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반 삼위일체
양태론과 양자론은 그리스도가 누구신지에 대해서 잘못 설명한 두 부류이다. 양태론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고 양자론은 인성을 강조한다. 이는 반삼위일체론으로서 하나님을 군주적 체제로 보는 단일신론에서 나온 것이다.
양태론은 한 하나님이심을 강조하는데서 나온 이단사상으로서 하나님을 한 가정에서는 남편, 직장에서는 직원, 부모에게는 아들이라는 형태로 설명한다. 또한 프락세아스는 태양 자체와 열과 빛으로 설명하는데 이 사상은 사벨리우스에게서 발전되었다. 그는 성부, 성자, 성령이 다른 양식을 가진 것에 불과하다는 억지주장을 했다. 이들은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그리스 신화의 케르베루스(세 머리를 가진 괴물)를 숭배하는 자들이라고 했다. 이처럼 삼위일체론을 떠난 자들은 시대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는 하나님을 말하는 세대주의 또는 신비주의를 말하는 양자론자들로 발전되었다.
또한 데오도투스는 주장하기를 예수는 사람이었는데 세례 시에 하나님이 되었다는 양자론을 펼쳤다. 사모사타의 바울은 예수가 매우 도덕적인 삶을 산 관계로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었다는 사상으로 아리우스(약 250-약 336)에게 영향을 주었다.
아리우스는 노바티안처럼 교회의 순수성을 강조하여 도덕적인 삶을 가르쳤는데 자연스럽게 오리겐의 사상을 닮게 되었다. 그는 교회의 순결과 도덕적인 삶을 강조하는 금욕주의자로서 도덕적인 삶을 살면 신적이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즉 예수님은 도덕적 모범으로서 그를 본받아 거룩하게 살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을 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사상의 바탕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는 영지주의에 의한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황제 콘스탄틴은 니케아 범종교회의(325)를 열었는데, 여기서 아리우스는 이단으로 정죄되고 아타나시우스가 제시한 삼위일체의 견해를 결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니케아 신조 약 10년 후에 아타나시우스는 정치세력에 의해 추방을 당하게 된다. 아타나시우스가 모함을 당하고 추방을 당하면서까지 삼위일체를 지키려고 했던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인성만을 가지셨다면 우리의 구원은 사라진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없더라도 부인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즉 아리우스의 추종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인간적으로 이해하려 했고, 아타나시우스는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삼위일체가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한 것이다.
아타나시우스는 20년 동안 6번의 유배생활을 하는 가운데 이집트의 은자들을 만났고「안토니의 생애」를 집필하게 된다. 훗날 이 책은 어거스틴의 생애에 도전을 주게 된다. 326년에 황제 율리안은 아타나시우스를 초청하여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삼위일체를 적절하게 만들자고 했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는 하나님은 참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된 인간이심을 강조해야 함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364년의 회의에서는 사람들이 삼위일체의 의미, 즉 “위”(휘포스타시스)는 무엇이고 “체”(오우시아)는 무엇인가에 관심의 초점을 두게 되었다.
6장 삼위일체
삼위일체론은 설명할 수 있을 뿐이지 삼위일체론을 누구든 이해시킬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길은 삼위일체 외에는 없다. 성경에서 삼위일체 설명은 이해를 위함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심을 알리는데 목적이 있다. 흔히 사람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세 가지 얼굴을 가지신 한 분 하나님 혹은 세 가지 역할을 하시는 한 분 하나님으로 설명한다. 이런 설명은 양태론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이해는 “요아킴”처럼 세상을 몇 세대로 나누어 성령운동을 주도하는 이단이나 세상을 악하다고 보는 종말론자들이 될 수 있다.
삼위일체에서 “위”는 헬라어로 “휘포스타시스”인데 이는 본질, 본체, 인격으로 번역될 수 있지만, “특성”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즉 위격이란 그분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특성이란 말이다. 따라서 삼위는 세 특성을 의미하는 것이며, 삼위일체 하나님은 세 특성을 지니신 한 분 하나님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체”는 본질, 본체라는 의미로 세 가지 특성을 가지신 한 본질(본체)이신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를 하나의 육체를 가지신 분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육체를 지니신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부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특성은 “영원히 자존하심”이며, 성자 하나님의 고유한 특성은 “영원히 태어나신다”는 것이다. 성령 하나님의 고유한 특성은 “영원히 나오신다” 또는 “영원히 보냄을 받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본질은 인간과는 다르다. 그분은 “전능”, “전지”, “편만”, “영원”. “자존”, “무한”, “불변”하시다. 이러한 본질들은 인간에게는 없고 하나님만이 지니고 있는 속성들이다.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위들에는 높낮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성부가 계신 시대, 성자가 계신 시대, 성령이 계신 시대로 나누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설명은 양태론이면서 이단성을 가진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세 가지 특성을 가지신 한 분이신 하나님이다. 한 가지 특성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것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데 세 가지 특성을 가지신 한 분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의미를 모른다고 해서 부인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하나님을 이해하게 된다. 즉 그분의 구속사역을 살필 때, 구원을 경험한 자만이 이해할 수 있다. 시간 속에서 삶을 통하여 경험하게 됨으로 하나님을 점진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완전한 이해란 없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세 특성을 지니시고 본질에서 동일하신 한 분 하나님은 구속의 사건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325년 니케아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본질이심이 결정되었다. 381년에는 니케아 신조를 한 번 더 인준한다. 이때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약 330-390)가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정통신앙을 드러냈다. 그러다가 451년 칼케돈 4차 회의에서 삼위일체는 완전히 마무리가 된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이 종교회의들이 결정한 설명에서 더 넘어가서도 안 되며 그 이하가 되어서도 안 된다.
