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8-25 18:21
기독교 예배의 역사(김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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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10,761  

기독교 예배의 역사  


"기독교인은 어떻게 예배를 드릴 것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우리는 예배의 역사를 연구할 수 있다. 다양한 다른 대답의 방편들--성서적, 신학적, 철학적, 혹은 비교 종교학적 연구 등등--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예배의 역사연구는 기독교인이 어떻게 예배를 드려왔는가? 하는 것을 서술적(descriptive)으로 보여줌으로써 "기독교인은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하는 물음에 대답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배의 역사 연구를 통하여 완전한 예배의 형태 혹은 예배원형을 찾을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기독교 예배는 문화(culture)와 구별이 어려울 만큼 연결되어 있으며, 신학적(theological) 이슈들, 정치적(political) 고려들, 그리고 실천적(practical) 문제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고 모두에게 적용할 수 있는 완벽한 하나의 예배형태를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무의미하기도 하다. 

도리어 예배의 역사연구는 역사 속에 나타나는 여러 예배의 형태들, 즉 예배의 다양성을 강조한다. 또한 동시에 그러한 다양한 예배 형태들 속에 공유되는 통일성을 포착한다. 즉 예배의 역사 연구를 통하여 우리는 어떤 신앙공동체의 신학, 문화, 그리고 상황에 맞는 토착적인 어떠한 예배 형식을 창조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능력은 어떠한 형식(form)이 언제부터 있어왔는가? 하는 것 같은 시간적인 면에서 근원을 파악하는 (origin in time) 것으로는 얻어질 수 없는 것이다. 도리어 한 예배가운데 숨어있는 공동체의 실체적 근원(origin in substance of the community)을 파악할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예배의 역사 연구는 어떠한 의식(form)이 그 당시 그 공동체에게 어떠한 의미를 주었으며 어떠한 역할을 감당했는가?가 하는 물음을 끊임없이 물어야 하는 것이다. 

예배의 근거

기독교 예배의 역사를 설명하기 위하여 먼저 예배가 의미하는 것을 결정해야겠지만 예배의 정의를 내린다는 것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기독교 예배에 관한 여러 학자들의 정의, 혹은 성서에 사용된 용어들이 있지만 그 모든 것을 하나로 종합할만한 요약은 불가능해 보인다. 이곳에서 시도되는 필자의 설명 또한 예배에 대한 하나의 설명에 불과할 뿐이다.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모든 종교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인간과 신 사이에 연결(connecting point)이 가능하고 교류(communication)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여 왔다. 대부분의 종교에 나타나는 신들(gods)은 인간과 관련이 있으며 인간세계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즉 신은 사람과 관계(relation)의 상황에 서있다. 그렇다면 신은 사람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 예배학자인 James White에 의하면 어떤 존재이든지 존재간에 연결이 이루어지려면 존재간에 "자기수여" 혹은 "자기를 내어줌"(self-giving)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자기 안에만 갇혀 있으면 개체는 절대로 다른 개체와 연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과 인간이 서로 서로 자기를 내어주게 될 때 (self-giving) 그곳에 관계가 존재하게 되며 서로간의 만남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한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신(gods)이 "자기를 내어주는" (self-giving) 방법이다. 신은 그 방법에 있어서 무한할 수 있지만 그 대상이 인간이 될 때, 신의 자기수여 (self-giving)는 인간의 한계와 영역을 벗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신(gods)의 자기 수여는 절대로 인간에게 전달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신은 모든 주파수의 소리를 다 만드시고 들으실 수 있으시지만 인간은 자신이 들을 수 있는 음폭이 한정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신의 "자기를 내어줌"은 인간이 경험하고 인지할 수 있는 인간의 육체성과 시간성안에서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은 인간이 경험하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신을 나타내며 또한 자기를 내어준다. 이러한 신의 자기 수여(self-giving)는 크게 말(word)과 행동(action)이라는 커다란 두 방법을 통하여 인간에게 다가온다.

