기한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 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갈5:4)


율법이란 그것을 지킴으로 하나님이 의를 주기 위하여 주신 것이 아니다.
바울은 율법 안에서 의롭다함을 얻으려 하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끊어지고 떨어진 자라고 혹독한 비판을 하고 있다.
아담을 통하여 이 세상에 죄가 들어 왔고 그 죄가 넘쳐 흐르게 되었는데, 그래서 하나님은 그 만연된 죄와 범법함을 보시고 율법이란 것을 주셨다.
이것도 하지 말라. 저것도 하지 말라. 이것은 이렇게 해야 되고 저것은 저렇게 해야만 한다..... 즉 지키지 않으면 벌을 주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이 율법에 어긋남을 알고 "아! 이것은 죄이구나, 하지 말아야지...." 라고 죄를 강제적으로 깨닫게 하도록 하나님이 배려하신 것이 바로 율법인 것이다.
그러나 목이 곧은 그 백성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만이 곧 하나님의 의의 표준과 잣대인 것으로 착각을 하여 율법을 지키기 위한 행동을 그 표준으로 삼았던 것이다.
 
즉 율법을 지키면 의인이 되고 안지키면 죄인이 되는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율법은 "의의 표준"이 아니고 "죄의 표준"이었다.
예를 들어 사람을 죽이거나 강도짓을 하면, 사형을 당하거나 형무소에서 징역을 살아야 하는 것이 현재 우리나라의 형법인데,사람을 죽이지 않거나 강도짓을 하지 않으면 의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즉 이러한 무서운 형법이 있는 목적은 강도짓과 살인이 해서는 안될 죄라는 깨닫게 하는 기능을 하게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살인을 하거나 강도짓을 하게되면, 그 사람은 징역이나 사형같은 무서운 형벌을 받게 되므로 살인이나 강도짓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역활을 하는 것이다.


형법이란 결코 사람을 의인으로 만들지 못하며, 살리는 법이 아니라 죽이는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이란 그 기능적으로서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의 선물인 구원을 얻는다.


만일 율법을 온전히 지켜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면, 구원은 더 이상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의지와 노력의 산물이 되고말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떨어진 자가 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것을 성경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은 율법의 완성이 된다. 바꾸어 말하면 율법은 복음의 예비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을 거스리는 것이냐? 결코 그럴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다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갈 3:21)

 

율법이란 "살게 해주는 것"이 아니었다는 이야기이다.
율법으로는 누구도 의인이 되지 못하므로 구원을 얻을수 없다.
왜냐하면 원래 율법의 목적이 "살리게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며, 죄를 깨닫게 함으로써 죄를 미연에 강제적으로 방지시키는 기능을 갖는다.
그러나 복음으로는 아무리 죄인이라도 구원을 얻을수 있다.
왜냐하면 복음은 "살리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3. 율법은 폐하여 졌는가?


이 문제는 "율법으로 의로움을 받을수 있는가?" 하는 문제보다 사실상 더 어려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율법을 더 굳게 세워야 한다고 하셨다.
그것은 율법의 본래적인 기능...... 죄를 알게 하며 깨닫게 하는 역활로서 더욱 굳게 세워져야 함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셨다.
그 말은 율법이 미완성적이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예비적이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 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갈3:23)

"범법함을 인하여 더 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갈3:19)

 

앞 문장들은 분명히 "계시 될 믿음의 때까지..."라든지 "약속한 자손이 오기까지 있을 것"을 말하고 있다.
또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율법이란 금지사항을 알림으로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었으며, 믿음이란 의를 얻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의미는 율법이 완성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수님 자신이 율법을 이루신 것이다.


율법으로는 충족할 수 없는 “의”를 바로 믿음으로 충족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수 없느 니라.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롬3:31)

 

율법이란 죄를 깨닫게 하고 알리는 역활로서, 그리스도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활로 더욱 굳게 세워지고 더욱 예비적인 역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율법을 더욱 굳게 세워졌다고 말하기도 하며, 율법이 폐하여졌다고도 말하고 있는데 그러나 이 두 뜻은 전혀 상반된 의미가 아니다.

