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중세 개혁운동
“리용의 가난한 사람들”이라 불리는 왈도파는 정통신앙을 고수한 자들이었다. 왈도(1140-1217)는 1176년 경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왈도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들은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고 성경공부를 정기적으로 했으며, 7성례 중 세례와 성찬만을 인정했다. 일반신자도 설교를 했는데 교황 알렉산더 3세는 이를 거부했다. 결국 이들도 이단으로서 박해를 당하고, 피에몽트 골짜기에서 종교개혁자들을 만나기 전까지 약 3-4백년간을 은거하게 된다. 왈도파가 1120년에 작성한 신앙고백서는 종교개혁자들이 주창했던 내용과 다를 바가 없었다.
프란체스코 영성파의 강조점은 성령운동이었다. 지도자 요아킴은 탁발수도회에 속했지만 세대주의처럼 세상을 셋으로 나누어 구약은 성부의 시대, 신약은 성자의 시대, 현재는 성령의 시대라고 강조했다. 그는 완전한 삶을 추구하면서 과도한 성령운동을 시작했는데 이에 영향을 받고 여성을 중심으로 모인 것이 베긴파로서 이들은 1260년에 사도적 형제단으로 발전하여 완덕을 추구하는 개인주의로 나가게 된다.이러한 완덕을 추구하는 독일의 대표적인 신비주의자들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요한 타울로, 하인리히 수소 등이다. 또한 템플 기사단은 순례자들과 솔로몬 성전을 보호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칼을 든 수도회였지만 본래의 임무에서 벗어나 그들이 가진 재물을 탐낸 필립 4세에 의해 이단으로 처형되었다. 중세 말기 “디보치오 모데르나”의 영적운동은 제랄드 후르트에 의해서 “공동체 형제단”으로 발전된다. 이들의 지침은 토마스 아켐피스의「그리스도를 본받아」에 소개되고 있다.
14세기 교회의 타락상은 극도에 달했다. 이때 샛별처럼 나타난 사람들이 있었으니 이들을 “전 종교개혁자들”이라고 부른다. 존 위클리프(1330-1384)는 화체설을 비난했으며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다. 그는 교회의 주인은 주님이시며 사람은 청지기일뿐이라고 하여 교황의 권위를 부인했다. 그래서 이단자로 정죄 받았으나 에드워드 3세의 보호 덕에 화형을 당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은 ·1415년 콘스탄스 종교회의에서 위클리프의 시신을 파내어 화형시켰다.
요한 후스(약 1369-1415) 또한 위클리프의 견해에 의하여 화체설을 반대했으며, 성직자들의 타락과 성직매매를 비판했다. 당시 로마 가톨릭은 성찬에 대한 신성모독적 행동이라는 이유로 일반신자들에게 분병과 분잔을 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후스는 성찬을 일반신자들에게 나눠주기를 원했다. 그로 인하여 보헤미아에는 민족교회가 세워지기도 했다. 후스 역시 콘스탄스 종교회의에서 화형에 처하게 된다.
사보나롤라(1452-1498)는 이탈리아의 개혁자였다. 그도 교회의 사악성과 세속성을 공격한다. 1491년 상 마르코의 부수도원장으로서 그는 교회의 타락상, 안일성, 도덕성을 깨우치면서 금욕주의를 강조한다. 이에 교황 알렉산더 6세는 사보나롤라를 파직시켰는데, 1498년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켰을 때 교회는 그 책임을 사보나롤라에게 묻고 이단자로 몰아 1498년 화형에 처한다. 이처럼 로마 가톨릭은 복음과 성경의 진리에서 이탈했다. 이에 대하여 긍정적인 이단들과 부정적인 이단들이 일어나서 교회를 개혁하려고 한 것이 중세개혁운동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14장 종교개혁시대
“프로테스탄트가 로마 가톨릭의 분파인가?”라는 질문이 있지만, 프로테스탄트는 로마 가톨릭과 다른 기원을 갖고 있다. 때가 이르러 하나님께서는 거짓 진리로부터 진실한 기독교인들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종교개혁을 일으키셨다. 로마 가톨릭이 주도하던 중세교회사 시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단자 혹은 마녀라는 오명 속에서 고문과 화형을 당했다. 로마 가톨릭은 정통의 길에서 이탈했고 종교개혁 때에 이르러서 비로소 기독교는 성경적 신앙으로 되돌아 갈 수 있었다. 유럽의 개신교인들은 초대교회의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일념 하에 개혁에 동참했다.