기독교를 예로 들어보자. 기독교에 있어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인간)에게 끊임없이 말과 행동(word and action)으로 자신을 내어주시는 분이시다. 선지자들을 통하여 자신의 말 (神言)을 전달하며, 인간의 시간 (歷史)속에서 자연적, 초자연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은 구름기둥으로, 불기둥으로, 만나와 메추라기로, 법궤로, 혹은 선지자의 말씀으로, 혹은 이적으로 자기를 나타내시며 자기를 수여(self-giving)하셨다. 이것도 모자라서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모습을 입고 이 땅에 오게 하셨다. 결국 하나님의 자기 수여(self-giving)의 정점에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주심으로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자기 수여(self-giving)를 실행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자기수여이다. 기독교를 비롯한 대부분의 종교에는 신의 자기 수여(self-giving)가 필수적이다. 우리는 흔히 이러한 신의 자기수여를 넓은 의미로 계시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인간 편에서 하나님을 향한 자기 수여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인간 또한 신을 향하여 자신의 말과 행동(word and action)으로 자신을 드리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인간의 자기수여(self-giving)이다. 고대 종교에서는 신을 달래기 위한 목적으로 어린아이나 처녀를 바치는 의식이 있었는데 바로 이것이 인간의 자기 수여를 잘 나타내 보여 준다. 즉 종교성을 가진 인간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가지고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을 내어놓는다. 인간은 자신의 시간을 내어놓으며, 어떠한 장소에 신을 위하여 모이며, 또는 특별한 행동(action)를 통하여 하나님께 자신을 수여(self-giving)한다. 춤과 노래, 찬양, 식사, 기도, 봉사, 구제, 계시된 말씀의 낭독, 제사 등등의 상징행동(sign-act)과 말(word)은 인간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자기수여의 여러 방법들이다. 그리고 이렇게 인간이 하나님께 자신을 내어 드리는 행위를 가리켜 우리는 예배(worship)라고 말한다.

넓은 의미로 예배는 인간의 말과 행위(word and action)로 신께 드리는 인간의 자기 수여(self-giving)이다. 그리고 이 예배 속에서 하나님은 또다시 신의 말과 행위(word and action)로 다시 자신을 내어 줌(self-giving)으로써 인간에게 다가오신다. 이러한 서로의 자기 수여를 통하여 인간은 하나님과의 만남(encounter)을 경험하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넓은 의미의 예배(worship)이다. 즉 예배란 신과 인간, 초월과 한계가 접하는 만남이다. 헉스터블(John Huxtable)이 말한 "기독교 예배란 하나님과 그 백성간의 대화"라는 예배의 정의는 이러한 인간과 하나님과의 만남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만남(encounter)의 관계에서 인간의 자기수여(self-giving)를 결단케 하고 유도하는 것은 인간의 그것을 선행하는 신의 자기 수여(self-giving)이다. 대부분의 경우 종교에서 신의 자기 수여(self-giving), 혹은 계시는 인간에게 그들 나름대로의 신관을 형성해 주게 되고 결국 인간은 선행된 신의 계시, 혹은 자기수여를 통하여 얻어진 신에 관한 정보를 따라 자신을 내어놓게 된다. 결국 인간의 자기수여(self-giving)는 언제나 신의 자기수여에 대한 응답(response)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신의 자기수여(self-giving)를 계시(revelation)로, 그리고 인간의 자기수여를 응답(response)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바다에 나가기 전에 신을 달래기 위한 제사를 지낸다면 그것은 그가 이해하고 있는 신(계시)에 대한 그 사람의 응답이 된다. 그에게 있어서 계시된 신은 바다에서 폭풍을 일으키고 자기를 죽일 수도 있는 신이다. 결국 어떤 종교에서든지 예배의 자리는 신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 만나는 자리이다. 
예배학자인 버크하르트(John E. Burkhart)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하신 것, 하고 계신 것, 그리고 하시기로 약속하신 것에 대한 인간의 흥겨운 응답이다" (Worship is the celebrative response to what God has done, is doing, and promises to do)라고 말하였다. 폴 훈(Paul Hoon)과 언더힐(Evelyn Underhill) 역시 예배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Gods revelation)와 인간의 응답(mans response)을 강조한 바 있다. 결국 모든 종교의 예배는 어떠한 수준과 형태를 취하고 있든지 간에 신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