 

예를 들어 어느 집을 건축하는데 설계도면이 곧 율법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 집의 건축이 완성되었다면 설계도면은 더 이상 필요없게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설계도면은 계속 필요하게 된다.


그러나 그 설계도면이 계속 필요한 용도는 집을 더 건축하기 위함으로서가 아니라, 보수와 사후처리등 다른 목적을 위하여  설계도면은 계속 필요하게 된다.
또 우리는 설계도면이 더 이상 필요없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그 이유는 일단 완성된 집에서는 더 이상 건축을 위한 도면으로서의 기능은 폐하여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율법이란 의를 이루기 위하여서는 폐한 것이지만, 죄를 알고 깨닫게 하는 역할로서는 계속 필요하며 더욱 굳게 세워져야만 하며, 믿음의 의로 인도하기 위한 역할로서도 필요한 것이다.
만일 율법으로 계속 의를 추구하는 수단으로 간주한다면,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으므로 그 율법은 죽이는 법이 되고만다.

 

4. 그리스도인은 율법을 지켜야만 하는가?

이 문제에서 안식교와 여호와의 증인 같은 교단이 정통교회가 부딪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율법을 주셨다. 그 원인은 죄가 넘치고 범법함이 만연했기 때문이다.

"지켜야만 한다" 든지 "하면 안된다"는 율법은, 애당초 그것을 지킴으로 의로움을 주겠다는 의도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율법은 "살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제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에게는 더 이상 정죄함이 없어졌는데, 그래서 복음은 값없는 은혜가 되어진다. 복음은 아무리  죄인이라도 살릴 수 있다.
율법이란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이정표"였다.
이제 새로운 의가 나타난 것은, 이제 "살게 하는 것"이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된다,


또다시 율법으로 의를 찾는다든지 "율법의 지킴이 심판의 기준"이라는 안식교와 여호와의 증인같은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은 성경의 본래적인 의미를 잘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는다면, 구원이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노력과 의지로 구원을 이루는 것이 되고만다.

 

율법과 복음은 동등한 것이 아니다.
율법은 예비적이었고 복음은 완성적이다.


율법은 정죄의 기능을 하는 것이었으며 복음은 죄를 없애는 기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기능은 동등한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역활적 의미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사람들은, 하찮고 반시대적인 율법조차 제대로 지켜야 한다.
그들은 칠칠절과 맥추절과 나팔절도 지켜야 하며, 모든 음식물의 규례와 함께 그들은 안식일에 불도 피우면 안되며, 제사도 다시 지내야만 할 것이다.


그 모든 율법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되어졌다.
율법이 완성되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완성을 이루신 것이다. 바로 그리스도가 실체가 되신다.


하나의 새롭고 완성된 법이 공표되면 예전의 법은 이미 그 새로운 법 안에 포함되어 지는 것이다.

율법이란, 지킴으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자기의 죄를 알수 있는 그런 마음의 거울인 것이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헤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 겠느냐?
그럴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6:1-2)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좋고 지킬 필요가 전혀 없다는 의미가 될 수 없다.
바울은 율법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죄 가운데 거할 수가 없음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의무를 갖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율법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거나 율법이 우리에게 명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8:2)

 

전자의 "법"은 생명의 성령의 새 법이며, 후자의 법은 율법을 말한다는 것을 아무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로 우리를 의롭다고 받아들여 주시는 것이다.


율법이란 우리가 지켜야 하는 "의"이며 그것은 죄와 사망의 법이다.
복음이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는 것"을 말하며 그것은 생명의 법이 된다.

 

율법은 차별이 없으며, 율법은 냉정하다.
만일 모든 율법을 지키다가 단 하나라도 지키지 못하면 모든 죄를 범한 것이 되고 만다.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갈3: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2:10)


그러니 율법으로는 아무도 의인이 되지 못하며 모두가 죄인이 되며 율법은 죽이는 법이 되고 마는 것이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 여 살려함이라.“(갈2:19)


바울은 율법에 대해 죽었으며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10:4)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이미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십자가에서 율법의 마침이 되어주심으로 우리는 율법에서 해방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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