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주의가 계몽주의에 대한 답변으로 제시되었지만 가시적 부흥만을 가지고 정통신앙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는 일이다. 또한 내적부흥을 가지고 정통신앙으로 판단하기도 어렵다. 다만 정통신앙의 기준은 성경과 역사라는 것이다. 1-5세기에 있었던 1-4차 범종교회의를 통하여 완성된 신앙과 신조는 어떤 기독교인이든 신앙의 진리로 수용한다. 이 신앙을 우리는 정통신앙의 기준으로 보고 우리의 신앙이 바른 것인지를 판단해야 한다.
초대교회 핍박의 시절에 기독교인들이 가졌던 관심은 “내가 믿는 주님이 누구시냐?”는 것이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것이 일차적인 관심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가르침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그분의 가르침에만 관심을 가지게 되면 자유주의로 빠지게 된다. 그 예로 아리안주의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함으로 금욕적인 삶을 강조하는 단성론적 신앙에 빠지게 되었다. 사람이었다가 신이 된 그리스도를 본받아 나도 신에 속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오늘날의 뉴에이지 운동이나 포스트모더니즘과 맥락을 같이 한다. 이러한 혼합주의와 다원화는 영지주의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영향으로 인해서 오늘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해도 “영적으로 무엇을 들었다 보았다” 하는 아리우스적 신비주의의 그릇된 모습을 직면하고 있다.
펠라기안주의는 능동적으로 선을 행해야 한다는 취지는 좋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조건적인 것으로 추락시키고 인간의 의지와 노력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는 지금의 이성주의와 별 차이가 없는 모습이다.
당시 사회는 신비적 경향을 가진 단성론의 분위기였다. 사람들은 금욕적으로 살면서 거룩해지고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죄 안 짓기를 바라게 되었다. 단성론자들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문제만 해결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믿었다. 교회 일에 충성하면 부모를 공경하는 일이나 가정의 일에는 관심을 갖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고 했다.
중세의 사제들은 성친을 통해서 가시적인 물체와 형태를 가지고 은혜를 만들었다. 오늘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만족을 찾으려고 하는 모습이 있다. 이에 종교개혁자들은 목숨을 내걸고 말씀중심, 성경중심, 하나님 중심을 외치며 기독교를 처음 신앙의 모습으로 되돌렸다. 그런데 진리만 고수하면 된다고 하다 보니 스콜라주의와 같은 이성주의로 빠지게 되었고, 이후 교회는 경건주의, 청교도주의, 부흥으로 치달으면서 진리보다는 삶을 강조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은 명백하다. “오직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 것이다. 행함으로가 아니다. 이제 우리는 성삼위일체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기에 나의 삶 속에 경건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영적으로 혼탁해져가는 이 세상에서 만사형통이라는 억지주장을 물리치면서 진리를 찾아야만 한다. 그래서 진리 자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마음에 새기면서 올바른 신앙을 가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