당시 로마 가톨릭은 “화체설”을 통해 교권제도를 확립하고 국가를 지배했다. 종교개혁 전의 사람들은 선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 선을 행하기 위해서 신비적인 도움을 받기 위한 금욕, 은둔, 혹독한 훈련 등이 유행했다. 이런 가운데 선을 손쉽게 행할 수 있도록 해주는 “화체설”이 등장했다. 이는 사제를 통하여 떡과 잔을 그리스도의 몸과 보혈로 바꾸는 의식인데 이로써 사제와 일반신자는 주종관계를 넘어 신과 인간의 관계로까지 확대되었다. 이를 성직자 존중주의 혹은 교권주의라고 한다.
14-15세기에는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 중 약 250만명이 죽었다. 인류의 3분의 1이 죽어나가고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보장이 필요했다. 이때 교황은 면죄부를 팔았는데, 이는 재난들을 악용하여 공포분위기를 조성함으로 헌금을 강요하는 일이었다. 또한 13세기부터 유럽은 1-7차 십자군운동들로 인해 삶의 모든 부분에 있어서 변화가 일어나는 르네상스 시대가 열렸다. 이 변화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새로운 환경들을 만들어 가셨다.
이런 상황 속에서 종교개혁자들은 세 가지의 새로운 이슈를 내걸었다. 첫째는 “이신칭의”로서 오직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다. “칭의”는 피조물 인간이 창조자 하나님과 교제를 갖는다는 말이다. 둘째는 만인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가 대제사장이시고 우리는 어린 양이라는 것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모든 기독교인들은 제사장들로서 세상에 대하여 제사장직을 담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오직 성경으로 성경은 누구든지 읽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명백하다는 것이다. 또한 성경은 스스로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인데 하나님의 권위가 담겨 있으며 최종적 결정은 성경이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개혁 신앙은 이 세 가지를 통해서 초대교회로부터 내려오는 성경적 신앙 또는 정통신앙을 대체적으로 회복할 수 있었다. 이러한 종교개혁시대의 초점은 이미 역사 속에서 규명된 정통적 신론, 즉 삼위일체론에 관해서나 기독론에 관해서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 이런 신론을 바탕으로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것이 구원론이다. 로마 가톨릭은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편의주의에 빠져 비성경적인 구원론을 제시했지만, 종교개혁자들은 분명하고 정확하게 성경적 구원론을 밝혔다.
15장 종교개혁자들
마틴 루터는 “오직 은혜”(sola gratia)로 구원 신앙을 확고하게 했다. 당시 로마 가톨릭의 구원에는 선행과 봉사가 필요했다. 전 종교개혁자들도 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마틴 루터와 ”전 종교개혁자들“ 간에 차이점은 루터가 구원에 대한 진리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루터는 말씀을 읽다가 진리를 발견했는데, 당시 면죄부를 판매하는 교회가 진리를 왜곡하는 모습을 95개 조항으로 만들었고, 두 달 만에 온 유럽이 다 읽게 되었다. 그리하여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던 “믿음, 은혜, 칭의”의 교리를 성경적으로 역사적으로 증명하면서 바울과 어거스틴의 신앙을 회복했던 것이다.
츠빙글리는 인문주의자로서 군목으로 전투에 참여한 경험을 바탕으로 스위스의 용병제도를 금지해야 한다고 역설했는데, 이로 말미암아 그는 목회직에서 파직당하고 취리히에서 목회를 수행했다. 츠빙글리는 종교개혁을 시의회에 의존했는데, 이때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그가 즉각적인 개혁을 수행하지 않음에 실망하여 츠빙글리와 다른 길을 걷게 되는데 이들을 가리켜 “재세례파”라고 부른다.
그는 성경의 알레고리칼한 해석과 은유적 해석을 싫어했으며, 성경본문은 하나의 의미만을 지니고 있다고 보아서 문자적으로 해석했다. 그는 성찬이 주님의 보혈과 살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분의 죽으심을 단순히 기념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퀴나스가 로마 가톨릭의 신학과 신앙을 총정리했다면, 칼빈은 프로테스탄트의 신학과 신앙을 총정리했다. 그의 사상은 「기독교강요」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독교 입장을 결정하는 권위를 갖고 있으며 모든 교리가 그리스도와 관련을 맺고 있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칼빈의 중심사상이며 그분에 관련된 교리는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핵심이 된다.