다른 예배학자인 맥스웰(William D. Maxwell)은 인간의 언어와 행위(word and action)로 구성되어지는 이러한 인간의 응답(response)은 하나님께 대한 지식(knowledge of the God)과 인간들이 그 예배에 반영할 수 있는 재원들(the human resources)에 따라서 결정되어진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인간이 반영할 수 있는 재원들은 한계가 있으므로 결국 인간은 모든 종교에서 비슷한 유형으로 예배할 수밖에 없다. 구체적으로 인간은 춤과 노래 등의 인간이 가진 재원으로 신을 예배하게 되는데 그러한 춤과 노래는 대부분의 종교에서 예배의 도구로 활용된다는 말이다. 결국, 인간이 사용하는 자신의 재원(the human resources)의 면에서 본다면 종교간에 서로 다른 예배를 말하거나 구별하기 어렵게 된다.

결국 각 종교에 있어서 그 예배의 독특성(uniqueness)을 형성하는 것은 인간이 가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다. 이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자기 수여(self-giving) 혹은 계시(revelation)를 통해서 인간에게 만들어지는 것으로 독특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그 종교 예배를 다른 종교의 예배와 구별하여 주는 것이다.

기독교 예배란 무엇인가?

결국 예배에 있어서 가장 큰 요소는 그 예배를 독특하게 하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지식이다. 기독교 예배의 독특성은 결국 기독교 예배를 가능케 하는 구별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다. 성경을 통해 계시된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지식이 바로 기독교 예배를 다른 예배와 구별짓는 중요한 잣대가 된다. 

한가지 예를 든다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히브리서 10장 10절에 성자하나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소개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단 한 번 몸을 바치셨고 그 때문에 우리는 거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공동번역) 이러한 성자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곧바로 그러한 하나님에 대한 예배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언제나 하느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립시다. 하느님의 이름을 우리 입으로 찬양합시다. 좋은 일을 하고 서로 사귀고 돕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이런 것을 제물로서 기쁘게 받아 주십니다"(히브리서 13: 15-16).

기독교 예배는 결국 기독교가 인식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전통적으로 기독교 예배는 삼위 일체이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그 예배를 형성하여 왔다. 버크하르트(John Burkhart)에 의하면 인간이 드리는 예배는 첫째, 하나님께 대하여 그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인정, 감사, 혹은 숭모(adoration)하고, 둘째,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기념하고 재연(rehearse)하며, 셋째,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선포하고 알리는(proclaim)것을 그 예배의 내용으로 담아 왔다고 말하였다. 결국 우리에게 계시되신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숭모하고(adoration), 하신 일을 재연하며(rehearse), 선포하는 것(proclaim)이 기독교예배이다. 

앞서 기독교 예배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서 출발한다고 하였는데 이와 관련한 기독교 예배의 문제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 예배에서 적당히(properly) 예배되지 못하고 특별한 모습의 하나님, 즉 성부하나님, 성자 하나님, 혹은 성령 하나님중의 한 위를 그들의 예배 속에서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예배학자들 조차도 그러한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서 언더힐(Evelyn Underhill)은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관계를 강조함으로써 보다 창조주이신, 성부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강조한 경향이 있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폴 훈 (Paul Hoon)은 그의 예배에 대한 정의를 기독론에 근거하여 기독교 예배는 근본적으로 기독론적 이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오순절교회를 대표하는 학자들은 대부분 기독교 예배는 성령이 활동하며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예배라는데 강조점을 두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성부 하나님을 강조하여 예배한 부류 중에 유대인들을 들 수 있으며, 성자하나님을 강조하여 예배한 부류 중에 성만찬을 강조하고 실행한 과거 서구 교회를 들 수 있고, 또한 성령하나님을 강조하여 예배한 부류 중에 은사와 병고침 등을 강조한 현대 오순절 교회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한쪽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교회의 예배는 사실 기독교 예배를 총체적으로 대표한다고 볼 수 없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한 지식이 골고루, 적당히 예배 속에서 표현되어질 때에만 진정 기독교다운 예배라고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배와 관련된 문제들-- 예배의식, 외식, 우상숭배