7장 기독론
사람들의 궁극적인 관심은 구원이다. 이 구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독론(그리스도가 누구신가)을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단성론이 기독론의 정통양성론에 대한 이단으로 일어났다. 아폴리나리스, 네스토리우스, 유티케스 등이 이 논쟁의 핵심에 서있었는데 네스토리우스는 인성을 강조하고 아폴리나리스와 유티케스는 신성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3-4차 범종교회의는 이 문제를 다루게 되었다.
성자 하나님은 성부와 성령에게는 없는 독특한 두 본성이 있는데 바로 신성과 인성이다. 따라서 단성론은 양성의 관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호기심에서 출발하게 되었고, 그리스도를 보다 닮고 싶어 하는 열망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러다보니 그분처럼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죄를 짓지 않는 “하늘 육체”를 사모하게 되었다. 이는 신성을 강조하고 인성을 덜 강조하는 단성론적인 경향으로서, 영적인 문제만 해결되면 육적인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된다는 식으로 발전될 수 있다. 결국 신성보다 인성을 더 강조하면 자유주의가 되고 인성보다 신성을 더 강조하면 신비주의가 되는 것이다.
아폴리나리스도 예수님은 인간의 마음 대신에 로고스를 지니신 분, 즉 완전한 하나님이시지만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예수님의 인성을 우리와는 다른 거룩한 인성으로서 신성화 된 육체라고 생각한 것이다. 훗날 중세 이단들도 대부분 신성화 된 육체를 열망했다. 그리고 종교개혁 시대의 재세례파, 현대의 은사주의, 오순절주의, 제3의 물결 등이 그 부류들이다. 이러한 단성론은 세상 일이 괴롭고 힘들기 때문에 영적인 일에만 치중하며 금욕적이고 수도원적인 삶을 열망하게 한다. 결국 아폴리나리스는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다.
그런데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기 위해 마리아를 “데오토코스”(하나님의 모친)라고 하여 숭배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에 네스토리우스는 “크리스토토코스”(그리스도의 모친)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런데 네스토리우스가 그리스도의 양성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한 분 하나님 안에 네 인격이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431년 에베소 범종교회의에서 이 문제를 다루게 되었다. 여기서 시릴은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자로 정죄하고 그리스도 안에는 온전한 신성과 온전한 인성이 있음을 확립했다.
유티케스는 성육신 전에는 두 본성이 있었으나 후에는 한 본성만, 즉 성육신 하신 말씀만 있다고 주장하여 우여곡절 끝에 451년 칼케돈에서 정죄를 받았다. 칼케돈에서 결정한 중요한 문구인 “변함도 없고 혼동도 없고 혼란도 없고 나뉨도 없다”는 것은 제한을 말하는 것이다. 즉 그 한계에서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100%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100% 인간이시라는 것을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어야만, 순교의 상황 등에서 어떤 분을 신뢰하고 믿고 지냈는가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분이 친히 인간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기에 또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는 그분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의 구원은 완전하며 영원한 것이다. 이러한 두 본성은 결코 구별될 뿐이지 구분할 수 없는 것이다.
8장 어거스틴
디오클레티안 황제 시대의 대핍박 때에 많은 배교자들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어려움이 지닌 후 이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오려는 과정에서 카르타고의 감독 도나투스는 이를 강경하게 반대했다. 이때 키프리안처럼 정통 교회론을 변호했던 사람이 어거스틴이다. 즉 도나투스파가 교회분열을 조장하자 5세기에 어거스틴은 이들에 대한 글을 쓰게 된 것이다.
어거스틴의 입장은 “재세례”란 있을 수 없는 것이며, 이단자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세례의 효력은 사제의 영향력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누가 세례를 베풀든지 하나님께서는 세례를 받는 사람의 믿음에 따라서 임재하시고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이런 어거스틴의 주장으로 이 문제는 일단락이 되었다.
이제 10핍박의 시대가 끝나자 새로운 문제가 대두되었다. 당시 로마제국은 게르만의 대이동과 전쟁의 와중에서 도덕적인 삶이 실종된 상태였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만 도덕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운명론에 빠져 있었다. 이에 펠라기우스는 이런 사람들을 계몽해서 하나님 앞에서 도덕적 삶을 살도록 해야겠다는 의도로 원죄를 부인하고 자유의지를 주장했으며, 은혜가 없어도 선행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펠라기우스는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받지 못하는 현상의 책임을 인간의 의지에 두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은혜는 값없이 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에 따라 받는 것이 되어버린다. 따라서 이방종교가 말하는 “지성이면 감천”식의 기복주의 신앙이 되는 것이다. 이런 사상 안에는 은혜의 자리란 있을 수 없게 되며 오직 인간의 노력만이 있게 된다.
이에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의 위험스러운 사상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20년 동안 그의 사상을 반박하는 정통 은혜론에 대한 책을 쓰게 된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독특한 경험 속에서 자신이 아무리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던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었고, 이에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셔야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에 “오직 은혜로”(sola gratia)라는 분명하고 성경적인 답을 추출하기에 이르렀다.
어거스틴이 펠라기우스의 사상을 전생애에 걸쳐서 비판한 것은 그 사상이 당시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악영향을 끼칠 것이며 위험하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 교회는 418년 카르타고 종교회의를 열었고 펠라기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했다. 그러나 펠라기안주의를 따르는 사람들은 여전히 역사 속에 존재했고 현재에도 여전히 교회 안에 존재하고 있다. 그들이 “세미펠라기안들”이다. 세미펠라기안주의도 529년 오렌지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를 받게 된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지 않으면 아무도 행할 수 없다. 은혜는 조건이 아니라 무조건적이다. 이 은혜를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예정한 사람이다. 예정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다. 이것이 어거스틴의 은혜론이다.