칼빈은 지식을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인간에 대한 지식으로 말하며, 사람이 자신을 알기 위해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율법은 구세주의 필요성을 알려주고, 복음은 구세주의 충만하심을 알려준다고 말한다. 칭의문제에 있어서는 루터의 견해와 거의 동일하다. 특히 칼빈은 예정론을 통해서 하나님의 택하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나님의 선택이 곧 예정이며 하나님께서는 예정된 사람들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자들이 모인 곳이 교회라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개혁시대에도 이단이 있었다. 스위스의 재세례파와 독일의 급진파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했다. 이들은 중세의 이단적인 신비주의와 견해가 유사했다. 또한 로마 가톨릭과 개혁자들은 서로가 국가의 힘과 정치력을 빌려서 상대방을 견제하고 탄압하려고 했다. 종교개혁이 변질되기 시작한 것이다. 성찬에 있어서 루터는 공재설을, 츠빙글리는 기념설을 주장했다. 재세례파는 그리스도의 인성에 강조를 두고, 성찬 받는 것을 영적 능력을 받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종교개혁 이후 세상은 사색을 선호했고 이성우월주의와 무신론으로 흐르게 되었다. 이는 급진적인 사람들이 개혁에 들어왔고 정교유착의 현상 그리고 성찬론에 집착한 결과였다.
16장 후기 종교개혁시대
멜랑흐톤은 루터를 만난 후 성경연구에 큰 영향을 받았으며 “루터란주의”의 성명서라 할 수 있는 “아우구스부르크 고백서”를 작성한다. 그는 평화주의자였지만 끊임없는 신학논쟁에 휘말리게 되었는데, 플라시우스와는 원죄문제로, 오시안더와는 칭의문제로, 아그리콜라와는 도덕폐기론 문제로 논쟁이 있었다. 결국 루터란들은 사상적으로 분열된 상황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서 “협화신조”를 1577년에 작성하고 1580년에 공포했다.
디오도레 베자는 칼빈의 후계자로서 개혁신앙을 유지하는데 일등공신이었다. 그는 칼빈이 1559년 세운 “제네바 아카데미”의 최초의 교장으로서 개혁신앙을 가르쳤으며, 칼빈이 설명한 예정론을 “이중예정론”으로 확립시켰다.
그런데 칼빈주의를 오해하는 부류들이 생겼다. 아르미니안들은 예정론을 공격했는데, 1610년 조건적 선택, 보편적 속죄, 전적타락, 효과적이지만 저항할 수 있는 은혜, 성도들의 견인의 불확실성 등 5개 항목의 “항의서”를 제출하기에 이른다. 이에 대해서 칼빈주의자들은 “칼빈주의 5개항목”을 만들었다. 이는 전적타락, 무조건적 선택, 제한 구속,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의 견인 등이다.
소시니안은 반삼위일체론자들로서 속죄론에 대한 오류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이성으로만 성경을 해석했으며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으면 모든 것을 거부한다. 그리스도는 도덕성을 위한 모본으로서 인간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가는데 도움을 주는 자로만 여긴다. 이들의 사상은 초대교회의 이단인 아리안주의와 유사성이 있다.
칼빈주의 신학의 특징은, 언약신학과 삼위일체론 그리고 예정론에 있다. 언약신학의 핵심은 하나님과 우리가 약속을 함으로 그분이 우리의 삶을 간섭하시며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드러났다. 언약신학은 비성경적인 것을 배제하고 성경적인 예배와 신앙생활을 추구하는 성경적 신학이다.
칼빈주의는 성삼위일체 하나님을 아주 강조한다. 그런데 기독교강요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신론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간섭하는 언약의 특성이 예정론이다. 이 예정론을 이해하려면 먼저 속죄의 개념을 알아야 한다. 속죄란 “덮는다”라는 의미로서, 우리가 어떤 죄를 범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보시지 않고 그리스도의 보혈만 보시니까 항상 의인으로 보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누구에게 속죄를 주시는가? 곧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에게만 주신다는 것이다. 이 선택은 창세전에 일어났기에, 오늘 내가 믿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도 하나님께서 이미 예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즉 우리의 행동은 본인이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행도동과 죄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도 하나님의 예정 속에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예정과 우리의 자유 같은 하나님의 신비한 작정들은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진리가 아니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결국 칼빈주의 내부에서 일어난 큰 두 문제는 예정론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