예배와 관련하여 정리해야할 몇 가지가 있다. 첫 번째로 우상숭배의 문제이다. 우상숭배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인간의 행위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다른(different) 지식(knowledge)이다. 즉 하나님에 대한 다른 지식을 가지고 인간이 응답을 하게 될 때 바로 우상숭배가 된다. 앞서 말한바 있지만 인간이 가진 재원들(human resources)은 한계가 있으므로 다른 종교의 예배와 그것을 가지고 우상숭배의 문제를 구별할 수 없다. 어떠한 종교에서도 인간은 신에 대한 응답으로 절을 하거나 춤을 추거나, 노래할 수 있다. 문제는 그렇게 응답하는 인간의 마음속에, 혹은 공동체의 의식 속에 어떠한 하나님 관, 신에 대한 지식이 있는가? 이다. 개신교에서 흔히 상징이나 상징행위에 대해서 우상숭배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기독교 예배에서도 상징이나 상징행위는 얼마든지 하나님께 예배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 또한 인간이 가진 재원들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와 다른 신을 가리키고, 지향하는 상징과 상징행위는 우상숭배가 된다. 하지만 상징과 상징행위가 모두 우상숭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예배와 관련하여 정리해야할 다른 한가지는 예배가 단순히 종교적 제의 혹은 의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앞에서 본 것처럼 예배란 하나님의 자기 계시, 혹은 자기를 내어줌(self-giving)에 대한 인간의 응답(response)이다. 이러한 인간의 응답으로서의 예배는 어떤 순간 혹은 어떤 장소에서만 거행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의 전반에 스며들어가게 된다. 인간은 그의 전 삶을 통하여 그에게 계시된 하나님께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가지고 성실히 응답하게 된다. 결국 인간의 예배는 인간의 삶 전체를 요구한다. 인간은 그의 전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숭모(adoration)하고, 하신 일을 재연(rehearse) 하고, 또한 선포(proclaim)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삶의 여정 속에서 같은 하나님 지식을 가진 공동체가 함께 하나님께 응답하게 되면서 인간의 삶 속에서 특별한 시간과 장소를 할애하고 특별한 행동과 말을 통하여 하나님께 예배하게 되는데 이렇게 전 삶 속에 스며있는 예배가 하나의 반복적인 형식(form)을 갖추어가게 되면 그것은 예배의식(worship service)이 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좁은 의미의 예배이다. 

이 예배 의식은 기독교인의 예배 적 삶 전체를 요약하게 되는데 그런 의미에서 예배 의식에서 사용되는 하나 하나의 의식들은 모두 깊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지식을 표현하게 된다. 결국 전 삶으로 드리는 우리의 응답을 요약하면 예배의식이 되고 이 예배의식을 풀어놓으면 인간의 전체적인 삶이 되는 것이다. 

기독교 예배와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정리해야 할 문제는 외식이다. 외식이란 겉에서 보기에는 올바른 하나님지식에 근거하여 드려지는 마땅한 인간의 응답처럼 보이지만 실재로 그 안에 그러한 지식이나 정신이 없는 것을 말한다. 흔히 예배 의식이 외식이 될 경우가 많이 있는데 올바른 지식에 의하여 예배순서가 마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순서 안에 참여하는 예배자가 실존적으로 응답을 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그러므로 참 예배란 의식을 만들지만 의식 안에 갇혀서도 안되고, 잘못된 신관을 반영하여 우상숭배가 되어서도 안되며, 동시에 의미 없는 외식이 되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앞으로 살펴볼 기독교 예배의 역사는 기독교 예배가 얼마나 많이 의식 안에 갇히고, 우상숭배와 공허한 외식으로 변질되어 왔는지를 보여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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